◈ 25. 크로노 검술관 (4)
“……랜스 페터슨?”
“아는 사람이야?”
어깨에 앉아 있던 루루가 물었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모자의 깃털이 볼을 찔렀다.
조용히 모자를 벗긴 아이른 파레이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크로노 검술관 동기야. 체격이 엄청 커졌네.”
동기들과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그지만, 랜스 페터슨과는 비교적 많이 대화했었다.
브랫 로이드의 곁에 꼭 붙어 다니던 세 명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실력도 꽤 좋았다. 일리아 린제이, 브랫 로이드, 주디스. 이 부동의 상위권 셋을 제외하면 손가락에 꼽힐 정도.
‘아니, 걔들 포함해도 손에 꼽히려나?’
아마 그럴 듯싶었다. 대련에서도 거의 이긴 기억이 없었으니까.
일대일의 경우 아이른은 상위권 동기들을 상대로 대부분 열세를 보였다.
‘아마 순수 검술이 최종평가의 주제였다면, 나는 15위 안에도 못 들지 않았을까?’
그때, 루루가 말했다.
“강해 보인다.”
“그래?”
“응. 나이치고 엄청 강할 거 같아.”
검에 조예가 있기에 하는 말은 아니었다.
루루는 매우 뛰어난 요술사고, 거울에 비친 사물을 보듯 선명히 타인의 의지를 볼 수 있다.
아마 이를 통해 미루어 짐작한 것일 터였다.
물론 아이른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다.
하지만 루루만큼 명확하진 않았다.
그렇기에 직접 보고 싶었다.
지난 5년간 그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그런 생각을 할 때, ‘손님’들의 앞에 선 랜스 페터슨이 말했다.
“안녕하세요, 크로노 검술관의 손님 여러분. 27기 정식 수련생 랜스 페터슨이라고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을 상대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뭐야, 수련생이야?”
“졸업자가 아니라?”
“기다려 봐. 소문 못 들었어? 황금 세대라 불리는 27기잖아.”
“황금이고 나발이고 수련생은 수련생이지. 이거 완전 사기 아니야?”
말을 마치자마자 곳곳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손님맞이’는 관주의 인정을 받은 졸업자가 하는 것이 관례였다.
한 명의 훌륭한 검사로 인정받은 후에도 검술관에 남아있는 이들이 많기에 가능한 것이었는데, 이를 기대하고 온 사람들의 입장에선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허나 랜스 페터슨은 당당했다.
그가 어깨에 걸친 대검을 쾅 하고 내리꽂았다.
“……!”
“……!”
상당한 울림이 지면을 타고 전해졌다.
검을 통해 기운을 방출한 것. 사람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말소리도 점차 잦아들었다.
그렇듯 조용해진 분위기 속에서, 랜스 페터슨이 예의 바르게 말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손님맞이는 대대로 졸업자 선배님들이 한다는 거. 하지만, 이번에는 제가 떼를 좀 썼습니다. 검술관 외의 사람들과도 검을 겨루며 경험을 쌓고 싶어서요.”
“…….”
“많이 모자를 수 있습니다. 성에 차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먼 곳에서 오신 여러분들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뭐…… 실망시킨다면, 그 즉시 선배님을 모셔오도록 하겠습니다.”
가벼운 농담과 함께 고개를 숙이는 랜스 페터슨.
정중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도발적인 태도이기도 했다.
눈빛으로 알 수 있었다. 결코 선배를 모셔오지 않겠다. 즉 자기 선에서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그럼…… 시작할까요? 어떤 분이든 좋습니다. 대련을 원하시는 분은 앞으로 나오세요.”
“좋아. 내가 먼저 하지.”
군중을 헤치고 거한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여관에서 아이른에게 질문을 던졌던 사내. 보기만 해도 겁이 날 만큼 커다란 검을 들고 있었다.
랜스 페터슨이 말했다.
“저보다 더 큰 검을 쓰시는군요.”
“왜, 쫄리냐?”
“그런 건 아니고,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서요.”
“얘기는 집어치우고 바로 시작하지.”
“그럴까요?”
땅에 꽂힌 대검을 빼 들고 진지하게 자세를 잡는 랜스 페터슨.
그를 향해 거한이 달려들었다. 커다란 기합과 함께였다.
바야흐로 크로노 검술관의 손님맞이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
콰아앙!
철그럭-!
“크윽…….”
“고생하셨습니다. 함께 전투에 대해 복기하기를 원하시나요?”
“……아니, 됐다.”
온몸에 흉터가 가득한 사내가 저 멀리 날아간 자신의 검을 집고 물러났다.
어깨가 축 처진 것이, 자신에게 무척 실망한 모습이었다.
허나 그를 동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의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오직 한 사람, 랜스 페터슨 뿐이었기 때문이다.
“와…… 진짜 강하네요. 그렇지 않습니까, 형님?”
“으음…….”
친한 동생의 말에, 길버트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는 자신의 동네에서 알아주는 검사로, 웬만한 베테랑 용병들에게도 져본 적이 없는 사나이였다.
그렇게 1년, 1년 자신감이 쌓이자 자신의 그릇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긴 여정을 거쳐 크로노 검술관에 오게 되었다.
‘젠장.’
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실 처음 연무장에 들어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길버트는 크로노 검술관의 명성이 과대평가 되어있다고 생각했다.
동행하는 검사들 대부분이 그저 그런 수준 같았고, 심지어 한 명은 아무리 봐도 풋내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순해 빠진 얼굴로 요상한 고양이와 함께하는 모습이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것 같았다.
게다가 손님맞이를 나온 크로노 녀석조차 20살이 될까 말까 한 어린 녀석이었으니, 도저히 기대감이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콰앙!
첫 번째로 나선 거한이 순식간에 끝장나고.
콰아앙!
두 번째로 나선 날렵한 녀석도 일검을 받아내지 못하고 나가떨어지고.
콰아아앙!
세 번째로 나선 이마저 지금 막 패배한 순간, 길버트는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시발…… 저게 수련생이라고? 말이 되는 일이야?’
상대한 검사들의 수준이 낮은 것도 아니다.
특히 세 번째 사내는 훌륭한 실력이었다.
자신도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 정도로 정교하고 힘 있는 검술을 보여줬다.
허나 크로노의 수련생은 그를 상대하는 내내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저 녀석은, 평범한 용병이나 낭인 검사 수준에서는 절대로 넘을 수 없는 ‘벽’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데…….”
“과연 황금의 27기라 이건가? 수련생조차 저 정도라니…….”
“확실히 대단해. 하도 허무맹랑한 얘기들이 많아서 헛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이번 27기는 격이 다른 모양이야.”
“하긴, 정식 수련생이 되지 못하고 떨어져 나간 사람들조차 지금 온갖 곳에서 활약하고 있으니…… 저 자식, 자신감을 보인 이유가 있었어.”
“사는 세상 자체가 다르네.”
“어떡하죠, 형님? 나가실 겁니까?”
“가만히 좀 있어 봐, 임마.”
크로노 검술관 27기에 대한 찬양이 여기저기서 나오는 가운데, 눈치 없는 동생 녀석이 자신을 부추겼다.
길버트는 성질을 꾹 참고 낮게 대답했다.
순수하게 검을 배우러 온 것이었다면 즐겁게 나섰겠지만, 그는 그럴 의도로 여기 온 게 아니었다.
그저 많은 사람에게 추앙받고 싶었을 뿐이다.
그 가능성이 사라진 이상, 최선은 지금처럼 가만히 있는 거였다.
튀지 않고 조용히,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구경꾼의 자세를 유지하자.
고개를 숙인 채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형님? 저 녀석, 이쪽으로 오는데요?”
“어?”
동생의 소곤거림에 길버트가 깜짝 놀라 앞을 쳐다봤다.
정말이었다.
지금껏 연무장 중앙에서 움직이지 않던 랜스 페터슨이 성큼성큼 자신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분위기도 뭔가 달랐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표정은 굳어 있고, 눈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시발, 뭐야!’
속으로 울부짖은 길버트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된다. 저 녀석이 도대체 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다. 부담스럽다. 더 솔직히 표현하면 쫄았다.
하지만 죽어도 그런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진 않다.
죽으면 죽었지, 그런 꼴은 절대로 못 보여준다!
마음을 다잡은 그가 눈을 부릅뜨고 앞을 노려볼 때였다.
“아이른 파레이라.”
“……?”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이름.
길버트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더 자세히 랜스 페터슨의 얼굴을 살폈다.
이제 보니 자신을 쳐다보는 게 아니었다. 그보다 조금 더 뒤를 향하는 시선이었다.
몸을 돌린 그가 자신의 뒤에 있는 이를 바라봤다.
그 녀석이었다.
말하는 고양이를 데리고 다니는, 얼굴에 ‘나 풋내기요’하고 써 붙이고 다니는 금발 청년.
자신이 사는 동네에서 마주쳤다면 얼굴도 제대로 못 들었을 것 같은 녀석.
허나 그렇지 않았다.
길버트의 생각과는 다르게, 금발의 청년은 심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도 당당히 랜스 페터슨의 눈빛을 받아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어깨에서 검은 고양이를 내려놓은 그가, 상대를 안다는 듯한 말을 내뱉었다.
“오랜만이네.”
“그래, 진짜 오랜만이다. 도대체 어디서 뭐 하고 있었어? 금방 돌아올 줄 알았는데!”
“음, 말하자면 긴데…….”
“당연히 길겠지 5년이나 지났는데!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다고!”
랜스 페터슨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였다.
놀람과 흥분으로 인해 굳어있긴 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기본적으로 반가움의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 사실에 아이른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면서 했던 가장 큰 걱정.
바로 ‘검술관 동기들이 나를 거의 잊은 상태면 어떡하지?’ 하는 부분이었다.
함께 보낸 시간은 1년이고 떠나 있던 시간은 5년이니 당연한 걱정이었다.
심지어 일리아 린제이, 주디스, 브랫 로이드 말고는 친분이 있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사이였으니까.
‘쓸데없는 걱정이었어.’
아이른이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오랜만에 만난 인연.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을 함께 고생한 사이.
그중 하나인 랜스 페터슨의 환대를 받으니 마음 한구석이 따스해지는 느낌이었다.
“완전히 돌아온 거야? 관주님이 내준 숙제는 해결했고?”
“음…… 조금 애매해.”
“그래? 어려운 거였나?”
“어렵다기보단 내가 모자랐지.”
“여전하네. 그런 식으로 말하고 또 엄청 강해졌겠지. 예전에도 그랬잖아.”
“하하…….”
“아쉽네. 조금만 더 일찍 왔으면 주디스랑 브랫도 볼 수 있었을 텐데.”
“브랫? 브랫 로이드가 검술관에 있어?”
“아, 넌 모르나? 걔, 곧바로 다시 돌아왔어. 제대로 해보겠다고.”
예전과 달리 브랫 로이드에게 존칭하지 않는 랜스 페터슨.
허나 그보다 더 관심이 가는 부분은 브랫 로이드의 소식이었다.
요술세계에서야 멀쩡한 브랫이었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본 현실세계의 그는 어딘가 망가진 듯 위태로워 보였으니까.
그러나 랜스 페터슨의 말을 들어보니, 그 위기를 무사히 넘긴 모양이었다.
‘다행이야.’
아이른의 얼굴이 밝아졌다.
기분이 좋았다.
마음 한구석에 있던 걱정거리들이 말을 할 때마다 사라지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까보다 더 진한 미소를 지은 그가 입을 열었다.
주디스와 브랫 로이드의 근황을 묻기 위해서였다.
허나 랜스 페터슨이 한발 빨랐다.
그가 굵고 짧게 말했다.
“아이른.”
“응?”
“한판 붙자.”
“……?”
“오랜만에 만났는데, 안 할 거야? 대련?”
아이른은 당황했다.
방금 전까지 즐겁게 대화를 나누다가 난데없이 대련이라니.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
그저 구경만 할 목적으로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이기에 더욱 그랬다.
‘대련…… 나쁘지 않지만, 지금은 브랫과 주디스 근황을 더 듣고 싶은데. 관주님도 뵈러 가야하고.’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 아이른이 거절의 의사를 내비치려 했다.
그 순간, 랜스 페터슨이 한 마디를 더했다.
“한판 붙자고.”
“…….”
아이른 파레이라가 랜스 페터슨을 쳐다봤다.
랜스 페터슨도 아이른 파레이라를 쳐다봤다.
조용히 서로를 쳐다보는 둘을, 주변 사람들이 더욱 조용히 지켜봤다.
그 고요함 속에서, 아이른이 과거를 떠올렸다.
‘이상하네.’
상황이 다르다.
주고받은 말은 더더욱 다르다. 겹치는 구석을 찾는 것이 오히려 힘들 정도다.
그런데 왜, 자신이 루루에게 요술을 알려달라고 했을 때가 생각나는 걸까?
“……그래.”
더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본 랜스 페터슨이 여태까지 중에 가장 밝은 표정을 지으며 손짓했다.
“갈까?”
“좋아.”
연무장의 중앙으로, 두 청년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