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악마를 베는 검 (1)
아이른 파레이라는 15살 때부터 신비한 꿈을 꿔왔다.
낡고 초라한 담장이 있는 마당에서, 의문의 사내 하나가 쉼 없이 검을 휘두르는 꿈.
신기하기 그지없는 일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일상이 된 일이기도 했다.
물론 자신의 검을 들기 위해 힘썼던 5년의 시간 동안은 그 꿈을 꾸지 않았다.
허나 요술세계에서 빠져나온 날 밤부터 의문의 사내는 다시금 등장했고, 바로 어제까지도 한결같은 모습으로 열심히 검을 휘둘러댔다.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익숙한 시야, 익숙한 냄새, 익숙한 인물.
이내 시작되는 우직한 검술 수련.
21살의 청년이 된 아이른 파레이라는 이를 지겹도록 많이 봐왔다.
그냥도 봤고, 집중해서도 봤다.
꿈속이 아닌 현실에서도 이 시간에 집착했던 적도 있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래서 알 수 있었다.
미세한 차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절대로 알아챌 수 없을 아주 작은 차이점을, 아이른은 꿈이 시작된 지 한 시간쯤 지났을 때부터 구별할 수 있었다.
‘눈.’
눈.
누군가에게 있어선 그저 물체를 볼 수 있는 감각기관.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마음을 비추는 거울.
아이른이 느낀 것은 후자였다.
사내의 눈빛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감정이 그의 머릿속에 의문부호를 떠올리게 했다.
‘어째서 분노의 감정이?’
여태껏 단 한 번도 자신의 감정을 노출하지 않았던 사내다.
그는 평생의 업이 검을 휘두르는 것인 마냥 묵묵히, 표정 변화 없이 같은 동작만을 반복했다.
똑같은 하루만을 반복했다.
그런 그가 이제 와서 분노를 드러낸다고?
믿을 수 없었던 아이른은 계속해서 사내에 집중했다. 오로지 사내의 눈만을 바라봤다.
확실했다.
아주 조금일 뿐이지만, 그는 분명 분노하고 있었다.
……그렇게 꿈은 끝이 났다.
“거기, 빨리빨리 움직여!”
“물자는 충분하지?”
“빨리 식사 준비부터 끝내자고.”
잡일을 담당하는 병사들의 부산스러운 소리.
청년은 자신이 현실로 돌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래라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움직였을 것이다.
검술 수련까진 아니더라도 밤새 굳은 근육과 관절을 풀어주는 건 중요했으니까.
허나 아이른은 누운 상태 그대로 조금 더 시간을 보냈다.
다시금 눈을 감은 그가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꿈이 변할 때마다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났었지.’
분명히 그랬다.
꿈속에서 자아를 유지할 수 있게 된 순간부터 검술 수련에 탄력이 붙었고, 사내가 자신을 돌아본 순간에는 자신도 모르는 새 요술세계로 빠져들어 갔다.
그런 전례로 볼 때, 아마 이번에도 무언가 변화가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변화는 일어났는지도.’
아이른이 곰곰이 어제 일을 떠올렸다.
확실히 뭔가가 이상했다.
요술세계에서 얻은 성과 이상으로 완벽한 퍼포먼스를 보였다는 점도.
그런 대단한 활약을 보여 가문의 명예를 드높였으니 기뻐야 함에도 불구하고 내내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는 점도, 분명 이상했다.
물론 매우 사소한 일이니만큼, 그저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그만.”
고개를 강하게 저은 아이른 파레이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라진 꿈.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은 맞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마인 토벌이다.
황혼 기사단 부단장에게까지 인정받긴 했지만, 여전히 자신은 경험 부족한 초짜일 뿐이다.
이를 항상 유념하고 행동해야 한다.
집중하자.
긴장을 풀지 말자.
마음속으로 다짐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꼼꼼하게 몸을 풀었다.
“여어, 공자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어제 활약, 정말 대단했습니다!”
첫날과는 달리 몇몇 황혼 기사단원들이 먼저 말을 걸어줬다.
그들 말고도 많은 이들이 자신에게 말을 걸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적당히 웃는 얼굴로 그들을 대한 뒤, 아버지 쪽을 살폈다.
자신보다 더욱 진한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른은 조금 크게 미소를 지은 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배식을 받았다.
스스스스……
그러자 또다시 검게 물드는 목걸이.
좋았던 기분이 나빠졌다.
아무래도 이 악의는 토벌이 끝날 때까지 쭉 이어질 것 같았다.
‘혹시 몰라. 독 말고 다른 방식으로 날 골탕 먹일 수도 있어.’
더욱 조심해서 행동해야겠다고 생각을 하며 해독을 기다리는데, 머리에서 무언가가 느껴졌다.
깜짝 놀란 아이른 파레이라가 빠르게 손을 올려 이를 낚아챘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이번에도 독이 들어 있습니다! 진짜 나쁜 놈들입니다! 항상 조심하세요!]
여전히 삐뚤빼뚤한 글씨.
바닥을 치던 기분이 조금이나마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내 편이 하나도 없는 건 아니구나.’
누군지는 몰라도, 감사합니다. 항상 긴장하고 있겠습니다.
속으로 중얼거린 아이른은 해독이 끝나기를 기다린 후 평소보다 큰 동작으로 밥을 먹었다. 마치 누군가 보란 듯이.
이를 정말로 보고 있던 잭 스튜어트가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데, 곁으로 다가온 필 가이른이 조용히 속삭였다.
“이번엔 진짜 효과 있는 거 맞겠지?”
“적어도 독이 들어간 건 확실합니다. 일반인이라면 사흘 밤낮 설사를 쏟아내고 탈진할 정도로 심한 걸로…….”
“그 말은 어제도 했잖아! 근데 왜 지금까지 멀쩡한 거냐고!”
“……아마 이번에도 효과가 없다면, 독을 막아주는 아티팩트를 갖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됩니다.”
“젠장, 젠장! 이 가이른 자작님도 없는 상급 아티팩트를 두 개나 갖고 있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또 동생 년인가?”
눈이 벌게진 가이른이 침을 튀겨가며 파레이라 가문을 욕했다.
잭 스튜어트의 얼굴에도 침이 튀었다.
내색하지 않는 그를 향해 가이른이 한마디 말을 더 남기고 떠났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녀석의 발목을 잡으라고.
그가 떠난 것을 확인한 잭 스튜어트가 뒤늦게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뺨에 묻은 침보다도, 그래도 함께 토벌에 나선 이를 해쳐야만 한다는 사실이 더욱.
* * *
마인 토벌대의 이틀 차 진군은 생각보다 훨씬 무탈하게 이어졌다.
어제와 같은 돌발 사태는 하나도 벌어지지 않았다.
두 번의 야심 찬 기습이 실패했기 때문인지, 마물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지능이 낮은 몬스터 몇 마리만 간혹 날뛰었다.
힐 버넷이나 아이른 파레이라가 나설 것도 없었다.
녀석들은 황혼 기사단원들의 칼날 아래 피를 한 바가지씩 흘리며 나자빠졌다.
이를 본 아이른의 안색이 다소 창백해졌다.
“표정이 좋지 않군. 괜찮나?”
“괜찮습니다.”
대답을 들은 힐 버넷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수롭지 않은 일일 터다.
어제 거대한 마물을 상대로도 평온한 모습을 보였던 마당에, 이제 와서 살생에 대한 거부감을 느낄 리도 없고.
헌데 그것이 맞았다.
살육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
그것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낀 아이른이 당황했다.
‘내가 왜 이러지?’
물론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다면 이러는 게 당연하지만, 어제는 멀쩡해 놓고서 도대체 왜?
그는 그런 의문과 함께 이틀 차를 보냈고, 또다시 꿈을 꿨다. 은은하게 분노하는 사내의 꿈을.
그리고 시작된 토벌 사흘 차.
아이른 파레이라는 또다시 엄청난 활약을 선보였다.
“저쪽에 마기가 느껴집니다. 아마 함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좌측에서 마물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마인의 본거지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숲에 진입한 뒤부터였다.
아이른은 또다시 자신의 몸에 변화가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놀랍도록 평온하다.
그러면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롭다.
감각이 어찌나 예민한지, 동생이 준 목걸이보다도 한발 먼저 마물들의 수작을 눈치채고 대비할 정도였다.
검에도 자비가 없었다.
망설임 없이 적들을 썰어 넘기는 그를 보며 부단장이 흡족한 미소를 보였다.
그런 반면 가이른의 속은 뜨겁게 타올랐지만, 이를 티 낼 수는 없었다.
아이른 파레이라의 활약에 힘입어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나오지 않은 이 상황에서, 그에게 싫은 감정을 내비칠 수는 없다.
그저 잭 스튜어트만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볼 뿐.
허나 잭 스튜어트로서도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저렇게 훌륭한 검사로 자란 아이른을 상대로 그렇게까지 더러운 짓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리 적대 가문의 장자라지만, 그래도 나는 기사가 아닌가!’
사실 적대 가문조차도 아니었다. 그저 필 가이른이 일방적으로 싫어할 뿐이지.
잭 스튜어트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렇듯 다양한 인간군상이 각기 다른 생각을 하며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마인의 본거지에 도달하였다.
인공적으로 공간을 뒤틀어 만든 듯한 넓은 입구의 동굴.
황혼 기사단 부단장 힐 버넷이 아이른 파레이라를 향해 말했다.
“함께 앞장서지.”
당연한 판단이었다. 토벌대에서 가장 강하면서, 또 가장 마기에 민감한 인물을 앞장세우는 것은 당연했다.
어찌 애송이에게 막중한 임무를 주냐고 반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토벌대 전부는 아이른 파레이라를 젊은이가 아닌 한 명의 강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예, 토벌대장님.”
아이른으로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처음에는 신경 쓰였던 변화도 지금은 오히려 기꺼웠다.
날카롭게 벼려진 감각, 차갑게 유지된 이성.
상대가 어떤 수작을 부리든 전부 대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둘은 당당히 동굴의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을 따라 100여 명의 토벌대 일원들 역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약 1분, 어두운 공간을 마법 불빛에 의지해서 걸어 나갈 때였다.
♩♪ ♬♩♪
갑자기 들리는 음악 소리.
모두의 발걸음이 동시에 멈췄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악기 소리가 나니, 그럴 수밖에.
사람들의 얼굴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현악기…… 바이올린인가?”
“피아노 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
몇몇 음악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은 악기의 종류를 맞췄고, 아닌 사람들은 조용히 음악에 귀 기울였다.
듣다 보니 썩 나쁘지 않았다. 그들은 어느새 눈을 감고 선율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 ♬♩♪
“괜찮은데?”
“실력이 꽤 좋아.”
멜로디가 이어질수록 사람들의 표정이 풀어져 갔다.
누군가는 진지한 표정으로 감상평을 늘어놨고, 누군가는 말없이 조용히 음악에만 집중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 모두의 공통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전진하는 그들을 따라 박자가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고, 토벌대원들의 속도도 조금씩이지만 빨라졌다.
그렇게 모든 이들이 앞으로, 앞으로 걸어가던 와중이었다.
“하압!”
퍼어엉!
힐 버넷이 크게 소리쳤다.
기합과 함께 퍼진 기파가 넓은 반경으로 퍼졌고, 토벌대원들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방금 전까지 자신들이 정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은 탓이다.
“모두 괜찮나?”
“네, 네!”
“괜찮습니다!”
“혹시라도 주변에 아직 정신 못 차린 사람이 있다면 강하게 흔들어라. 아이른 파레이라, 자네는 당연히 괜찮겠지?”
“괜찮습니다.”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힐 버넷을 비롯해 정신조종에 침식당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때, 복도 끝의 공동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던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은 드레스와 긴 흑발이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그녀의 주변에 둘러서 있는 해골 병사들도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손에는 현악기가 들려 있었다.
“손님이 왔군요. 반갑습니다.”
온통 붉은 눈을 제외하면 인간과 다른 점이 없어 보이는 존재.
힐 버넷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보다 훨씬 강한 마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