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헤일 왕국의 잠룡(潛龍) (1)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악마를 몬스터만큼이나 쉽게 마주할 수 있었던 시절이 예전에는 있었다.
인간계와 마계의 경계가 흐릿했던 400년 전이 그러했고, 강력한 일곱 대악마들이 날뛰었던 150년 전이 그러했다.
그에 비하면, 두 세계를 이어주는 통로가 막힌 현재는 훨씬 평화롭고 안전한 시대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魔)의 위협이 완전히 사라졌냐고 하면, 그건 아니다.
마인(魔人).
그 타락한 존재들은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강대한 힘을 얻고, 그 부정적인 영향력을 온 대륙에 펼치기 위해 모든 힘을 쏟는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마인은 평범한 몬스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
심각한 표정의 키릴 파레이라.
그 말을 들은 아이른 파레이라 역시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다.
허나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요술사’와 비견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마인’이다.
믿을 수 없는 기적을 발휘할 정도로 강한 마음이 발휘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차이라고 한다면, 마인들이 품고 있는 마음은 몹시 부정적이라는 점.
분노, 불안, 절망, 혼란, 질시, 자괴감, 열등감, 박탈감, 배신감…….
저 심층에 웅크리고 있는 악마들의 귀에까지 전달될 정도로 진한 염원이라니, 그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잔혹할지는 상상하기도 힘들 것이다.
동생이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
“자신 있으니까. 무사히 돌아오도록 노력할게. 아니, 꼭 그렇게 할게.”
“……예전보다 말솜씨가 늘었네.”
뭐, 보기 싫지는 않지만.
속으로 중얼거린 키릴이 입을 삐죽였다.
남의 도움 없이 홀로 결계를 부수고 나왔다기에 꽤 기대하긴 했지만, 생각보다도 훨씬 듬직해졌다. 자라난 키보다 훨씬 더.
‘나도 꽤 컸는데 말이지.’
여전히 자기 시선보다 높은 곳에 있는 오빠의 얼굴을 보며, 키릴이 억지로 무게를 잡았다.
듬직한 건 듬직한 거고, 걱정되는 건 또 다른 이야기다.
눈에 힘을 준 그녀가 한 번 더 경고했다.
“강한 것도 강한 거지만, 마인들이 위험한 건 어떤 능력을 발휘할지 예측이 안 된다는 점이야. 특히 정신과 관련된 부분에서.”
“으음. 그건 확실히 위험하네.”
“그래! 엄청 위험해. 마침 내가 알고 있는 얘기들이 있으니까, 다 알려줄게.”
“응.”
“진짜 중요한 부분은 적어도 주고.”
“고마워.”
“토벌 도중에도 생각나는 거 있으면 바로바로 말해주고.”
“어?”
아이른이 당황했다.
둘이 대련을 한 이유가 무엇인가. 키릴의 반대에 맞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자신이 토벌전에 참여하기 위함이다.
헌데 동생도 토벌전에 참가한다니?
“오빠가 간다고 해서 내가 가지 않을 이유는 없잖아?”
“하지만…….”
“그런 말 한 적 있어?”
“…….”
맞는 말이긴 했다.
아이른이 침묵을 지켰다. 한쪽 입꼬리를 올린 키릴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오빠가 말했잖아. 자신 있다고. 그러니까 걱정할 것도 없지.”
이번에도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함께 힘내자’라고 하며 내미는 동생의 손을, 아이른은 묵묵히 잡아줄 수밖에 없었다.
* * *
결론부터 말하면, 키릴 파레이라의 토벌전 참가는 수포가 되었다.
부모님의 반대 때문은 아니었다.
까칠한 성격에 비해 어머니의 말을 잘 듣긴 하지만, 이번에는 보통 단단히 마음먹은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고집쟁이 요술사의 고삐를 잡은 건 또 다른 요술사였다.
키릴 파레이라의 스승, 스키나 키튼.
요술사의 나라인 세자르 공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그녀가 직접 파레이라 영지를 찾아온 것이다.
“얘가! 당장 2주일 뒤에 중요한 행사가 있는데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아니, 하나밖에 없는 오빠가 결계에서 나왔는데 당연히…….”
“아, 그쪽이 아이른 파레이라? 반가워요. 얘기 많이 들었어요. 나는 세자르에서 가장 아름다운 요술사, 스키나 키튼이라고 해요!”
스키나 키튼이 쾌활한 모습으로 손을 내밀었다. 아이른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듣기로는 올해로 50살이 넘었다고 들었는데, 외관만 보면 영락없는 20대 아가씨였다.
그리고 실제로 미녀였다.
‘요술로 외모를 젊게 한 건가?’
“맞아요.”
“네?”
“지금 한 생각, 맞다 고요.”
“제, 제 생각도 읽을 수 있나요? 그것도 요술?”
“아니요. 하지만 당신이 무슨 생각하는지는 요술이 아니어도 알 수 있죠. 아, 너무 고우시다,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 진짜 키릴의 스승님인가? 이렇게 생각하고 계셨잖아요.”
“…….”
“이 사람 말 귀담아듣지 마. 요술 빼고 모조리 엉망인 사람이야.”
키릴이 인상 쓰며 말했다.
스승에게 하는 말이라고 보기엔 상당히 예의 없는 발언.
허나 스키나 키튼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키릴을 꼭 껴안으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당연하지! 요술만큼은 내가 최고인걸? 이 부끄럼쟁이, 스승님 칭찬을 그렇게 돌려서 하다니!”
“아니,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어요!”
“참고로 이 아이, 5년 동안 아이른 군 얘기만 엄청나게 했어요. 어떤 얘기 했냐면…….”
“아악! 으아아아악!”
“내 입을 닫고 싶으면, 얌전히 나와 함께 세자르로 돌아가실까?”
“…….”
분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못 하는 키릴을 보며, 아이른이 감탄을 터뜨렸다.
고집쟁이에 괴팍하기 그지없는 동생을 저렇게 잘 다루다니.
과연 세자르에서 손꼽히는 요술사다웠다.
물론 모두에게 저런 태도를 보이는 건 아니었다.
키릴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뜬 후, 둘만 남은 자리에서의 스키나 키튼은 무척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미안해요. 초면에 조금 그랬죠? 키릴 스승 노릇 하려면 키릴보다 더 기가 세야 하거든요. 이해해주세요.”
“아, 아니요. 무슨 말인지 알고 있습니다.”
“키릴과 정말 다르네요. 여러모로.”
전과는 달리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이어지는 대화.
아이른은 이를 통해 키릴의 지난 5년을 알아갈 수 있었다. 동생의 즐거움, 동생의 슬픔, 그 밖의 여러 가지 것들.
스키나 키튼이 고마웠다.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부분을 곧바로 알아채고, 따스한 말투로 말해준다.
정말로 마음을 읽는 요술사가 아닐까 싶을 정도.
‘게다가…… 이분, 키릴을 정말로 아껴주고 있어.’
동생이 정말로 좋은 스승 밑에 들어갔구나.
절로 드는 생각에 아이른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그리고 이거.”
심지어 선물도 있었다.
목걸이였다.
마기와 일정 수준의 마법 함정 따위의 위험한 것들을 미리 경고해주고, 웬만한 독은 해독까지 시켜주는 상급 아티팩트(Artifact).
깜짝 놀란 아이른이 손사래 쳤다. 이것이 얼마나 귀한 건지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을 듣고는 손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함께 만든 거예요. 5년 동안 계속. 키릴은 오빠가 결계를 나오기만을 바라면서 매일 이 목걸이에 자기 힘을 쏟아 넣었어요.”
“……감사히 쓰겠습니다.”
“얘기는 여기까지만 할게요. 파레이라 남작님께도 키릴을 데려간다고 말씀을 드려야 하니까요. 세자르의 일정에 맞추려면, 사실 시간이 상당히 촉박하거든요.”
키릴이 사라진 걸 알았을 때 어찌나 놀랐는지, 호호호.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에게 아이른은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스키나 키튼이 하늘로 떠올랐다.
그리고 말했다.
“멋진 오빠라 정말 다행이에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자리를 떠났다.
잠시 후, 스승을 대신해 제자가 아이른 파레이라의 곁으로 돌아왔다.
“무슨 말 했어?”
“그냥. 너 잘 지내고 있다는 얘기. 그런데 여기 있어도 괜찮아? 스승님 따라가야 하는 거 아니야?”
“부모님께 인사 마치면 알아서 다시 오겠지.”
키릴이 틱틱대며 말했다.
물론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아이른은 행복한 표정을 지었고, 한 마디 쏘아붙이려던 동생은 칫 하고 말을 삼켰다.
그렇게 찾아온 정적 속에서, 남매는 평화로이 산책을 즐겼다.
고요하지만 불편하지 않은 시간.
그러한 분위기를 먼저 깬 것은 아이른 파레이라였다.
“혹시 알고 있어?”
“응?”
“루루가 어디 있는지.”
“……몰라.”
“정말?”
“진짜야. 설마 내가 거짓말하겠어? 몇 달 정도는 영지에 있다가, 어느 순간 사라졌어. 그 뒤로는 본 적 없고. 그게 다야.”
“…….”
또다시 찾아온 정적. 전과는 달랐다. 우애 좋은 남매 사이에 불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아이른의 눈이 키릴의 표정을 좇았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마음에 품은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루루를 안 좋게 생각하는 거, 알고 있어. 하지만…… 알잖아. 루루 잘못이 아니라는 거.”
“…….”
“애초에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 잘못된 게 없으니까. 나는 내 의지로 앞으로 나아가길 원했고, 세상은 내 소원을 들어주고 터를 마련해줬어. 그뿐이야.”
“……그래서, 어쩌라고.”
“다음에 만나면, 루루를 미워하지 않아 줄 수 있을까?”
아이른이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조용히 동생 쪽을 응시했다.
평소와 비슷한,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표정.
하지만 키릴은 알고 있었다.
오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
그 마음의 크기가 얼마나 커다란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요술사였으니까.
“……노력은, 해 볼게.”
그렇기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날씨 좋은 4월의 오후였다.
* * *
한 달 후.
파레이라 남작을 포함한 헤일 왕국 남부 6가문의 병력이 가이른 영지로 모였다.
수는 적지만 대부분이 기사로 이루어진 정예 병력으로, 이번 마인 토벌전이 평소의 토벌전과 얼마나 다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허나 모여든 귀족들의 얼굴에는 그다지 불안감이 엿보이지 않았다.
왕국의 수도에서 파견된 황혼 기사단과 마법사, 사제 전력.
그리고 그들을 통솔할 젊고 유능한 실력자, 힐 버넷 경이 와주었기 때문이다.
‘마인이 아무리 위험하다 해도, 힐 버넷 경이 이끄는 황혼 기사단의 기사들을 상대로는 뼈도 못 추리지!’
‘무조건 참여해야 한다. 잃을 건 없고 얻을 명예는 많은 토벌전이야!’
덕분에 휘하 병력만 보내려던 가주들, 그리고 장남들이 모조리 토벌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출병 전 긴장과 피로를 풀기 위해서 연회까지 열렸으니, 가이른 영지에 모인 그 누구도 토벌의 실패는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그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5년 만에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나태 공자, 아이른 파레이라였다.
“이런 자리에서 볼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요술 결계에 갇혀 있었다지?”
“그거 진짜긴 해? 거짓말 아니었어?”
“하긴, 나는 예전에 자살했다고 생각했어. 사실을 밝히기 힘드니까 대충 변명을 지어낸 거라고…….”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아이른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가 실제로 요술세계에 들어갔다 온 건지, 그냥 병에 걸렸던 건지, 그도 아니면 사람들을 피하고 싶어 꾀병을 부렸던 건지는 누구도 몰랐다.
허나 이거 하나는 알았다.
평생 가문에만 처박혀 있던 녀석이 이제 와서 한 숟가락 걸치려고 해봤자, 알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을 거라는 사실 말이다.
‘멍청한 녀석.’
‘몬스터 토벌조차 한 번도 못 경험해본 놈이, 오줌이나 지리지 않으면 다행이겠어.’
허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레스터, 러셀, 가이른 가의 자제들.
특히 가이른 가문의 장자, 라이언 가이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와인을 마시고 있던 그가 하인에게 잔을 넘겼다.
그리고 저벅저벅 아이른 파레이라를 향해 다가갔다.
‘뭐야?’
‘무슨 일이야?’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어느새 마주한 둘을 향해 꽂혔다.
한쪽은 남부 6가문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
다른 한쪽은 가장 뒤떨어지는 나태 공자.
흥미롭기 그지없는 조합에 모두의 얼굴에 기대감이 서릴 때였다.
“황혼 기사단의 부단장, 힐 버넷 경께서 입장하십니다.”
웃고 떠들던 이도, 말없이 음식을 즐기고 있던 이도, 라이언 가이른과 아이른 파레이라를 쳐다보고 있던 이도 모두 힐 버넷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들에게 영광스러운 명예를 안겨 줄 위인에게 관심을 주지 않을 수 있나.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박수갈채를 보냈고, 힐 버넷은 잠깐의 침묵으로 이를 즐겼다.
물론 언제까지고 그러고 있지는 않았다.
손을 들어 박수를 멈춘 그가 엄숙하게 말했다.
“초 쳐서 미안하지만, 여러분들은 토벌전에 참여하지 않아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