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38화 (38/388)

◈ 15. 반갑지 않은 손님 (1)

대륙에 존재하는 귀족 가문은 과연 몇 개나 될까?

이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아마 상당히 많을 것이다.

왕국부터가 100개가 넘는 데다가 장자 독식 승계가 아닐 경우 영지가 쪼개지는 경우도 잦으니, 귀족 가문은 지금 이 순간에도 늘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렇게 많은 가문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성을 떨치고 있는 몇 곳이 있었다.

마법으로 유명한 룬텔 왕국의 3가문.

검으로 유명한, 서부 5왕국을 대표하는 5개의 가문.

그리고 유독 요술사를 많이 배출하는 세자르 공국과 대대로 훌륭한 성기사를 배출하는 신성 왕국의 공작 가문.

이 열 개의 가문은 아주 척박한 시골 동네 사람이 아닌 이상에야 모두가 알 만큼 대단한 명가(名家)였다.

‘그중에서도 린제이 가는 한 손에 꼽힐 만큼 대단한 곳인데…….’

시종 마르쿠스가 상징패를 곧바로 알아본 것도 그 덕분이다.

백금처럼 비싼 금속에 린제이 가의 문양을 마법으로 처리했으니, 이건 진품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도련님은 이 귀하디귀한 물건을 어떻게 얻으신 걸까?

대답은 허탈하리만치 간단했다.

“친구……가 줬어.”

“……친구요?”

아이른 파레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 여전히 낯선 단어라 입에 잘 붙지 않는다.

하지만 상대가 자신을 친구라고 말해 줬는데, 자신이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물론 마르쿠스가 놀라는 이유도 알고 있었다.

나태 공자는 세상 물정에 어둡지만, 바보는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말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놀라다니…… 린제이 가문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하구나.’

아이른은 대륙의 10가문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그저 들어 본 적이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마르쿠스의 반응으로 미뤄보아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새삼 알게 되었다.

‘하긴, 입관 처음에 다른 아이들이 보였던 반응도 이랬던 거 같긴 하네.’

물론 지금의 나태 공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녀가 고귀한 가문 출신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었다. 주디스가 고아인 것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소년이 시종의 손에서 백금패를 돌려받으며 말했다.

“응, 친구.”

“…….”

“미안한데, 잠시 눈 좀 붙일게.”

“아, 넵! 도련님!”

아이른은 눈을 붙인다는 핑계로 명상에 빠졌다.

평소와 같은 이유는 아니었다. 지금의 그는 오히려 사내의 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었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여태껏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주제였고, 심지어 명확한 답이 없는 철학적인 주제였다.

아이른은 그런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정도로 요령 좋은 인간이 아니었다.

‘아마 예전이라면 도망갔겠지. 진짜로 잠에 빠져들었을 거야.’

지금의 아이른은 그렇지 않았다.

어렵고 힘든 일이라도 일단 도전한다. 계속해서 도전한다. 그러다 보면 길이 열린다는 것도 배웠다.

그 모든 것이 꿈의 도움을 받은 덕분이라는 게 문제지만.

‘나의 검…… 나 스스로 노력하는 법…….’

난해한 문제를 풀기 위해 소년은 자신의 세계로 깊이 빠져들었고, 시종 마르쿠스는 그런 그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 * *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파레이라 가의 마차는 하염없이 달리고 달려 가문의 지근거리까지 왔다. 도시 하나만 넘어가면 바로였다.

그리고 그동안, 나태 공자는 비슷한 나날을 보냈다.

하루 대부분을 명상과 고민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도련님, 괜찮은 거 맞나?’

시종 마르쿠스의 걱정이 나날이 커졌다.

처음 도련님을 뵀을 때만 하더라도 한시름 놨다.

예전보다 훨씬 좋아진 몸에, 가문 이외의 사람들과 대화하는 모습도 봤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그 유명한 대륙의 천재, 일리아 린제이의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이는 크로노 검술관의 정식 수련생이 된 것만큼이나 좋은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나이에 비해 순박한 도련님이야 이게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가문과 공자님에게 엄청난 힘이 될 것임에는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게 호재가 많다고 해도, 공자님 본인의 기분이 이리 좋지 않다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실의에 빠지신 것 같은데…….’

죄송한 생각이지만, 시종은 아이른 파레이라가 검술관에 붙을 거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터다.

크로노 검술관은 검의 초보가 이겨내기에는 무척 힘든 장소라고 들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다른 이들의 생각일 뿐, 본인은 실망하고 좌절하는 것이 당연하다.

난생처음으로 도전다운 도전을 해 본 공자님이라면 더더욱.

‘뭔가, 도련님이 기운을 차릴 만한 뭔가가 필요해!’

물론 쓸 만한 생각은 나지 않았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걸 팍팍 생각해 냈더라면 애초에 도련님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터다.

결국 시종은 속으로 끙끙 앓기만 하며 시간을 보냈고, 그 사이에 마차는 가문에 복귀하기 전 마지막 도시에 도착했다.

그때, 마르쿠스의 눈에 이색적인 광경이 들어왔다.

‘오크?’

녹색 피부.

성인 남성보다 두꺼운 체격.

입 밖으로 살짝 튀어나온 커다란 치아까지.

확실했다. 오크가 분명했다.

‘대륙 북서부에서나 간간이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어쩌다 남부까지?’

헤일 왕국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데다 교류가 잦은 종족은 아니다 보니, 이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존재였다.

그것도 그냥 오크가 아니었다.

목에 걸려 있는 오망성 펜던트와 피부 위에 드러난 문신을 보니, 정령술과 점성술에 꽤 일가견이 있는 존재로 보였다.

‘이거다!’

시종이 짝 하고 손뼉을 쳤다.

그리고 곧장 여관으로 돌아가 공손히 아이른을 불렀다.

“도련님? 주무십니까?”

“아니. 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심심풀이로 점이라도 보러 가시지 않겠습니까?”

“점?”

점이라면 아이른도 알고 있었다.

세간에 떠도는 미신 같은 것으로, 사람의 길흉화복이니, 오늘의 운세니, 앞날이니 하는 것들을 알아보는 방법이 아닌가.

“재미야 있겠지만, 굳이…….”

“보통 점술사가 아닙니다. 지금 도시에 오크 점술사가 머무르고 있습니다.”

시큰둥하던 아이른이었지만, 이번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가문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던 소년이 오크의 실물을 봤을 리가 만무하다.

순수한 호기심이 생긴 그는 흔쾌히 수락했고, 복장을 갖춘 둘은 곧바로 오크 점술사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종이 남몰래 웃음 지었다.

‘오크 점술사는 좋은 말만 해 주기로 유명하지.’

같은 인간이 좋지 못한 운수를 말해 줘도 기분이 언짢은 마당에, 종족까지 다른 오크의 악담을 참아 줄 이는 아무도 없다.

그렇기에 오크 점술사들은 어떤 점괘가 나오든 적당히 좋은 말을 건넨다.

물론 사람들도 그걸 알고 있지만, 좋은 게 좋은 거 아닌가.

도련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앞날에 대한 좋은 이야기를 들으면, 탈락의 아픔을 잊고 기운을 차리실지도 몰라!’

그런 기대를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오크 점술사의 앞에 도착했다.

다행히 줄은 길지 않았다. 아이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진짜네.”

“그렇죠. 진짜 오크입니다. 그리고 아십니까? 점술사 중에 가장 용한 게 바로 오크 점술사입니다.”

“응. 오크 점술사는 만나는 것만으로도 행운을 불러온다는 얘기, 들어 봤어.”

“맞습니다.”

실제로는 모든 오크 점술사가 좋은 얘기만 해 주기에 생긴 이야기였지만, 시종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아이른 파레이라의 차례가 되었다.

소년은 오랜만에 두근두근한 심정이 되어 의자에 앉았고, 시종은 시립했다.

오크 점술사가 밝은 얼굴로 둘을 맞이했다.

“반갑습니다, 손님들! 점을 볼 분은 이분인가요?”

“그렇습니다.”

“좋습니다! 어떤 것을 알길 원하십니까? 오늘의 운세? 올해의 운세? 연애운? 재물운? 건강운? 무엇이든 말씀해 주세요! 용하디용한 이 오크 점술사님이…… 모조리…….”

굉장히 유창한 대륙어에 아이른도, 마르쿠스도 놀라고 있을 때였다.

청산유수처럼 말하던 오크의 말이 점차 느려졌다.

무슨 일이라도 났나 싶어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오크 점술사는 아이른 파레이라만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

“…….”

“……저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두 시선이 마주쳤고, 침묵이 흘렀다. 아이른은 등에 땀이 나는 걸 느꼈고, 시종은 알 수 없는 압박에 점술사를 채근했다.

잠시 후, 진지한 표정의 오크 점술사가 조용히 질문했다.

“실례지만,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 * *

“다시는 그딴 쓰레기 점 치지 마! 가시죠, 도련님.”

잔뜩 성을 내며 돌아서는 시종과 무거운 얼굴로 뒤를 따르는 귀족 자제.

떠나는 둘을 바라보던 오크 점술사, 쿠바르가 앓는 소리를 냈다.

“젠장, 이제 여기선 장사 못 하겠구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까놓고 말해 자신의 점은 형편없다.

지금껏 그가 장사를 할 수 있었던 건 입에 발린 말과 훌륭한 관찰력, 그리고 임기응변 덕분이다.

이 정도 능력으로도 99퍼센트의 손님들은 만족시킬 수 있지만, 가끔 삑사리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번이 그런 경우였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근육을 갖고 시험에서 떨어졌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처음 볼 때부터 느꼈다. 눈앞에 선 남자가 얼마나 처절한 수련을 해 왔는지.

몸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일반인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발달한 몸.

단순히 부피만 키운 것이 아닌, 실전적인 움직임에 최적화된 밀도 높은 육체.

그런 사람이 뒤에 수행원까지 갖추고 있으니, 지체 높은 귀족, 혹은 부유한 상인의 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게 맞았고.

그래서 명망 높은 기사단에 입단시험을 보러 가는 듯하니, 효험 좋은 부적을 써 주겠다고 했는데…… 이미 떨어지고 오는 길이란다.

‘심지어 기사단도 아니고, 검술관이라고? 나 참, 거기 인간들은 눈깔이 전부 삐었나 보지?’

손님의 비범한 점은 근육뿐만이 아니었다.

오크 점술사 쿠바르는 점성술에는 조예가 없었다. 허나 정령술은 꽤 할 줄 알았다.

자랑 좀 보태면 인간들 중에선 자신보다 나은 이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보기에, 손님의 몸에 들어찬 금(金)의 기운은 믿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1~2년 쌓은 정도로는 댈 수도 없는 수준.

평생을 두드리고, 두드려야만 완성될 강철과 같은 기운.

‘그런 기운을 가진 주제에 16살이라고? 그걸 누가 믿냐.’

종족이 다르기에 인간의 나이를 판단하기 힘든 탓도 있지만,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실수가 더욱 불거졌다.

뛰어난 정령술이 오히려 독이 되어 두 번이나 헛다리를 짚은 것이다.

“뭐…… 그런 신비로운 존재를 본 것만으로도 남는 장사지만.”

맞는 말이다. 돈 한 푼 받지 못했지만, 실제로 쿠바르는 기분이 좋았다.

다섯 원소 중 하나를 극한까지 쌓은 인간을 본 것도, 그 인간의 나이가 스물도 되지 않았다는 것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렇기에 욕을 먹는 와중에도 소년을 위한 선물을 줬다.

사이비인 자신의 것이 아닌, 위대한 점술사인 스승님의 힘이 담긴 쪽지다.

스승님의 영험한 쪽지는 섭리에 따라 소년에게 가장 적합한 조언을 해 줄 터였다.

“다시 마주칠 날이 있을까? 흠…….”

뭐, 기회가 되면 볼 날이 있겠지.

머리를 긁적인 쿠바르가 허리춤에서 술병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오늘 벌어들인 복채를 탕진하기 위해, 도박장에 뛰어들었다.

* * *

“죄송합니다. 그런 사이비인 줄 모르고…….”

다음 날, 가문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시종이 고개를 숙였다.

당일에는 너무 죄송스러워서 오히려 제대로 사죄를 표할 수가 없었다.

그의 눈에는 죄송스러운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물론 아이른은 괜찮았다.

“신경 쓸 필요 없어.”

“하지만…….”

“안 좋은 소리를 들은 것도 아니잖아? 틀리기야 많이…… 틀렸지만, 그래도 완전히 틀린 건 아니기도 하고.”

“그런가요…….”

완전히 틀린 거 아닌가?

마르쿠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겨우 16살인 도련님께 ‘연세’가 어떻게 되냐는 말을 하고, 시험에서 떨어져 돌아가는 길인 사람한테 어느 기사단에 지원하는지는 모르지만 무조건 붙을 거라는 말을 하고.

‘욕이라도 한 바가지 더 해 줬어야 했는데.’

그런 생각은, 뒤이어 나온 아이른의 말에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나 떨어진 거 아니야.”

“예?”

“붙었어. 지금 말해서 미안하긴 한데…… 다른 중요한 생각을 하느라 깜빡했어. 미안.”

“…….”

“아, 그런데 당장은 아니고, 관주님께서 내주신 숙제가 있어서…… 조건부 합격이야. 1년 안에 숙제를 해결하면 돌아갈 수 있는.”

“어, 어어…….”

시종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 말을 왜 지금에서야, 라고 말하는 게 먼저일까, 축하한다는 말을 하는 게 먼저일까. 그도 아니면 완벽한 합격이 아니니 말을 아껴야 할까. 그냥 얌전히 응원만 해야 하나?

아니, 진짜 합격했다고? 그 위대한 크로노 검술관에 정식 합격을?

도무지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마르쿠스는 혼란스러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아이른 파레이라는, 오크 점술사가 건네준 쪽지의 메시지를 속으로 곱씹고 있었다.

‘오롯이 서기 위해 꼭 홀로일 필요는 없다.’

대충 있어 보이게 아무렇게나 쓴 조언 같지만, 아이른은 이 메시지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 오크 점술사가 연세라고 표현한 건…… 아무래도 꿈속 사내를 말한 거겠지.’

얼핏 듣기로는 다섯 원소니, 금(金)기니 하는 말도 했던 것 같다. 검술관에서도 자주 들었던 단어다.

강철 같은 의지. 이 역시 자신이 아닌 사내를 일컫는 말일 터였다.

“으음.”

자잘한 부분은 엇나갔지만, 커다란 틀은 맞췄다.

심지어 후자의 것은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던 부분이다. 속을 꿰뚫는 듯한 눈을 가진 이안 관주조차도.

‘……무시하지는 말자.’

아이른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남의 말에 무작정 의존할 필요는 없지만, 무시할 필요도 없다.

일단은 그 정도면 된다. 소년이 나름의 정리를 마쳤을 때였다.

마부석에 있던 병사 하나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에…… 가이른 가의 마차가 오고 있습니다.”

그 말에 아이른 파레이라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시종 마르쿠스 또한 깜짝 놀란 얼굴로 마차 밖을 내다봤다.

가이른 자작 가문.

파레이라 남작 가문을 은근히 견제하는 영주가 있는 가문.

그리고 파레이라 가문의 장자를 대놓고 무시하는 두 아들이 있는 가문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