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헤일 왕국의 잠룡(潛龍) (4)
“…….”
힐 버넷과 아이른 파레이라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들이 요상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이 서지 않았다니.
그게 무슨 선문답 같은 말이란 말인가.
물론 아예 얼토당토않은 말은 아니긴 했지만, 나이 지긋한 성직자도 아닌 젊은 청년이 저런 말을 했다는 데서 사람들은 위화감을 느꼈다.
‘저거, 그냥 있어 보이는 대답한 거 아니야?’
‘뭔 소리 하는 거야?’
“흠.”
힐 버넷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 역시 그런 생각을 아예 안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한 줄기 기대감이 남아있는 상태.
그가 재차 질문을 던졌다.
“부가 설명은 아까보다는 지금이 더 필요할 듯하군. 마음이 서지 않았다는 말, 조금 더 자세히 풀어줄 수 있나?”
“죄송합니다. 뭔가 있어 보이는 얘기를 하려던 건 아닙니다.”
“괜찮으니 부담 갖지 말고 말해도 된다.”
“……제가 토벌전에 참여한 이유는 마인을 토벌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활약을 통해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서입니다.”
솔직한 대답.
나쁘지 않았다. 소영주가 가문의 영예를 위해 힘쓰는 건 당연한 거니까.
청년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활약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지금은 그 부분을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다른 이들이 검을 휘두르는 모습에 저도 그래야 하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긴 했지만, 토벌 당일에 수련을 해봤자 토벌엔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 판단했고요.”
“흠.”
“노력은 지극한 행동과 더불어 지극한 마음이 따라야 완성되는 것. 시작부터 마음이 서지 않으니…… 지금 제가 검술 수련을 해봤자 노력이라 부를 수는 없는 거 아닌가, 그런 뜻에서 했던 말이었습니다.”
아이른 파레이라의 말을 들은 주변 사람들, 특히 파레이라 가문과 사이가 좋지 않은 이들이 피식 웃는 모습을 보였다.
엄청 있어 보이는 말로 서두를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그냥 자기합리화 아닌가.
물론 토벌 당일에 열심히 수련해봤자 별 차이가 없다는 말은 사실이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당연히 뭐라도 하는 편이 낫다.
‘역시 나태 공자야.’
‘게으름에 대한 핑계도 가지가지로구만.’
‘말 자체도 그다지 특별할 거 없는 얘기고…….’
그들의 시선이 황혼 기사단의 부단장 쪽으로 꽂혔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는 깐깐한 표정을 하는 힐 버넷.
그의 눈이 나태 공자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다.
주변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저런 서늘한 눈빛, 결코 오래 마주 하고 싶지 않다. 자연스레 고개가 돌아갔다.
허나 아이른 파레이라는 그러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살짝 시선을 아래로 한 채,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훤칠한 청년.
그를 한참이나 살피던 부단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행군 준비가 완전히 끝난 시점.
토벌대를 슥 둘러본 그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곧바로 진군하겠소! 그리고…… 너는 내 옆으로 와라. 조금 더 대화가 필요하겠어.”
“……!”
깜짝 놀란 표정으로 둘을 쳐다보는 사람들.
일반 기사와 병사들뿐만이 아니었다. 그 시선들 중에는 라이언 가이른과 필 가이른 자작의 것도 섞여 있었다.
‘도대체…….’
‘뭘 보고?’
질척하면서도 뜨거운 질시의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허나 힐 버넷과 아이른 파레이라, 둘 중 누구도 가이른 부자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멈췄던 토벌대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 * *
황혼 기사단의 부단장, 힐 버넷은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 대화의 내용만을 보지 않는다.
특히 사람을 평가할 때는 더더욱 그렇다.
눈.
사람의 마음을 비치는 거울.
상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그대로 알려주는, 눈이야말로 내용만큼이나 중요한 부분이다.
적어도 힐 버넷은 그렇게 생각했다.
‘같은 내용을 이야기하더라도, 이를 진심으로 생각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말의 무게가 확연히 달라지니까.’
‘인생은 덧없는 것’이라는 말을 산전수전 다 겪은 80세 노인이 진지하게 하는 것과,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가 어디서 주워듣고 대충하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처럼.
힐 버넷은 누군가가 의견을 말할 때, 그가 자신의 말의 무게를 감당 가능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느낀 바로는…….
‘아이른 파레이라는 전자야.’
단순히 ‘그렇게 생각한다.’ 수준이 아니다.
이미 자신이 말한 바를 오랫동안 실천하고, 경험하고, 이를 통해 신념을 쌓은 자의 눈.
이를 본 순간, 힐 버넷은 아이른 파레이라에 대한 모든 부정적인 소문을 저 멀리 치워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를 감출 수 없는 호기심이 대신 차지했다.
좀 더 그에 대해 알고 싶다.
그러한 생각을 하며, 부단장이 옆의 청년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얘기 이어서 하지. 자네, 이번 마인 토벌을 위해 자신이 어떤 것을 하면 좋을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그 고민 끝에 나온 결과가 몇 가지 있을 것 같은데…… 내게 얘기해 줄 수 있나?”
“경험이 부족하여 마음에 차지 않으시겠지만…… 세 가지 부분을 중점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세 가지나? 어서 말해봐라.”
흥미가 생긴 부단장이 재촉했고, 아이른은 고개를 끄덕인 뒤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았다.
1. 자신은 한 번도 피를 본 적이 없는 미숙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첫 살생에서 따라오는 충격과 혼란에 대비할 수 있도록 미리 신경 써야 한다.
2. 경험 없는 병사의 돌발행동만큼 위험한 것이 없다고 들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상급자의 통솔에 잘 따라 토벌대에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조심하자.
3. 마인, 그리고 마인의 수하인 마물들로부터 풍겨 나오는 마기(魔氣)에 항상 촉각을 곤두세워, 적의 출현을 미리 파악하고 알릴 수 있도록 노력하자.
모든 것을 들은 힐 버넷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생각보다 훨씬 현실적이군. 그래서 나쁘지 않아.”
“감사합니다.”
“첫 번째는 정말로 중요한 부분이다. 그 어떤 베테랑이더라도 첫 실전은 떨리기 마련이지. 미리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것은 좋은 습관이다. 그렇다고 너무 긴장을 많이 해서 동작이 굳어지면 안 된다. 그 부분도 유념하도록.”
“명심하겠습니다.”
“두 번째도 나쁘지 않아. 마찬가지로 첫 실전에 참여하는 녀석이 흔히 겪는 실수다. 자기 객관화조차 못 한 머저리들이 상관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나대다가 순식간에 세상 뜨는 걸 지금까지 백번도 넘게 본 것 같군.”
“조심하겠습니다.”
“아, 자네가 그럴 거 같다는 말은 아니야. 지금의 침착한 모습, 아주 좋아. 지금의 그 마음만 유지한다면 문제 될 일은 하나도 없을 것 같군. 그리고 세 번째 말인데…….”
하하, 황혼 기사단 부단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옆의 청년이 확실히 경험이 부족하긴 하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꼈기 때문이다.
나이에 맞지 않게 침착한 모습을 보여 ‘실제로는 베테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그는 애송이다.
‘다만, 잘 커나간다면 훌륭한 재목으로 거듭날 수 있겠지.’
자신을 과시하려 하지도,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런 것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자신이 마인 토벌에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말이다.
힐 버넷은 그의 그런 요란하지 않은 태도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직접 가르침을 내리고 싶을 정도로.
상념을 끝낸 그가 웃는 얼굴을 유지한 채 말을 이었다.
“그 부분은 걱정할 필요 없다.”
“그렇습니까?”
“그래. 그를 위해 사제를 대동한 거니까.”
지하 깊숙한 곳에 세상을 오염시키는 추잡한 악마들이 있다면, 하늘 높은 곳에는 대륙을 굽어살피는 성스러운 신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위대한 존재의 권능을 일부 사용할 수 있는 사제들이, 지금 토벌대에는 존재했다.
“마인과 마물들이 뿜어내는 끔찍한 마기 따위, 사제들이 얼마든지 감지해낼 수 있다.”
“그렇군요.”
“물론 성스러운 기운에도 감지되지 않을 만큼 음습한 녀석들도 존재하긴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교단의 성물도 함께하고 있다. 그러니까 첫 실전을 겪는 자네가 그런 부분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는…… 흠.”
매끄럽게 말을 이어가던 힐 버넷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이른 파레이라 때문이었다.
내내 자신의 말을 경청하던 그였건만, 지금은 태도가 몹시 불량하다.
대화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고 있다니.
‘무슨 일이지?’
부단장은 곧바로 화를 내지는 않았다.
첫 대면이라면 몰라도, 함께 시간을 보낸 덕분에 상대의 성정을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다.
그가 이유 없이 저런 행동을 보이지는 않을 터였다.
뭔가 이유가 있을 텐데, 뭐지?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이었다.
그의 등골에 갑작스레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후우우욱-!
“……!”
역겹고, 더러운, 인간의 근원을 건드리듯 두려운 마음을 심어주는.
그야말로 끔찍하기 그지없는 마물들이, 토벌대 후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두 가지 그림을 바꿔치기한 듯 기척도 없이, 순식간에 등장한 것이다.
“아, 아니!”
“마물인가?”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한두 마리가 정찰 온 수준이 아니었다.
대충 봐도 수십 마리, 심지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나무와 돌 따위의 그림자에서 솟아오르는 검은색 크리쳐(creature)들을 보며 부단장이 소리쳤다.
“모두 전투 준비! 기사들 전열로 나서! 6가문은 뒤로 빠져서 마법사 사제 지켜!”
‘전황을 파악해야 해!’
빠르게 지시를 내린 힐 버넷이 표정을 굳혔다.
어째서 사제들이 감지해내지 못했는가? 따위의 걱정은 할 시간 없다.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에 집중한다. 생각을 마친 그의 눈이 빠르게 전장을 살폈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었다.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신장 5미터의 거인을 보며 그가 생각했다.
‘저놈은 내가 맡아야 한다!’
자신이 토벌대에 참여한 이유.
아군이 감당할 수 없는 강적을 찍어 누르기 위함이다.
지시도 지시지만, 저런 강력한 괴물을 홀로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피해를 최소로 줄일 수 있다.
다만 지금 경우는 상황이 나쁘다.
미리 대비하고 미리 준비해 앞으로 나섰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곧바로 움직여도 녀석이 먼저 전열에 도착하는 걸 막을 수가 없다.
젠장, 고민하지 말고 바로 달렸어야 했는데.
절대로 늦지 않았어야 했는데!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그의 눈에, 금발의 청년 하나가 지척까지 접근한 게 들어왔다.
아이른이었다. 흥분하지 않고 통솔에 따르겠다고 말한 게 무색하게, 돌발적으로 행동한 것이다.
부단장의 표정이 더욱 다급해졌다.
“안……!”
안 돼, 라고 말할 틈조차 없었다.
터엉!
지면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도약하여.
쒜에에엑!
강렬한 내려 베기와 함께 떨어진다.
그야말로 뇌전이 내리꽂힌 듯 날카롭다.
체고 5미터의 마물은 제대로 된 저항도 못 하고 두 쪽으로 갈라져 버렸다.
일격.
검을 뽑던 힐 버넷의 몸이 석화 저주에 걸린 듯 굳어버렸다.
‘이건 대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