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가주 회의 (3)
케빈 레스터를 꺾고, 마틴 러셀을 꺾었다.
그리고 남부 6가문의 자랑인 라이언 가이른마저 꺾었다.
다름 아닌 파레이라 가의 나태 공자, 아이른 파레이라가.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이것이 좌중에게 안겨준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귀족들을 포함한 모든 이들을 멍한 표정으로 아이른과 라이언, 그리고 부러진 검 조각을 바라봤다.
자신의 형과 동행한 애런 가이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지금의 일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사실 녀석이 레스터 형제를 이긴 것까지는 그러려니 했다. 마차에서의 일 때문이었다.
겉으로는 별거 아니다, 실력은 그대로인 주제에 예전과 달리 건방져졌다 후려치는 말을 했으나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뭔가 달라졌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이조차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녀석이 마틴 러셀을 몰아치는 모습을 볼 때 느꼈다. 이미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고.
하지만…….
‘형님이…… 졌다고?’
자세히 보진 못했다.
그가 인지한 것이라고는 그저 아이른이 어림없는 거리에서 검을 내리쳤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언 가이른의 검이 두 동강이 났다는 것.
두 사건 사이에 연관성이 있냐 물어보면 확답할 수 없지만, 마음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대련이라도 하고 있었던 것이냐?”
“으음?”
“무슨 일이지? 왜 검이…….”
설상가상으로, 회의가 끝난 가주들이 무더기로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기묘한 분위기를 느낀 몇몇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필 가이른 자작은, 아버지는……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아는 애런 가이른이 몸을 부르르 떨 때, 자작이 라이언 가이른에게 물었다.
“대련 중이었나?”
“예, 가주님.”
“아니, 대련 중이 아니라 끝난 것 같군.”
“그렇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이 아비도 알 수 있을까?”
입이 웃고 있다. 눈도 웃고 있다. 하지만 눈동자만은 서늘하게 빛난다. 차가운 시선이 큰아들의 얼굴에 날아가 꽂힌다.
애런 가이른은 시선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크게 몸을 떨었다.
다른 이들도 긴장한 표정으로 라이언 가이른의 다음 말을 조용히 기다렸다.
잠시 후.
쾌활한 표정을 지은 가이른 가의 장자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뭐, 보시는 대로입니다. 제가 졌습니다.”
“으응? 네가 졌다고?”
“예. 제가 졌습니다. 아이른의 검술이 놀랍도록 위력적이더군요. 무려 5미터 밖에서 공격해왔는데, 이렇게 제 검이 두 동강이 나버렸습니다.”
“…….”
잠깐의 침묵.
가주들이 표정을 찡그렸다.
소드 마스터도 아니고, 그에 비견되는 고명한 검객도 아닌 나태 공자가 공간을 격해 검을 내려 베다니.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로소 아들의 의도를 파악한 필 가이른 자작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렇군! 아이른의 검이 몹시 뛰어났나 보구나! 하긴, 크로노 검술관에서 1년이나 검을 배웠으니 너로서는 상대가 안 되는 게 당연하지.”
“송구합니다. 다만…… 남부 연합의 입장에서는 큰 축복입니다. 아이른의 놀라운 성장이 토벌전에 큰 힘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암, 그렇고말고. 파레이라 남작, 참으로 부럽습니다!”
“…….”
너스레를 떠는 가이른 가의 부자.
둘을 본 가주들은 이제야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렇지, 라이언 가이른은 애초에 져줄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연무장의 목검이 아닌 자신의 검을 준비했고, 일부러 나태 공자의 동작에 맞춰 검이 동강 나는 퍼포먼스를 보인 것이다.
비로소 의문이 풀린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런저런 말을 쏟아냈다.
대부분이 필 가이른의 의도에 부합하는 내용이었지만, 가이른 자작가와 긴밀하지 않은 두 가문은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파레이라 가문에 대한 조롱이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었는데, 그러한 생각 때문에 가주들은 알아채지 못했다.
대련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 자제들의 표정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럼, 패자는 이만 물러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피곤한 듯한데 쉬러 가거라. 그래도 괜찮겠지요, 파레이라 남작?”
“그렇게 하십시오.”
정중히 예를 취한 라이언 가이른이 자리를 떴고, 잭 스튜어트가 그의 뒤를 따랐다.
자리를 뜨는 둘을 보며 많은 이들이 그를 칭찬했다.
나태 공자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패배를 감수하다니, 무척 마음이 넓다고 말이다.
물론 진심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6가문에서 가장 세력이 큰 가이른 자작에게 잘 보이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 공허한 칭찬들을 뒤로한 채, 라이언 가이른은 걸었다. 말없이 걸었다.
방금 전의 여유로웠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얼굴로.
뒤를 따르는 잭 스튜어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작은 주군의 검은 부러져있지 않았다는 것을.
가주가 직접 하사한 검에 비하면 손색이 있어도, 그것이 꽤나 아끼는 검이었다는 사실을.
“잭 스튜어트 경.”
“예, 소가주님.”
“가문에 돌아가면…… 허수아비들 좀 준비해 놓게. 셋…… 넷, 아니 다섯.”
“그리하겠습니다.”
잭 스튜어트가 표정 변화 없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아버지보다도 더욱 끔찍한 아들의 화풀이 방법 덕분에 병신 다섯, 혹은 송장 다섯이 나오게 생겼다.
물론 그 역시 그들을 위할 생각은 없었다.
다시금 고요해진 분위기 속에, 둘은 빠르게 숙소로 돌아갔다.
* * *
가주 회의가 끝났다.
토벌전에 필요한 물자 조달과 병력 편성을 비롯한 구체적인 일정이 짜였다.
앞으로 3주 후면 남부 6가문은 몬스터의 씨를 말리기 위해 영지 전역을 돌아다닐 것이고, 파레이라 가문 역시 연합의 구성원으로서 용맹정진하게 싸울 것이다.
아이른 파레이라 역시.
허나 타 가문의 인사들이 떠나간 직후, 하룬 파레이라 남작의 생각은 전과 달라져 있었다.
“참가하지 않아도 괜찮다.”
“…….”
“토벌전은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크로노 검술관의 정식 수련생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괜히 시간을 빼앗기느니 네 검을 더욱 가다듬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허울 좋은 명분.
하지만 가족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룬 파레이라가 지금 꺼낸 말은…… 자신의 아들을 타 가문의 귀족들로부터 지켜주기 위한 말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해가 가는 말이기는 했다.
아이른 파레이라는 성장했다.
목검 열 번 휘두르고 벌벌 떠는 소년은 더는 없었다.
지금의 그는 가문의 모두가 놀랄 정도로 뛰어난 육체 능력을 갖췄고, 라이언 가이른과의 대련을 제외하고라도 충분히 인정받을 만한 검술 실력도 얻었다.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하지만 타 가문의 음습하면서도 지독한 악의를 감당할 정도로 마음이 강해졌는가를 묻는다면, 하룬 파레이라는 자신 있게 답할 수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강해졌다 한들, 아버지의 눈에 비친 아들은 어리고 미숙할 뿐이다.
심지어 소년은 나태 공자다.
이제 막 10년간의 아픔을 딛고 올라선, 그렇기에 여전히 위태위태한.
그런 아들을 토벌전의 구성원에 끼워 넣는 것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사자 새끼를 절벽에 떨어뜨리는 수준이 아니라 수라장에 던져 넣는 수준인 것이다.
헌데.
“참여하겠습니다.”
소년이 불복했다.
“토벌전, 꼭 참여하고 싶습니다.”
나태 공자, 아이른 파레이라가 아버지의 말에 불복했다.
난생처음 있는 일에 하룬 파레이라 남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멜과 키릴 또한 커다랗게 눈을 뜨고 아이른의 눈을 바라봤다.
그리고 느꼈다.
그의 눈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뜨거운 불길을 말이다.
“3주 동안 노력하겠습니다. 부족한 점을 채우겠습니다. 그 안에 아버지가 염려하지 않도록, 걱정하시는 부분을 모두 극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믿음직한 아들이 되겠습니다. 만약…….”
“…….”
“그때의 제 모습이 미덥지 못하다면, 깔끔하게 포기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아이른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방을 나섰다.
가족들 중 누구도 그를 잡지도, 만류하지도 못했다.
그들은 알 수 없는 감정이 복받치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키릴은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말했다.
“괜찮을까요?”
“당연히 괜찮지, 키릴. 네 오빠는 잘하고 있단다.”
자신의 품에 얼굴을 묻는 딸을 보며, 아멜 파레이라가 말했다.
부드럽고 포근한 어머니의 말투에 키릴의 눈물이 조금 더 진해졌다.
아멜도 금방이었다. 눈가에 맺힌 물기를 손으로 닦아내며, 그녀가 재차 말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으니, 우리는 믿어주기만 하면 되는 거야. 키릴도 오빠 믿어줄 수 있지?”
“네, 네…….”
코를 훌쩍이는 모녀.
하룬 파레이라는 여전히 눈을 감은 상태로 그들의 말을 들었다. 밖으로 표출되지 못한 만큼 더욱 진한 감정이 그의 속 안에서 휘몰아쳤다.
그것이 마냥 걱정뿐만은 아니라는 것에 감사하며, 파레이라 남작은 아들의 앞날에 축복이 가득하길 빌었다,
* * *
그 시각.
연무장에 도착한 아이른 파레이라의 눈에서도, 눈물 몇 방울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빠르게 자신이 사용하는 목검을 집어 든 그가 거칠게 검을 휘둘렀다.
동작도, 자세도 엉망진창. 크로노 검술관의 가르침을 하나도 담아내지 못하는 마구잡이식 베기.
하지만 거기에 담긴 마음만큼은, 예전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진한 것이었다.
‘더는.’
부웅!
‘더 이상은!’
부우웅!
‘더는, 가족에게 나의 짐을 떠넘기지 않겠어. 나 때문에 무시당하게 하지 않겠어. 나로 인해, 나 때문에, 나를 위해 슬픔을 감내하고 분노를 억누르는 가족들의 모습, 가문의 모습…….’
부우우웅!
’보지 않겠어.‘
강하고 지극한 마음, 그리고 다짐.
이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이른 파레이라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의 검을 들면 된다.
대륙 최고의 검사인 이안이 말하지 않았는가. 끊임없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세워야 한다고. 자신의 검을 들어야 한다고.
이제야 알았다. 비로소 깨달았다.
순식간에 수백 번 검을 휘두른 그가 고개를 끄덕인 뒤, 뒤로 돌아섰다.
그곳에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고양이 요술사 루루가 있었다.
그에게 말했다.
“예전에 내가 보여줬던 모습은…… 나의 검을 찾기 위해 내가 했던 행동은, 노력이 아니라고 했지. 마음이 없으니까 말이야.”
“…….”
“지금은 어떻게 생각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건…… 단순한 헛고생일까? 아니면…….”
“노력이 맞아.”
루루가 진지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표정은 알 수 없지만, 분위기가 그랬다. 눈이 그랬다.
짧게 숨을 내쉰 나태 공자, 아이른 파레이라가 그에게 말했다.
“지금의 나는 요술을 배울 수 있을까?”
“배울 수 있어.”
“꿈속 사내의 검을 말하는 게 아니야. 나의 검을 말하는 거야.”
“알고 있어.”
“그렇다면, 가르쳐줄 수 있어?”
“기꺼이. 하지만 오늘은…… 감정 좀 추스르는 게 좋겠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내일부터 시작하자.”
“……그래.”
대화가 끝났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몸을 돌렸다.
재차 검을 휘두르는 소년의 모습이 예전과 달랐다. 마치 불꽃에 휩싸인 듯 뜨겁기 그지없었다.
가문을 위한 검.
가족을 위한 검.
비로소 자신이 나아갈 길을 찾은 그를, 고양이 요술사 루루는 언제까지고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