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악마를 베는 검 (2)
마인은 인간이다. 하지만 인간이 아니다.
악마의 끔찍한 힘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정신은 타락하고, 육체 역시 그로 인한 변화를 맞이한다.
도저히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런데, 눈앞의 마인은 그러지 않았다.
요사스럽게 빛나는 붉은 눈만 제외하면 어떻게 봐도 사람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모습.
그만큼 자아가 강하다는 의미였다.
악마에게 소중한 것을 저당 잡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거의 잃지 않는다니.
다섯 번 넘게 마인 토벌에 나섰던 힐 버넷조차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물론 우리가 질 일은 없지만…….’
그가 빠르게 공동안을 살폈다.
마인의 주변에 서 있는 해골 병사들은 전력이 아니다.
정말로 악기를 연주하는 역할 말고는 쓸모가 없는 녀석들로 보인다.
물론 그 밖에 다른 기상천외한 무언가를 숨겨놨을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적어도 눈으로 보이는 적은 마인 하나뿐.
성물도 별다른 반응이 없고, 아이른 파레이라도 별다른 경고를 주지 않는다.
우리가 이긴다.
아니, 자신과 아이른 파레이라, 둘만 나서더라도 충분히 녀석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점이 부단장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왜 도망치지 않은 거지?’
저 녀석 역시 알고 있을 것이다. 양측의 전력 차이가 심각하다는 것을.
아무리 강하더라도 마인 혼자서 토벌대 전체를 상대로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건 진짜 ‘악마’ 정도나 가능하다.
본거지에 소중한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닌 듯싶었다.
앞서 봤듯이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해골 병사들과 피아노를 제외하면.
고민이 이어지던 찰나였다.
싱긋 웃은 마인이 입을 열었다.
“한 곡 더 들으실래요?”
“닥쳐라! 이 간악한 마인!”
뻔뻔하기 그지없는 태도에 러셀 남작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혼자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기사들에 잔뜩 둘러싸인 지금은 용기가 샘솟았다.
물론 마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더욱 진한 미소를 지은 그녀가 러셀 남작에게 말했다.
“하지만…… 제 연주, 무척 훌륭하다고요?”
“이 녀석, 쓸데없는 소리…….”
“방금 곡은 에피타이저에 불과해요. 제 진짜를 맛보여드릴게요. 피곤에 지친 몸을 감싸 안는 침대처럼 달콤하고, 진한…….”
“어, 어어…….”
“아마 꿈처럼 기분 좋을걸요?”
“그, 그럼, 한 곡만…….”
어느새 눈이 풀린 러셀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씩이지만 걸음도 앞으로 나아갔고, 주변인들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정신 차리시오!”
“헛!”
그런 남작의 정신을 깨운 것은 또 황혼 기사단의 부단장이었다.
멍한 표정의 러셀 남작이 한 박자 뒤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런 그를 보며 마인이 말했다.
“아쉬워라. 제 말은 틀림없는 진실이었는데…….”
“더 두고 볼 필요 없다! 마인이 다른 수작을 벌이기 전에 끝을 내자! 황혼 기사단! 전원…….”
힐 버넷이 결단을 내렸다.
본거지에 무슨 수작이 준비되어있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이대로 시간 여유를 주는 것보다는 바로 공격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명령을 들은 기사들이 발에 힘을 주었고, 6가문의 병력은 자연스레 마법사와 사제, 가주들을 지켰다.
토벌에 나서기 전에 약속된 기본적인 대형이었다.
하지만, 황혼 기사단은 적을 향해 돌격할 수 없었다.
그보다 한발 앞서 마인의 능력이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쑤우욱!
“허억!”
발밑의 그림자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토벌대원 한 명의 발을 잡아 어둠 속으로 끌고 갔다.
잠시 후, 마인의 그림자에서 모습을 드러낸 기사를 보며 가이른 자작이 외쳤다.
“잭 스튜어트 경!”
“아아, 그런 이름이었군요? 반가워요, 잭?”
사라락, 길게 늘어져 있던 머리카락이 잭 스튜어트의 목을 감았다.
허공에 떠오른 그가 숨을 쉬기 위해 발버둥 쳤다.
순식간에 싸늘해진 분위기.
그 속에서 흑발의 마인이 말했다.
“아아,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이런 대단한 능력을 계속해서 쓸 정도로 대단한 마인은 아니거든요, 제가.”
“이년이……!”
“그리고 잭을 죽일 생각도 없어요. 저는 평화주의자거든요.”
“무슨 개수…….”
“거래를 하죠.”
쑤우욱-
잭 스튜어트의 목을 휘감은 머리칼이 더욱 높이 올라갔다.
“이 잘생기고 훌륭한 기사님의 목숨과…….”
마인이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름답고 재능 넘치는 저의 목숨. 이 둘을 교환하는 거예요.”
“…….”
“어때요, 괜찮지 않아요? 여러분께서 길을 터주시면 제가 이곳을 벗어나서,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위치에서 이분을 놔드릴게요.”
“거짓말하지 마라!”
“거짓말이라뇨. 제가 모시는 분인 라스트로 님을 걸고 맹세합니다. 확실한 안전을 보장해주면, 저 역시 확실한 안전으로 보답할게요.”
“크윽…….”
“가이른 자작!”
힐 버넷이 필 가이른의 이름을 불렀다.
많은 내용이 생략되었지만, 모두가 그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마인의 말에 넘어가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마인과 협상하지 마라.
성국에서 내린 지침이었다.
‘아니, 그런 지침이 아니더라도 무조건 척살해야 해! 저 마인이 살아나가서 대륙에 끼칠 피해를 생각하면…….’
물론 그럴 경우 잭 스튜어트의 희생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감수해야 한다. 가이른 가에서 반대한다 해도 힐 버넷은 공격을 강행할 생각이었다.
다만 독단적으로 명령을 내릴 경우 내분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그 전에 가이른 자작이 옳은 결단을 내리는 편이 좋았다.
부단장의 눈빛이 점차 간절해졌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았음인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고민하던 필 가이른 자작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우리 가이른 가는, 더러운 마인과 협상 따위 하지 않는다!”
기사단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가이른 자작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 존경과 미안함의 감정이 깃들었다.
대륙의 안녕을 위해 가문의 제1기사를 희생하는 판단을 하다니.
옳은 일이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고맙소. 그리고 잭 스튜어트 경, 미안하오.”
부단장 역시 이를 잘 알았다.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 그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마인을 돌아봤다.
순식간에 돌변한 분위기.
그 속에서 마인이 당황한 얼굴을 했다.
자연스러운 모습이고,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협상이 실패로 돌아간 이상 마인이 살아날 길은 없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황혼 기사단이 신중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마인의 표정이 바뀌었다.
마치 가면을 갈아 낀 듯 소름 끼치는 변화.
힐 버넷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데, 또 한 번 이능이 발현되었다.
쑤우욱-!
“으, 으아아!”
기시감이 들 정도로 비슷한 상황.
그림자 속으로 끌려들어 간 인물이 마인의 옆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양 갈래로 나뉜 흑발이 강하게 인질의 목을 죄었다.
가이른 가의 대공자, 라이언 가이른이었다.
아들의 모습을 확인한 필 가이른이 전보다 훨씬 큰 비명을 질렀다.
“라이언! 안 돼!”
“약간의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 모두 돌…….”
“멈춰! 멈추라고!”
목이 찢어지는 듯한 쇳소리.
힐 버넷을 포함한 황혼 기사단 전원이 걸음을 멈췄다.
가이른 자작의 목소리에서 무언가를 느꼈기 때문이다.
잭 스튜어트가 잡혔을 때와는 전혀 다른.
이대로 토벌을 강행할 경우 무슨 일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불온한 감각.
그것은 사실이었다.
잔뜩 표정을 일그러뜨린 필 가이른이 명령했다.
“모두, 황혼 기사단을 막아라.”
“가이른 자작!”
“러셀 남작, 레스터 남작. 그대들도 내 뜻에 따라주겠지?”
“……황혼 기사단을 막아라.”
“저들을 제지해라.”
러셀, 레스터 남작의 병력이 쭈뼛거리며 가이른 자작의 병력에 합류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두 가주는 가이른 자작에게 여러 약점을 잡힌 상태였기에, 도저히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또다시 바뀐 분위기.
힐 버넷이 미칠 것 같은 표정으로 외쳤다.
“가이른 자작! 내가 이 일을 좌시할 것 같소!”
“그 얘기는 오늘이 지난 다음! 나중에 해도 안 늦어!”
“도대체 뭐가 늦지 않는다는 말…….”
“닥쳐! 일단은 저년의 말에 따라! 이봐! 협상은 아직도 유효한 거지?”
필 가이른이 다급하게 말했다.
마치 광증에 걸린 듯 엉망인 모습. 흡족한 웃음을 지은 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아까 말했잖아요? 제가 모시는 라스트로 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고요. 약속은 지킬 거예요.”
“좋아. 우리가 황혼 기사단을 막을 테니…….”
“황혼 기사단! 마인 토벌을 막는 이는 가문, 신분을 불구하고 용서치 마라!”
“힐 버네에에엣!”
피가 나올 듯 처절한 목소리로 울부짖는 필 가이른 자작을 보며, 토벌대원 전원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레스터 남작과 러셀 남작은 황혼 기사단을 적대해야 하는 상황이 두려우면서도, 가이른 자작에게 잡힌 약점 때문에 그의 명령을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휘하 병력 역시 급작스러운 흐름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황혼 기사단은 황혼 기사단 나름대로 미칠 노릇이었다.
아무리 마인 토벌이 중요하다지만, 여러 가문을 적대하면서까지 작전을 수행하는 것은 크나큰 부담이었다.
러셀, 레스터, 가이른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가문도 갈피를 못 잡기는 매한가지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인이 자신의 오른쪽을 쳐다보며 속삭였다.
처음에 인질로 붙잡힌 잭 스튜어트가 있는 방향이었다.
“어때요, 잭? 이쪽 청년과 온도 차가 매우 큰 것 같은데…… 기분을 말해주세요.”
“윽…… 끄윽…….”
“아 참, 제가 목을 강하게 죄고 있어서 대답이 어렵군요! 괜찮아요, 그대로 계세요.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으니까.”
절망, 분노, 서러움.
그 밖에 온갖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 있는 잭 스튜어트를 보며 마인이 웃었다.
그녀의 미소는 엉망진창이 된 토벌대를 보며 더욱 진해졌다.
이것 때문이다.
이 광경을 보기 위해 도망치지 않고 남아있었다.
마인은 자신의 눈만큼이나 붉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한 명, 한 명의 표정을 꼼꼼히 머리에 새겼다.
황홀감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자신이 죽는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일부 병력이 단독으로 움직이더라도 상관없다.
합심하여 달려드는 것이면 모를까, 분열의 틈바구니에서 한 몸 건사하는 정도는 충분히 자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조금 더 이 상황을 즐기자.
저 치들의 멍청한 얼굴을 머리에 담아 좋은 추억으로 남기자.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그녀의 눈에, 이질적인 인물 하나가 들어왔다.
“음?”
남들과 달리 약간의 표정 변화도 없는 얼굴로,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금발의 청년.
헌데 자세가 이상했다.
마치 검을 들고 있는 듯한 모습. 하지만 그의 손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다.
‘아니, 처음부터 저러고 있었던가?’
마인이 기억을 되짚었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저 이상한 녀석은 자신이 연주를 끝내고 인사를 건넸을 때부터 저 모습이었다.
눈을 감고, 이상한 자세를 잡고.
그 상태로 뿌리박힌 듯 가만히 서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아니.
힘을 모으는 것처럼.
“……!”
화아악!
마인이 능력을 사용했다.
다른 이를 납치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 자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뒤늦게 울린 머릿속의 경종을 무시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없었어’
자신을 놔줄 생각 따위, 저 녀석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어!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달은 마인이 자리를 뜨려는 순간이었다.
번쩍!
아이른 파레이라가 눈을 떴다.
그와 함께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거대한 검이 모습을 드러냈고,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사아아악-
피할 수 없다.
막을 수도 없다.
그 어떠한 반응도 하지 못한 마인의 몸이, 정확히 두 쪽으로 양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