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헤일 왕국의 잠룡(潛龍) (2)
헤일 왕국 황혼 기사단 부단장, 힐 버넷.
그는 강하다. 그리고 젊다.
그 말은 웬만한 이들은 엄두도 못 낼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몇몇 이들은 힐 버넷이 장차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규모가 작은 헤일 왕국으로서는 그야말로 보물과도 같은 존재.
심지어 가문까지 받쳐줬으니, 왕국 내에서 그의 영향력은 막강 그 자체였다.
백작위조차 없는 남부 6가문 인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번 마인 토벌 작전은, 제가 데리고 온 병력으로만 수행하겠습니다.”
그토록 대단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즐거운 분위기의 한 가운데서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지나치다. 선을 넘었다.
남부 귀족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리 위세가 드높다 한들 저리 방약무인한 태도라니!
절대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힐 버넷의 몸에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후우욱-!
“으음!”
“으……!”
마치 공기가 무거워진 듯한 압박감.
연회장에 모인 모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쉽사리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영광스러운 황혼 기사단의 부단장인 힐 버넷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장내가 조용해진 가운데, 그가 엄숙히 말을 이어나갔다.
“마인은 몬스터와는 격이 다른 존재올시다. 훨씬 끔찍하고, 훨씬 악랄하고, 훨씬 강하지. 이는 어린애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고.”
“헌데 알 거 다 아는 남부 귀족분들은 이 사실을 모르는 것 같군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저와 제 휘하 병력은 가이른 영지로 오는 내내 단단한 신앙심과 국가에 대한 뜨거운 충성심으로 정신무장을 하고 왔으니. 간악한 마인을 멸할 준비가 충분히 되어있습니다. 다만!”
“대륙의 안녕, 국가의 평화보다 개개인의 명예를 우선시하는 그대들과 함께 하는 것은…… 별로 내키지 않는군요.”
“…….”
“할 말 있습니까?”
있었다. 황혼 기사단 부단장을 바라보는 모든 귀족들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하지만 이를 차마 입 밖으로 낼 순 없었다.
순식간에 넘어간 분위기도, 점차 강해지는 기운도, 좌중을 훑어보는 힐 버넷의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얼굴도. 전부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1, 2, 3, 4, 5.
5초의 시간이 흐른 뒤, 부단장이 약한 한숨을 내쉬었다.
귀족들로부터 시선을 거둔 그가 연회장을 빠져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콰앙!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
아니 그를 넘어선, 연회장의 모두가 깜짝 놀랄 정도의 충돌음.
이는 라이언 가이른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가 한쪽 무릎을 굽혀 앉으며 강한 힘을 준 것이다.
자연스레 힐 버넷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가 물었다.
“그대는?”
“가이른 가의 장자, 라이언 가이른이라고 합니다.”
“용건을 말하라.”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짧게 끊어 말한 그가 푹 고개를 숙였다.
뒤통수 위로 베일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마에서 땀이 절로 났다.
하지만 라이언 가이른은 멈추지 않고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다른 분들의 마음은 알 수 없으나, 저의 경우는 분명 부족했습니다. 미숙했습니다. 절대 방심해선 안 될 상대인 마인을 앞에 두고도 해이한 마음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변명치 않겠습니다.”
“…….”
“하지만, 더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실수하지 않겠습니다. 부단장님과 부단장님이 이끄는 황혼 기사단의 기사들을 거울삼아, 한 톨의 방심조차 남아있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마음을 가다듬겠습니다. 기회를 주십시오!”
우우웅-!
피 끓는 듯한 웅변이 끝난 직후였다.
장내에 퍼져 있던 힐 버넷의 기운이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내내 답답함을 느끼던 이들의 얼굴이 비로소 편안해졌다.
허나 라이언 가이른은 아니었다.
부단장의 기운이 모조리 그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한 압박 이상의 물리적인 충격을 받았다.
강건하던 표정이 절로 일그러졌다.
“……!”
허나,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다.
라이언 가이른이 입안을 깨물었다.
터져 나온 피가 입 밖으로 나와 턱을 타고 흘렀지만, 그 덕분에 정신은 또렷해졌다.
그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위를 바라봤다. 뜨거운 시선이었다.
힐 버넷은 이를 피하지 않았다.
잠시, 대치가 이어졌다.
그리고.
후욱
라이언 가이른을 짓누르던 압박이 사라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굳어있던 부단장의 얼굴에도 조금이지만 미소가 피어났다.
비교적 편안해진 분위기.
그 속에서 힐 버넷이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장난이 조금 과했군요.”
“…….”
“여러분들의 참여를 불허한다니, 제가 그런 미친 짓을 할 리가 없죠. 각 가문의 수장들이 직접 마인을 토벌하는 모습을 보여야 영지민들이 마음 놓고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여전히 뼈가 있는 말이었다. 전력상 도움은 안 되지만, 영지 안정을 위해 연합 작전을 펼친다는 뜻.
허나 귀족들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방금 전의 여파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가 사라지기 전에, 힐 버넷은 마지막 말을 남겼다.
“물론 마인을 상대로 결코 방심하면 안 된다는 말은 진심이었습니다. 모두들, 토벌 당일까지 최고로 컨디션을 끌어올리시길 바랍니다.”
뚜벅 뚜벅
빠르게 멀어지는 황혼 기사단의 부단장을, 연회장의 누구도 제지할 수 없었다.
그저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볼 뿐. 모두의 눈에 적지 않은 긴장이 서려 있었다.
처음과 같은 태도를 유지한 건 오직 한 사람.
어느새 대중들로부터 잊힌 인물, 아이른 파레이라였다.
* * *
힐 버넷은 곧바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기분이 묘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라이언 가이른은 명불허전. 괜찮은 인재다!’
소문은 익히 들었다.
왕국 남부에 왕립 기사 아카데미를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한 기재가 있다고.
그리고 지난 몇 년 새 더욱 뛰어난 모습을 보여왔다고.
확실히 나쁘지 않았다.
이대로 잘만 커나간다면 왕국의 미래를 책임질 축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 녀석 하나가 끝이라는 게 문제란 말이지.’
늙은 가주들이야 애초에 관심 없었다.
하지만 그들 휘하의 기사들, 그리고 젊은 자제들은 기대했었다.
소문으로도 접하지 못한 진흙 속의 진주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조금이지만 있었다.
허나 꽝이었다.
라이언 가이른을 제외한 그 누구도 자신의 앞에 당당히 나서지 못했다.
심지어 거들지조차 못했으니, 그야말로 왕국의 미래가 어둡다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문밖의 병사가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지금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기분이 아니었던 탓이다.
허나 손님의 정체가 누군지를 듣는 순간, 그런 생각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잠시 후, 쾌활한 미소와 함께 들어오는 이를 보며 힐 버넷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밀러 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하하, 이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군. 그간 잘 지냈나?”
“저야 당연히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곳에 있다는 건 어찌…….”
“아아! 작정하고 찾아온 건 아니고, 일 때문에 우연히 지나가는 길이었네. 좀 바쁘긴 하지만, 그래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으니…… 자네는 시간 괜찮나?”
“괜찮고 말고요. 여기 앉으시죠!”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거구의 장년인.
보기만 해도 주눅이 들 만큼 험악한 인상이다.
허나 힐 버넷은 이 거베라 출신의 방랑기사를 자국의 선배 기사들보다 더욱 존경했다.
실력, 인성, 배포.
그리고 거베라 왕국과의 연합 토벌전에서 그가 보여줬던 영웅적인 모습.
‘그야말로 기사의 귀감이라 할 수 있는 분이지.’
과거를 떠올린 힐 버넷이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이를 본 톰 밀러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답지 않은 표정은 갖다 치우게.”
“아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제 표정이 왜요?”
“헤일 왕국 최고의 깐깐쟁이가 그런 얼빠진 모습을 보이는데, 욕이 안 나오겠나?”
“깐깐쟁이라니…….”
황당한 웃음을 지으면서도 힐 버넷은 기분 좋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연회장에서 보여준 것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
허나 이쪽이 그의 본모습에 가까웠다.
일에서는 엄격하고 냉정한 그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의 자리에선 이처럼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3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때로는 톰 밀러의 얘기를 들어주고, 때로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그렇게 이런저런 화제들을 건드리던 도중, 톰 밀러의 제자 얘기가 나왔다.
힐 버넷이 말했다.
“아아,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굉장한 기재라지요?”
“기재라고 할 것까진…… 뭐, 쓸 만한 재능을 가졌다는 말 정도는 해도 되겠군.”
“너무 야박하신 것 아닙니까? 밀러 님의 제자는, 그 괴물 같은 크로노의 황금 세대들 사이에서도 단연 두각을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까?”
“에이, 그래 봤자 정식 입관도 못 하고 떨어져 나온 녀석일 뿐인걸…… 물론 뭐, 지금은 합격자 녀석들에게 크게 밀릴 거란 생각은 안 하긴 하지만…… 흠흠.”
톰 밀러가 겸양을 떨었다.
허나 힐 버넷의 말을 완전히 부정하지도 않았다.
깐깐한 기준을 가진 그의 눈에도 사랑스럽게 보일 정도로 제자의 재능은 엄청난 것이었으니까.
‘뭐, 내 제자만 그런 건 아니긴 하지. 크로노 검술관 27기는…… 하나하나 천재가 아닌 녀석이 없으니까.’
크로노 검술관의 27기 수련생.
다른 말로 크로노의 황금 세대라 불리는 젊은이들은, 지난 몇 년간 대륙을 가장 뜨겁게 달궜던 화젯거리였다.
1년의 수련을 마치고 돌아간 인재들 모두가 각국에서 엄청난 성장세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돌풍이 얼마나 거대했냐면, 대대로 소드마스터를 배출해내는 것으로 유명한 서부 5왕국의 명문가들조차 대놓고 견제를 할 정도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뛰어난 활약상을 보이는 크로노의 황금 세대들이 전부 ‘정식 수련생’이 아닌 ‘탈락자’라는 점이었다.
그 때문에 처음에는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크로노 검술관의 안목이 별로여서 진짜배기들을 놓친 것이라는 쪽과 합격자들은 탈락자들보다 훨씬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쪽이 허구한 날 말싸움을 일으켰었다.
하지만, 그러한 논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씻은 듯이 사라져버렸다.
크로노 검술관 최종 평가에서 당당히 수석을 차지한, 그러면서도 정식 입관을 거부했던 아단 왕국의 천재.
일리아 린제이가 말도 안 되는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14살의 나이로 아단 왕국 최강인 월광(月光) 기사단의 명예 기사가 되다니…… 경악이라는 표현도 부족한 일이긴 하지.’
아단의 천재를 떠올린 힐 버넷이 표정을 굳혔다.
자신이 그러한 경지에 올랐을 때가 언제였을까?
서른 살? 아니면 그 이상?
알 수 없었다.
‘이그넷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괴물이 대륙에 나타났어.’
여기까지 생각한 그가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계속해서 곱씹어봤자 박탈감만 느껴질 뿐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톰 밀러의 제자가 그만큼 뛰어난 크로노의 황금 세대 사이에서도 출중한 실력을 보인다는 점이었다.
표정을 바꾼 그가 다시금 칭찬을 이어갔다.
“그렇죠. 당연한 말씀입니다. 일리아 린제이 상식 밖의 존재를 제외하면, 밀러 님의 제자는 27기 정식 수련생과 견줘도 모자라지 않을 겁니다.”
“허허, 부끄럽군. 하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은걸? 조금 더 해보게.”
“열 번이고 백 번이고 할 수 있습니다. 하아, 정말이지 부럽습니다. 우리 헤일 왕국에는 어째서 그런 인재가 없을까…….”
힐 버넷이 푸념했다.
방금 봤던 라이언 가이른이 꽤 쓸 만하다고는 하지만, 톰 밀러의 제자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심지어 그를 뒤따를만한 인재조차 없으니 암울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허나 이러한 생각도 잠시, 그는 살짝 실수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라를 생각하는 충신으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걱정이지만, 오랜만에 만난 존경하는 선배와의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꺼낼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밝은 얘기를 해야 할 때.
빠르게 실수를 인지한 그가 화제를 돌리려고 할 때였다.
톰 밀러가 의아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엥? 그게 무슨 소리야? 인재가 없다니?”
“예?”
“내 제자한테 듣기로는, 그 일리아 린제이에 버금가는 엄청난 괴물이 헤일 왕국 출신이라고 하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