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요술사 (3)
앞서도 언급했지만, 아이른 파레이라가 크로노 검술관에 조건부 합격한 것은 대부분이 모른다.
파레이라 남작이 비밀로 했기 때문이다.
떨어질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외부에 알렸다간 아들이 부담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 그 자신조차도 아이른을 못 믿고 있기는 했다.
1년이라는 시간은 사람을 바꾸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으니까.
아들을 끔찍이 사랑하는 아버지조차 그런데, 다른 이들은 어떨까.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머릿속에 있는 아이른은 여전히 나태 공자였다.
크로노 검술관으로 향하기 직전에 보였던 모습은 희미해진 지 오래다.
그런 그가, 1년간 열심히 노력하긴 했겠지만 결국 ‘정식 입관 실패’라는 꼬리표를 달고 온 16살 소년이 꼭두새벽부터 무리를 한다?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언제까지 뛰실 거지?”
“그러게. 벌써 저 속도로 10분은 넘게 뛴 것 같은데…….”
건강한 사람이 몇 분쯤 달리는 건 전혀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적당한 속도로 뛸 때의 이야기지, 지금처럼 전력 질주하듯 빠르게 달린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체력 좋은 병사들도 헉헉대며 구역질을 하기 십상이다.
헌데 아이른 파레이라는 병사들이 본 것만 해도 10분 넘게 저 속도를 유지하고 있다.
아니다.
눈썰미 좋은 젊은 병사 하나가 중얼거렸다.
“더 빨라지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 그러게.”
병사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는 약간의 염려였다면, 지금은 훨씬 심각했다.
자신들이 지켜보는 와중에 도련님이 무리하다 탈이 난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겠는가.
말려야 한다.
부담스럽지만 공자님을 제지해야 한다.
서로 눈치를 보던 병사들 사이에서 최고참 하나가 꿀꺽 침을 삼켰다.
그는 긴장한 얼굴로 파레이라 가의 장자에게 접근했고, 연무장을 뱅뱅 돌던 아이른은 다행히 의도를 파악하고 뜀걸음을 멈췄다.
그런데…….
“어?”
“왜 그래?”
“아니…… 그게…….”
‘왜 이렇게 멀쩡하시지?’
정말이었다.
멈춰선 도련님은 그야말로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평소보다 빠르겐 했지만 규칙적이고 안정적인 호흡에, 심지어 땀도 몇 방울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살펴봐야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누가 보면 강도 높은 달리기가 아니라 스트레칭만 한 것으로 착각할 수준이었으니, 고참 병사가 당황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덕분에 할 말이 궁해져 버렸다.
‘어, 어떻게 하지.’
원래는 걱정이 되어 도련님을 멈춰 세우려고 한 행동이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져 버렸다.
그렇다고 ‘아, 문제없으니 그냥 하던 일 하셔도 됩니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다행히 난처한 상황은 곧바로 해결되었다.
아이른이 뭔가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아 맞다, 오늘 병사들 새벽 훈련이 있을 예정이라고 했지.”
“아? 아아, 맞습니다! 어, 그, 저, 도련님을 방해하려는 건 아니고…….”
“아니, 괜찮아. 슬슬 달리기는 그만 하려고 했어.”
“그, 그렇습니까?”
“그래. 난 구석에 있는 저 철봉 사용할게.”
아이른이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사실 굉장히 애매한 타이밍에 끊겨서 몸이 아직 근질거렸다.
하지만 괜찮았다. 달리기만 운동이 아니니까. 소년은 철봉으로 향했고, 가볍게 폴짝 뛰었다.
그리고 여유 넘치는 모습들로 운동을 이어 갔다.
“…….”
“…….”
그 모습을, 병사들이 넋 놓고 지켜봤다.
집합 시간이 가까워짐에 따라 모여드는 다른 병사들 역시 비슷한 표정이 되어 나태 공자를 지켜볼 따름이었다.
* * *
“아오, 졸려.”
늘어지게 하품을 한 파레이라 영지의 기사, 오른 주크란이 연무장으로 향했다.
새벽 6시에 예정된 훈련을 지휘하기 위함이었다. 술은 먹지 않았지만 잠을 뒤척였다 보니 영 개운하지가 않았다.
‘젠장, 토벌 시즌 되니까 아주 들들 볶는구만.’
헤일 왕국 남부 6가문은 봄마다 연합 부대를 편성해 몬스터 토벌에 나선다.
주기적인 토벌해 주지 않으면 산속의 몬스터들이 주요 길목으로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이 기간에는 상대적으로 할 일이 많다. 주변 눈치도 많이 보이고.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파레이라 가문의 명성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었다.
인자하고 유능한 파레이라 남작을 향한 칭송, 계속해서 부유해지는 영지, 그리고 앞날이 창창한 요술사 키릴 파레이라.
분명 좋은 일이지만, 가파른 상승세는 주변의 질시를 유발하기 마련이다.
주변 가문들의 은근한 견제를 떠올린 오른 주크란이 인상을 찌푸렸다.
‘얕보이지 않기 위해서는 나도 좀 바짝 조일 필요가 있어. 자칫 잘못하면 남작께서 새로 영입한 기사 녀석들에게 자리를 뺏길지도…….’
“쯧.”
이런저런 고민을 이어 가던 그가 혀를 찼다.
어제 오후, 검술관에 유학 갔던 장자가 돌아왔다는 부분에 생각이 미쳤던 탓이다.
아무래도 파레이라 영지의 가장 큰 흠이 나태 공자이니만큼, 앞으로 있을 견제는 더 집요하고 음습할 가능성이 컸다.
그로 인해 생기는 일거리와 스트레스를 자신 또한 나눠 받아야 할 테고.
여기까지 사고가 흐르자 안 그래도 좋지 않던 기분이 더욱 밑으로 가라앉았다.
“에휴. 속 편한 도련님은 모르겠지. 자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마음 졸이고 신경 쓰는지…… 어?”
연무장의 입구에 들어선 오른 주크란이 놀란 목소리를 냈다.
분위기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현재 시각은 5시 55분. 전원 집합은 당연하고, 각 잡고 대기까지 하고 있어야 마땅할 병사들이 해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마치 시장바닥에 모여 뭔가를 구경하는 듯한 느낌.
확 열이 받은 그가 살금살금 병사들 쪽으로 향했다. 지근거리에서 왁! 호통을 쳐 혼을 쏙 빼줄 생각이었다.
“앗, 주크란 기사님!”
그런데 실패했다. 젊은 병사 하나가 자신을 먼저 발견했다.
심지어 이 상황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상기된 얼굴의 녀석이 그를 향해 뛰어오며 말했다.
“저것 좀 보십시오.”
“뭔 소리야, 지금!”
“도련님이 단련하고 있습니다.”
“뭐? 도련님이? 이 시간에?”
놀란 표정을 지었던 오른 주크란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검술관으로 떠나기 한 달 전부터는 공자님도 열심히 검을 휘둘렀었지.
‘그래도 검술관 가서 정신은 차리신 모양이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병사들이 이렇게 무질서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가 어떻게 훈계할지를 생각하며 병사들 쪽으로 향했다.
“허어.”
몇몇 놈들은 인사하고, 몇몇 놈들은 자신이 온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도련님을 쳐다본다.
오른은 황당함을 느꼈다.
도대체 뭐가 그리 신기하기에 자신이 왔는데도 알아채지 못하는가.
그는 궁금증을 품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후, 병사들과 비슷한 표정이 되어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후웁, 훕.”
“하아, 하아.”
규칙적이고 안정적인 호흡.
그에 따른 정교하고 힘 있는 동작.
아이른 파레이라는 여유롭게 철봉 운동을 하고 있었다. 턱걸이와 비슷한 동작이었다.
하지만 난도는 차원이 달랐다.
소년은 턱까지만 몸을 당겨 올리는 것이 아니라, 이를 훌쩍 넘어 허리까지 봉 위로 올렸던 것이다.
심지어 그것만이 아니었다.
“저 원판, 무게가 어떻게 되지?”
“글쎄, 잘 모르겠는데…… 아, 저쪽 구석에 똑같은 거 있다. 한번 들어볼까?”
동작을 행하고 있는 소년의 허리에는 밴드가 매어져 있었고, 뒤편으로는 무거운 원판이 매달려 있었다.
궁금증이 생긴 병사 하나가 두 손으로 같은 무게의 원판을 들었다.
허나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내려놓은 뒤, 기겁한 표정으로 철봉 쪽을 바라봤다.
다른 병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허어, 저 녀석이 비틀거릴 정도로 무거운 무게를 달고…….”
“저런 동작을 하고 있다고?”
“1년 사이에 뭔 일이 있었던 거야?”
“아니, 검술관에서 탈락하신 거 아니었어?”
넋 놓고 아이른을 구경하던 병사들의 화제가 다른 쪽으로 흘렀다.
어떻게 도련님이 저만한 성취를 거둘 수 있었는지, 저만한 성취를 거뒀는데도 떨어진 이유가 뭔지.
물론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들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로노 검술관이 평범한 검술관에 비해 얼마나 대단한지.
그 대단한 크로노 검술관에서도 이번 기수가 얼마나 특별하고 치열했는지.
거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이들이 어떤 훈련을 소화해냈고, 소화해낸 이들이 어느 정도의 체력과 정신력을 가졌는지.
마지막으로, 아이른 파레이라가 그 재능 넘치는 수련생들 사이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지.
병사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리고 이는 오른 주크란도 마찬가지였다.
“주크란 님!”
“어, 어? 뭐냐!”
병사 하나가 오른 주크란을 불렀다. 넋 놓고 나태 공자를 바라보고 있던 그가 뒤늦게 대답했다.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지금 공자님 정도면 정말 대단한 수준 아닙니까? 도대체 왜 검술관에서 떨어졌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도 몰라, 이 자식아! 애초에 1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도대체?’
그도 이해할 수 없었다.
크로노 검술관이 유명한 거야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런 신체 능력의 인물을 떨어뜨릴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허나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껏 깔봤던 나태 공자를 인정하는 것도, 자신의 무지를 내비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잠시 생각한 그가 입을 열었다.
“이 자식아, 크로노 검술관이 신체 능력만으로 입관할 수 있는 곳인 줄 알아?”
“아, 아닌가요?”
“당연하지. 검술관이 뭐야? 검 배우는 곳이잖아. 물론 도련님이…… 꽤 달라진 모습이긴 하지만, 솔직히 평생 검도 안 잡아 본 분이 그런 명문 검술관에 입관하는 건 어려운 일이지.”
“아, 하긴…….”
“그렇겠구나. 도련님은 검을 수련하신 적이 없으니…….”
“주크란 님 말이 맞겠네.”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우쭐한 오른 주크란이 말을 이어 갔다.
“게다가 너희들 눈에는 충분히 대단해 보일지 몰라도, 저 정도는 기사들 수준에선 아무것도 아니야.”
“헉, 그렇습니까?”
“그럼 주크란 님도 저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습니까?”
“당연하지. 기사 서임 받는 게 만만해 보여?”
주크란이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그도 할 수 있는 건 사실이었다. 아무리 젊은 시절의 열정이 없다 해도 일단은 기사니까.
다만 쉽게 할 수는 없고, 그로서도 꽤 진을 빼야 하는 건 사실이었다.
물론 이런 부분까지 병사들에게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 그는 이쯤에서 잡담을 마무리하고, 훈련을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그때, 아이른 파레이라의 동작이 바뀌었다.
“우……와아.”
“저게 어떻게 가능하지?”
“…….”
“주크란 님! 주크란 님은 저것도 쉽게 할 수 있습니까?”
철봉에 의지해 지면과 몸을 수평으로 만든 뒤, 발바닥이 하늘을 향하도록 다리를 들어 올린다.
그리고 시계추가 움직이듯 좌, 우로 왔다 갔다 움직인다.
그야말로 미친 난도의 움직임이었다. 어마어마한 코어 힘이 아니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수준.
잠시 이를 지켜보던 주크란이 크게 성을 내며 외쳤다.
“이 자식들아! 벌써 6시 10분이다! 잡담 언제까지 할래! 훈련 대열 갖춰!”
* * *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버님.”
“그래, 고생했다.”
파레이라 영지에 다녀온 둘째 아들을 보며, 필 가이른 자작이 웃음을 지었다.
애런 가이른은 살짝 의기소침한 얼굴로 물러났고, 방에는 자작과 잭 스튜어트만이 남게 되었다.
평소와 같은 시니컬한 표정이 된 필 가이른이 물었다.
“저 녀석, 왜 저렇게 똥 씹은 얼굴이야? 남작 영지에서 문제라도 있었어?”
“…….”
“뭐 있는 모양이구만. 솔직하게 다 털어놔!”
“……알겠습니다.”
늙은 살쾡이 같은 목소리에, 잭 스튜어트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바를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