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반갑지 않은 손님 (2)
파레이라 영지는 작지만 부유하다.
두 왕국과 인접한 까닭에 교역량이 많고, 현 가주인 하룬 파레이라 남작이 유리공예 길드를 끌어들인 이후 사정이 더욱 나아졌다.
거기에 더해 키릴 파레이라라는 장래가 촉망받는 요술사 딸까지 둔 덕에, 가문의 위상은 예전보다 훨씬 더 높아진 상황이다.
그 점이 주변 영지들의 질투를 샀다.
‘하필 가이른 자작가라니…….’
시종 마르쿠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주변의 다섯 영지들 전부가 그렇긴 하지만, 가이른의 견제는 유독 심했다.
헤일 왕국 최남단 지역의 대장 역할을 하던 그들에게 있어 파레이라 가문의 성세는 그리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공격하기 쉬운 먹잇감이, 마차에 타고 있다.
‘기왕이면 그냥 지나가 줬으면 좋겠는데…….’
물론 그럴 리는 없다. 속사정이야 어쨌건 헤일 왕국 남부 6가문은 우호 관계다.
파레이라 영지의 지근거리에서 두 가문이 만났는데 휙 지나쳐 버리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상대의 마차가 속도를 줄이며 다가온다. 파레이라 쪽 마차도 속도를 줄였다.
적절한 거리를 두고 정차한 두 마차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잠시 후, 가이른 자작가의 마차에서 두 명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젠장!’
애런 가이른이라니!
시종이 속으로 욕지기를 삼켰다.
애런은 가이른 자작가의 차남으로, 아이른 파레이라보다 1살이 어리다.
하지만 성격만큼은 웬만한 어른들보다도 훨씬 지독했다.
실제로 영지에 방문할 때마다, 그는 은근히 도련님을 무시하는 행동을 보이곤 했다.
선을 넘을 듯한 행위에 화를 내려 할 때면 어려서 그랬다고, 잘 몰라서 그랬다고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얄미운 모습도 자주 보였다.
즉, 지금 상황에서 마주할 수 있는 최악의 인물이라는 뜻이었다.
“……공자님, 들으셨죠?”
“그래.”
“가이른 자작가의 마차입니다. 애런 가이른 공자님과…… 잭 스튜어트 경이 마차에서 내렸습니다.”
“…….”
“마차 안에 계시겠습니까?”
시종 마르쿠스가 정중히 물었다.
얼굴조차 비치지 않는 건 실례가 될 수 있지만, 편찮으시다는 핑계로 대충 무마할 수 있다.
그보다는 도련님의 기분이 상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이른 파레이라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예의도 아니고.”
“……예.”
‘확실히 달라지셨다.’
여전히 무표정하고, 여전히 말수가 적다.
하지만 예전과 다르다. 자세히 설명할 순 없지만…… 더 단단해진 느낌이다.
마르쿠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이마에서 흐르는 땀 한 방울을 닦고, 마차의 문을 연다.
그 뒤를 따라 나오는 도련님을 보필한다.
이윽고 가이른 자작가의 차남, 애런 가이른을 마주한 그가 인사를 건넸다.
“애런 가이른 공자님과 잭 스튜어트 경을 뵙습니다.”
“어…… 그래.”
“…….”
애런 가이른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의 뒤에 서 있는 잭 스튜어트도, 마차를 끌던 가이른 가의 병사들도 모두 비슷한 얼굴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나태 공자의 체격이 예전보다 훨씬 커졌기 때문이었다.
애런 가이른이 생각했다.
‘키가…… 컸나? 아니, 몸도 꽤 좋아진 것 같은데.’
우락부락한 몸은 아니다.
허나 예전의 비실비실했던 몸은 더욱 아니다. 옷 위로도 느껴지는 근육이 그를 당황케 했다.
고작 1년 검술관에 들어갔다 왔다고 이렇게 변한다고?
물론 그 이상의 감흥은 없었다.
살짝 당황했을 뿐이다. 평생 약골일 줄 알았던 녀석이 평범해졌다면 놀라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순식간에 표정을 바꾼 그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쪽은 크로노 검술관에서 오는 모양이네?”
“예, 맞습니다. 가이른 가에서는 어쩐 일로 저희 영지에…….”
“아아, 아버님 심부름으로 전할 말이 있어서. 그건 그렇고 오랜만이네. 반가워, 아이른?”
“그래.”
“이야, 크로노 검술관이 잘 가르치긴 하는 모양이네. 아이른이 이렇게 몰라보게 달라질 줄이야…….”
한 살 어린 애런이었지만 존대는 하지 않았다. 이상한 건 아니었다.
남작 자제와 자작 자제라는 차이도 있었고, 한 살 차이 정도는 친근하게 부르는 경우도 많았으니까.
물론 둘 사이가 친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애런의 말투에는 상대를 얕잡아보는 뉘앙스가 은연중에 드러나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뭐, 앞으로도 계속 검술 연습할 거야?”
“……아마도.”
“가문에서? 하긴, 다른 데서 배우기는 좀 애매하긴 하겠네. 워낙 늦게 시작했으니.”
‘저 망할 꼬맹이가!’
시종 마르쿠스가 발끈했다.
은연중에 깔린 무시도 그렇고, 도련님이 크로노 검술관에서 떨어진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도 그렇고 기분이 몹시 나빴다.
자신조차 아이른이 붙을 리 없다 생각했던 것은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그런 자기반성을 하기에는, 애런 가이른이 너무 재수 없었다.
말투도, 표정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아마 파레이라 가의 사람이라면 모두가 자신과 같은 마음일 터였다.
허나 아이른 파레이라는 동요하지 않았다.
“아마 그렇겠지.”
“어?”
“더 할 말 있어?”
“어…….”
“딱히 없으면 이만 가 보려고 하는데. 여정이 길었거든. 좀 쉬고 싶어.”
침착하게 자신의 할 말을 하는 아이른의 모습에 뒤에 시립해 있던 잭 스튜어트가 또다시 놀랐다. 애런 가이른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그가 느낀 감정은 놀람보다는 짜증에 치우쳐 있었다.
‘저 녀석이 감히?’
녀석이 변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알 수 있었다.
예전에는 저러지 않았다.
예전의 아이른 파레이라는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못했고, 자신의 말에 저렇게 똑바로 대답하지도 못했다.
어떻게든 자리를 피하려고 노력했다.
아마 그것이 나태 공자의 평생을 통틀어 유일하게 한 노력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지금은 그렇지 않지?
왜 자신 앞에 당당한 모습으로 서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는 거지?
나태 공자 주제에? 조금 발악했다 한들 1년 만에 검술관에서 쫓겨나 가문으로 돌아가는 중인 낙오자 주제에?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순간, 애런 가이른은 상대를 순순히 보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잠깐.”
“……?”
“아아, 별 건 아니고. 가기 전에 악수나 한 번 하자고.”
“지금 와서?”
‘이게!’
살짝 표정이 일그러질 뻔했지만, 애런은 억지로 웃었다. 그리고 말을 이어 갔다.
“그거 알아? 검사들은 손만 잡아도 서로의 실력을 알 수 있다는 말?”
“처음 들어 보는데.”
“이런, 가문에 오래 있어서 그런지 견문이 부족하네. 유명한 검사인 루이스 소가드 경이 한 말이야. 실제로 검술에 있어서 악력만큼 중요한 것도 없으니까, 꽤 잘 들어맞는 말이라고 할 수 있지. 그렇지 않나요, 잭 스튜어트 경?”
“그렇습니다.”
“봐봐. 우리 가문 최고 기사도 그렇다고 하잖아.”
“…….”
“6년 먼저 검술을 익힌 선배로서,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한번 봐줄게.”
말이 끝나자마자 휙 오른손을 내뻗는 애런 가이른.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종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잭 스튜어트는 약간의 호기심을 품고 상황을 지켜봤다.
그리고 아이른 파레이라는.
“…….”
잠시 고민하다가, 말없이 상대의 손을 마주 잡았다.
속으로 쾌재를 부른 애런이 곧바로 힘을 주었다.
‘아차! 이렇게 바로 힘을 줬다간 손을 뺄 텐데. 조금 천천히 했어야…… 어?’
뭔가 이상한데?
애런 가이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었다. 그는 이럴 리 없다는 눈으로 아이른 파레이라를 바라봤다.
맞잡는 순간 느껴지는 만만치 않은 압박.
단단한 굳은살, 그리고 미동도 없는 상대의 손.
가이른 자작가의 차남은 조금씩 불안감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더, 조금 더 강하게 힘을 주었다.
그런 상대를, 아이른은 가만히 지켜봤다.
‘어떻게 하지?’
예전에도 언급했듯,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조롱과 무시, 냉대와 비웃음을 확실하게 구별할 줄 알았다.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적응되는 것도 아니었다.
딱지가 생기기도 전에 쏟아지는 주변의 시선은, 말은 소년에게 더 큰 상처로 다가왔다. 가시지 않는 멍으로 다가왔다.
그는 아프지 않기 위해 잠으로 숨었고, 검으로 숨었다.
도망만 다니는 인생이었다.
‘지금도 도망갈 필요가 있나?’
아니. 그렇지 않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도망갔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애런 가이른만큼 두렵고, 무섭고, 집요한 상대는 몇 없었으니까.
나태 공자에게 있어 눈앞의 상대는 마치 천적과도 같았다.
허나 지금은 아니었다.
일리아 린제이, 브랫 로이드, 주디스, 그 밖의 많은 예비 수련생들의 눈빛을 받아왔던 소년은 애런에게서 아무런 두려움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면, 싸워야 할까?’
이것은 잘 모르겠다.
관주와의 최종 면담 이후, 소년은 자신의 힘과 꿈속 사내의 힘을 구분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할수록 나오는 대답은 하나였다.
지금의 성장은 자신의 능력 덕분이 아니라 오로지 꿈 덕분이라는 걸. 자신은 그저 거기에 얹혀 갔을 뿐이라는 걸.
그런 주제에 잘났다는 듯이 상대를 찍어 누를 자신이, 당당함이 소년에게는 없었다.
“이이익…….”
생각을 고민하는 동안에도 악수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이른은 몰랐지만 애런은 지금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어떻게든 상대의 구겨진 표정을 보기 위해. 상대의 신음을 듣기 위해.
허나 나태 공자는 평화로웠다.
육신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어지는 고민, 계속되는 숙고. 그 끝에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의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할지는 이미 결론이 난 바다.
‘적어도…….’
상대의 손만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이.
‘당당하지 못할 필요는, 없잖아?’
애런의 눈으로 향했다.
도망치지도, 숨지도 않는 기세.
그것이 부지불식간에 흘러나왔다. 물론 아메드 교관이나 일리아 린제이가 보여 준 것과는 수준 차이가 있었다.
허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깜짝 놀란 애런 가이른이 펄쩍 뒤로 물러났다.
“……읏.”
뒤늦게 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자존심, 그리고 수치심 때문이었다.
‘내가, 나태 공자의 손을 먼저 놨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속일 수는 없었다.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아이른의 눈빛에 순간 움찔했다는 것을.
그 전에 녀석의 힘을 자신의 힘으로 압도하지 못했다는 것을.
궁금증이 든다.
어떻게 된 건지. 어떻게 인간쓰레기에 불과했던 나태 공자가 이런 분위기를 자아내는 건지.
고작 1년의 시간이 사람을 이렇게 바꿔 놓을 정도로 긴 시간인지. 아니면 그냥 자신이 이상한 건지.
허나 그보다 더욱 진하게 느끼고 있는 감정은.
‘도망가고 싶다.’
바로 두려움.
지금의 그는, 1년 전의 나태 공자가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대로 꼴사납게 물러나서야 체면이 살지 않았다.
저 재수 없는 나태 공자 녀석이 가문에 돌아가 뭐라고 떠들어댈지, 그 뒤에 서 있는 시종 녀석이 무슨 뒷얘기를 할지가 신경 쓰여 도무지 마차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심지어 저쪽 풀숲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검은 고양이조차 거슬렸다.
말 못 하는 동물마저도 자신의 추태를 널리 널리 퍼뜨릴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때, 지금껏 잠자코 있던 잭 스튜어트가 입을 열었다.
“공자님?”
“어, 응?”
“아이른 파레이라 공자님께서 여독을 풀고 싶다고 하셨으니, 계속 잡고 있는 것은 예의가 아닐 것 같습니다.”
“아, 그, 그런가?”
“그렇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기사가 아이른을 쳐다봤고,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잭 스튜어트가 정중히 예를 갖췄다.
“그럼 저희는, 이쯤에서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그, 그래. 아! 아이른, 꽤 쓸 만해진 것 같더라. 물론 진짜 대련을 해 봐야 알겠지만!”
“…….”
“그럼, 나 간다!”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둘을 보며 아이른은 말없이 인사했다. 시종과 마차를 끌던 병사들도 예를 갖췄다.
허나 마르쿠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저 싸가지없는 자식!’
결과야 나쁘지 않았다지만, 애초에 뻔히 의도가 보였다.
도련님을 망신시키고 싶어서 안달이 난 녀석도, 어린애의 속셈을 뻔히 알면서도 말리지 않은 잭 스튜어트도 모두 한통속이었다.
물론 그것 가지고 지랄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럴 만한 신분도, 상황도 아니었으니까.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건 남몰래 한숨을 쉬는 것뿐.
그렇게 파레이라 가문 또한 마차로 돌아가려는 때였다.
“쫄아서 튀는 주제에 말은 잘해요.”
“……?”
갑자기 들려오는 도발적인 언사.
마차로 돌아가던 애런 가이른이 홱 신형을 돌렸다. 그리고 눈을 부라렸다.
“감히 어떤 녀석이!”
방금 느꼈던 불안감, 두려움 따위의 감정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 자리를 끔찍한 분노가 대체했다.
감히, 감히 가이른 가문의 아들인 자신에게 그런 망발을 지껄여?
도대체 어떤 녀석이!
그에 대한 대답은 곧바로 나왔다.
“난데, 어쩔래?”
“어?”
그리 큰 키가 아닌 애런 가이른, 그보다 훨씬 낮은 위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됐다.
검은 고양이.
그저 야생동물로만 보였던 작고 귀여운 모습의 생물이, 두 다리로 서서 한마디를 더했다.
“뭘 꼬라봐?”
말하는 고양이.
있을 수 없는 일을 접한 모두의 머릿속에 한 단어가 떠올랐다.
‘요술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