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검을 들다 (2)
아이른 파레이라가 몸담고 있는 이세계는 꿈속의 환경을 재현한 것이다.
허나 완전 똑같은 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른 파레이라의 의지에 따라 조금씩 변한다.
봄에서 가을로 계절을 바꾸었듯이 말이다.
지금도 그랬다. 원래라면 담장 밖에는 너른 평원만이 존재해야 하건만, 난데없이 러닝 코스가 만들어져 있었다.
아이른은 그 위를 따라 열심히 달렸다.
평소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현재의 그는 자신을 믿지 못해 방 밖으로 나오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등 뒤에서 시선을 주고 있는 한 존재 때문에, 그는 구슬땀을 흘리며 코스를 뛸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일리아 린제이였다.
“균형 잃지 말고. 발목 항상 신경 쓰고.”
“코로 숨 쉬고 입으로 내뱉어.”
“이제부터 모랫길이야. 균형에 더 힘 써야 해.”
끊임없이 조언을 이어가며 페이스를 맞춰주는 은발의 소녀.
당황스러웠다. 뭐가 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멍하니 서서 사태를 파악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아이른 파레이라는 일리아의 주도하에 굉장히 오랜만에 몸을 움직였고, 땀을 흘렸다.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찾아올 때까지.
“밥 빨리 먹고 검술 수련으로 넘어가자.”
물론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일리아 린제이는 그야말로 열과 성을 다해 아이른을 굴렸다.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그를 마당으로 끌고 나오고, 검을 쥐여줬다.
그리고 열심히 검을 휘두르는 한편 날카로운 눈초리로 감시를 이어갔다.
아이른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그 눈초리가 무서워 검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정성 들인 행동은 아니었다. 곧바로 최선의 노력을 쏟기엔, 그의 정신 상태가 영 별로였으니까.
일리아는 그런 아이른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정신 차려!”
“동작이 엉망이잖아. 제대로 집중해!”
“완전히 속이 비었잖아. 마음을 채워야 제대로 된 동작이 나오는 거야. 루루한테 배우지 않았어?”
“그래, 아까보다 좀 낫네.”
호랑이 선생님 같은 엄한 지도.
그가 알던 일리아 린제이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아니, 그 전에 루루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허나 이에 신경 쓸 틈은 없었다.
딴생각할 때마다 은발의 소녀는 귀신처럼 이를 지적했고, 찔끔한 나태 공자는 열심히 검을 휘둘렀다.
그에 따라 죽어 있던 마음도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물론 예전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기는 했지만, 점심과 저녁이 지나 늦은 밤이 될 때쯤의 아이른은 아침의 아이른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적어도 우울하기 그지없던 표정만큼은 훨씬 밝아졌다.
“그럼, 다음에 보자.”
그런 그를 뒤로한 채 일리아 린제이는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스르륵.
이를 지켜보던 아이른 파레이라가 뒤늦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진짜 일리아는 아니었구나.”
당연한 일이다. 아마 요술로 만들어진 존재일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바닥에 검을 꽂고 집으로 들어섰다. 땀 범벅이던 몸이 순식간에 청결해졌다.
개운함을 느낀 나태 공자가 자연스레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이윽고 찾아오는 나른함.
억지로 잠을 청했던 어제는 느낄 수 없었던 좋은 기분 속에서, 아이른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잠깐의 꿈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어.
그는 오랜만에 깊은 잠을 청했다.
그리고 다음 날.
또 한 명의 손님이 찾아왔다.
“뭐해 이 자식아! 빨리 안 일어나?”
“…….”
“벌써 다섯 시가 넘었는데, 언제까지 자고 있을 거야! 죽고 싶어?”
타는 듯한 붉은 머리를 찰랑거리는 소녀, 주디스.
그녀의 불호령을 들은 아이른이 깜짝 놀라 마당으로 뛰쳐나왔다.
“왔어? 좀 늦었네.”
“얼빠진 표정 짓지 말지? 귀족으로서의 체면을 생각해라.”
그런 그의 앞에 또다시 모습을 드러낸 일리아 린제이.
그리고 헤어질 때의 우울한 모습이 아닌, 그 전의 당당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브랫 로이드.
둘을 보며, 아이른 파레이라는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대련부터 할까? 아니면 각자 개인 수련 시간 좀 가질까?”
“아이른 몸도 안 풀었잖아. 생각 좀 하고 말해라.”
“이 샌님 새끼는 사사건건 시비네. 맞고 싶어?”
“그만, 브랫 말대로 대련은 나중에 하자. 아이른? 이리 와.”
일리아의 말에 따라 고개를 돌리는 세 명의 아이들.
눈부신 모습이었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존재들 같았다.
그렇기에 나태 공자는 다가갈 수 없었다. 살짝 고개를 떨군 그가 뒤로 물러나려는 순간이었다.
“…….”
믿음이 담긴 눈빛.
당연히 이쪽으로 올 거라는 확신이 가득한, 반짝이는 세 명의 시선을 느낀 아이른이, 입술을 깨물고 앞으로 나섰다.
도저히, 그들의 기대를 배반할 수가 없었다.
그의 손엔 어느새 커다란 검이 쥐어져 있었다.
“역시 못 참겠어. 실전이 최고의 수련이야! 덤벼!”
“그렇게 못 참겠으면 나랑 붙어. 지금 막 일어난 애 괴롭히지 말고.”
“어쭈? 그래, 한번 해 보자!”
“쟤들은 놔두고, 우린 우리끼리 수련할까?”
“……그래.”
고개를 끄덕인 아이른 파레이라가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휘둘렀다.
후우웅!
여전히 부족한 모습.
허나 어제보단 훨씬 나은 모습이었다.
이를 본 일리아 린제이가 환한 웃음을 보였다.
한창 다투던 주디스와 브랫 로이드 역시 미소지었다.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아이른은 그들의 그런 반응이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여기서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가 재차 검을 휘둘렀다.
아까보다 못한 동작.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주 조금 피어올랐던 자신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이른이 주변의 눈치를 봤다. 세 아이의 반응이 바뀌었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허나 그들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믿음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나 따위를 믿어주는 거지?’
남의 도움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나를?
그런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사라졌다. 일리아가 그럴 수 없게 만들었다.
호통을 듣지 않기 위해, 나태 공자는 더욱 열심히 검을 휘둘렀다.
이(異)세계 진입 2년 하고 120일째.
아이른 파레이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많은 시간이 흘렀다.
1년,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시간.
그동안 아이른은 열심히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성장했다.
이제는 하루 만 번의 휘두르기도 거뜬히 할 수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속 빈 행동만을 말하는 게 결코 아니었다. 동작 하나하나에 마음이 충실하게 담겨 있었다.
물론 위기가 없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많았다. 끊임없는 불안과 자괴감이 아이른의 마음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머저리.
누군가가 도와줘야만 하는 모자란 놈.
결국엔 실패할 녀석.
그렇듯 또다시 찾아온 의심이 그의 내면을 좀먹으려 할 때였다.
예전, 잠시 스치고 지나갔던 오크 점술사가 건네준 쪽지의 내용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오롯이 서기 위해 꼭 홀로일 필요는 없다.’
그 순간 아이른 파레이라는, 지금까지 자신이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의 도움을 받아 나아가는 건, 잘못된 게 아니야.”
검술관주 이안의 말이 떠올랐다. 타인의 의지로 타인의 길을 좇지 말고, 자신의 길을 가라고. 온전한 너의 뜻을 세우라고.
분명 맞는 말이다. 이 조언을 듣기 전까지의 자신은 잘못된 길을 걷고 있었다.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법을 모르는 공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에, 더는 그런 삶을 살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었다.
허나 그것은 남의 도움을 배제하고, 고독한 길을 걸으라는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타인의 도움과 믿음을 통해, 자신은 더욱 강해지는 거였다.
‘널 믿어주고, 사랑해주는 다른 존재와 함께해. 그러면 어떤 위기라도 이겨낼 수 있어.’
잊고 있던 루루의 말이 떠올랐다.
잊고 있던 아버지의 사랑도 떠올랐다.
어머니의 자애로움과 키릴의 솔직하지 못한, 그러나 누구보다 자신을 위해주는 속마음도 연이어 떠올랐다.
“이제 알겠어?”
“…….”
그리고 또 다른 인연들.
어느새 자신의 앞에 선 세 명의 아이들을 향해, 아이른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을 믿어주는 그들의 눈빛을 통해, 자신은 더욱 강해질 거라고.
계속해서 성장할 거라고.
“우리 역할은 끝났네.”
“혹시 모르지. 나중에 또 부를지도.”
“귀찮은데…… 그래도, 부르면 오긴 해야겠지.”
“궁상떨지 말고 열심히 해라. 괜한 의심 품지 말고.”
“힘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이들은 사라졌다.
일리아 린제이도, 주디스도, 브랫 로이드도 자취를 감추고, 오직 아이른 파레이라만이 적막한 방안에 홀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괘념치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소년, 아니 청년이 힘찬 걸음걸이로 집을 나섰고,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휘둘렀다.
지극한 마음을 담아, 지극한 행동을 보였다.
검술을 수련하는 그의 눈빛은 예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 * *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났다.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 긴 시간 동안 아이른 파레이라는 우직하게 노력을 이어갔다.
마냥 평탄한 시간은 아니었다. 위기는 끊임없이 찾아왔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버틸 수 있었다. 혼자서는 참기 힘든 고난도 다른 이들과 함께라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었다.
검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그 전에 검을 대하는 마음의 변화가 찾아왔다.
‘지금까지 나는, 행동과 마음을 따로 생각하고 있었어.’
멍청한 짓이었다.
루루가 말하지 않았던가. 몸과 마음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지극한 행동을 쌓아 마음을 강화하듯, 지극한 마음으로 행동을 보조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순간, 아이른은 검술 동작 하나하나에 담긴 진의를 더 깊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후웅!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치는 사람이 있고, 하나를 온전히 익히는 사람이 있다.
반면 그 하나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하는 이도 많은데, 다행히도 아이른은 그렇지는 않았다.
그의 놀라운 집중력은 보고 겪은 것을 완벽하게 모방할 수 있도록 도와줬으니까.
다만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일리아 린제이가 그렇듯, 주디스와 브랫 로이드가 그렇듯 가르침 이상의 것을 얻어가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 한계가 부서지고 있었다.
후우웅!
마음을 다해 행동에 집중한다.
오랜 세월 다듬어진 검술의 동작 하나하나에 깊게 파고들어, 그 이면에 숨겨진 뜻을 파악한다.
그리하여 이해한다. 깨닫는다. 무작정 좇는 것이 아니라, 진의를 무너뜨리지 않는 선에서 넓은 방향으로 사고를 확장한다.
그러한 마음에 행동이 뒤따르고, 이내 닫혀있던 수많은 가능성이 펼쳐진다.
후우웅!
후우우웅!
아이른이 검을 휘둘렀다. 무아지경으로 휘둘렀다.
끊임없이 샘솟는 마음의 길을 따라 몸이 움직였고, 검이 뒤를 따랐다. 몇 날 며칠을 지치지도 않고. 질리지도 않고.
현실 세계였다면 탈진해서 쓰러졌을 테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곳은 요술로 만들어진 세계.
창조자의 염원을 이뤄주기 위한 목적으로 탄생한 기적의 장소.
덕분에 아이른은 훨씬 더 오랜 시간을 찬란한 깨달음의 세계에서 보낼 수 있었고, 그것이 그를 한 차원 높은 경지로 인도했다.
“후우.”
이윽고 검을 내려놓은 나태 공자.
아니, 아이른 파레이라의 눈에서 날카로운 정광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