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4인의 천재 (4)
퍽, 퍽, 퍼억.
주디스의 주먹이 상대에게 연이어 날아갔다. 브랫 로이드의 얼굴은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
그 지경이 될 동안 누구도 이 난폭한 소녀를 제지하지 못했다.
상황이 너무나 급박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애초에 예상할 수 없던 일이라는 게 컸다.
크로노 검술관에서 마차로 향하는 그 짧은 순간에 사달이 날 거라고 누가 생각하겠는가.
“이, 이 자식이 감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공자님! 제가 지금 저것을 잡아 오겠…….”
“됐어.”
어느새 멀찌감치 도망간 주디스를 잡기 위해 로이드 가의 사병들이 움직이려 했다.
허나 브랫의 제지에 그들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눈치만 보고 있는 병사들 사이에서 로이드 가의 장자가 물었다.
“뭔데?”
“너 코피 난다.”
“네가 때려 놓고 그딴 말을…….”
“보기 흉하니까 무게 잡지 말란 소리야.”
“헛소리하지 말고 대답이나 해라. 왜 그랬냐고.”
“당연히 열 받아서 그랬지.”
주디스가 빙글빙글 웃었다.
그 모습이 몹시 얄미웠다. 하지만 브랫은 대꾸하지 않았다.
어차피 떠나는 몸. 남을 녀석과 더 말을 섞어 봤자 남는 것도 없었다.
하인이 건넨 손수건으로 코피를 닦은 그가 얌전히 마차에 올랐다.
우물쭈물하던 병사들도 마부석과 마차에 나눠 올라타기 시작했다.
그때, 주디스가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자랑해라!”
“…….”
“대륙 최고가 될 검사한테 여덟 대나 맞고 버틴 것도, 어린 시절에나마 시험에서 이긴 것도 평생 자랑거리 삼기에 부족함 없을 테니까! 이따위 걸로 죽을상 짓고 도망가는 녀석한테는 말이야!”
그럼 잘 가라! 샌님 새끼야!
욕설로 말을 마무리할 때까지, 로이드 가의 마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브랫이 내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잠시 후,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떠나갔다.
점차 멀어지는 로이드 가의 사람들.
이를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아이른과 일리아 쪽으로 주디스의 시선이 향했다.
“뭘 봐.”
“어?”
“아니…….”
“아직 성질 다 안 풀렸는데, 너희들도 한 대씩 맞을래?”
둘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검술 실력과 상관없이, 지금 주디스의 박력은 그들을 위축되게 만들었다.
그 모습을 본 주디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원래 순한 아이른이야 그렇다 치지만, 일리아까지 저런 얌전한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다.
“됐고, 아이른.”
“응.”
“너 손에 들고 있는 거 뭐야?”
“어, 이거, 일리아가 준…….”
“뭐야 이거. 백금이잖아?”
빠르게 다가온 주디스가 아이른의 손 위에 있는 패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리고 말했다.
“나도 하나 줘.”
“뭐?”
“싫으면 말고. 억지로 달라는 거 아니다.”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줘.”
일리아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주디스 역시 묘한 구석이 있었다.
평소에는 거칠어도 애 같은 면이 있었던 반면, 지금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 거절하기 힘든 분위기가 풍겼다.
아이른과 비슷한 생각을 했음인가. 일리아도 군말 없이 가문의 상징패 하나를 더 꺼냈다.
씨익 웃은 주디스가 이리저리 금속패를 살펴봤다.
“똑같이 백금 맞네? 혹시 다른 걸로 주나 했는데.”
“그럴 리가 없…….”
“미안했다.”
“뭐?”
“너랑 네 가문 욕한 거. 미안했다고.”
불쑥 튀어나오는 사과.
일리아가 커다랗게 눈을 떴다.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도 화제 전환이지만, 그 자존심 강한 주디스가 자신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심지어 꽤나 진지했다.
“내가 싸가지없고 막 나가는 년이긴 하지만, 확실히 그때는…… 내가 가족 같은 게 있어 본 기억이 없던 년이라 그런가, 너무 막 내뱉었어.”
“…….”
“아니, 이것도 변명이지. 미안하다, 진심으로.”
주디스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하기 싫은 일을 하는 듯 표정이 기괴했지만, 태도에서 진심이 드러났다.
“……그래. 나도 무시하는 말 했던 거, 사과할게.”
이를 본 일리아 린제이가 마주 사과했다. 아이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디스가 다가올 때까지만 해도, 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일이 묘하게 잘 풀렸다.
쌓였던 앙금에 비해 손쉽게 화해한 둘을 보며, 잠깐이지만 허탈한 감정도 들었다.
‘나는 중간 평가 때 일리아랑 화해하려고 온갖 고민을 다 했던 것 같은데…….’
물론 나쁜 일은 아니다. 오히려 이보다 좋을 수 없다.
다만 주디스가 이러는 이유를 알 수 없어서, 그게 조금 마음에 걸렸다.
그런 아이른의 마음을 알아챘음인가?
순식간에 앙숙과의 관계를 개선한 붉은 머리 소녀가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야. 빨리 와라.”
“응?”
“관주님이 내준 숙제. 뭔진 모르겠는데 빨리 끝내고 돌아오라고. 그래야 찝찝한 거 다 털어낼 수 있으니까?”
“찝찝한 거? 그게 무슨…… 아.”
최종 평가 전에 있었던 대화를 떠올린 아이른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주디스가 지금 왜 이러는지를.
‘자기 나름대로, 각자에게 찝찝한 구석을 털어내고 있는 거였구나.’
그 방식이 상당히 파격적이긴 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주디스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피식 웃었고, 주디스 역시 웃는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뭘 쪼개냐?”
“아니, 그냥. 미안.”
“미안은 개뿔, 뭔 말만 하면 미안하대. 됐고 빨리 검술관으로 돌아오기나 하라고. 알았어? 브랫처럼 이기고 튀면 진짜 세상 끝까지 쫓아간다.”
“그래.”
화기애애한 건지, 살벌한 건지 모를 둘의 대화를 들으며 일리아는 말없이 서 있었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아이른이 갑자기 감탄사를 터뜨린 이유도 모르겠다.
그에 관해 묻고 싶지만, 쉽사리 끼어들 타이밍이 나오지 않는다.
다그닥 다그닥
심지어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 한 대가 다가왔다. 파레이라 가의 문장이다.
대화를 나누던 아이른의 앞으로 선이 가는 중년인 하나가 다가왔다.
“공자님? 이분들은…….”
“아, 검술관에서 같이 수련한…… 친구들이야.”
“그렇군요. 저희 도련님과 친하게 지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차, 말을 꺼낸 시종이 속으로 뜨끔했다. 방금 자신이 한 말은 꼬아서 들으면 묘하게 기분 나쁠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다행히 아이른은 별말 하지 않았다. 몰래 가슴을 쓸어내린 그가 아이른에게 물었다.
“대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까요?”
“아니, 괜찮아. 나중에 또 볼 수 있으니까.”
자신을 위해 먼 거리를 달려온 이들을 세워 두고 싶지 않았다.
생각을 마친 아이른은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어 주디스, 그리고 일리아 린제이와 악수를 나눴다.
“그럼, 나중에…….”
“빨리 돌아와.”
“검술관으로 돌아오기 전에 우리 가문 오는 거, 잊지 마.”
두 소녀와의 인사까지 마친 아이른 파레이라가 저벅저벅 마차로 향했다. 한 번 뒤를 돌아보긴 했지만 그뿐.
이내 저 멀리 사라지는 파레이라 가의 일행을 보며 일리아와 주디스는 한동안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끔찍한 정적이 찾아왔다.
“…….”
“…….”
3개월 전의 시비 때를 제외하면, 서로 말 한마디 건넨 적 없을 정도로 어색한 게 둘의 관계였다.
좋지 못한 감정을 어느 정도 털어냈다 한들, 불편함마저 해결할 수는 없었다.
“너는 안 가냐?”
“나는, 내일…….”
“그래?”
“응.”
“…….”
“…….”
“그럼, 들어간다.”
“나는…… 산책 좀 하고 들어갈게.”
그렇게 둘은 헤어졌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매우 어색하게.
* * *
[외전 - 주디스 후일담]
아이른 파레이라와 브랫 로이드가 떠난 이후,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 검술관에 남아 있는 수련생은 주디스 하나밖에 없었다.
탈락한 이들이야 여기 있을 이유가 없고, 합격하여 정식 수련생이 된 이들도 정식 입관일인 8월까지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잠시 가문으로 돌아간 것.
허나 부모가 없는 주디스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다.
대연무장의 중심에 선 그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아!”
거친 욕설도 아낌없이 내뱉었다.
“개새끼들아아아! 내가 반드시 다 이겨준다! 다 박살 내 버린다고오오오!”
소리 지르고, 소리 지르고, 계속해서 소리 질렀다. 목이 다 쉬어 아리고 쓰릴 때까지.
호흡이 거칠어져 켁켁 소리가 날 때까지. 그래도 마음은 시원해지지 않았다.
분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허억, 커흑, 젠장…….”
일리아 린제이가 미웠다.
태어날 때부터 다 가진 주제에 노력까지 마다하지 않는 녀석이 너무 미웠다.
아이른 파레이라도 미웠다.
일리아보다 더한 재능과 근성을 타고난 주제에 바보처럼 착한 놈이라, 욕 한마디 시원하게 박아 주기 힘든 놈이라 더 미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브랫 로이드.
그 녀석이 가장 미웠다.
‘개자식이, 어떻게든 이겨 보자고 했으면서!’
처음 봤을 때부터 재수 없었고, 한창 수련을 이어 갈 때도 재수 없었다.
사실 녀석이 떠나는 순간까지도, 녀석을 그리 좋게 본 건 아니었다.
녀석이 품은 샌님 특유의 분위기는 주디스와는 영 맞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녀석이 막판에 보여 줬던 모습만큼은.
검술관의 모두가 엄두도 못 내는 상대에게 당당히 도전장을 내밀고, 진심으로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모습만큼은, 나쁘지 않았었다.
그랬기에 더 짜증이 났다. 형편없었던 녀석의 마지막 모습이, 그녀에게 견딜 수 없는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됐어.’
퉤, 침을 뱉은 주디스가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옆에 널브러져 있던 검을 집어 들었다.
이내 펼쳐진 검술은 불꽃이 작열하듯 폭력적인 검.
관주의 검무를 통해 깨닫고, 브랫 로이드와의 대련을 통해 가다듬은 검술이다.
물론 대련 상대는 이제 없지만, 괜찮다.
조금만 기다리면 자신은 크로노 검술관의 정식 수련생이 되고, 그곳에는 녀석보다 훨씬 대단한 선배들이 한가득이다.
자신에게는 차고 넘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잡념은 집어치우자.
일리아든, 아이른이든 모조리 박살 내기 위해 더 열심히 검을 휘두르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카앙!
불쑥 끼어든 연습용 철검.
주디스는 깜짝 놀랐다.
전력을 다해 휘두른 검을 흘려 버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예비 수련생 중에서나 대단한 거지, 교관들에 비하면 자신의 검술은 어린아이 장난과 같았으니까.
하지만 검을 뻗은 상대가 수련생들 중 하나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녀가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브랫…….”
“집에 가서 곰곰이 생각을 해 봤는데 말이야.”
브랫이 다시 검을 치켜세웠다. 그리고 자세를 잡았다.
그러자 예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약간의 빈틈도 없는, 밀도 높은 물의 구체가 다가오는 듯한 답답한 기분.
“일리아 린제이나 아이른 파레이라라면 몰라도, 너한테 얻어맞고 돌아가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관주님께 싹싹 빌었다는 뜻이지. 다시 받아 달라고.”
“관주님이 성격이 좋네. 너 같은 놈을 받아 주고.”
“너랑은 비교도 안 되는 인격자이시지.”
“지랄.”
“예전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욕은 적당히 해라. 겁먹은 개가 왈왈 짖는 것 같으니까.”
“재수 없는 새끼.”
연거푸 욕을 하면서도, 주디스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브랫도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만난 둘은 이후 말없이 검을 나누었다. 해가 떨어질 때까지.
‘……너희들도 그 둘에 비해 모자라지 않다.’
그런 소년, 소녀의 모습을 이안 관주는 오랫동안 지켜봤다.
그의 얼굴에는 흐뭇한 웃음이 오랫동안 떠나가지 않고 있었다.
* * *
[외전 - 일리아 린제이 후일담]
크로노 검술관을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일리아 린제이는 아쉬운 기분을 느꼈다.
처음 입관했을 때만 하더라도 딛고 올라서야 할 수많은 계단 중에 하나였을 뿐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친분과는 별개로, 그곳에서 만난 인연들은 그녀에게 있어 꽤나 소중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시 검술관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가문의 검술이 있는 이상, 본가보다 내가 성장하기에 적합한 장소는 없으니까.’
가문을 떠올린 일리아 린제이의 입에 미소가 어렸다.
검술관의 인연들이 아무리 소중하다 한들 집에 비할 수는 없었다.
1년이나 못 본 부모님도 그리웠고, 자신을 딸처럼 귀여워해 주는 가문의 기사들도 보고 싶었다.
그리고…… 몇 년째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는 오빠도. 이번에는 보고 싶었다.
‘충분히 좋아질 수 있어!’
주변인들이 멋대로 쏟아내는 부담스러운 기대감, 경탄, 존경.
역시나 마찬가지로 멋대로 던져대는 날카로운 비난, 조롱, 괄시. 그것들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그것을 견뎌내는 것은, 이겨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아이른 파레이라는 해냈으니까.’
수많은 이들의 날 선 시선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을 잃지 않고 나아간 소년. 그리고 끝내 위대한 검을 완성해 낸 소년.
그의 이야기를 해 줄 것이다. 그의 도움을 받아 굴레에서 벗어난 자신의 이야기도 해 줄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시간이 지나다 보면…….
분명히 기운을 차릴 수 있을 것이다.
오빠는 약한 사람이 아니니까.
“어?”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마차 창문 밖으로 꽃이 핀 것이 보였다.
노란색 복수초였다. 아이른이 선물해 준 팔찌에 음각된 것과 같은 꽃이었다.
그녀가 마차를 세웠다.
“꽃이 필요하신가요? 곧 영지에 도착하는데. 제가 곧바로 꽃집에 들르…….”
“아니, 이걸로 괜찮아요. 다시 출발하죠.”
복수초 한 아름을 종이에 싸맨 일리아가 꽃향기를 맡았다. 그리고 과거를 떠올렸다.
그녀가 일곱 살일 때까지만 하더라도, 가문의 정원에는 노란색 복수초가 많이 피어 있었다.
그날 칼 린제이가 건넨 꽃도 복수초였다.
노란색 꽃다발을 건네며 금방 이기고 오겠다고 했던 오빠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이후 복수초는 둘에게 있어 아픈 기억으로 자리 잡았지만, 지금의 일리아는 괜찮았다.
아이른과의 대화를 통해 아팠던 추억을 모두 극복한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오빠에게는 조금 그러려나…….’
가문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 약간의 걱정이 피어올랐다.
자신이야 이겨냈지만, 오빠는 여전히 힘든 상태다. 어쩌면 복수초를 보는 순간 그때의 아픔을 상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겨내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언제까지고 예전 일에 사로잡혀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런 두 개의 상반된 생각이 일리아 린제이의 머릿속에서 힘 싸움을 벌였고, 끝내 소녀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가문에 도착했다.
그리고 잠시 후.
아버지께 말을 전해 들은 그녀는, 이제는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네 오빠가…… 집을 나갔단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실종되었다는 쪽이 더 맞는 것 같구나.’
린제이 가의 장남, 칼 린제이가 하루아침에 증발했다.
성의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영지를 샅샅이 뒤져 봐도, 근처의 영지를 뒤져 봐도 마찬가지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런…… 흔적도 없습니다. 마치 마법…… 아니, 요술을 부린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제 미천한 실력으로는 도련님께서 어떻게 되었는지, 도무지 예측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가문 마법사의 이야기였다.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는, 약간의 실마리조차 찾을 수 없는 완벽한 실종.
일리아 린제이는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
즐거웠던 검술관의 추억이 지워졌다.
가져왔던 복수초는 버려지고, 짓밟혔다.
다시금 찾아온 우울 속에서, 그녀는 들려오는 소문을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린제이 가의 대공자가 실종됐다!’
‘3개월째 진전없는 실종 사건, 자살 쪽으로 가닥 잡혀…….’
‘미래를 비관한 린제이 가의 대공자, 끝내 자살하다!’
‘이그넷에게 당한 패배를 이겨내지 못한 칼 린제이, 천재의 불운한 죽음!’
‘결국 린제이 가는 영원히 이그넷을 넘지 못하는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귀담아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귀를 막고 눈을 가려도 파고드는 사람들의 말은, 시선은 일리아 린제이의 마음을 어둡게 만들었다.
어쩌면 오빠는 살아 있을 것이다.
살아서 거리를 떠도는 소문에 하루하루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오빠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사람들의 시선에 괴로운 숨을 내뱉었을 것이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헛소리를 뱉어대는 이들의 목을 모조리 쳐야 할까.
애석하게도 그럴 수는 없었다.
그것은 칼 린제이 이상의 재능을 가진 일리아 린제이라도 역부족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입을 다물게 만드는 건 충분히 가능했다.
‘이그넷.’
그녀가 이룬 업적을 차례차례 깨부숴 나가자.
그녀가 세상에 남긴 최연소 기록을 모조리 다시 써 내려가자.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해 주자.
당신들의 역겨운 눈과 입만 아니었다면, 자신이 아닌 오빠 역시 충분히 이그넷을 꺾을 수 있었을 거라고. 그런 미래도 있었을 거라고.
“앞으로 검술 수련하는 시간을 늘리려고 합니다.”
자신의 길을 걷겠다는 각오가 흐려졌다.
타인의 말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다짐도 희미해졌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대중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보다 더한 집착.
“…….”
어여쁜 딸의 검에 서슬 퍼런 증오가 맺혀 가는 것을, 조슈아 린제이 백작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주디스와 브랫 로이드가 재회하고, 일리아 린제이가 가문에 도착하기 전의 시점.
아이른 파레이라는 이동하는 내내 굳은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를, 시종인 마르쿠스는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봤다.
‘하긴, 1년이나 버티긴 했지만 탈락은 탈락이니…….’
그는 나태 공자가 합격했다는 사실을 아직 몰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이른이 그에 관해 아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소년의 머릿속은 오로지 관주의 조언으로만 가득 차 있어서, 시종에게 꼭 해야 할 중요한 말조차도 잊고 있을 정도였다.
‘나에게 있어 검은, 검술은 어떤 의미일까.’
아니 그 전에, 나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아이른 파레이라는 살면서 한 번도 이런 진지한 고민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당연했다.
어렸을 때는 침대 속에 숨어 도피의 끝을 달렸고, 신비한 꿈을 꾼 이후로는…… 아무런 의심도, 아무런 저항도 없이 사내의 검만을 좇을 뿐이었다.
소년에게, 아이른에게 있어서는 특히 어려운 숙제.
표정이 어두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으음. 어떤 말을 해야 도련님이 기운을 차릴 수 있을까?’
마차 안의 정적 속에서, 시종 마르쿠스는 끊임없이 고민했다.
사실 아이른의 상태는 예전보다 훨씬 좋은 편이었다.
마르고 볼품없던 몸이 건장한 체격으로 바뀌었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발전이었다.
거기다가 가문의 사람 외의 아이들과 친분을 쌓은 모습까지 봤으니, 어찌 보면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욕심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도련님의 마음에 있는 약간의 근심이라도 덜어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
마르쿠스가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도련님의 손에, 뭔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저, 저기, 공자님.”
“응?”
“귀찮게 해서 죄송하지만…… 지금 손에 쥐신 것…….”
“아, 이거?”
“네, 네! 그거! 잠깐 봐도 되겠습니까?”
시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고, 아이른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이 심심해서 매만지고 있다 보니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는 순순히 손안의 물건을 마르쿠스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커다란 목소리가 마차 안에 울려 퍼졌다.
“리, 리, 린제이 가문의 백금패! 이, 이거 어디서 얻으셨, 스, 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