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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47화 (47/388)

◈ 18. 가주 회의 (1)

가주 회의 겸 저녁 만찬 자리가 시작되었다.

하나둘씩 자리에 앉는 타 가문의 인사들을 보며, 아이른 파레이라가 시종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저희에게 호의적인 가문은…… 없다고 보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물론 모든 가문이 파레이라 가문에 적대적인 것은 아니다.

프리드 가문, 바우어 가문의 가주는 크게 모난 것 없는 성격으로, 십 년 넘게 아무런 트러블도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뿐. 끈끈한 친분이 있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다른 세 가문은…….

‘나도 잘 알고 있지.’

레스터, 러셀, 그리고 가이른 가문.

이 셋은 파레이라 가문에 확실한 악감정을 가지고 있다.

‘필 가이른 자작을 특히 조심하십시오. 전대부터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아이른이 굳은 표정을 지었다.

시종 마르쿠스의 경고가 아니어도 알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자신을 가장 괴롭혔던 게 다름 아닌 가이른 자작가의 차남, 애런 가이른이 아니던가.

당연한 말이지만, 이는 부모의 묵인이 없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행동이다.

소년은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필 가이른 자작 쪽을 힐끗 쳐다봤다.

‘어머니와 키릴이 식사에 참여하지 않은 것도 저 사람 때문…….’

삼백안(三白眼)에 매부리코, 그리고 굉장히 마른 얼굴.

예전에 몇 번 마주했을 때도 느끼긴 했지만, 정말이지 신경질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외관이다.

눈빛도 뭔가 부담스럽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더 그렇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회피할 생각은 없다.

실수하지 말고 당당히 있자.

마른침을 삼키며, 아이른 파레이라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남부 교역로의 안전을 위해 귀한 시간을 내주신 점,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남부 여섯 가문의 번영과 평화를 위해.”

“평화를 위해!”

하룬 파레이라 남작을 따라 다섯 가주가 외쳤고, 하늘 높이 와인 잔을 들었다.

이를 지켜보던 아이른 역시 뒤늦게 잔을 들었다.

술을 마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나, 자기 또래의 자제들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이 입가에 잔을 가져간다.

그런 상황에서 혼자 멀뚱멀뚱 앉아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소년은 질끈 눈을 감은 채 화이트 와인 몇 모금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리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모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을 느꼈다.

‘뭔가 실수한 건가?’

손에서 땀이 난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모르겠다. 침묵이 감돈지는 1초도 되지 않았지만, 그 짧은 순간이 1분이 넘게 느껴질 정도로 갑갑했다.

“아이른 파레이라.”

심지어 그 적막을 깬 이는 다름 아닌 필 가이른 자작. 그가 가장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었다.

소년은 밖으로 튀어나올 듯 거센 심장박동을 느끼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조롱과 비아냥거림으로 가득할 그의 뒷말을.

그러나 가이른 자작의 목소리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온화했다.

“잔을 쥐는 법이 조금 잘못되었구나.”

“……예?”

“레드 와인이라면 손바닥으로 잔을 덮듯이 쥐어도 아무 상관 없다. 하지만 지금의 화이트 와인 같은 경우는 이 잔의 기다란 부분, 스템을 쥐는 것이 좋지. 차게 마시는 술에 손의 온기가 전달되면 좋지 않으니 말이다.”

“아,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자, 다시 한번 제대로 잡아 보려무나.”

필 가이른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누구보다 인자한, 아이른 파레이라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던 얼굴.

소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잔을 고쳐 쥐었고, 가이른 자작이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아주 좋아. 다만, 새끼손가락도 떼는 편이 좋겠어.”

“예?”

“아…… 모르나? 지금은 흔하지만, 예전에는 향신료가 무척 귀해서 엄지와 소지로 아주 조금씩만 집어가야 했던 시절이 있거든. 그런데 잔을 모든 손가락으로 쥐고 있으면, 소지에 물기가 묻어 향신료를 낭비하게 되는 일이 잦았지.”

“그렇군요.”

“물론 지금은 후추도, 육두구도 풍부하니 굳이 잔에서 새끼손가락을 뗄 필요는 없지만…… 귀족으로서 테이블 매너라는 게 있으니 말이야. 하하하.”

“하하, 그렇지요. 사소한 부분에서 평민과 귀족의 차이가 생기는 법이지요.”

“맞는 말씀입니다.”

맞장구를 치는 레스터 남작과 러셀 남작.

그리고 침묵을 지키고 있는 파레이라 남작.

그들의 표정을 본 아이른이 비로소 깨달았다. 필 가이른 자작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아니, 말이 이상하게 와전될 뻔했군요. 레스터 남작, 나는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닙니다. 파레이라 남작께서도 오해를 거둬주시지요.”

“……오해하지 않았습니다.”

“휴, 정말 다행입니다. 나는 그저 아이른을 생각해서 한 말이었습니다.”

“자자, 이쯤 하지요. 우리가 모인 이유는 따로 있지 않습니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가이른 자작, 그리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화제를 돌리는 러셀 남작. 식탁의 분위기는 다시금 부드럽게 흘러갔지만, 파레이라 남작의 표정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본 아이른 파레이라는, 식탁 밑으로 조용히 손을 거두었다. 포크에도, 나이프에도 일절 손을 대지 않았다.

무언가를 먹을 수 있을 정도로 편한 마음이 아니었다.

* * *

가주들의 지적, 질문들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중요한 것들은 아니었다.

대부분이 미술과 음악적 지식과 같은 교양에 관련된 것들이었고, 귀족이라면 누구나 답할 수 있을 정도로 수준도 높지 않았다.

허나 이는 어디까지나 ‘평범한’ 귀족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일 뿐.

평생을 방안에 틀어박혀 있던 아이른 파레이라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 어려운 질문들이었다.

귀족들의 질문이 툭툭 던져질 때마다 소년은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고, 질문이 없는 시간에도 언제 자신에게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까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하하. 너무 신경 쓸 필요 없단다.”

레스터 남작, 러셀 남작, 가이른 자작은 결코 공격적인 말투로 소년을 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이상 부드러울 수 없을 정도로 상냥한 태도로 아이른 파레이라를 어루만졌다.

허나 모두가 알고 있었다.

“모르는 건 이제부터 하나씩 배워 가면 되는 거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파레이라 남작?”

그들이 내뱉는 따사로운 격려와 칭찬.

그 모든 것들이 나태 공자가 쌓아왔던 게으름과 무지에 대한 공격이고, 이를 방치해왔던 아버지에 대한 공격이라는 것을 말이다.

“죄송합니다. 속이 좋지 않아서, 먼저 일어나 봐도 되겠습니까?”

“……그러도록 해라.”

결국 참지 못하고 일어나는 아이른 파레이라를, 하룬 파레이라는 잡지 못했다.

일순 테이블에 정적이 감돌았다. 가주들을 비롯한 모두가 나태 공자가 있던 자리를 말없이 지켜봤다.

레스터 남작이 큼큼, 목을 가다듬은 뒤 말했다.

“많이 늠름해지긴 했지만…… 이번 몬스터 토벌, 괜찮겠습니까?”

“…….”

파레이라 남작은 침묵을 지켰다.

오히려 그에 대답한 건 가이른 자작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당연히 가능하지요!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아이른은 이번 기회를 통해 하나씩 배워나갈 겁니다.”

“아, 그, 그렇죠. 하하.”

“뭐 다소 벅찬 일에 맞닥뜨릴 수도 있지만, 그때마다 어른인 우리가 함께 알려주고 보듬어주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파레이라 남작?”

나긋나긋한 어조로 묻는 필 가이른을 보며, 하룬 파레이라가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의 행동과는 달리, 그의 표정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 * *

“허억, 허억.”

한발 먼저 식사를 마치고 나온 나태 공자가 찾은 곳은 가문의 연무장이었다.

그는 연신 거친 숨을 토해내며 근처 나무에 몸을 기댔다. 의지할 곳이 생겼지만, 마음은 편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짙은 자괴감이 자신의 몸을 옥죄는 게 느껴졌다.

“나는…….”

아이른은, 자신이 있었다.

겉으로는 아니라고 했지만 알고 있었다. 자신이 예전과는 달라졌다는 것을.

자신의 힘이 아닌 신비로운 꿈에 의지했을지언정, 더욱 강해지고 보다 단단해졌음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맞는 말이기는 했다.

지금의 그는 예전보다 훨씬 더 검을 잘 다루고, 더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고, 더 넓은 세상을 경험했다.

애런 가이른의 시비를 아무렇지 않게 넘겼던 것처럼, 타 가문의 압박도 수월하게 넘길 수 있을 거라…… 그렇게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필 가이른 자작의 악의는 소년의 생각보다 훨씬 음습했다. 그리고 비열했다.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혹은 선을 넘더라도 항의하기 애매한 수준에서 이어지는 은근한 압박은 아이른으로서는 처음 겪어보는 종류의 것이었고, 제대로 한마디 반박조차 할 수 없었다.

아니, 여러 번 겪어봤더라도 힘들었을 것이다.

파레이라의 힘이 가이른을 필두로 한 세 가문을 압도하는 것이 아닌 이상은 도리가 없을 테니까.

아버지께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일 터.

여기까지 생각한 아이른 파레이라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윽.”

몰랐다.

아버지가 어떤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가족들이 어떤 아픔을 이겨내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자신의 존재가 그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짐이 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 혼자만 편해지기 위해 10년의 세월을 방에 틀어박혀 있었을 뿐.

그래서 더 힘들었다.

그것이 더 괴로웠다.

가이른 자작이 쏟아냈던 말들보다, 자기밖에 몰랐던 지난날의 과오가 더욱 아프게 소년의 가슴을 찔러왔다.

뒤늦게 이를 깨달은 나태 공자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

한바탕 눈물을 쏟아낸 소년이 비틀비틀 어딘가를 향해 걸어갔다.

무기 진열대였다. 나무 재질의 대검. 익숙한 무게를 집어 든 그가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알고 있었다.

이 역시 도망치는 행위라는 것을.

토벌전이 아닌 가주 회의에서조차 도망쳐 나와 검에 의지하는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꼴불견일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을 알면서도 나태 공자는 검을 휘둘렀다.

그러지 않고서는 지금의 감정을 버틸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뭐야, 여기 있었네?”

“오, 자세 꽤 괜찮은데? 검술관 갔다 온 게 거짓말은 아니었나 봐?”

“…….”

레스터 남작의 쌍둥이 아들, 케빈과 시저.

러셀 남작의 장남, 마틴.

셋 모두 아이른 파레이라와 비슷한 나이로, 그보다 훨씬 일찍 검에 발을 들여놓은 아이들이었다.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마틴 러셀이 말했다.

“어떻게 여기 왔냐고? 우리도 먼저 나왔어. 어른들끼리 할 얘기가 있다고 하더라고.”

“…….”

“어른들 얘기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 심심한데, 우리끼리 대련이나 하고 있을래?”

“…….”

“뭐야. 왜 대답이 없어. 와인 잔 쥐는 법만 모르는 게 아니라, 검 쥐는 법도 제대로 몰라서 그래?”

“에이, 너무 뭐라고 하지 마.”

“그러니까. 1년이면 검 쥐는 법 배우기에는 빠듯한 시간이지. 나태 공자한테는 말이야.”

“하하하하, 그럴 수도 있겠네!”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는 모습을, 아이른이 빤히 지켜봤다.

그는 이미 한 번 도망쳤다.

매사에 당당하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가이른 자작의 말 몇 마디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혼자서는 버티지도 못해 검에 의지하기 위해 연무장을 찾았다. 창피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스윽

“오, 뭐야. 진짜 하자고?”

“오오, 대단한데?”

“그런데 괜찮겠어? 얼굴에 눌어붙은 눈물 자국부터 닦는 게 어때?”

두 번 연속으로 창피한 일을 만들 수는 없었다.

마음속에 뜨거운 불꽃을 품은 나태 공자가 말했다.

“덤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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