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43화 (43/388)

◈ 16. 요술사 (4)

“…….”

잭 스튜어트의 이야기가 전부 끝날 때까지, 필 가이른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의자에 앉은 그는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물론 영원히 그러고 있지는 않았다.

잠시 후,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니까…… 영지 근처에서 마침 돌아오는 게으름뱅이 녀석을 만났다?”

“예.”

“서로 인사를 하던 중에 애런이 평소처럼 굴었고.”

“예.”

“그런데 그 나태한 녀석이, 예전과 다르게 도망치지도,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고…….”

“…….”

“그것도 모자라, 눈빛으로 내 아들을 주눅 들게 했다…… 내가 이해한 게 맞아? 너 이렇게 말한 거 맞지?”

“……적어도 제가 본 바로는 그러했습니다.”

“지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너 이 새끼, 눈깔 제대로 뜨고 다니는 거 맞아!”

콰당탕!

와장창!

쨍강! 쨍그랑!

필 가이른이 고함과 함께 테이블을 뒤엎었다. 위에 놓여 있던 유리잔이 산산이 부서지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뜨거운 찻물 몇 방울이 잭 스튜어트의 얼굴로 튀었다.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잠시 후,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져 있던 필 가이른의 표정이 풀어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놀랍도록 차분해진 그가 말을 이었다.

“아마 이렇게 말했을 거야. 이 말을 한 게 네가 아니라 다른 놈팡이였다면 말이야.”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믿어야지. 당연히 믿어야지. 내가 가장 신임하는 기사인데. 너 아니면 내가 누굴 믿겠어? 히히히.”

희번득 눈을 뜬 채 히죽히죽 웃는 모습도, 종잡을 수 없는 감정 변화도 소름 끼쳤다.

하지만 잭 스튜어트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그는 주군의 생각이 정리되길 기다렸다.

“허, 하지만 신기한 일이야. 솔직히 아직도 믿기지 않아. 그 병신 같은 애새끼가 심지가 생겼다고? 죽을 날 받아 놓은 노인처럼 눈알 흐리멍덩한 그 녀석이? 진짜 달라진 거 맞아?”

“변한 건 분명합니다. 체격도 눈에 띄게 좋아졌고, 사람을 마주하는 태도도 딴판입니다. 아무래도 크로노 검술관에서 얻은 게 많은 것 같습니다.”

“허, 시발! 검술관이 무슨 요술방도 아니고. 어쨌든 짜증나는구만. 하룬, 그 미끈하게 생긴 놈이 웃고 있을 걸 생각하니 속이 뒤틀려.”

필 가이른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는 예전부터 하룬 파레이라를 싫어했다.

딱히 상대가 뭔가를 한 건 아니었다.

녀석은 자신보다 잘생겼고 머리숱도 많다.

정략 결혼한 자신과 달리 연애결혼으로 예쁜 부인도 얻었다.

그것도 둘씩이나. 참고로 자신의 부인은 박색하기로 소문이 났다.

그것만 해도 열이 받는데, 녀석의 영지가 날로 부유해졌다. 녀석을 향한 영지민들의 칭송도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재수없는 녀석.

생각만 해도 밥맛 떨어지는 녀석.

그래서 그랬다.

녀석에게 있어서 누구보다 소중한, 허나 병신과 다름없는 아들 녀석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건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물어뜯기 좋은 녀석이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고…….’

“젠장. 병신 같은 녀석! 계속 병신처럼 방에나 처박혀 있을 것이지, 왜 기어나가서! 왜 사람 구실 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거야!”

필 가이른이 계속해서 욕설을 내뱉었다. 말소리가 빨라지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충혈된 눈동자와 달달달 떨리는 무릎이 그의 스트레스를 대변했다.

그때, 잠자코 있던 잭 스튜어트가 넌지시 말했다.

“자라나는 싹은 다시 밟으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응? 그렇지, 그렇지! 하지만 어떻게?”

“방법이야 지금부터 생각하면 되죠. 하지만 어렵지 않을 겁니다. 곧 토벌전이 있지 않습니까.”

“아하!”

짝!

가이른 자작이 손뼉을 쳤다. 히히히 웃음도 터뜨렸다.

주군의 눈치를 살핀 잭 스튜어트 역시 엷은 미소를 흘리며 말을 이어 갔다.

“나태 공자의 실력이 어떤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일이 있으면 문제 몇 개쯤 만들기야 어렵지 않을 거고, 그 와중에 트집내고 흠잡는 건 훨씬 쉬운 일입니다. 어찌 됐건 상대의 이름만 다시 진창에 처박으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맞아! 맞는 말이다!”

“그도 아니라면 더 독한 방법도 있고요.”

“그것도 마음에 드는걸! 역시, 역시 잭이야! 그대만 믿겠다!”

필 가이른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잭 스튜어트를 칭찬했다. 기사는 적당히 주군의 비위를 맞춰 준 뒤, 조심스레 방을 나섰다.

“미친놈.”

얼굴에 묻은 찻물을 닦아 낸 잭이 인상을 썼다.

대우가 좋긴 했지만, 가이른 자작의 광증을 볼 때마다 입맛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거랑 별개로, 이번 일은 그리 문제 될 건 없겠지.’

애초에 모든 행사에 불참했던 녀석이기도 하고, 혹시라도 마음을 고쳐먹었다 한들 걱정거리는 아니다. 앞서 말했던 수작들조차 필요 없을 터였다.

‘아마 대공자 선에서 끝날 거야.’

아버지보다 영리하고, 유능한, 그리고 더 음습한 인물. 라이언 가이른.

헤일 왕립 기사 아카데미를 높은 성적으로 졸업한 그를 떠올리며, 잭 스튜어트는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 * *

크로노 검술관에서 돌아오고 일주일.

아이른 파레이라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육체 단련과 검술 수련을 이어 갔다.

명확한 답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소년은 여전히 자신의 검이 무엇인지, 자신이 나아갈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더는 사내의 검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물론 여러 가지 도움을 받기는 했다.

자신이 방에서 나온 것도, 검술관을 경험하고 많은 사람들과 연을 맺어 좋은 영향을 받은 것도 모두 신비로운 꿈과 사내의 검 덕분이다.

하지만 적어도 검술에서만큼은 그 영향력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기에, 소년은 이를 악물고 크로노 검술관에서 배운 검법만을 수련했다.

잊을 때까지, 사내의 검이 희미해질 때까지 계속.

“헉, 허억, 헉…….”

“미친…….”

“언제까지 하시려는 거지?”

그런 나태 공자를 바라보며, 몇몇 병사들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성장한 도련님의 모습에 자극받아 자발적으로 연무장에 나온 이들이었다.

평생을 게으름뱅이라고 손가락 받던 인물의 극적인 변화가 그들의 마음에 불씨를 심어 준 것이다.

허나 뜨거운 열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잠깐의 동기부여만으로 쫓아가기엔, 아이른의 체력이 너무 좋았다.

“아이고, 나는 이제 못 하겠다.”

“그래. 이 정도면 됐지.”

결국 하나둘씩 연무장을 떠나가는 병사들.

마침 휴식을 시작한 아이른이 그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검술관의 아이들을 떠올렸다.

일리아 린제이, 브랫 로이드, 주디스, 그 밖의 수많은 예비 수련생들.

‘걔들이 진짜 대단했던 거구나.’

새삼 느끼는데, 그들은 정말로 대단한 아이들이었다.

자신이야 신비로운 꿈의 덕을 봤다지만, 그들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았다.

오로지 순수한 열정, 투지, 정신력만으로 지옥 같은 훈련을 버텨 냈다. 그들의 체력은 처음부터 있던 것이 아니었다.

‘내가 진짜 꿈 없이 홀로 설 수 있을까?’

다시금 떠오른 불안.

아이른이 고개를 흔들었다.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다. 몇 번이고 겪어 보지 않았는가.

새로이 마음을 다잡은 그가 재차 검을 휘두르려는 찰나였다.

휙-

퍼덕퍼덕!

폴짝!

믜야옹-!

“하하 그것도 못 잡니?”

“…….”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낯선 광경에, 소년의 집중력이 깨졌다.

굉장한 일이었다. 웬만한 일로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자기 일에 몰두하는 게 지금의 아이른 파레이라다.

허나 지금의 광경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터였다.

낚싯대에 매달린 벌레 모양의 장난감을 쫓아다니는 얼룩 고양이 세 마리.

그리고 그 낚싯대를 이리저리 휘두르고 있는 검은 고양이 한 마리.

이런 해괴망측한 일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는가.

덕분에 자리를 뜨려던 병사들과 일하러 가던 하녀들, 심지어 시종 마르쿠스까지 고양이들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이유야 들었다.

키릴 파레이라가 자신의 말을 잘 들을 것 같으니, 자신을 꼬드길 생각이라고. 이것이 요술사 루루가 직접 한 말이었다.

허나 그날 이후로 루루는 소년에게 한마디 말도 건네지 않고 있었다.

뭐, 매일같이 아이른의 근처에 눌러앉아 있긴 했다.

허나 첫날에는 잠깐 쳐다보는 듯하다가 내내 잠만 잤고.

둘째 날에는 어디서 찾아온 공을 갖고 자기 혼자 놀았다. 간간이 그루밍도 했다.

그리고 어제부터는 어디서 데려온 건지 모를 고양이들과 함께 놀고만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매사에 무덤덤한 편인 아이른조차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후우.”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한 그가 고양이 요술사 루루 쪽으로 다가갔다.

때맞춰 시종 마르쿠스도 뒤따랐다.

아이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마르쿠스는 왜?”

“그, 고양이 요술사처럼 특이한 존재도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무슨 대화를 하시려나 궁금해서…….”

거짓말이었다. 마르쿠스는 그냥 고양이를 좋아했고, 가까이서 구경할 구실을 찾고 싶었던 것뿐이다.

물론 아이른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루루를 향해 다가갔고, 얼룩 고양이 세 마리는 후다닥 도망갔다.

다행히 루루는 도망가지 않았다.

인상을 찡그리지도 않았다.

그가 말했다.

“왜?”

“아니…….”

황당했다.

자신을 공략한다느니 뭐니 말해 놓고, 이제 와서 ‘왜?’라니.

소년은 말했다. 아니, 하려다 멈췄다.

‘그런데, 존대를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아이른이 고개를 저었다.

요술사이긴 하지만, 고양이에게 존대를 하는 건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편하게 대하기로 마음먹은 그가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날 공략……하겠다며?”

“어! 그 말투, 어디서 들어 본 적 있는데. 맞다! 어른 인간들이 보는 소설에서 봤어!”

“……네가 한 말이잖아.”

“그것도 맞지.”

“아무튼, 그래 놓고 왜 나한테 아무 말도 안 걸어?”

“대화하는 재미가 없을 거 같아서?”

“어?”

“키릴은 톡톡 튀는 맛이 있는데, 넌 별로야. 계곡에 수백 개 쌓인 조약돌만큼 심심해 보여.”

“…….”

맞는 말이긴 했다. 오랜 시간 방에만 처박혀 있던 아이른 파레이라는 말주변이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고양이한테까지 저런 말을 들으니 뭔가 기분이 그랬다. 잠깐이지만 반박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루루가 자신의 옆구리에 낚싯대를 집어넣었다.

아무것도 없던 곳에 기다란 물건이 쑥 들어가는 걸 본 주변 사람들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헌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루루는 낚싯대를 집어넣은 것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손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뭔가를 찾았다는 듯, 밝은 표정을 지었다. 종족이 다른데도 감정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가 말했다.

“내가 선물 줄게.”

“응?”

“사람들은 뇌물이라고도 하더라.”

“…….”

“이거 받고, 마음에 들면 동생한테 잘 좀 말해 줘.”

“아니…….”

소년이 당황했다. 뇌물이라는 노골적인 표현도, 자신의 의도를 곧이곧대로 털어놓는 고양이의 태도도 모두 예상외였다. 그는 혼란에 빠졌다.

허나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특히 옆에 있는 시종 마르쿠스는 고양이 요술사가 건네는 물건이 무엇일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쭉 빼 고양이의 작은 손 위에 놓인 물건을 확인했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묘, 묘안석!”

“묘안석?”

“진짜?”

주변 인물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 역시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

묘안석이 뭔지 모르는 건 아이른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알 것 같았다.

‘엄청 비싼 보석 같은데…….’

그가 물었다.

“마르쿠스, 이거 비싼 거야?”

“엄청 비싼 거야.”

“엄청 비싼 거죠.”

고양이 요술사 루루와 마르쿠스의 입에서 동시에 대답이 튀어나왔다.

잠시 뜸을 들인 시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정도 크기라면, 그리고 만약 이게 진짜 묘안석이라면…… 아마 파레이라 영지의 1/4은 살 수 있을 겁니다.”

“…….”

상상을 초월한 값어치에 나태 공자가 할 말을 잃었다.

그 모습을 본 루루가 폴짝 뛰어 시종의 어깨 위에 앉았다.

그리고 상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이렇게 말했다.

“나한테 유리한 말을 해 주다니, 아주 고마운걸?”

“그, 그냥 저는 있는 그대로의 값어치를 말한 것뿐…….”

“혹시 쟤 설득하게 되면 너도 좋은 것 줄게.”

고양이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시종이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이른이 뒤늦게 물었다.

“이렇게 귀한 걸 주면서까지 내 동생을 제자로 삼으려는 이유가 뭐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