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헤일 왕국의 잠룡(潛龍) (3)
황혼 기사단 부단장, 힐 버넷이 대화를 멈췄다.
상대의 말이 잘 이해가 안 됐기 때문이다.
뭐? 일리아 린제이에 버금가는 인재가 헤일 왕국에 있다고?
잠시 머리를 굴리던 그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 무슨 그런 농담을 하십니까?”
“응? 농담이라니?”
“예?”
“자네, 설마 모르나?”
“무슨…….”
“허어. 이럴 수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헤일 왕국 사람인 자네는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톰 밀러.
심지어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숨까지 쉬는 모습에 힐 버넷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중요한 말을 꺼냈으면 끝까지 할 것이지, 지금 이게 뭐 하는 건가?
존경하는 선배만 아니었다면 지금 당장 멱살을 쥐었을 것이다.
그런 기색을 알았음인가?
톰 밀러는 더 뜸 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니 처음부터 말해주겠네. 알다시피, 5년 전에 크로노 검술관에서 예비 수련생들을 모집했었지. 아닌가? 6년 전인가? 하여튼…….”
그렇게 시작된 크로노의 괴물에 대한 이야기는 그야말로 놀라운 것이었다.
중간 평가 최상위권.
최종 평가 차석.
그 밖의 모든 자잘한 테스트에서도 압도적인 성과를 보여줬단다.
현재 대륙 각지에서 엄청난 활약을 하는 다른 황금 세대들과는 격이 다른 실력을 보이면서 말이다.
“다른 이들은 물론이고, 지금 크로노 검술관 정식 수련생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수준이라고 알려진 브랫 로이드, 주디스와도 비교할 수 없는 실력이라고 하더군. 심지어…….”
“심지어?”
“최종 평가에서는 일리아 린제이와도 비등한 모습을 보였다는 모양이야. 종이 한 장 차이였다는 게, 내 제자가 내린 평이었네.”
“…….”
믿을 수가 없었다.
일리아 린제이가 누군가?
현재를 넘어 역사상 최고의 천재를 꼽을 때 항상 언급되는 괴물, ‘이그넷’과도 견줄만한 재능을 가졌다고 알려진 아이다.
모든 검사들의 궁극적인 목표인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확정적으로 올라설 거라 예상되는 인물.
‘일리아 린제이에게 있어서 되느냐 아니냐는 중요한 게 아니지. 언제 되느냐가 중요한 거겠지.’
헌데, 그 정도로 대단한 자와 비등한 실력을 갖춘 이가 헤일 왕국에 있다고?
“그렇게 대단한 녀석이 왜 크로노의 정식 수련생 자리를 포기했답니까? 아니, 포기한 게 아닌 거 아닙니까? 지금 크로노에 있는 거 잘못 알고 계신 거 아닙니까?”
“아니야. 내 제자한테 듣기로는 분명히 자기 영지로 돌아갔다고 했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그러면 자네, 이건 알고 있나?”
“예? 어떤?”
“하긴, 모르겠군. 아무것도 아는 거 없어 보…….”
“제발! 한 번에 다 말씀하십시오, 한 번에! 속 터져 죽겠습니다!”
“아, 알겠네. 표정 좀 풀게! 하여튼, 무슨 말을 하려고 했냐면…… 그 괴물 같은 청년이, 내가 알기로는 헤일 왕국에서도 남쪽 출신이라고…….”
“뭐요? 남쪽?”
“그, 그래. 잠깐! 자네 진정 좀…….”
선배의 말에도 힐 버넷은 도무지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헤일 왕국 남쪽이라니, 자신이 있는 바로 이곳이 헤일 왕국의 남쪽이지 않은가!
심지어 왕국 남부 가문의 자제들 역시 여기 머무르고 있고, 이미 그들 전부를 한 차례 눈에 담은 차였다.
심지어 몇 시간 지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별달리 기억에 남는 녀석이 없다는 것은…….
“……토벌전에 참여하지 않은 건가?”
“뭐야, 여기 없다고?”
힐 버넷의 중얼거림을 들은 톰 밀러가 실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그가 이곳에 들른 것은 친한 후배 기사를 만나려던 것도 있었지만, 제자가 말한 의문의 천재를 보기 위함이기도 했다.
아무리 5년간 잠적해 있던 조용한 녀석이라 해도, 자기 영지 근처에서 마인이 나타났는데 가만히 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
헌데 후배의 표정을 보니 자신의 생각이 틀린 모양이다.
쯧 하고 혀를 찬 그가 술잔을 들이켰다.
힐 버넷만큼은 아니지만, 아쉬운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름은 들으셨습니까?”
“응?”
“이름. 제자가 말했을 거 아닙니까.”
“아아. 그렇지. 생각해보니 그것부터 말할 걸 그랬군. 아이른, 아이른 파레이라라고 들었네.”
“파레이라 가……!”
선배의 말을 들은 힐 버넷이 여러 번 ‘파레이라’라는 단어를 읊조렸다.
자신의 앞에 누가 앉아있는지 완전히 잊은 모습.
그 모습을 본 톰 밀러가 고개를 저었다.
“이거, 더 있으면 안 되겠구만.”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다른 생각을…….”
“아니, 괜찮아. 나는 그만 일어나지. 어차피 시간도 얼마 없었어.”
“다음에 제대로 시간 내서 찾아올 테니, 그 전에 아는 거 생기면 서신이라도 보내 두게.
이 말을 끝으로 톰 밀러는 자리를 떠났다.”
이윽고 찾아온 고요 속에서, 황혼 기사단의 부단장이 깊은 생각에 빠졌다.
‘파레이라 가의 유명 인사는, 키릴 파레이라밖에 없다고 알고 있는데 말이지…….’
헤일 왕국에서 나고 자랐다고 하지만, 그는 헤일 남부의 인물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대부분의 생을 수도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유망한 요술사로 알려진 키릴 파레이라, 그리고 왕립 기사 아카데미 출신인 라이언 가이른.
딱 이 두 명 말고는 아무도 몰랐다.
다른 인물들 따위는 전혀 관심 없었다. 파레이라의 가주조차도 말이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아이른 파레이라…… 조사해봐야겠어.’
생각을 마친 힐 버넷은 곧바로 부하를 불러 이에 대해 지시했다.
그리고 출병 전에 원하는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애초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정보의 내용이 예상과 너무 달랐다.
일리아 린제이에 버금가는 천재 중의 천재, 아이른 파레이라에 대한 평가가 생각보다 훨씬 처참했던 것이다.
‘헤일 왕국 최고의 게으름뱅이.’
‘나태 공자.’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바보.’
평범한 수준조차 못 되는, 그야말로 자신이 가장 혐오하는 종류의 인간.
글을 읽어 내려가던 힐 버넷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뭐 하는 놈이야?”
다른 인물인가 싶었지만, 그건 또 아니었다.
아이른 파레이라는 실제로 크로노 검술관에 입관한 적이 있고, 1년 후 자신의 영지로 돌아왔다.
그리고 5년간 요술에 휘말려 어딘가에 갇혀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동안 활약이 없었던 것도 이해된다.
하지만…….
‘나태 공자라고 왕국 남부 전체에 악명이 자자했던 녀석이…….’
가능한가?
대륙 최고라 평가받는 크로노 검술관.
그 안에서도 최강의 기수라 칭송받는 황금의 27기.
거기서도 두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인재가 되는 것이, 정말 가당키나 한 얘기인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콰작
부단장이 손에 쥐고 있던 문서들을 가차 없이 구겼다.
이를 아무렇게나 내던진 그는 불을 끈 뒤 침대에 누웠다. 일찍 잠에 들기 위해서였다.
당장 내일이 토벌일이니 질 좋은 수면은 필수였다.
“…….”
하지만, 힐 버넷은 쉬이 잠에 들 수 없었다.
계속해서 선배 기사 톰 밀러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격이 다른 천재였다고 하더군!’
‘내 제자도 자존심이 참 강한 녀석인데, 그놈 칭찬을 어찌나 많이 하던지…….’
‘도대체 무슨 연유로 조용히 지내는지 모르겠다만, 모습만 드러낸다면 아마 세상이 놀랄 걸세.’
‘헤일 왕국에게 있어선 축복이나 다름없는 얘기 아닌가?’
“……그만, 그만 생각하자.”
이야기의 진위를 알아볼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아이른 파레이라 역시 토벌대의 일원이니, 내일이 되면 두 눈으로 직접 그의 실력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아는 힐 버넷이었지만, 아이른 파레이라에 대한 호기심은 도무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결국,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겨우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 * *
5월 중순 어느 날.
마침내 마인을 토벌하기 위한 병력이 출진했다.
왕국 수도에서 파견된 기사단과 마법사, 사제 전력 50명.
남부 가문의 가주와 자제들, 휘하 기사와 정예 병사들을 모아 50명.
이는 평소 몬스터를 토벌할 때보다 적은 수였는데, 마인을 상대할 때는 병력의 양보다 질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수만 적을 뿐이지 전력은 작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든든하구려.”
“마인…… 두려운 적이긴 하지만, 이 정도 전력이라면 불상사는 없을 듯합니다.”
앞장서서 나아가는 황혼 기사단과 왕실 마법사들을 본 남부 귀족들이 미소 지었다.
말 그대로였다. 지원이 워낙 훌륭한 나머지 걱정이 요만큼도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신경 쓰이는 건, 자기 가문이 토벌전에서 아무런 활약도 하지 못할까 하는 부분이었다.
‘우리 가문의 기사들이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해!’
‘내 아들이 멋진 활약을 해서 부단장의 눈에 들기라도 하면 참 좋을 텐데.’
하룬 파레이라를 제외한 모든 가주들의 머릿속에 이러한 생각만 들어찼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자제들 역시 힐 버넷, 혹은 황혼 기사단의 영향력 높은 기사들의 눈에 들기를 누구보다 바라고 있었다.
한창 꿈이 클 나이인 귀족 자제들에게 있어서는 지금의 무대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회로까지 느껴졌다.
그래서였다.
긴 행군 끝에 찾아온 점심시간, 마인은커녕 몬스터도 없는 상황에서 그들이 검을 든 이유는 말이다.
“흐읍!”
부우웅!
“하압!”
부우우웅!
라이언 가이른을 필두로 한 남부 가문의 공자들이 열심히 검을 휘둘렀다.
검술 연습이었다.
자신들이 항상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일종의 보여주기식 행동.
황혼 기사단의 기사들이 웃음을 흘렸다.
그들의 속 보이는 행동이 나름 귀엽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저런 게 낫긴 하지.”
“옳은 말이야. 그리고 생각보다 수준이 괜찮은데?”
“특히 저 녀석…… 라이언 가이른 이랬나?”
“맞아. 꽤…… 훌륭하군.”
“흠.”
기사들의 시선이 점차 한 곳, 라이언 가이른 쪽으로 몰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다년간의 토벌 경험을 통해 모두 나쁘지 않은 실력을 지니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가이른 가의 장자에 견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수련을 멈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안 할 때 하는 사람이 돋보이는 것처럼, 모두가 할 때 안 하는 사람도 눈에 띄기 마련.
그들은 기사들에게 게으름뱅이로 낙인찍히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혹시 모른다.
라이언 가이른에 비할 수는 없지만, 그 바로 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면.
그렇다면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한 일념으로 자제들은 열심히, 더 열심히 검을 휘둘렀다.
그 열정은 말단 병사들이 잡일을 끝낼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질 예정이었다.
그때였다.
지금껏 아무 말 없이 앉아있던 토벌대의 대장, 힐 버넷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저벅저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를 본 필 가이른 자작이 꿀꺽 침을 삼켰다.
부단장이 향하는 방향이 자신의 장남, 라이언 가이른이 검을 휘두르는 쪽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직접 지도라도 해주려는 건가?’
명사의 가르침은 언제든 환영이다.
허나 그보다 더 기꺼운 것은, 장차 헤일 왕국의 핵심 권력이 될 인물과 끈이 생긴다는 점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필 가이른이 뜨거운 눈으로 힐 버넷을 바라봤다.
평소와 달리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황혼 기사단의 부단장이 자신의 아들을 지나쳤을 때.
그리고 가만히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있던 아이른 파레이라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을 때.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가이른 자작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모두의 생각이었다.
도대체 왜, 부단장은 라이언 가이른이 아닌 아이른 파레이라를 찾아간 것일까.
모두가 열심히 수련 중인 와중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질책하기 위해서인가?
장내의 관심이 집중되는 가운데, 힐 버넷이 어느새 눈을 뜬 아이른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른 파레이라.”
“예, 부단장님.”
“토벌대장이라고 불러라. 지금은 토벌대를 이끄는 중이니까.”
“예, 토벌대장님.”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자네를 제외한 모든 젊은이가 점심 휴식 시간을 활용해 검술 수련을 하고 있다.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말이지. 그런데 자네는 홀로 여유를 부리고 있군.”
“…….”
“다들 저리 노력하는 와중에 가만히 있는 이유가 뭔지, 말해줄 수 있나?”
주변인들의 표정이 아리송해졌다.
질책의 내용을 담은 말.
허나 평소 부단장의 성격을 생각하면 훨씬 부드러운 말투.
질책인가? 아니면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이른 파레이라의 입에서 의외의 답변이 흘러나왔다.
“검술 수련을 하는 것은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검을 휘둘러봤자 노력이 아니라고?”
“죄송합니다. 오해할 말을 했습니다. 제 말은…… 다른 사람들은 상관없이, 지금의 제게 있어서는 검술 수련이 노력이 될 수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어째서 그렇지?”
힐 버넷이 또다시 질문했다.
큰 기대를 갖고 물은 건 아니었다. 의외의 대답이 나왔기에, 그냥 반사적으로 물어본 것일 뿐이었다.
허나 아이른 파레이라의 대답은 그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깊었다.
“마음이 서지 않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