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가주 회의 (2)
“……하!”
러셀 남작가의 장자, 마틴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시저 레스터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냐는 듯 옆을 쳐다봤고, 케빈 레스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론 원하는 바이긴 했다. 그들은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연무장을 방문한 거니까.
하지만 이런 상황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설마 그 ‘나태 공자’가 저런 말을 할 줄이야.
“자신감이 대단한데…… 좋아. 어디 실력 한번 보자.”
가장 황당해했던 케빈 레스터가 앞으로 나섰다.
우득 우드득,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뼛소리를 내는 그를 연무장 관리인이 불안한 듯 지켜봤지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귀족들의 일에 감히 나설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관리인이 염려하는 사이, 케빈 레스터는 자신이 쓸 검을 골라 아이른 파레이라의 앞으로 다가갔다.
부웅, 붕! 목검이 허공을 가르는 모습이 썩 나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검을 잡은 것이 벌써 6년도 더 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부우웅!
“후우.”
한 번 더 위협적으로 검을 내려 벤 케빈 레스터가 눈에 힘을 줬다.
질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야 당연했다. 유명한 검술관에 다녀왔다고는 하나 고작해야 1년이다.
무언가를 배우기엔 지나치게 짧은 시간이었다.
그에 비해 자신은 오랜 시간 검을 휘둘러왔다.
좋은 스승의 밑에서 좋은 가르침을 받았고, 토벌전에도 세 번이나 참여했다. 직접 몬스터를 죽인 경험도 있다.
‘제대로 망신을 줘야겠어.’
쉽게 끝내주진 않는다.
어떻게든 질질 끌면서 농락할 것이다. 비웃어줄 것이다.
그리고 말해줄 것이다.
크로노 검술관 덕분에 자신감이 생긴 것 같은데, 착각하지 말라고. 너는 여전하다고. 여전히 나태 공자 그 자체라고.
그런 생각을 하며 가볍게 검을 휘두르려는데…….
휙-
“헉!”
순식간에 결과가 나버렸다.
아이른 파레이라의 검은 어느새 상대의 목에 닿아 있었고, 케빈 레스터는…… 반응하지 못했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
이를 말 없이 지켜보던 나태 공자가 검을 내렸다.
그리고 뒤편을 보며 말했다.
“다음 덤벼.”
“자, 잠깐! 무효! 이건 무효야!”
“어째서?”
“대련 시작이라고 말 안 했잖아! 이 비겁한 새끼, 갑자기 공격을…….”
“눈 마주쳤잖아.”
“…….”
“고개 끄덕였고. 긍정의 의미 아닌가?”
날카롭게 말을 끊어오는 아이른을 보며, 케빈 레스터가 부드득 이를 갈았다.
하고 싶은 말이 한 보따리였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를 못했다.
분노가 이성을 마비시키기도 했고, 저 겁쟁이 녀석이 이렇게 따박따박 말대꾸를 할 줄 몰랐다.
하지만 뭣보다 중요한 건 아이른의 검 빠르기였다.
머리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방금 전의 공격, 대비하고 있었어도 막아내지 못했을 거라고.
그는 당황과 짜증, 놀람이 뒤섞인 눈으로 상대를 노려봤다. 그저 노려보기만 했다.
그런 케빈 레스터의 뒤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할게, 케빈.”
“뭐? 됐어! 이 건방진 새끼가 지금…….”
“방심해서 그런 거 아는데, 그냥 내가 할게.”
“…….”
“저 어이없는 새끼, 내가 직접 상대해야 속이 시원하겠어.”
낮게 깔리는 마틴 러셀의 음성에 케빈 레스터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얌전히 뒤로 물러났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옆에 있는 시저 레스터에게 말했다.
“저 치사한 놈이, 아직 준비도 안 됐는데…… 알지?”
“당연히 알지. 하, 저 자식 기고만장한 거 봐.”
시저 레스터가 웃는 낯으로 형제를 달랬다. 어색한 목소리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케빈이 놀란 것만큼이나 그도 놀랐으니까. 방금 전 아이른이 보여준 검술은 누가 봐도 1년 배운 수준이 아니었다.
시저의 머릿속이 오만가지 생각으로 복잡해졌다.
‘물론 마틴이 지진 않겠지만…….’
그가 케빈을 대신해 나선 마틴 러셀을 바라봤다.
16살 동년배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큰 신장에, 두꺼운 몸통.
솔직히 말해 자신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검술을 배운 기간은 비슷했지만, 마틴에게는 자신들이 가지지 못한 뛰어난 재능과 육체가 있었으니까.
‘박살을 내. 아주 개 박살을 내줘!’
시저 레스터가 여전히 혼란스러운,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큰 분노의 감정을 품고 나태 공자를 쳐다봤다.
당연한 감정이었다.
귀족은커녕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던 녀석이 저렇게 건방지게 서 있다니.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마틴 러셀은 검을 골랐고, 아이른 파레이라의 앞에 섰다. 그리고 말했다.
“시작할까?”
“그래.”
아까와는 다른 명확한 시작.
직후, 마틴 러셀의 검이 상대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꽂혔다.
따악!
탁, 타악!
목검과 목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
끊김이 없었다. 멈춤이 없었다. 성인이 되지 못한 이의 검이라기엔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마틴 러셀의 검은 단 한 번도 아이른의 몸에 적중하지 못했다. 모조리 가로막혀 튕겨져 나갈 뿐이었다.
“으음…….”
시간이 흘렀다. 대련이 이어질수록 마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그는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처음의 여유 따위 내다 버리고 가장 빠르게, 가장 무겁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른은 뚫리지 않았다. 버거워하지 않았다.
심지어 땀조차 흘리지 않았다.
그 사실이 그를 미치게 했다.
‘이럴 수는 없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레스터 형제들보다, 아니 자신 또래의 대부분보다 훨씬 괜찮은 실력의 마틴 러셀이다.
그런 만큼 자존심도 높았고, 나태 공자가 검을 배운다는 말에도 가장 큰 웃음을 터뜨렸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깔보던 상대와 검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 그는 도저히 예전과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일 수가 없었다.
“크읏…….”
마틴 러셀의 표정이 변해간다.
억지웃음에서 무표정으로, 무표정에서 초조함으로.
그런데도 나태 공자는 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처음과 같은 모습 그대로, 싸늘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검을 받아낸다.
인정하고 싶지 않다?
이제는 그런 악에 받친 감정조차 사라졌다. 마틴 러셀의 눈에 두려움의 감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제발 누가 끝내줘.
더는 무리야, 이 이상, 하고 싶지 않아.
속으로 울부짖는 그를 보며, 레스터 형제의 표정 역시 심각하게 변해가고 있을 때였다.
“그만하지? 끝난 것 같은데.”
갑작스러운 목소리.
가주들의 음성은 아니었다. 허나 그들 또래보단 나이가 있어 보였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가볍게 거리를 벌렸다.
그의 시선은 크게 헛친 마틴 러셀이 아닌 훨씬 뒤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목소리의 주인공이 엷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정말 많이 늘었구나, 아이른. 어때, 나와도 한번 겨뤄보지 않겠어?”
“…….”
“기왕이면 진검으로 말이야.”
가이른 자작가의 장남, 라이언 가이른이 더욱 크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 * *
‘괜찮을까?’
연무장 관리인이 불안한 눈빛으로 라이언 가이른을 쳐다봤다.
아무래도 작정한 게 분명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도련님이 쓰는 것과 비슷한 대검을, 진검으로 준비해서 가져왔을 리가 없다.
‘물론 큰일이 나기야 하겠냐만…….’
그래도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까와 마찬가지로 관리인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대련의 당사자들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라이언 가이른이 말했다.
“마침 휘하 기사가 대검(大劍)을 쓰고 있어서 다행이야. 잭 스튜어트 경, 그대의 검을 아이른에게 빌려줘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대공자님.”
“그렇다고 하는군. 마음 편히 써도 좋아.”
“…….”
“아, 물론 진검으로 하지 않아도 좋아. 평소 쓰던 것과는 무게가 다를 테니…… 아니면, 네게는 진검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거니까.”
받아들이기에 따라선 깔보는 것으로 여길 수도 있는 말에, 아이른은 짧게 ‘네’라고 대답했다.
라이언 가이른의 입가가 살짝 씰룩였다. 그래, 그럼 그대로 가지. 그도 건조하게 대답했다.
자연스레 형성된 날 선 분위기.
아이른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정말이지 하나도 신경 쓰지 않았다.
가이른 가의 장자가 등장했을 때부터 익히 예상했던 일이었으니까.
조용히 심호흡한 소년이 과거를 떠올렸다.
그는 라이언 가이른에 대해 아는 바가 많이 없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검술에 탁월한 재능을 보인 그는 지난 7년간 왕립 기사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었고, 수석 졸업을 하고 돌아온 지 2개월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서로 마주친 적이라고는 단 한 번, 방학을 맞은 라이언 가이른이 자작과 함께 파레이라 영지에 방문했을 때뿐이었다.
……그러나 그때 상대가 보였던 눈빛을, 나태 공자는 평생 잊을 수 없었다.
‘경멸.’
으레 받아왔던 수준이 아닌, 그야말로 압도적인 농도의 경멸.
제 아버지의 것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치 진하고 역한 그의 눈빛은, 세간에 알려진 좋은 평가를 뒤집기에 차고 넘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그때보다 더욱 역해진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수는 양보해주마. 먼저 검을 배운 입장에서 이 정도는 해야 맞겠지.”
“…….”
“마음에 안 드나? 그냥 편하게 갈까? 그것도 아니면…….”
“좋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씰룩, 말이 끊긴 라이언 가이른의 입가가 또다시 움직였다. 그러나 여유를 잃지는 않았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좋아. 오너라.”
말을 끝낸 라이언 가이른이 자세를 잡았다.
제대로 된 자세는 아니었다.
어깨에 대충 검을 기댄 모양새.
상대를 완전히 깔보는 태도였지만, 여기 모인 누구도 이를 지적하지 않았다.
그는 남부 6가문을 넘어 왕국에서 소문난 검의 천재였기 때문이다.
압박감부터가 차원이 달랐다. 파레이라 가문의 사람들조차 그의 승리를 확신했다.
“…….”
반면 맞은편에 선 소년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그보다 못했다.
케빈 레스터를 꺾고 마틴 러셀을 몰아붙이던 기세는 온데간데없고, 일말의 존재감조차 드러내지 못하는 겁쟁이만이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
상대를 앞에 두고 눈을 감는다.
그것도 모자라 형편없는 자세를 보인다.
빈틈이 가득한, 그야말로 검의 초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자세.
이를 본 레스터 형제와 마틴 러셀의 얼굴에 황당함이 드러났다.
“하하.”
라이언 가이른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들보다 심했다. 억지로 유지하고 있던 표정이 눈빛과 비슷한 느낌을 풍겼다.
입꼬리에도 숨길 수 없는 조롱의 감정이 깃들었다.
아무리 가능성이 없다지만 저렇듯 자포자기의 모습을 보이다니.
아무리 선수를 양보했기로서니 저렇듯 무방비한 자세로 임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다른 녀석이라면 모르지만, 이 녀석은 원래 그런 녀석이었으니까.
구제 불능.
쓰레기.
겁쟁이.
그 밖에 어떤 부정적인 말을 붙이더라도 상관없었다.
모조리 어울릴 터였다. ‘나태 공자’라는 표현이 그렇듯이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가 어깨에 걸친 검을 앞으로 세웠다.
그리고 저벅저벅 아이른 파레이라를 향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격하려는 건 아니었다. 위협 정도만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저 겁쟁이 녀석이 영원히 저러고만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에 핀 조소가 더욱 진해졌고, 눈빛은 더욱 깊게 가라앉았다.
그때였다.
소년의 눈이 떠지고, 소년의 검이 움직인 것은.
“……!”
타앗!
라이언 가이른이 거리를 벌렸다. 단 한 걸음이었지만 순식간에 거리가 벌어졌다.
그 상태 그대로, 그가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공포가 담겨 있었다.
‘방금 그건?’
착각인가?
알 수 없었다.
무언가 소름 끼치는 것이 날아왔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래서 재빨리 거리를 벌리긴 했는데…… 모르겠다.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니.
아니,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다. 하나 달라진 게 있기는 했다.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앞을 바라봤다.
맞은편의 상대, 아이른 파레이라의 검이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설마 저놈이……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그렇다. 우연히 타이밍이 맞아떨어지긴 했으나, 지금의 기운이 녀석의 검술이라고 하는 건 지나친 비약이었다.
거리가 너무 멀다. 아니, 그전에 저런 애송이가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라이언 가이른의 생각은 다른 쪽으로 흘렀다.
휘발되듯 사라진 기이한 감각 대신, 나태 공자가 보이는 건방진 눈빛 쪽으로 말이다.
‘이놈이…….’
하, 라이언 가이른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거리 조절조차 못 하고 한참 멀리서 검을 휘두른 주제에, 자신이 뭔가 했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꼴이라니.
‘짜증나는군.’
참을 수 없었다.
참을 이유도 없었다. 분노에 휩싸인 그가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그가 자신의 기분을 풀기 위해 검을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툭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검.
놓친 것이 아니었다.
부서진 것이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얼음 조각상을 날카롭게 베어낸 듯 깔끔하게 떨어져 내렸다고 할 수 있었다.
“…….”
라이언 가이른이 걸음을 멈췄다. 레스터 형제와 마틴 러셀이 비웃음을 멈췄다.
잭 스튜어트도, 애런 가이른도, 그 밖에 연무장에 있는 모두가 하던 행동을 멈추고 경악의 시선을 보냈다.
그 시선의 중심에 있는 나태 공자만이, 동요 없는 표정으로 라이언 가이른의 앞에 마주 서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