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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54화 (54/388)

◈ 20. 검을 들다 (3)

깊고 진한 깨달음의 폭풍이 지나간 뒤.

아이른 파레이라는 천천히, 그리고 꼼꼼히 자신의 몸을 점검했다.

팔다리를 움직이고, 뜀 걸음을 하고, 가볍게 검을 휘두르고. 눈과 귀에 신경을 집중해 감각의 상승치를 계산해보고.

그 결과 알게 되었다.

지금의 육신은 예전과는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성장했다는 것을 말이다.

‘크로노 검술관 때 생각나네.’

그때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중간 평가 직전에 찾아온 기적과도 같은 경험은 낙제생에 가깝던 자신의 몸뚱이를 최상위권의 위치로까지 올려주었다.

‘정확히 어느 정도일까?’

바닥에 검을 꽂은 아이른이 팔짱을 낀 채 생각했다.

마스터의 경지?

그건 절대 아니다.

아무리 엄청난 성장을 거뒀다고 한들, 대륙을 통틀어 100명이 있을까 말까 한 수준에 올랐을 리는 없다.

그건 오만이자 과신이다.

허나 자신감을 품을 정도는 되었다.

적어도 누구 앞에서 어깨가 움츠러들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아니, 그것을 넘어서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자랑하고 싶었다.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무척 어색했지만…… 어쩌겠는가. 사실인걸.

“아.”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짝, 하고 손뼉을 친 그가 허공을 응시했다. 강렬한 의지가 요술로 구현된 세계의 일부분을 진하게 덧칠했고, 이내 변화가 일어났다.

스르륵-

슥-

스륵-

캔버스에 물감이 칠해지듯 모습을 드러낸 일리아 린제이, 주디스, 그리고 브랫 로이드.

그들을 바라보던 아이른 파레이라가 담담히 말했다.

“한 번 붙어보자.”

“나랑? 아니면 얘? 그것도 아니면…….”

“하나씩 말고. 셋이 한꺼번에.”

“……하!”

주디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일리아 쪽을 돌아봤다.

“들었어?”

“응. 달라졌네.”

“그러게. 예전엔 참 겸손했는데, 싸가지가 많이 없어졌네.”

“누가 누구에게 싸가지 없단 소리를 하는 거지?”

“넌 좀 닥쳐.”

브랫에게 인상을 구긴 주디스가 다시금 전방을 주시했다.

기분 나쁜 모습은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에 든다는 얼굴.

픽 하고 웃은 그녀가 검을 들었고, 그에 맞춰 양옆의 둘도 자세를 갖췄다.

“그래도, 그 싸가지 없는 모습이 보기 싫지는 않네.”

“좋게 말해줘서 고마워.”

“됐고, 빨리 검 들어. 기다리기 지겹다.”

“응. 사실 나도 엄청 궁금한 참이야.”

그 말대로였다.

가볍게 몸을 움직여봤다고는 하지만, 역시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맞상대가 필요했다.

후우, 심호흡한 아이른 파레이라가 검을 들며 생각했다.

‘쉽지 않겠지?’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아이들은 크로노 검술관 시절의 수준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살벌한 중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물론 자신 때문이었다. 더욱 강한 상대와 싸우고 싶다는 의지가 그들의 기운을 대폭 강화한 것이다.

하지만.

‘질 것 같지는 않아.’

화악!

아이른 파레이라의 눈빛이 바뀌었다.

밋밋하던 기운 역시 바늘 하나 들어가기 힘든 단단한 느낌으로 변했다.

마치 쇠를 부어 만든 거인이 서 있는 느낌.

주디스는 흥분 가득한 얼굴로 이를 바라봤고, 브랫은 신중한 자세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일리아도 서늘한 눈빛으로 상대를 주시했다.

그런 그들을 향해.

휙-

아이른이 먼저 움직였다.

콰아앙!

검과 검이 맞부딪쳤다. 주디스가 뒷걸음질 치며 힘겹게 버텨내는 사이 나머지 둘이 좌우를 점했다.

완벽한 합으로 들어오는 중단 베기가 소름 끼치는 기운을 뿜어냈다.

사이 좋은 이들의 대련이라고는 볼 수 없는 흉험한 분위기. 허나 세 아이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이른도 마찬가지였다.

표정은 철 가면을 쓴 듯 냉정했지만, 그의 마음에도 조금이나마 희열이 섞여 있었다.

잊은 지 오래지만, 이는 그가 중간 평가 때 잠시 느꼈던 열기와 다름없는 감정이었다.

분노, 후회, 자괴감 따위의 것보다 훨씬 더 밝고 건강한 불꽃.

아이른은 그 온기를 어렴풋이 느끼며 무아지경으로 검을 휘둘렀다.

잠시 후.

결판이 났다.

“후우…… 힘들다.”

간발의 차로 세 강적을 격퇴한 그가, 홀린 듯이 침대를 향해 기어갔다. 그리고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기이잉……!

그 사이.

지금껏 볼 수 없었던 거대한 철문이, 요술세계의 중심에서 천천히 솟아나기 시작했다.

* * *

“이게 출구인가?”

잠에서 깨어난 아이른 파레이라가 마당으로 나갔을 땐, 이미 철문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상태였다.

이를 본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젠 나갈 때가 되었다.

완벽하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끄덕일 수 없지만, 자신의 검을 들었냐는 대답에는 ‘그렇다’라고 할만한 성과를 얻었다.

“그럼, 어떻게 이 문을 여느냐가 문젠데…….”

손잡이도, 열쇠 구멍도, 약간의 틈도 없이 꽉 닫혀있는 문.

그리고 그 앞에 꽂혀 있는 투박한 모양의 대검(大劍).

자신이 쓰던 수련용 검이 아니었다. 허나 익숙했다.

그것의 정체를 깨달은 청년이 감상에 잠긴 얼굴로 중얼거렸다.

“꿈속 사내의 검…….”

우스웠다.

그가 이 괴상한 세계로 들어온 것은 자신의 검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즉, 더는 남의 길을 뒤쫓지 않겠다는 다짐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이 세계 진입 전까지 매일 꾸던 사내의 꿈을 꾸지 않게 된 것도 그러한 각오 덕분이라 볼 수 있었다.

헌데, 그런 자신의 앞에 ‘사내의 검’이 등장하다니.

심지어 그냥 모습을 드러낸 수준이 아니라, 그것을 ‘열쇠’로 사용해야만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듯 대놓고 문 앞을 가로막고 있다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라고 생각했겠지. 예전의 나라면.’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예전의 자신이라면 그랬을 터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 회피할 이유가 없었다.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간 그가 ‘사내의 검’의 손잡이를 잡고.

우드드득!

힘차게 뽑아냈다. 그리고 입맛대로 휙휙 휘둘러봤다.

후웅

후우웅!

“키가 커서 그런가, 이제 손에 딱 맞네.”

크로노 검술관에서 배운 동작들을 펼치며, 아이른은 검술관주가 해줬던 조언을 떠올렸다.

자신의 신념을 세우고, 의지를 세우고, 자신의 길을 깨달아라. 그리하여 자신의 검을 세워라.

예전엔 그 말뜻을 오해했었다.

자신의 검을 세우기 위해서는 그 어떠한 타인의 것도 섞이면 안 된다고, 오로지 자신의 것만으로 엮어내야 진정한 자신의 검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가족들의 사랑을 통해 아픔을 극복하고.

친구들의 믿음을 통해 의심을 떨쳐냈듯.

사내의 검 역시, 편하게 받아들이면 그만이었다.

‘그에 휩쓸리지 않고, 계속해서 내 의지를 세울 수만 있다면…….’

사내의 검을 쥐고, 휘두르는 것이 사내가 아닌 ‘자신’이라면.

그것은 나의 검이다.

속으로 읊조린 아이른 파레이라가 하늘 높이 대검을 들어 올렸다.

우우웅-!

크로노 검술관 최종 평가 때의 소년이 보여줬던 것과 똑같은 자세.

허나 그때의 검이 사내의 의지로 펼쳐진 사내의 검술이었다면.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아이른 파레이라의 의지로 펼쳐진 사내의 검술.

즉, 아이른 파레이라의 검.

그것이 거력(巨力)을 품고 아래로 떨어졌다.

콰과과과과과과과광!

천둥 번개가 수십 번 몰아친 것 같은 거대한 소음.

그와 함께 결코 열릴 것 같지 않던 철문이 열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박살이 났다.

그리고, 이곳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바람이 천천히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바깥 공기.

아니, 바깥이 아니다. 자신이 살던 곳의 공기다.

그것을 실로 오랜만에 느낀 청년은 홀린 듯이 앞을 향해 걸어갔다.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인고의 시간을 견뎌 훌륭한 성과를 거둔 자신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잠깐.”

허나 막 철문을 넘어가기 직전.

아이른이 멈춰 섰다.

그것을 넘어 아예 신형을 뒤로 돌렸고, 다시 마당으로 돌아왔다.

잠깐의 정적, 그리고 고민.

이윽고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일리아, 주디스, 브랫,”

스르륵-

슥-

스륵-

아니, 혼잣말이 아니었다.

재차 나타난 세 아이.

그중 가장 불만 가득한 표정의 주디스가 입을 열었다.

“뭐야. 왜 또 불러?”

“나가기 좀 아쉬워서.”

“뭐? 무슨 소리야. 정신 나갔어?”“설마 우리가 보고 싶어서 온 건가? 아쉽지만, 나는 진짜 브랫 로이드가 아니라 네 의지가 만든 허상…….”

“아니, 그런 이유는 아니고.”

아이른 파레이라가 브랫의 말을 끊었다. 그러자 모두가 궁금한 얼굴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 아이들을 향해, 그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나가기 전에, 너희들의 검을 얻어가고 싶어서 말이야.”

“…….”

너희들의 검을 얻겠다.

자신의 검을 포기하겠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자신의 검과 의지를 더욱 강하게, 날카롭게 만들기 위해 너희들의 검술을 빌려 가겠다는 말이었다.

방금 전에 사내의 검을 빌렸듯이 말이다.

“하.”

그 말을 들은 주디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아이들도 비슷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주디스가 브랫을 쳐다보며 말했다.

“역시 맞지? 싸가지 없어진 거.”

“그렇긴 하네.”

“그러게.”

일리아 린제이마저 동의했다.

물론 말만 그럴 뿐, 그들은 성심성의껏 아이른을 도왔다. 어쨌거나 이곳은 그의 성장을 위한 곳이었으니까.

그렇게 열흘의 시간이 더 흐르고.

아이른 파레이라의 검은 한층 더 진화했다.

콰앙!

콰앙!

콰아앙!

보는 이의 오금을 저리게 할 정도로 위압적인, 불꽃 같은 주디스의 검술.

터엉-

터어엉-!

그 어떤 공격이라도 흘려낼 수 있을 것 같은, 바다 같은 브랫 로이드의 검술.

사라락-

그리고 강철의 날개를 가진 나비처럼, 아름다우나 위협적인 폭풍을 불러일으키는 일리아 린제이의 하늘 검.

이 모든 것을 취한 청년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가 세 명의 친구들에게 말했다.

“그럼, 갈게.”

진짜로 문을 나서는 아이른 파레이라.

스르르르……

그리고 요술세계와 함께 천천히 사라지는 일리아 린제이, 주디스, 브랫 로이드.

청년은 그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어차피 곧 만날 수 있을 것이기에.

물론 당장은 아니었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키릴.’

자신이 검을 든 이유를 떠올리며, 키가 훌쩍 자란 그가 어두운 터널을 걸어갔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렇게 약 백 걸음.

1분이 채 안 되는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눈앞에 빛나는 하얀색 타원형 포탈로 들어간 순간.

슈우욱-!

아이른 파레이라는 마침내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더는 소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완연히 성숙해진 모습으로.

* * *

“그대로네?”

처음 청년이 자신의 방을 보며 느낌 감상은, 자신이 요술을 각성하기 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는 점이었다.

여전히 깨끗한 바닥.

여전히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방 구석구석.

마치 계속해서 사람이 살고 있던 방에 찾아온 느낌이었다.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아이른 파레이라의 눈시울이 약간 붉어졌다.

‘아마 계속해서 관리를 해주셨던 모양이야.’

정확히 얼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른다. 날짜를 센 것은 100일까지였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2년 이상은 지났을 것이다.

그런 긴 시간 동안 자신을 챙겨줬을 가족들을 생각하니 행복하면서도 죄송스러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빨리 부모님을 만나 뵈어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방문 쪽으로 걸어갈 때였다.

침대 밑에서 옅게 들리는 부스럭거리는 소리.

예민한 청각의 아이른 파레이라가 빠르게 자세를 낮추며 말했다.

“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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