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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51화 (51/388)

◈ 19. 각성 (2)

누구나 한 번쯤 다짐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건강관리를 위해 매일 아침 운동을 해야겠다, 화가가 되기 위해 그림 연습을 해야겠다, 앞으로는 사람들을 대할 때 웃는 모습을 보여야겠다…….

그러한 의지를 품은 이들은 열심히 노력한다.

졸린 눈을 비비고 침대에서 일어나 몸을 움직이고, 거금을 주고 산 물감으로 캔버스를 채워나가고, 거울을 보며 억지 미소를 짓는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그러며 생각한다. 이렇게 하루하루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믿음에 ‘의심’이 끼어드는 순간, 그들이 쌓아왔던 공든 탑은 와르르 무너져버리고 만다.

“당연한 거긴 해. 마음이 항상 같을 수는 없거든. 처음의 뜨거웠던 의욕이 사라지고, 몸이 무거워지기 시작하면 잡념이 많아지지. 그리고 혼자서 하는 대부분의 생각은 부정적인 쪽으로 흐르기 마련이야.”

단단한 신앙으로 무장한 성직자들조차 홀로 수행할 때는 끊임없는 사탄의 유혹에 휩쓸린다고 하니, 검은 고양이의 말은 틀림없는 사실일 터.

허나 루루는 부정적인 미래만을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희망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하는 거야.”

사람은 약해질 수 있다. 아니, 무조건 약해지는 시기가 온다.

지고한 경지에 오른 검사도,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한 가정의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그럴 때면 드높았던 자신감은 무너지고, 의심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그럴 때 자신을 믿어줄 사람.

누구도 모를 것 같은 아픔을 이해해주고 슬픔을 보듬어줄 사람.

그런 존재를 통해 사람은, 아니 고양이를 포함한 모두의 마음은 더욱 강해질 수 있다.

“널 믿지 못할 때면 너를 믿어주는 사람을 믿어. 그리고 나중에 그 존재가 힘들 때, 네가 받았던 믿음을 그대로 갚아줘.”

믿음의 선순환.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한쪽의 믿음이 깨지는 순간 관계는 파국이고, 악순환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믿음을 주고받을 존재를 신중히 고르는 것.

여기까지 생각한 아이른이 루루를 보며 말했다.

“날 그렇게까지 믿어줄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드는데.”

“으엉? 왜? 왜 그렇게 생각해?”

“날 좋아할 사람은 없을 거거든. 아마도.”

감정의 동요가 느껴지지 않는, 그래서 더 쓸쓸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여태껏 수많은 이들의 조롱과 비아냥을 뒤집어쓰고, 그것이 무서워 자신만의 공간으로 도망갔던 소년이 어찌 그런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겠는가.

이는 과거의 얘기만이 아니었다.

앞으로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하지만, 소년은 그러한 생각을 루루의 말을 듣는 내내 품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나는 믿어.”

눈을 동그랗게 뜬 고양이 요술사가 말했다.

“아이른이 분명히 검과 관련된 힘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어.”

“…….”

“뭐, 난 사람이 아니라 고양이지만!”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아이른 파레이라를 보며, 하늘에 떠오른 루루가 빙글빙글 돌았다.

소년은 모르지만, 말을 내뱉은 그는 살짝 부끄러운 상태였다.

물론 거짓을 말한 건 아니었다.

아이른에 대한 그의 믿음은 그저 ‘감’에 불과했지만, ‘강력한 요술사의 감’이란 일반적인 존재들과 궤를 달리한다.

그런 자신이 확신한 이상, 각성은 이루어진다.

생각을 마친 루루가 아이른의 머리에 착지한 뒤 말했다.

“예전에 내가 너한테 그랬지. 계곡에 수백 개 쌓인 조약돌 같다고.”

“그랬었나?”

“응. 잘못 생각했던 거였어. 조약돌은 조약돌인데, 엄청 매끈매끈하고, 단단하고, 예쁜 조약돌이야. 참고로 키릴은 사파이어!”

“…….”

“하여튼, 그런 단단하고 예쁜 조약돌을 싫어할 사람이 많을 거라 생각하진 않아.”

그러니까 이따 방에서 곰곰이 생각해봐! 그럼 나 간다!

그 말을 끝으로 루루는 사라졌다. 혼자 남은 소년은 검은 고양이가 사라진 쪽을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봤다.

천 번을 다 휘두른 뒤여서 다행이었다.

복잡한 감정을 속에 품고, 소년은 연무장을 떠났다.

* * *

‘날 좋아해 주고, 날 지지해줄, 날 믿어줄 사람들이라…….’

가족들과의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자신의 방에 들어온 아이른이 생각했다.

평소라면 검에 마음을 담는 법에 대해 고민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오후에 루루가 해줬던 말이 소년의 가슴속에 깊이 파고든 상태였다.

“날 싫어할 사람이, 많지 않을 거라고.”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지난 10년의 일은 말할 것도 없고, 당장 열흘 전만 해도 끔찍하지 않았던가.

그는 하이에나 떼에 던져진 토끼처럼 귀족들에게 물어뜯기고, 공격당했다.

그때의 감정은 자신의 의지를 강하게 만드는 한편, 약하게 만들기도 하는 복잡한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정확히 말하면 루루의 말을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그러한 기분은 희미해졌다.

암울하고 부정적인 생각이 조금씩 걷히고, 검은 안개에 싸여있듯 좁았던 시야도 넓어졌다.

그러자 잠시 잊고 있던 소중한 존재들이 하나씩 눈앞에 떠올랐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키릴.’

무려 10년간 자신이 기운 차리길 기다려줬던 가족들.

의심의 여지 없이 자신을 사랑해주고, 믿어주는 존재들이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여전히 성 밖으로 나갈 생각도 못 한 채 무의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 터.

‘이렇게 내 의지로 검을 들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겠지.’

가족뿐만이 아니었다.

소년은 자신의 품에서 빛나는 백금 패, 그리고 마법적 처리가 되어있는 금속 패를 꺼냈다. 둘 다 크로노 검술관의 인연이었다.

‘더 열심히 해. 안 그러면…… 순식간에 격차 벌려버릴 테니까.’

‘1년 주마. 그 안에 자신의 검을 찾고 와라.’

자신을 경쟁상대로 인정한 일리아 린제이도, 1년의 제한 시간을 정한 검술관주 이안도, 어찌 보면 자신을 믿기에 그런 말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이들이 끝이 아니었다.

자신이 무조건 최종 평가에 붙을 거라고 말했던 브랫 로이드.

무조건 1년 안에 검술관으로 돌아오라고 으름장을 놓았던 주디스.

그리고 많은 대화를 나누진 않았지만, 격려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봤던 교관들까지.

그들 모두가 루루가 말한 대상에 포함되었다.

자신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이들에게 믿음을 받고 있었다.

그 사실을 새삼 느낀 아이른은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하다.

나쁘지 않은 느낌.

열흘 전의 나쁜 기억을 지울 수는 없지만, 희미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기분이었다.

‘루루도 이런 존재가 있겠지?’

감정을 대충 수습한 아이른이 이번에는 고양이 요술사를 떠올렸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요술사는 괴짜에, 성격이 특이해 홀로 행동하는 걸 좋아하는…… 고독함을 뭉쳐 만든 듯한 존재였다. 약간이지만 루루도 그런 느낌이 있었고.

헌데 그런 존재가 ‘믿음을 주는 관계’를 말하다니.

‘누굴까?’

사람일까?

아니면 고양이일까?

그것도 아니면 완전히 다른 존재일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루루에 대한 그 존재의 믿음도, 그 존재에 대한 루루의 믿음도 굉장히 강할 거라는 사실이었다.

함께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 자그마한 덩치의 고양이가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가졌는지 말이다.

‘……나도 남들한테, 그만한 믿음을 주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내 주제에 무슨.

아마 예전이라면 그런 생각부터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아이른 파레이라는 그러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자신을 믿고, 자신의 검을 믿고, 자신이 나아갈 길을 믿는다.

그리하여 자신을 위하고, 믿어주는 이들을 배신하지 않는다.

그렇게 다짐한 그가 침대에 누웠다. 평소보다 이른 시각이지만, 오늘은 왠지 잠이 잘 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

그러한 생각은 사실이었다.

아이른은 눈을 감기 무섭게 잠에 빠져들었고, 꿈속 세상에 들어왔다.

‘이곳은 언제나 같구나.’

낯익은 하늘.

낯익은 담장.

낯익은 마당.

그 중심에 서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낯익은 사내.

조금 있으면 그가 검을 휘두를 것이다. 예상이 아닌 정해진 사실.

다른 일은 있을 수 없었다. 1년이 넘는 시간의 경험은 소년에게 확신 이상의 감정을 심어주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헉!’

별안간 자신을 쳐다보는 꿈속의 사내.

그의 깊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소년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고, 자신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릴 수도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자신을 쳐다보는 사내의 눈을 계속해서 바라보는 것뿐.

그러나 이 역시 잠시였다.

“…….”

현실과 환상의 틈으로 사라진 아이른 파레이라.

그를 대신해 거대한 무언가가 생성되었다.

그 어떠한 외부의 개입도 불허하겠다는 듯, 고독한 기운을 풍기는 반투명한 구체.

직후,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검은 고양이가 방 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럴 수가!”

요술사 루루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아이른의 요술 각성이 훨씬 빨랐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상적인 형태로의 각성도 아니었다.

확실한 장점이 있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단점도 존재하는 형태.

검은 고양이는 안절부절못한 채 반투명 구체를 두드려봤다.

그리고 이내 울상을 지은 뒤 방 이곳저곳을 정신없이 날아다녔다.

그때, 두 번째로 키릴 파레이라가 방에 들이닥쳤다.

“오빠! 어? 이건…… 루루!”

구체를 확인한 그녀가 곧바로 루루를 불렀다.

키릴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오빠가 요술을 깨우쳤음을. 그리고 저 반투명한 구체가 오빠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알 수 없었기에, 루루의 설명이 필요했다.

그녀가 검은 고양이를 채근했다.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된 거야!”

목소리가 떨리고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요술사들이 대개 그렇듯 그녀의 감 역시 특출한 것이었고, 그 이전에 루루의 태도가 너무나도 불안해 보였다.

그 사실이 키릴 파레이라의 가슴을 졸이게 했지만, 일단은 침착하기로 했다.

괜찮을 거라고,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억지로 자신을 진정시켰다.

다행히도 이어지는 검은 고양이의 말은, 그녀가 생각했던 최악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냥 희망적인 것도 아니었다.

“아이른은…… 자신의 마음속으로 들어갔어. 자기 염원을 이루기 위해.”

“뭐? 자기 마음속?”

“응……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원하는 바를 이루기에 가장 적합한 자신만의 장소. 거기서 아이른은 자신이 만족할만한 성과를 얻을 때까지 수련을 이어갈 거야. 아이른의 다짐과 그동안 보여줬던 모습을 보면…… 거의 확실해. 응, 그럴 거야.”

“그럼, 언제 나오는데?”

“…….”

“언제, 언제 나올 수 있냐고!”

12살 소녀의 앙칼진 목소리에 성안의 하인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키릴과 루루, 구체를 번갈아 쳐다봤다.

점차 많아지는 시선들 모두가 검은 고양이에게 진실을 요구했다. 심판하려는 듯이. 그의 잘못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어쩌면 내 잘못일지도 몰라.’

검은 고양이 미신.

그저 우연에 불과하다고. 자신도, 자신과 엮인 이도 불운해지지 않는다고 박박 우겼던 게 불과 보름 전이다.

하지만 눈앞에서 눈물 그렁그렁한 얼굴을 하는 소녀를 보니, 알 수 없는 죄책감이 솟아올랐다.

“원하는 성과를 얻는 즉시 나올 수 있을 테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몰라.”

“…….”

“당장 내일 나올 수도, 한 달이 될 수도, 일 년이 될 수도…… 아니면…….”

그가 뒷말을 삼켰다.

하지만 의미는 분명히 전달되었다. 키릴의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이 기어코 볼을 타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런 그녀를 보며 루루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딱히 없었다.

그저 마음속으로 아이른이 빨리 나오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금방, 진짜 금방 나올 수 있을 거야!”

“……진짜지?”

“응! 나를 믿어! 아이른이라면 빨리, 훨씬 멋쟁이가 돼서 나올 거야! 그니까 울지마!”

그 말을 들은 키릴 파레이라가 겨우 울음을 그쳤다.

물론 완전히 믿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그저 믿고 싶어 하는 것일 뿐.

‘제발.’

그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검은 고양이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지극한 마음을 담았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하루빨리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기를.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염원이 담긴 기도였다.

* * *

그 시각.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이른 파레이라가 주변 풍경을 둘러보았다.

낯익은 하늘.

낯익은 담장.

낯익은 마당.

허나 그 중심에 있어야 할 사내는 없다.

그저 텅 빈 곳만이 존재할 뿐.

‘아니.’

그렇진 않다.

강철처럼 묵직하게 서 있던 그는 없지만, 다른 사람이 있다.

나태 공자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손, 발, 수련복을 입고 있는 몸뚱이와 그 앞에 꽂혀 있는 수련용 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소년이 멍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설마…… 나, 꿈속으로 들어온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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