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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41화 (41/388)

◈ 16. 요술사 (2)

“응.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

키릴은 아이른 파레이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포장을 뜯었다. 그리고 조그만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꺼내 들었다.

목걸이였다. 푸른색의 아름다운 사파이어 목걸이.

허나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오빠가, 다른 사람도 아닌 대부분의 삶을 방에서만 살아온 오빠가 자신에게 뭔가를 챙겨 줄 생각을 했다는 게 중요했다.

잠시 목걸이를 바라보던 12살 소녀가 가까스로 말했다.

“……마워.”

“응?”

“……고맙다고. 한 번에 알아들어.”

“아, 미안…….”

평소와 다르게 굉장히 작은, 그리고 평소와 비슷하게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

이를 본 파레이라 부부의 얼굴이 환해졌다.

키릴도 키릴이지만, 아이른의 놀랍도록 긍정적인 변화가 둘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나태 공자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마르쿠스 말을 듣길 잘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들을 위해 선물 하나씩은 챙겨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던 시종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아마 자신은 아무런 생각도 못 하고 빈손으로 가문에 돌아왔을 것이다.

‘앞으로는 더 챙겨야지. 예전에 못 했던 만큼.’

자신은 느끼지 못하는 변화.

하지만 남들이 느끼기엔 누구보다 큰 변화를 보여 준 가문의 장자.

그 덕분에 방 안의 분위기는 더없이 화목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아이른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한 선물을 꺼내려고 하는 찰나였다.

“흐음, 그렇구만. 어쩐지 비슷한 냄새가 나더라니, 네가 오빠였구나?”

“히익!”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키릴이 깜짝 놀란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괴인, 아니 괴묘(怪猫) 루루가 두 앞발을 들어 사과했다.

“아, 미안! 놀라게 하려는 건 아니었어. 그냥 너를 설득하는 것보다 오빠를 설득하는 쪽이 더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혼잣말이 나와 버렸네.”

“그렇게 긴 혼잣말이 어디 있어! 그리고 오빠를 설득한다는 말은 무슨 소리야!”

어머니의 무릎에서 내려온 키릴이 요술사 루루를 확 잡아들었다.

그 겁 없는 모습에 파레이라 부부가 기겁했지만, 검은 고양이는 얌전히 키릴의 손에 붙들렸다.

허공에 매달려 주욱 허리가 늘어난 그가 말했다.

“아니 그냥, 쟤가 너보단 공략하기 쉬운 성격인 거 같아서. 그리고…….”

“그리고?”

“너는 오빠를 무척 좋아하니까, 오빠만 공략하면 너도 당연히 넘어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지.”

“…….”

“어? 이거 말하면 안 되는 건가? 속으로만 생각해야 했나?”

“사적인 공간에 마음대로 들어오면 평생 제자 안 할 거야!”

얼굴이 빨개진 키릴 파레이라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찔끔한 루루는 솜씨 좋게 상대의 손에서 빠져나오며 사과했다.

“미안! 다시는 안 그럴게! 미워하지 마!”

폴짝!

스슷-

그리고 허공을 향해 점프한 뒤,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하룬 파레이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감이 안 오는군.”

난감한 일이었다.

요술사 루루가 키릴의 스승이 된다면 가장 좋다.

하지만 그가 믿을 만한 존재인지, 또 키릴이 그를 마음에 들어 할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

만약 관계가 어그러진다면 문제는 더욱 커진다.

경비를 뚫고 마음대로 성 내부를 활보할 수 있는 강력한 요술사가 앙심을 품는다? 생각조차 하기 싫다.

사제의 연을 맺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는 있었다.

하지만 그 방법이…….

“여보?”

아멜 파레이라의 차분한 목소리.

남작이 부인을 쳐다봤다.

살짝 나른한, 보는 이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말했다.

“복잡한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고, 우선 우리 아이른한테 집중하죠. 아직 검술관 얘기도 제대로 못 나눴잖아요?”

“맞아. 그 얘긴 나중에 해요. 오빠, 크로노 검술관 얘기 좀 해 줘. 어땠어? 많이 배우고 왔어?”

“……그렇지. 미안하다, 아이른. 고양이 요술사 문제도 중요하긴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따로 있었지.”

“아니요, 전혀요. 그리고 키릴, 음…… 어떤 얘기부터 해 주면 좋을까?”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저은 아이른이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무표정이 익숙해 웃는 게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훨씬 자연스러웠다.

이후, 파레이라 가족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나태 공자 인생에서 가장 많은 말을 한 날이었다.

* * *

정신없는 하루가 지나가고 늦은 밤.

자신의 방에 들어온 아이른이 창밖을 보며 상념에 잠겼다.

크로노 검술관, 관주의 조언, 자신의 검, 가족, 동생, 고양이 요술사 루루, 가이른 자작가…….

방 밖의 세상은 어렵고 복잡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도망치면 됐던 예전과는 천지 차이였다.

물론 그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예전보다 훨씬 나았다.

그가 오늘 있었던 가족들과의 대화를, 그리고 그들이 지었던 미소를 떠올렸다.

‘고작 선물을 사 온 것만으로도 엄청 좋아했지, 모두들…….’

오히려 검술관에 조건부 합격을 한 것보다도 그것에 더욱 감동한 모습이었다.

이를 본 아이른은 행복을 느끼는 한편, 죄송스러운 마음도 함께 느꼈다.

무언가 큰일을 한 것도 아니고, 평범한 가정의 아들이라면 누구나 할 만한 사소한 행동으로도 과하게 기뻐하는 부모님과 동생을 보니 지금껏 자신이 낭비해 왔던 시간이 후회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그러지 말자.’

아이른 파레이라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거창하고 대단한 일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럴 깜냥도 안 될뿐더러, 부모님도 그런 것을 바라는 건 결코 아니다.

예전처럼 도망치지만 않으면 된다.

힘들어도 조금 더 허리를 펴고, 부담스러워도 조금만 더 참고 가슴을 펴면 된다.

그것만으로도 동생의 얼굴에 짜증 대신 웃음꽃이 필 것이다.

‘……나의 검을 찾는 일도, 미뤄서는 안 되겠지.’

아이른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크로노 검술관주, 이안이 내준 숙제는 굉장히 어려웠다.

평생 한 번도 고민해 본 적 없는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주제. 머리가 지끈거려 내팽개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

어려운 일이라고 가만히 주저앉아 있다가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꿈 덕분이긴 하지만, 나태 공자는 이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꿈속 사내의 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검을 세우기 위해 의지를 다지는데, 그 과정에서 또 꿈의 도움을 받고 있다니.

아이러니라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것이 아닐까.

“……뭐, 됐어.”

아이른 파레이라가 세차게 고개를 휘저었다.

깊고 진한 생각은 많은 고민을 부르고, 고민은 번뇌를 부른다.

번뇌는 우울증, 무기력증, 자기비하로 흘러간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그랬다. 이 또한 지난 10년의 세월을 통해 뼈저리게 깨달았다.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나씩 지워나갔다. 그렇게 하니 다음날 해야 할 일이 명료해졌다.

아이른이 방 밖을 향해 말했다.

“밖에 누구 있나?”

“예!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응, 들어와.”

말이 끝난 직후 하녀 하나가 들어왔다. 아이른이 말했다.

“내일 5시쯤 연무장에 나갈 예정이니까, 미리 알고 준비 좀 부탁해.”

“예? 내일 바로 말씀이십니까?”

하녀가 당황한 듯이 물었다.

아이른은 그녀가 왜 놀라는지 몰랐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문제 있어?”

“아니…… 그런데, 다섯 시라 함은…… 오후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러면 지금 말하지도 않았지. 당연히 오전이지.”

“오전…….”

하녀가 또다시 당황했고, 아이른은 잠자코 기다렸다.

잠깐의 침묵 끝에, 하녀가 조심스레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저기, 괜찮으실까요?”

“뭐가?”

“그게…… 제가 듣기로는 크로노 검술관에서 여기까지의 거리만 해도 보름이 넘었다고 하는데, 여독이 남은 상태로 제대로 쉬시지도 못하고…… 심지어 그렇게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연무장에 나가시면…… 탈이 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데…….”

하녀는 나이가 어렸지만, 성에서 일한 지 3년이 넘었기에 아이른 파레이라의 예전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검술관에 떠나기 전 다른 사람처럼 변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녀의 머릿속에 있는 도련님은 ‘나태 공자’ 그 자체였다.

‘아니, 그걸 떠나서…… 아무리 체력 좋은 사람이라도 이건 너무 무리야.’

하녀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이른의 입장은 달랐다.

지난 1년간 그의 평균 수면 시간은 채 5시간이 되지 않는다. 그 외의 시간은 모조리 수련, 수련, 수련의 연속이었다.

그런 소년에게 있어서 지난 보름간의 마차 여행은 고된 여정이 아닌 휴식에 불과했다.

만약 관주가 건네준 고민거리가 아니었다면 여행 도중에도 쉼 없이 검을 휘둘렀을 터.

아이른이 희미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괜찮아. 내가 말한 대로 준비해 줘.”

“예, 예.”

“요깃거리도 준비해 주고. 아침에 먹기에 조금 과한 양이어도 좋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내일은 병사들의 정규 훈련이 있어서 연무장이 이른 아침부터 붐빌 텐데, 괜찮으실까요?”

“상관없어. 많은 공간을 차지할 건 아니니까.”

“예.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인 하녀가 뒷걸음질로 방을 나섰다.

탁. 문이 닫히고, 그녀가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검술관 떨어진 것 때문에 부끄러우셔서 더 그러시는 건가?”

붙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건데 말이지.

뒷말은 속으로 생각한 그녀가 사뿐사뿐 복도를 걸어 주방으로 향했다.

아이른이 조건부 합격을 했다는 것을 아는 건 가족들, 그리고 마르쿠스밖에 없었으니 당연한 반응이기는 했다.

“내일 새벽에 드실 요깃거리를 만들라고?”

“도련님이 그렇게 일찍 연무장에 나가신대?”

“그렇게 무리하실 필요 없는데.”

주방의 하녀들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다.

마음씨 고약한 이들은 ‘이제 와서 헛고생해 봐야 늦었다’라는 생각을 품었고, 심성 착한 이들은 ‘그래도 예전보다 훨씬 기운차 보여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안타깝지만, 아이른 파레이라가 검술관에서 얼마나 성장해 왔을지를 기대하는 이는 양쪽을 통틀어서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새벽이 왔다.

“그럼, 오랜만에 몸 좀 움직여 볼까?”

정확히 오전 5시.

만반의 준비를 마친 나태 공자가 가문의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급하게 몸을 움직이진 않았다.

오랜만에 몸을 움직이는 만큼 꼼꼼하게 몸을 풀었다. 정적, 동적 스트레칭에 의해 전신의 근육이 유연하게 풀어지고 적당히 열이 올랐다.

물론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동작은 혹여나 있을 부상 방지를 위한 과정일 뿐.

검도 검이지만, 하도 오랜만에 움직이다 보니 제대로 몸을 쓰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아이른은 연무장을 슥 둘러봤다.

“…….”

크로노 검술관에 비해 훨씬 열악한 장비들.

하지만 괜찮았다. 맨몸으로도 할 수 있는 운동이 충분히 많았으니까.

“아직은 사람 없으니까, 좀 넓게 써도 되겠지?”

낮게 중얼거린 그가 연무장을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언제까지고 느린 것은 아니었다.

조금씩, 조금씩 아이른의 속도가 빨라졌다.

* * *

“젠장, 이런 새벽부터 무슨 훈련을 한다고…….”

“그러니까 말입니다. 지옥훈련? 웃기는 소리. 제대로 능률 보이려면 오히려 아침 든든하게 먹고, 9시쯤 시작하는 게 훨씬 나을 텐데…….”

“어쩔 수 없어. 위에서 하는 말 들었는데, 이거 주변 가문에 보여 주기 식으로 하는 거라서 어떻게든 외부에서 보기에 빡센 느낌으로 하는 거야.”

“아니, 그게 무슨 쓸데없는…….”

새벽 6시 훈련 집합을 위해 연무장으로 모여드는 병사들.

그들의 입에서는 연신 이 상황에 대한 욕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당연했다. 꼭두새벽부터 졸린 눈 비비고 일어나 몸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은 누구도 없을 것이다.

“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있었다.

언뜻 보면 무표정한, 허나 묘하게 상쾌한 듯한 얼굴로 연무장을 뛰는 소년.

“도련님?”

“돌아오셨나?”

“맞다. 어제 검술관에서 돌아오셨지. 그런데…….”

“무슨 새벽부터 전력 질주를 하고 계시지?”

“저러다 탈 나는 거 아냐?”

아이른 파레이라의 모습을 확인한 병사들이 한마디씩 던졌다.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의 얼굴에 염려가 들어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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