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검을 들다 (1)
따사로운 햇볕, 불어오는 산들바람, 이를 타고 느껴지는 약간의 풀냄새.
좋은 날씨다. 피도 눈물도 없는 신경질쟁이 세무관조차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일만 한, 그런 날씨.
허나 그 중심에 서 있는 소년, 아이른 파레이라는 웃을 수 없었다.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진짜로…… 꿈속에 들어온 건가?’
놀람을 가득 담은 시선이 집 곳곳을 맴돌았다.
어설프게 관리된 집과 담장, 그사이에 드문드문 나 있는 잡초의 정취는 유달리 낯익은 것이었다.
자신의 몸에 걸쳐져 있는 의복 또한 익숙하기 그지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껏 수백 번도 넘게 봐왔던 옷이니까.
‘내가 직접 입어본 적이 없을 뿐이지.’
꿈속 사내의 옷.
꿈속 사내의 집.
꿈속 사내가 검을 휘두르던, 바로 그 장소.
모든 것이 자신의 추측이 사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물론 곧바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렇지 않은가. 당장 몇 시간 전만 해도 가문의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고, 가족들과 성에서 저녁 식사를 했던 상황이다. 아이른은 당황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는 한편 더욱 자세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집 밖으로도 나가 널리 살펴봤다.
허나 둘러보면 둘러볼수록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는 생각은 확고해졌다. 그리고 자신이 이 신비로운 곳에 왜 끌려왔는지, 그에 대한 이유도 점차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
자신은 지금, 요술을 각성했다.
이를 자각한 소년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어났다.
“하하!”
즐거웠다. 즐겁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귀하디귀한 요술사가 되었다는 점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의 검, 가문과 가족을 지키는 검에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는 착각은 하지 않았다.
아이른이 마당의 중심에 꽂혀 있는 검을 뽑아 들었다.
쑤욱
사내가 사용하던 것보다는 조금 작은, 자신의 신체 사이즈에 적합한 검.
소년이 이를 휘둘렀다. 처음 쥐어보는 검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길들인 것 같은 익숙함이 느껴졌다.
신이 난 아이른은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고, 또 한 번 깨달았다.
자신이 이곳에 발을 들인 이유가 무엇인지.
자신이 각성한 ‘요술’이 어떠한 유형의 능력인지를 말이다.
‘이곳은…… 수련 장소야.’
가문을 지키고, 가족을 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힘.
그런 굉장한 힘을 곧바로 부여한 것은 아니다.
허나 아쉬워할 필요 없었다.
요술, 그 신비로운 힘은 자신이 직접 ‘자신의 검’을 갈고 닦을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을 제공해줬으니까.
한 마디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을 알려줬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모든 궁금증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목표한 바를 이루지 못한다면, 영원히 이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자신의 목표’라 함은 어느 정도의 수준인가? 추상적이기 그지없는 염원에 어떤 기준을 들이대야 할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꿈속 사내는 도대체 누구인가.
자신과 어떤 관계이기에, 요술을 각성하는 순간조차 이렇게 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단 말인가.
“…….”
아이른이 고개를 흔들었다.
표정을 굳힌 그가 말없이 검을 휘둘렀다.
쒜엑!
휘둘렀다.
쒜에엑!
휘두르고, 휘두르고, 더 세게 휘둘렀다.
그에 따라 머리를 가득 채웠던 잡념은 하나둘씩 사라졌고, 그 자리를 자신의 검에 대한 지극한 마음이 대신 채웠다.
‘천 번, 이천 번, 아니 그 이상!’
몸과 마음을 다하여 검을 휘두른다.
루루에게 헛고생 취급을 받았던 마음이 빈 행동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노력’을 이어간다. 그리고 이를 점차 늘려간다.
이천 번, 삼천 번, 오천 번, 만 번.
아니, 체력과 심력이 허락하는 한계치까지!
“하압!”
아이른 파레이라가 기합을 내질렀다. 눈에서는 화염이 피어오르고, 가슴속에는 화산이 들끓었다.
그야말로 불꽃 같은 의지. 그것이 몸을 타고 검으로 전해졌다.
쒜에에엑!
언제까지고 꺼지지 않을 것 같은 뜨거운 마음이, 대기를 뜨겁게 갈랐다.
이(異)세계 진입 첫날.
아이른 파레이라는 3022번의 노력을 휘둘렀다.
* * *
현실 세계였다면 계절이 바뀌었을 시간이 흘렀다.
허나 이곳 날씨는 변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면 따사롭고, 바람이 불면 시원한. 아이른 파레이라가 가장 좋아하는 날씨가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잘 먹겠습니다.”
그의 기호가 반영된 건 비단 날씨뿐만이 아니었다.
식탁에 앉는 순간 곧바로 차려지는 푸짐한 음식들.
집 밖을 나서는 순간 갈아입혀지는 수련복과 신발.
그 밖의 온갖 편의들.
이곳은 그야말로 아이른만을 위해 만들어진 완벽한 수련 공간이었다.
그리고 파레이라 가의 장자는, 그 훌륭한 환경에 부끄럽지 않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후우웅!
후웅!
휘두르고, 휘두르고, 또 휘두른다.
그냥 휘두르는 것이 아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루루의 가르침이 남아있고, 행동 하나하나에는 지극한 마음이 담겨 있다. 이는 단순히 몸을 혹사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피로한 일이었다.
심지어 아이른은 무엇이 진정으로 자신의 검을 위한 마음인지, 무엇이 진짜 답인지 결론조차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그저 그때그때 느끼는 최선을 담기 위해 애쓸 뿐.
‘괜찮아. 걱정할 필요 없어.’
루루가 말했다. 주체적으로 고민을 시작한 것 자체가 고무적인 일이라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으니, 의심하지 말고 정진하라고.
고개를 끄덕인 그가 재차 검을 쥐었다. 그리고 휘둘렀다. 밤이 늦을 때까지. 하루를 꽉 채울 때까지.
이(異)세계 진입 94일째.
아이른 파레이라는 5
1번의 노력을 휘둘렀다.
* * *
더 많은 나날이 흘렀다. 그리고 영원할 것 같았던 풍경이 바뀌었다.
시간의 흐름 때문은 아니었다. 매일 똑같은 광경을 보는 것이 지겨웠던 아이른이 계절을 가을로 바꿨기 때문이다. 무더운 여름과 칼바람 부는 겨울만 아니라면 어느 날씨든 좋았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가 정말로 변했으면 하는 부분.
정확히 말하면 성장했으면, 더더욱 발전했으면 하는 부분. 검술.
그것이 제자리걸음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후우웅!
아이른 파레이라는 여전히 최선을 다한다. 그날 쏟아낼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쏟아내고, 일검(一劍), 일검에 마음을 담기 위해 노력한다.
허나 노력의 숫자가 칠천 번에서 늘지 않는 순간.
그제보다 만족스럽지 않은 어제, 어제보다 만족스럽지 않은 오늘이 이어지는 순간, 가슴에 불안감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괜찮아.”
후우, 한 차례 심호흡을 한 아이른 파레이라가 자신을 다독였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당연히 그럴 수 있다. 노력과 성취는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것 따위, 이미 알고 있다.
크로노 검술관에서도 겪지 않았는가?
두드리고, 두드리고, 또 두드리다 보면 언젠가 무너지는 것이 벽이다. 잠깐의 지지부진함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을 의심해봤자 좋은 꼴을 보기 힘들다.
푹
생각을 마친 그가 바닥에 검을 내리꽂았다. 그리고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각, 집에 들어갔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는 적절한 휴식도 필요한 법.
다시 한번 자신을 위로한 아이른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異)세계 진입 211일째.
아이른 파레이라는 6695번의 노력을 휘둘렀다.
* * *
더, 더 많은 시간이 흘렀다. 계절은 다시 봄으로 돌아왔다. 물론 의미는 없었다.
그런 것 따위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른 파레이라의 얼굴에 불안이 가득했다.
후웅!
최선을 다해 검을 휘두른 듯 보인다.
허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마음이 따라주지 않은 탓이다.
후우웅!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마음.
그에 따라 부정확하게 흔들리는 몸뚱이, 그리고 검 끝.
억지로 행동을 이어갔지만, 이내 포기했다. 무너질 대로 무너진 심리상태로 수련을 이어가 봤자 남는 것 하나 없다. 그래, 이후의 수련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런 의미 없는 고생을 하느니, 빠르게 재정비를 취하는 게 낫지.’
그렇게 마음먹은 아이른이 검을 내려놓고 집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곧바로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예전보다 훨씬 푹신하고 커다래진 침대.
그 안락한 공간에 녹아든 그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하아…….”
눈을 감는다. 허나 곧바로 잠이 오진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온 힘을 쏟아내고 쓰러지듯 눕던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여력이 남은 상태였으니까. 아이른도 알고 있었다. 모르는 척하고 있을 뿐이지. 그는 억지로 잠을 청했고, 이내 원하는 대로 잠을 이룰 수 있었다.
이(異)세계 진입 353일째.
아이른 파레이라는 5695번 검을 휘둘렀다.
* * *
이(異)세계 진입 1년 하고 52일째.
아이른 파레이라는 3695번 검을 휘둘렀다.
* * *
이(異)세계 진입 1년 하고 134일째.
아이른 파레이라는 1400번 검을 휘둘렀다.
* * *
이(異)세계 진입 1년 하고 259일째.
아이른 파레이라는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의 다음 날도.
그다음 날의 다음 날의 다음 날도, 그는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노력하지 않았다.
그저 멍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있을 뿐.
그렇게 며칠의, 몇 달의 시간이 더 흘렀다.
아이른 파레이라는 더는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 * *
아이른 파레이라가 이(異)세계 진입하고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그는 예전으로 돌아갔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이전, 그가 한창 ‘나태 공자’로 불렸을 시절로 돌아갔다는 뜻이었다.
아이른은 그 사실에 실망을 내비치지 않았다.
지금의 그에겐 그럴 여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사실, 이렇게 되는 게 당연했어.’
나태 공자가 눈을 감은 채로 생각했다.
20년 조금 안 되는 인생을 되돌아봤을 때, 자신은 인생의 절반 이상을 게으르게 살아왔다.
빛나는 순간이 아예 없던 건 아니었다.
크로노 검술관에 있었을 때만큼은, 게으르고 나태한 자신조차도 성실히 몸을 움직였다.
‘하지만 그건 내 의지가 아니었지.’
그랬다. 그때의 의지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사내의 의지였고, 자신의 마음이 아닌 사내의 마음이었다. 노력의 주인 역시 자신이 아닌 사내였다.
꿈속의 사내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첫 번째 체력 테스트조차 견뎌내지 못하고 검술관에서 쫓겨났을 터였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이곳은 자신의 검을 세우기 위한 수련 장소.
그에 불필요한 요소는 완벽하게 차단되며, 덕분에 매일 밤 꾸던 사내의 꿈을 더는 보지 않게 된 상황이다.
즉, 의문의 남자의 도움 없이 온전히 혼자의 힘으로 수련을 이어갈 수 있게 된 셈이다.
허나 그 결과가 어떠한가?
처참하기 그지없다.
사내의 도움을 받지 못한 자신은 1년이 채 되지 못했을 때부터 흔들렸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위기는 누구나 올 수 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말처럼, 이를 잘 헤쳐나가면 더욱 굳건한 마음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저 힘들고, 괴롭고, 불안한 마음을 피하고자 예전처럼 침대 위로 도망쳤을 뿐.
……여기까지 생각한 나태 공자는 억지로 잠을 청했다. 공허하고 슬픈 감정을 잊기 위해.
사실 아이른의 이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다.
그는 노력했다. 보통 사람들은 엄두도 못 낼 시련을 질기게 버텨왔고,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만치 굳건한 모습을 보여왔다.
그랬다. 자신을 못 믿는 것은 오직 그 혼자였다.
‘1년이나’ 견뎌왔던 자신의 의지를 깎아내리고.
‘몇천 번이나’ 반복했던 자신의 노력을 평가절하했다.
고양이 요술사 루루가 가장 경계했던 ‘의심’이, 아이른의 마음에 균열을 일으킨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오랫동안 어두운 터널을 지나오지 않았더라면, 조롱과 비아냥대신 칭찬과 격려 가득한 삶을 살아왔더라면.
그래서 조금 더 자신을 믿고 사랑해줄 수 있었더라면, 이러한 의심 따위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잠깐의 흔들림에 무너지지 않고 단단하게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허나 이미 일은 벌어졌다.
꿈 없는 어두운 잠 속에 빠져, 아이른 파레이라는 긴 시간을 가라앉았다.
건져줄 사람도, 응원해줄 사람도 없었다. 이곳은 그만이 들어올 수 있는 요술로 만들어진 세계였으니까.
그러나 다음 날.
이변이 찾아왔다.
“……른.”
“…….”
“……이른, 아이른.”
“으음…… 어?”
눈을 비비던 아이른 파레이라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곳은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요술로 만들어진 세계.
그런 장소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나다니.
그는 황급히 상체를 일으켜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쳐다봤다. 그리고 또다시 놀랐다.
익숙하기 그지없는 모습이 자신을 반겨줬기 때문이었다.
“어서 일어나. 새벽 단련 시작해야지.”
“…….”
“뭐해? 안 일어날 거야?”
달빛을 머금은 듯 아름다운 은발을 품은 소녀, 일리아 린제이.
당연한 것을 묻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아이른은 자신도 모르게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