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재회 (3)
“젠장! 어떻게든 박살을 내야 하는데…….”
황혼 기사단 부단장 힐 버넷이 중얼거렸다.
얼굴에는 짜증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당연히 가이른 가문 때문이었다.
‘간악한 마인의 정신 세뇌 때문에 잠시 판단이 흐려졌을 뿐, 자신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것은 마인의 계략이다. 자신이 죽은 후에도 왕국에 분열이 일어나도록 수를 쓴 것이다.’
이것이 가이른 자작의 변명이었고, 이 말에 러셀과 레스터 가문이 동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른 가문들도 ‘그럴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입장으로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물론 그런 핑곗거리들이 있더라도 토벌대장의 명에 불복한 것은 커다란 문제다.
그것만으로도 가이른 자작가에 상당한 배상금을 뜯어낼 수 있다.
하지만 힐 버넷이 원하는 건 그 정도가 아니었다.
‘왕국의 안녕을, 대륙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너그러운 전례를 만들어서는 안 돼!’
지금은 분명한 평화의 시대다. 악마는 소설책이 아니면 찾아볼 수도 없고, 마인조차도 수십 년 전에 비하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허나 그래서 더욱 위험할 수도 있었다.
마인의 무서움을 아는 사람들이 점차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인을 쉽게 생각하고, 마인 토벌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순간 평화는 끝이다. 대륙은 다시 불안정해지고 마계와의 경계가 허물어질 거야.’
그렇기 때문에, 가이른 자작가는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부드득 이를 간 힐 버넷이 다시금 고민을 이어갔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힐 버넷 부단장님. 잭 스튜어트 경이 뵙고자 하는데…….”
“응? 잭 스튜어트 경이?”
잭 스튜어트의 증언은 두통을 시원하게 날려버릴 만큼 고맙고 청량한 것이었다.
“주군…… 필 가이른 자작이 정신 세뇌에 걸렸었는지 아닌지는 솔직히 말해 모르겠습니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진짜일 수도 있죠. 원래도 광증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따로 있습니다.”
그 뒤에 나온 말은 정말이지 경악할 만한 것들이었다.
토벌대 최고의 전력인 아이른 파레이라를 시기하여 식사에 독을 탔다.
심지어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시도했고, 그것이 통하지 않자 마물과의 대치 상황에서도 방해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
힐 버넷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안 그래도 최악이었던 필 가이른 자작에 대한 감정이 더욱 끔찍해졌다.
물론 이러한 감정은 필 가이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미안했던 감정이 싹 사라지는군.’
힐 버넷이 잭 스튜어트를 살기 가득한 눈으로 노려봤다.
마인에게 인질로 잡혔을 때의 일 때문에, 그는 상대에게 적지 않은 부채감을 가지고 있었다.
맡은 바 임무를 깔끔하게 수행하던 것도 봤던지라 평소 이미지도 나쁘지 않았었다.
허나 이제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부단장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주군의 명령이라고 해서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저 또한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당연하지.”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는 잭 스튜어트.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는 모습이었지만, 힐 버넷은 그를 동정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그의 과오가 너무나도 컸다.
물론 그와는 별개로 잭 스튜어트의 증언은 커다란 힘이 되었다.
“이건 말도 안 돼! 헛소리야! 잭 스튜어트, 저놈이 독단으로 벌인 일이라고! 아니, 아니다! 저 자식도 정신세뇌를 당한 거야! 그, 그래! 그게 맞는 것 같아! 아무튼 내 잘못은 아니야! 아니라고!”
“아직도 더 할 말이 있다니, 가이른 자작도 참 대단하시오.”
가이른 자작가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남부 6가문 전부가 알고 있었다.
잭 스튜어트가 어떤 위치의 사람이었는지를 말이다.
필 가이른의 제1기사마저 등을 돌린 상황에서 레스터, 러셀 남작가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심지어 가장 침착해야 할 가이른 자작마저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가중되는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정신이 나가버린 것이다.
그렇게 가이른 자작가는 망했다. 마인 토벌전과 함께.
허나 그 사실에 슬퍼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
“후우. 이제야 일이 좀 해결됐군.”
마인 토벌에 대한 보고와 가이른 자작가에 대한 일을 무사히 마무리한 힐 버넷.
그가 그다음으로 한 일은 파레이라 남작가를 방문하는 것이었다.
최대한 빨리 일정을 재촉했으나 부단장의 마음은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헤일 왕국 최고의 보물을 다른 나라에서 날름 빼먹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소문이 퍼지기 전에 빨리 입단시켜야 해!’
전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헤일 왕국은 국력이 약하다. 그리고 왕권도 약하다.
솔직히 말해 아이른 파레이라의 재능을 감당하기에는 모자란 그릇이었다.
기사로 유명한 서부 5왕국, 혹은 그보다 떨어지더라도 자국보다 강한 나라에서 등용을 권한다면 막기가 힘들다.
하지만 아무 시도도 하지 않고 마냥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최고의 대우를 약속하리라.
결연한 표정을 지은 그가 파레이라 영지에 도착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그런데…… 헛걸음을 하게 되셨구려.”
“예? 그게 무슨…….”
“아들은 지금 영지에 없습니다.”
가슴이 철렁했다.
설마, 벌써 다른 왕국이 채간 것인가!
다행히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하룬 파레이라의 말 역시 그다지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크로노 검술관으로 갔다고요?”
“그렇습니다. 일이 있다고 하더군요.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5년 전에 정식으로 입관하기도 했습니다.”
“허어…… 그렇군요.”
‘하긴, 이상하긴 했어. 저만한 실력을 갖추고 떨어졌을 리가 없지.’
허탈했다.
물론 검술관 출신이라고 국적을 버리거나 기사단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허나 크로노 검술관 출신은 대체로 어딘가에 소속되기보다는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성향이 강했다.
물론 아이른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일단은 공쳤어.’
결국 지금의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파레이라 남작의 호감을 쌓는 것.
그는 지참해온 귀중한 선물과 함께 아이른 파레이라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허허, 좋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룬 파레이라는 미소를 참지 못했다.
값비싼 선물 때문이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최고의 선물은 아들 칭찬이었다.
무려 15년 넘는 세월을 고생했던 그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랬다.
허나 힐 버넷의 말에 완전히 넘어가지는 않았다.
아들의 미래는 아들이 결정해야 한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제 앞가림을 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성장한 아이른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결국 힐 버넷은 아쉬움만 삼킨 채 방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지금껏 잠자코 있었던 키릴 파레이라가 입을 열었다.
“오빠가 출세하긴 했네. 저 사람 엄청 깐깐한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저렇게 저자세로 나오고 말이야.”
“…….”
“하긴, 우리 오빠 정도면 어디서 빠지지는 않지. 인물도 나쁘지 않고, 검술 실력도 대단하고, 거기다 요술까지…… 뭐, 여전히 엉망인 부분도 많긴 하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오빠에 대한 칭찬과 욕을 반반씩 쏟아내는 키릴 파레이라.
그런 그녀의 현재 모습은 특이하기 짝이 없었다.
어른 손바닥만 한 구슬 열 개를 수직으로 세워놓고는 그 위에서 한발로 균형을 잡는다.
그리고 그 상태로 눈을 감은 채 명상을 한다.
힐 버넷이 사라지자마자 기행을 펼치는 딸을 보며, 하룬 파레이라가 물었다.
“그건 뭐 하는 거냐?”
“요술 수행법이에요. 감을 끌어 올리고 있어요.”
“감?”
“세자르로 돌아가야 해서.”
“그게 무슨 말이니?”
딸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아멜 파레이라조차 당황한 얼굴을 보였다.
허나 키릴은 여전히 침착한 목소리로 자신의 행동을 설명했다.
“오빠가 돌아오는 타이밍에 정확히 맞춰서 올 수 있도록 감각을 다듬는 거예요. 소식 듣고 오면 그만큼 늦게 오는데, 그러긴 싫어.”
“…….”
“그거 알아요? 스승님은 구슬을 30개 쌓아 놓고도 여유롭게 명상해요.”
언젠가 나도 그렇게 되겠죠?
그렇게 묻는 키릴을 향해, 파레이라 내외가 가까스로 긍정의 말을 해주었다.
“그래.”
“물론, 그럴 수 있지.”
요술의 성취가 높아질수록 더욱 이해하기 어려워지는 딸이다.
허나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둘 모두 키릴 파레이라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있었다.
* * *
“정말 혼자 가셔도 되겠습니까?”
“괜찮아. 그리고 혼자 아니야. 루루가 같이 가기로 했어.”
시종 마르쿠스의 말에 아이른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걱정하는 듯한 얼굴이라 일부러 더 그랬다.
사실 걱정할 필요가 하나도 없긴 했다.
웬만한 기사들보다 훨씬 강한 그에게 호위 병력이 뭐가 필요하겠는가?
가는 길이 복잡한 것도 아니었다. 크로노 검술관의 본관은 오히려 지부보다 더 가까웠다.
마르쿠스를 보낸 아이른은 부모님과 키릴에게 인사를 한 뒤, 여유롭게 성을 빠져나왔다.
천천히 걸음을 걷는 그의 머릿속에 5년 전의 인물들이 스쳐 지나갔다.
‘다들 어떻게 변했을까. 관주님은 똑같은 모습이려나? 더 늙은 모습은 잘 상상이 안 가는데.’
아이른 파레이라가 린제이 가문보다 먼저 크로노 검술관을 찾는 이유는, 꿈 때문이었다.
꿈으로 인해 흔들리는 자신의 의지 때문이었다.
텅 비어있던 자신에게 처음으로 방향성을 제시해준 사람.
루루와 더불어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존재.
‘관주님이라면…… 지금 내 상황에 대한 조언도 해주실 수 있을 거야.’
물론 약속대로라면 린제이 가에 먼저 가는 게 맞았다. 검술관보다 먼저 들르기로 일리아와 약속했으니.
허나 5년이나 지난 마당에, 그 정도의 선후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솔직히 말하면, 지금의 고민을 먼저 해결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였다.
슈우욱-!
“짜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검은 고양이.
루루였다. 화려한 등장에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쳐다봤다.
허나 아이른 파레이라가 놀란 건 다른 부분이었다.
“옷을 입었네?”
“응! 아이른하고 여행 처음 가니까, 신경 좀 썼어!”
아이른이 루루의 복장을 슥 훑었다.
깃털로 멋을 낸 챙이 넓은 모자.
흰색 천 옷 위의 멋스러운 가죽조끼와 가죽바지, 그리고 힘이 잔뜩 들어간 검은 부츠.
심지어 허리춤에는 검까지 있었다. 레이피어(Rapier)처럼 얇은 검이었는데, 그 모습이 우스우면서도 또 나름 어울렸다.
그가 엄지를 치켜들며 말했다.
“멋있네.”
“진짜?”
“응. 엄청 멋있어.”
“하하! 역시 내 패션 감각이란! 내가 평소에 안 꾸며서 그렇지 힘 좀 주면 이 정도는 가뿐해!”
기다려라, 크로노 검술관! 최강 검사들이 나가신다!
얍! 얍! 소리치며 앞으로 스텝을 밟는 루루를 보며, 아이른이 크게 웃었다.
‘가는 내내 심심할 일은 없겠어.’
빠르게 달려가는 검은 고양이의 뒤를, 금발의 청년이 쾌활한 모습으로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