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헤일 왕국의 잠룡(潛龍) (5)
멈춘 것은 부단장만이 아니었다.
급박한 상황에 바쁘게 움직이던 황혼 기사단의 기사들, 그리고 6가문의 병력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그들을 향해 달려들던 졸개 마물들마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였다.
좌우로 갈라져 쓰러지는 듯했던 검은 거인의 안광이 다시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악-!
쿠와아악!
쪼개진 입에서 괴성이 나온다. 분열된 거구가 각자 의지를 가진 듯 개별적으로 움직인다.
다른 방향에서 날아오는 주먹을 보며 토벌대원들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허나 아이른 파레이라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까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검을.
후웅!
후우웅!
후우우웅!
휘둘렀다.
휘둘렀다.
또 휘둘렀다.
여기 있는 이들은 모르지만, 이는 틀림없는 주디스의 검술이었다.
강한 코어를 중심으로 회전력을 더한, 하나하나가 일격필살의 묘리를 담고 있는 강격(强擊)!
그 불꽃 같은 공격에 검은 거인은 순식간에 여러 조각으로 분열되었다.
또 한 번의 패배를 겪은 마물의 조각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헌데 끝이 아니었다.
허공에서 무너져 내리던 조각들의 겉면에 가시가, 칼날이 돋아났다.
보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예리함이 아이른의 사방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물론.
이번에도 그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터엉-!
터덩, 텅!
부드러운 원을 그리며 형성된 브랫 로이드의 방어술.
사라락-
직후 이어진 자유로우면서도 날카롭고, 무자비한 일리아 린제이의 하늘검.
그야말로 쉴 새 없이 대검이 휘둘러졌다.
마치 폭풍을 연상시키는 연격에 거인의 사체가 수백 조각으로 분리되었다.
투둑, 툭
그리고 더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 모든 광경을, 토벌대원들은 넋 놓고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콰앙!
퍼어억!
“뭐 하는가! 아직 전투 중이다! 정신 차려!”
“……우, 우와아아아아!”
물론 계속해서 그러고 있지는 않았다.
일선으로 달려온 힐 버넷이 졸개 한 마리를 걷어차며 호통치자 모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발차기 한 방에 고깃덩이가 되어버린 마물을 보니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바짝 마음을 다잡은 그들은 최선을 다해 검을 놀렸다.
퍼억-!
콰아앙!
그중에서도 단연 빛나는 것은 힐 버넷이었다.
거칠지만 위력적인 체술이 곁들여진 검술은 마물들을 문자 그대로 터뜨리고 부숴버렸다.
겁에 질린 몇몇이 도망가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고 어떻게든 따라붙어 추살했다.
황혼 기사단의 부단장에 어울리는 활약이었다.
허나 이번 전투의 1등 공신은 따로 있었다.
“후우, 후.”
“…….”
“…….”
모든 적을 쓰러뜨린 뒤, 무표정한 얼굴로 호흡을 고르는 아이른 파레이라.
그를 보는 토벌대 병력들의 눈에 다양한 감정이 서렸다.
경외, 질시, 혼란, 의아함, 동경…….
그중에서 가장 진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자는, 당연하게도 그의 아버지인 하룬 파레이라였다.
‘자랑스럽구나, 아이른!’
전에 없이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였을 때조차도 아들 걱정에 밤잠을 설치던 파레이라 남작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크로노 검술관을 다녀온 뒤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그가 지금까지 봐왔던 아이른은 어릴 적의 상처에 허덕이는 마음 여린 소년에 불과했을 뿐이니까.
허나 지금, 그러한 염려는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압도적인 활약.
그야말로 동화책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모습을 보여준 아들을 바라보며, 그가 눈시울을 붉혔다.
“잭! 잭 스튜어트!”
“부르셨습니까, 주군.”
“오기 전에 얘기했던 거, 진행해!”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증오, 그리고 분노.
대외적으로 보이는 온화한 표정 대신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한 필 가이른 자작이, 휘하 기사에게 명령했다.
잭 스튜어트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인 토벌이 시작된 지 반나절 가량이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 * *
마인 토벌대의 행군은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예상치 못한 마물들의 습격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경미한 부상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다친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크게 낭패를 볼 수도 있었던 순간이지만, 토벌대원은 오히려 크게 사기가 오른 상태로 마인의 본거지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물론 승리의 기쁨에 취해 무리하지는 않았다.
한 번 방심했다고는 하나 힐 버넷은 여러 번 마인을 토벌한 경험이 있는 베테랑 기사.
두 번 같은 실수를 당할 사람은 아니었다.
“아이른 파레이라.”
“예.”
“지금부터 사제들의 성물보다 자네의 말을 더 우선해서 판단하겠다. 마물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지면 곧바로 말해라. 알았나?”
“알겠습니다!”
전투 직후 알게 되었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가지고 있는 목걸이가 굉장히 뛰어난 아티팩트라는 것을.
그리고 그 아티팩트를 만든 것이 아이른의 동생인 키릴 파레이라라는 것을.
때문에 힐 버넷은 즉각 아이른을 중용했다.
아마 앞뒤가 꽉 막힌 귀족이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기상천외한 능력을 가진 요술사의 물건이라고는 하지만, 성물에 우선시하기에는 걸리는 점이 있었으니까.
실제로 몇몇 사제들은 이 결정에 불만을 내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적입니다. 좌측에서 다가오고 있습니다.”
“모두 전투 준비!”
한 번 더 아이른이 마물의 접근은 일찍 파악하자, 더는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토벌대는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내지 않은 채, 무사히 오후를 넘기고 숙영에 들어갈 수 있었다.
“굉장한데, 저 아티팩트.”
“그러게 말이야. 교단의 성물보다 더 뛰어난 마기 감지 능력이라니…….”
“파레이라 가의 요술사가 대단하긴 한 모양이야.”
“엄청 예쁘다는 말도 있는데?”
“……너랑 스무 살은 차이 나는 어린애가 예쁘든 말든 뭔 상관이야?”
저녁 배식을 받으며, 황혼 기사단의 기사들이 키릴 파레이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소문만 무성한 유망한 요술사의 힘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게 되니 말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허나 그보다 더 뜨거운 화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오늘 있던 두 번의 전투에서 어마어마한 활약을 펼친 젊은 검사, 아이른 파레이라에 대한 이야기였다.
“지금 나이가 몇이라고 했지? 스물다섯?”
“스물하나.”
“미쳤구만…… 스물하나에 저만한 실력을 보인단 말이야? 이미 엑스퍼트인 것 같은데? 아닌가? 그건 좀 너무 갔나?”
엑스퍼트(Expert).
소드마스터라는 지고한 경지에 비해서는 손색이 있지만, 일반적인 기사, 검사와 함께 묶기엔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는 인물들을 일컫는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엑스퍼트의 칭호는 자신이 원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크로노 검술관과 같은 대륙의 유명 검술관을 정식으로 졸업한 자.
모두가 인정하는 강대국 기사단의 일원인 자.
성국의 인정을 받은 자.
혹은 용병 중개소에서 황금패 이상을 받은 자.
적어도 이 정도 자격은 있어야 가능한 영광스러운 경지인 것.
당연히 스물하나 애송이의 이름 앞에 붙일 칭호는 아니었다.
하지만.
“당연히 엑스퍼트지.”
“맞지. 아까 마물, 우리였으면 셋이서 상대하기도 힘들었을걸?”
“그건 그래. 웬만한 중형급 몬스터보다도 강해 보이던데, 그걸 혼자서 처리했으니…….”
“아마 부단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실 거야.”
“심지어 전력을 다한 것도 아닌 모양인데…… 도대체 어느 정도 실력인 걸까?”
놀랍게도 황혼 기사단 전원이 아이른 파레이라의 경지에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부분을 궁금해했다. 그의 진정한 실력에 대해서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기사들의 이러한 대화는 순식간에 6가문의 귀족들 사이에 퍼졌다.
그들의 눈에 부러움과 질시의 감정이 깃들었다.
‘완전 제대로 눈도장 찍었네.’
‘젠장,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거지? 나태 공자 따위가…….’
‘파레이라 남작, 아주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는구만!’
하룬 파레이라의 표정을 본 몇몇 가주들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사람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른다더니, 가주 회의만 하면 가이른 자작에게 얻어맞기만 하던 양반이 순식간에 저 꼭대기로 올라가 버렸다.
반면 토벌전에서 가장 빛나는 활약을 펼칠 거라 생각했던 가이른 가문은 파레이라 가문에 완전히 밀려버렸다.
물론 라이언 가이른 역시 빼어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황혼 기사단의 그 누구도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오로지 최고의 활약을 한 금발 청년에게만 뜨거운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
그러나 그 시선의 중심에 있는 아이른 파레이라는, 누구보다 조용했다.
억지로 표정 관리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청년은 이러한 분위기 자체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가 표정을 굳힌 채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배식받은 식사가 보였다.
허나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동생의 목걸이.
그리고 그 목걸이가 검은색으로 변했다는 부분이었다.
스스스스……
열심히 기운을 내뿜어 음식을 정화하는 아티팩트.
이는 아이른이 들고 있는 식사가 독에 오염되었다는 뜻이었고, 일행 중 누군가가 그에게 악의를 풀었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크게 놀랄 일은 아니긴 하지.’
아마 가이른 자작가일 것이다.
5년 전에 이미 어렴풋이나마 자신의 실력을 봤으니,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 복통을 유발하는 독을 미리 준비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분노?
딱히 생기지 않았다. 원래 그런 사람들인 걸 알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욱 신경 쓰이는 부분은, 그릇 밑에 은밀히 붙어 있는 쪽지였다.
[이 음식엔 독이 들어 있습니다! 조심하세요!]
경고의 메시지.
마치 왼손으로 쓴 듯 삐뚤빼뚤한 글씨도 인상적이지만, 그 내용도 놀라웠다.
이 쪽지의 주인은 어떻게 여기에 독이 들었다는 것을 알았을까?
또 어째서 자신을 도와주는 것일까?
‘누굴까…… 날 도와줄 사람이 있을 거란 생각은 전혀 못 해봤는데.’
심지어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고민거리가 한 가지 더 있었다.
눈을 감은 그가 오늘 있었던 두 번의 전투를 떠올렸다.
부족한 부분을 찾으려는 건 아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오늘의 싸움은 완벽했다.
마물이긴 하지만 첫 살생이었는데도 전혀 떨지 않았고, 첫 실전임에도 불구하고 시야가 좁아지지도 않았다.
검을 휘두르는 걸 망설이느라 피해가 생기는 등의 실수도 전혀 없었다.
‘그게 문제란 말이야.’
위화감이 느껴진다.
자신은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무언가를 익히기 위해서 노력하고,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성과를 보는 타입.
당연히 이번 토벌에서도 실수가 있을 거라 생각했고, 그렇기에 토벌대장에게 말했던 것처럼 마인드 컨트롤에 힘쓰겠다고 한 거였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자신은 너무나도 완벽했다.
마치 수백 번 마물을 잡아 왔던 사람처럼.
띠- 띠- 띠-
목걸이에서 소리가 점멸했다.
해독되었다는 뜻.
고개를 끄덕인 아이른이 식사를 시작했다.
혹시나 해독이 안 되었으면 어떡하지? 따위의 생각은 전혀 없었다.
동생과 자신은 강한 신뢰로 묶여있으니까.
어쩌면 그러한 신뢰가 요술 아티팩트의 성능을 더 높이는 건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과 함께 막 식사를 마쳤을 때였다.
“아이른 파레이라. 식사 다했나?”
“예, 토벌대장님.”
“대련이나 한 번 할까?”
어느새 찾아온 황혼 기사단 부단장이, 의외의 제안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