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5년 만의 재회 (2)
“키릴?”
“어떻게 지금?”
갑작스러운 키릴 파레이라의 난입에 파레이라 부부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세자르 공국은 대륙의 남동쪽에 위치한 나라로, 파레이라 영지와의 거리는 꽤 멀다.
크로노 검술관까지의 거리보다 세 배는 된다.
그러니 아이른 파레이라의 소식을 듣고 찾아온 것은 아닐 것이다.
애초에 그들조차 아들을 마주한 지 한 시간도 안 되지 않았는가.
허나 이어지는 키릴의 말은 두 내외를 맥 빠지게 만들었다.
“그냥 왔어요.”
“그냥?”
“응. 왠지 오빠가 나올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 그래서 미리 출발했어요. 다행이네, 진짜로 나온 게 맞았어. 그 빌어먹을 결계에서.”
황당하기 그지없는 대답. 너무 어이가 없던 나머지, 아멜은 딸이 상스러운 표현을 썼음에도 지적조차 하지 못했다.
하룬 역시 입만 뻐끔거린 채, 할 말을 잃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아이른은 당황하지 않았다.
예전에 루루에게서 들은 적 있다.
뛰어난 요술사들 중 몇몇은 자신이 관심 가진 사안에 대해서 예지에 가까운 감각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고.
아무래도 동생의 경우도 비슷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말은, 키릴이 루루의 기준으로도 뛰어난 요술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루루의 말을 참고할 필요도 없긴 해.’
아이른이 실로 오랜만에 만난 동생을 살폈다.
조금 남아있던 볼살은 싹 빠져 갸름한 얼굴이 되었고, 신장은 몰라볼 정도로 커졌다.
살짝 날카로운 눈매가 비슷하긴 했지만, 그 역시 어릴 때와는 느낌이 달라졌다. 조금 더 차가워졌다고 할까.
허나 그런 외모의 변화보다도 더욱 눈길을 끄는 건, 내면의 변화였다.
스으으으-
요술을 각성했기 때문일까?
예전엔 느낄 수 없었던 신비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아마 이것이 키릴이 가진 요술사로서의 근원일 것이다.
거기에 담긴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아이른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동생은 성장했다. 자신이 성장했듯이.
그 사실에 그가 빙긋 미소 지었다.
“뭐야? 웃는다고?”
그 미소를 본 키릴이 오빠를 노려봤다.
예리하기 그지없는 눈빛. 아이른이 찔끔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허나 늦었다. 이미 심기가 상한 그녀가 한층 더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뭐가 그렇게 웃겨?”
“아니,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워서…….”
“그런 웃음이 아니었어.”
“어…….”
“뭔데. 무슨 의민데?”
“키릴. 오랜만에 만난 오빠한테 또 짜증 내면 어떻게 하니?”
“…….”
뒤늦게 평정을 찾은 아멜 파레이라가 나무라는 말을 했고, 이를 들은 키릴은 눈에 보이게 얌전해졌다.
이런 점은 예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허나 완전히 기가 죽은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힘이 빠지지 않은 목소리로, 키릴이 재차 말했다.
“하여튼, 원래 하던 얘기나 마저 하자.”
“어떤?”
“토벌전. 오빠는 나갈 필요 없어. 내가 나갈 거야. 그러려고 온 거고.”
“키릴? 그건 또 무슨…….”
“억지 부리는 게 아니에요, 아빠.”
꾸지람하려던 하룬 파레이라가 입을 다물었다.
키릴의 눈빛 때문이었다.
어릴 때의 쉽게 흥분하던 모습과는 다른 침착한 시선.
이를 유지한 채, 그녀가 말했다.
“그렇잖아요?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 우리 둘 중 하나가 꼭 참여해야 하는 건 맞지만, 그게 꼭 오빠일 필요는 없어요. 오히려 말려야죠. 그 끔찍한 결계에 5년이나 갇혀 있었는데, 곧바로 위험한 곳에 보내서야 되겠어요?”
“너는…….”
“위험한 건 저도 똑같지 않으냐고요? 아니요. 저는 안 위험해요. 아시잖아요? 예전의 내가 아니에요. 저, 세자르에서도 인정받는 요술사라고요.”
“…….”
“실력으로 보나, 상황으로 보나 내가 가는 게 맞는다고 생각하는데, 이래도 억지라고 생각하세요?”
폭풍처럼 휘몰아친 키릴 파레이라의 반론.
파레이라 내외는 할 말이 궁해질 수밖에 없었다.
맞는 말이었다. 예전처럼 고집이 셌지만, 예전과 달리 막무가내가 아니라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말을 하는 키릴의 뜻을 강제로 꺾을 수는 없었다.
아이른 역시 달라진 동생의 모습을 보며 감탄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동의하는 건 아니었다.
그가 말했다.
“키릴.”
“왜?”
“보여줄까?”
“…….”
“오빠가 결계 안에서, 5년 동안 뭘 연마했는지 말이야.”
후욱
아이른이 말을 마치기도 전이었다. 키릴의 기운이 눈에 띄게 강해졌다.
요술에 문외한인 부모님들조차 달라진 분위기를 어렴풋이 느낄 정도였다.
“자신 있어?”
“응.”
“정말로?”
“정말로.”
“그럼, 대련이라도 할까?”
“키릴!”
아멜이 조곤조곤한 말투를 버리고 딸을 혼냈다. 허나 이번에는 키릴도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그녀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자신에게 닿는 것을 느끼며, 아이른은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엷은 미소를 지었다.
동생의 감정은 분노와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분노는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고마운 감정이다. 그의 눈매가 키릴과는 달리 부드러워졌다.
허나 대답은 부드럽지 않았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단단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
훌쩍 커버린 두 자녀의 신경전을 바라보며, 파레이라 내외가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 * *
평탄하게 흘러가던 파레이라 영지의 하루가 크게 요동쳤다.
예정된 수순이긴 했다. 무려 5년간이나 베일에 휩싸여 있던 파레이라 가의 장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성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이들에게도, 최근에 고용된 이들에게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1년 넘게 영지를 방문하지 않았던 키릴 파레이라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더니, 아이른 파레이라와 함께 연무장을 찾았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대련할 모양이었다.
일련의 흐름을 파악한 기사, 제이콥 윌셔가 조용히 소곤거렸다.
“이런 일이 다 있네요.”
“그러게. 나는 평생 도련님 얼굴 못 볼 줄 알았는데.”
“저도 그렇습니다. 요술은 핑계고 이미…… 세상을 떠나신 게 아닌지 했는데. 사실이었나 보네요.”
제이콥의 말을 들은 기사, 타일러 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파레이라 가의 봉신이 된 지 3년이 채 되지 않았기에, 그보다 훨씬 전에 요술을 각성한 아이른 파레이라를 유령쯤으로 취급했었다.
허나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고, 그것을 넘어 요술의 나라인 세자르에서도 명성을 떨치고 있다는 키릴 파레이라와 대련을 한다고 하니 관심이 안 갈 수가 없었다.
제이콥 윌셔가 물었다.
“누가 이길까요?”
“그게 중요한가?”
“중요하죠. 싸움 구경이 그런 재미 아닙니까? 역시 키릴 아가씨일까요?”
“뭐…… 아무래도 그렇겠지?”
타일러 죠니가 남매 쪽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키릴의 명성은 저 멀리 떨어진 세자르 공국에서도 심심치 않게 들려오지만, 아이른에 대한 것은 거의 듣지 못했다.
그나마 들을 수 있는 예전 얘기도 ‘나태 공자’라는 오명뿐. 공자의 승리를 예측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승패가 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긴 했다.
이긴다고 떨어지는 것도 없는 대련을 뭐 하러 열심히 하겠나?
아마 파레이라 가의 장자가 건재하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쨌든 좋은 구경 하는군. 훈련하고 있길 잘했어.”
“그렇죠. 소문 듣고 몰려드는 건 눈치 보여도, 열심히 자율 훈련하던 차에 우연히 본 건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니까요. 그렇지?”
두 기사의 말을 들은 병사 몇이 동의의 웃음을 흘렸다.
쫓아낸다면야 어쩔 수 없지만, 그러지 않는 이상 제 발로 자리를 뜰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귀하디귀한 요술사가 힘을 쓰는 모습은 보기 힘든 광경이었으니까.
물론 키릴 파레이라는 그들의 시선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가 말했다.
“준비해.”
“준비됐어.”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아직 검도 안 들었잖아.”
“이제…… 준비됐어.”
동생의 말에 대답하며, 아이른 파레이라가 허공을 쥐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커다란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틀림없는 요술.
파레이라 부부를 포함한 구경꾼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키릴 또한 눈가에 힘을 줘 놀람을 표현했다.
아이른은 살짝 민망해졌다.
‘이것 말고는 딱히 없는데.’
요술세계가 제 본분을 다하고 사라진 이후, 그의 요술적 힘은 대부분 사라졌다.
꿈속 사내가 쓰던 검을 마음대로 꺼내 쓸 수 있다는 점이 그의 유일한 능력이었다.
물론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낡고 투박하지만, 자신에게 더없이 어울리는 검.
그것을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고개를 끄덕인 아이른이 동생에게 미소를 보였다.
“……칫.”
기분이 좋은 아이른과 달리, 키릴 파레이라는 지금 상황이 몹시 불편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빠의 저 여유를 가장한 표정이.
‘왜 자꾸 무리하는 거야.’
그녀가 과거, 아이른이 처음 검을 들었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그랬다. 난생처음 검을 쥐어 본 주제에 종일 무리하고, 또 무리하고.
손이 까져 붕대를 감고서도 계속해서 무리하고.
물론 노력하는 모습이 싫은 건 아니었다.
항상 바랐으니까.
어린 시절의 아픔에 갇혀 늘 우울한 모습만 보이던 오빠가 기운을 차리고 웃음을 되찾기를 말이다.
크로노 검술관에서 돌아와 멋쩍은 웃음과 함께 선물을 줬을 때, 그때는 뛸 듯이 기뻤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무리하다가, 억지 부리다가 탈이 나는 건…… 더는 보고 싶지 않아.’
무리해서 토벌전에 참여하려다 타 가문의 귀족들에게 모욕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
무리해서 요술을 익히려다가 결계에 갇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들었다.
그리고 5년간 후회했다.
늦지 않게 막았어야 했다고.
‘그러니까…….’
스르륵-
키릴 파레이라가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검을 꺼냈다.
아주 조그마한 모형 검.
허나 그녀가 손가락으로 두드리자 이내 어마어마한 크기로 자라났다.
아이른의 검보다도 훨씬 거대했다.
그것을 하늘에 띄운 채, 앞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할게. 오빠는 무리할 필요 없어.’
우우우웅!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요술을 모르는 일반인조차 알 수 있을 정도로 강한 기운이 모이며 검이 하늘로 떠올랐다.
원래는 결계를 부수기 위해 만들었던.
허나 이제는 다른 마음을 품은 거검(巨劍)이, 아이른 파레이라를 향해 겨눠졌다.
모두의 시선도 검 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했다.
그리고 그때.
지금껏 잠자코 있던 금발의 청년이 검을 내리그었다.
스윽
특별한 행위는 아니었다.
수직 베기, 수평 베기. 그리고 이어지는 간단한 찌르기 한 번.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검술 동작에 불과했다.
실제로 대련을 구경하던 병사 대부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더 대단한 무언가를 보여 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허나 아닌 사람도 있었다.
제이콥 윌셔와 타일러 죠니, 두 기사가 그러했다.
‘뭐지?’
‘지금, 뭔가…….’
명료한 느낌은 아니다. 잠결에 머릿결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애매한 감각이었을 뿐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정말로 뭔가가 일어난 것일까.
둘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이른 쪽을, 그리고 키릴 쪽을 쳐다봤다.
그리고 비로소 확신했다.
“…….”
젊은 요술사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스르륵……
다시 본래 크기로 돌아와 주머니로 돌아가는 검.
그보다 한발 늦게, 앞을 향해 걸어가는 아이른 파레이라.
그가 키릴 파레이라를 껴안았다. 강하게, 그러나 아프지는 않게.
그리고 말했다.
“무리하는 거 아니야.”
“…….”
“혹시나 내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면, 그러지 않아도 돼. 정말로…… 정말로 자신이 있어서 그러는 거니까, 이번에는. 그리고…….”
고생했어, 지금까지.
아이른의 말이 끝낼 때까지, 키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안도. 그리고 전율.
두 가지 커다란 감정 속에서, 동생은 처음으로 오빠에게 위로를 받았다.
* * *
대련이 끝났다. 꽤 긴박감 넘치게 흘러갔으나. 끝은 밍밍한 느낌으로.
연무장에서 구경하던 병사들은 찝찝한 기분으로 훈련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키릴 파레이라는 아니었다.
요술사이기에 알 수 있었다.
남매 사이기에 더 또렷이 볼 수 있었다.
오빠가 보인 의지가 얼마나 강건한 것인지.
그 의지에서 피어날 검이 얼마나 강력할 것인지.
“그래도 조심해. 이번 토벌전은 훨씬 위험하니까.”
“어?”
하지만 염려를 완전히 놓을 수는 없었다.
내달에 있을 토벌전은 매년 치르던 것과 차원이 달랐으니까.
“마인(魔人)이 나타났어.”
“마인?”
“응. 한 달 전, 가이른 영지 남쪽에서…… 악마의 흔적이 발견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