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35화 (35/388)

◈ 14. 4인의 천재 (2)

대륙에는 재능 있는 이가 수없이 많다. 남들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두각을 나타내는 아이들.

사람들은 그런 이들을 보며 영재, 수재, 천재라는 표현을 쓴다.

물론 천재라도 다 같은 것은 아니다.

시골 마을에서는 하늘이 낳은 천재라며 칭송받던 이도 도시로 올라오면 평범한 취급을 받을 수 있다.

도시에서 첫 손에 꼽히는 재능을 가진 이조차 왕국 단위로, 대륙 단위로 올라서면 그저 그런 아이들 중 하나로 전락하며 자신감을 잃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러나 약 20년 전.

그런 흔해 빠진 천재들과는 격이 다른 진짜 천재가, 린제이 가문에 태어났다.

“칼 린제이. 내 오빠야.”

자신의 오빠를 소개한 일리아가 말을 멈췄다.

오랜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른은 그 잠깐 사이에 소녀의 마음에 상당한 갈등이 있었음을 어렴풋이 파악했다.

이야기가 계속됐다.

“나는 잘 몰라. 오빠랑은 나이 차이가 꽤 나거든. 9살…… 그래도 내가 뛰어다닐 때쯤엔, 이미 대륙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하더라고.”

일리아 린제이의 말대로였다.

그녀의 오빠인 칼 린제이는 수많은 명사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며, 순식간에 대륙 최고의 천재로 이름을 알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안다는 진부한 표현은 그를 위한 것이었다.

신이 빚은 육체라는 표현도 그를 위한 것이었다. 10살짜리 아이가 기사와의 대련해서 승리했다는 사실도 별달리 자랑거리가 아니었다.

그는 그보다 훨씬 대단한 일을 수없이 많이 해 왔으므로.

그렇게 칼 린제이는 무수히 많은 기대를 받으며 무럭무럭 성장했다.

그런 그가 16살이 되었을 때.

검사 한 명이 린제이 가를 방문했다.

“이그넷……이라는 사람이야.”

이그넷.

꽤나 유명한 사람이었다.

평민임에도 불구하고 크로노 검술관에 입관하여 수많은 명문가 자제들을 제치고 수석을 도맡아 한 자.

정식 수련생이 되는 걸 거부하고 자신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나와, 14살이란 어린 나이에 용병대를 조직한 자.

이후 무수히 많은 업적을 달성한 자.

그녀가 칼 린제이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한번 붙고 싶은 상대였다는 건방진 말과 함께.

“오빠는 흔쾌히 수락했어. 애초에 우리 가문이 대련을 꺼리는 집안이 아니기도 하지만…… 자신이 있었거든.”

그랬다. 칼 린제이는 자신이 있었다.

상대가 아무리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라 한들, 자신과 동갑이다.

나이 많은 기사들을 상대로도 거의 뒤처진 적 없던 그는 동년배에게 진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결투 일정은 순식간에 잡혔다. 칼 린제이는 질질 끄는 것을 싫어했고,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이그넷은 긴 흑발을 휘날리며 대련 장소에 도착했다.

자신의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소름이 오싹 돋는 미소를 짓고,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도(刀)를 뽑고…….

순식간에 승부가 났다.

3합 만에, 칼 린제이가 승부에서 패배한 것이다.

“대련에서 승리한 뒤, 이그넷은 아무런 말도 없이 가 버렸어.”

일리아가 눈을 감았다.

우상이던 자신의 오빠를 처참하게 짓밟고 돌아서는 이그넷의 모습은, 그녀에게 있어서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상처였다.

7살에 불과했던 소녀는 오빠보다도 더 서럽게 울었다. 그런 그녀를 칼 린제이가 오히려 달랬다.

스르르 잠에 빠져들며 일리아가 생각했다. 이겨낼 거라고. 오빠는 천재니까 결국에는 이겨낼 거라고.

그래서 저 마녀 같은 사람하고 다시 싸워 승리를 따낼 거라고.

……그녀만의 생각이었을 뿐이다.

“오빠는 재기하지 못했어.”

……지금까지도. 일리아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아이른의 귀에 꽂혔다.

사실 흔한 일이었다.

승승장구하던 천재가 단 한 번의 고난을 넘어서지 못하고 주저앉는 건.

어려운 게 없었던 만큼 난관에 봉착했을 때 더욱 크게 좌절하는 경우가 많다는 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봤을 법한 이야기다.

재능에 비해 약한 정신력.

재능에 비해 약한 심성.

칼 린제이를 칭송하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고개를 돌렸다. 대륙은 두 번째 천재를 맞이했고, 최초의 천재는 외면 속에서 쓸쓸히 말라갔다.

그리고 그 광경을, 어린 날의 일리아 린제이는 지켜봤다.

계속해서, 계속해서 지켜봤다.

“오빠를 방안에 틀어박히게 만든 건 사람들의 시선이야.”

현재, 칼 린제이는 검을 들지 않는다.

그저 방 안에 틀어박혀 숨죽여 시간을 보낸다.

어린 시절 멋대로 쏟아졌던 타인의 기대도, 그 이후 멋대로 쏟아졌던 실망과 조롱, 비난도 모두 견디기 어렵다.

자신에 대해 아는 것 하나 없는 그들이 자신을 멋대로 재단하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에 칼 린제이는 말할 수 없는 압박감을 느낀다.

그래서 그의 동생은 사람들의 시선을 반기지 않는다. 타인의 말을 꺼릴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대륙의 많은 호사가들이 그녀를 두고 ‘대륙의 세 번째 천재’라고 띄워 줬을 때도, 그녀는 도무지 기쁜 마음이 들지가 않았다.

지금은 꿀처럼 달콤하지만, 언제고 칼처럼 날카롭게 변할지 모른다.

그러니 무시한다. 걷어낸다. 남들이 뭐라고 지껄이건 신경 쓰지 않는다.

타인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나아간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다짐했는데…….

“이미 휩쓸려 있었더라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말로 그랬다.

일리아가 12살의 나이로 크로노 검술관에 입관한 것은, 이그넷이 13살에 입관하여 수석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일리아가 14살의 나이로 정식 기사로 인정받으려 한 것은, 이그넷이 15살의 나이에 명예 기사 서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일리아가 18살의 나이로 증명의 땅을 정복하려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이며, 일리아가 20살이 되기 전 마스터가 되려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다.

오빠보다 이그넷이, 자신보다 이그넷이…… 린제이 가의 사람들보다 이그넷이 더 나은 검사라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이그넷이 세상에 남긴 최연소 기록을 모조리 경신함으로써 말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리아는 사람들의 말만을 쫓아 자신을 잃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야. 이제 안 그럴 거 같아.”

“그래?”

“응. 네 덕분이야.”

“……나?”

“그래.”

아이른은 당황했고, 일리아는 웃었다. 소년이 처음 보는 밝은 미소였다. 더욱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상대의 마음이 진심인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말을 이어 갔다.

“주변에 휩쓸리지 않고, 남이 뭐라고 하던 신경 쓰지 않고, 우직하게 자신의 길을 걷고…… 그걸로 주변의 평가를 완전히 바꿔 버렸지.”

“…….”

“물론 지금의 넌 그런 것조차 신경 안 쓰고 있겠지만. 하나도.”

“그건…….”

“읏차.”

일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쭉 기지개를 켰다.

뭔가를 훌훌 털어 버린 듯 맑은 표정.

“이제 그만둘래. 이그넷 뒤꽁무니 쫓아다니는 것도, 남의 말에 휘둘리는 것도. 이제 다 필요 없어. 그냥 내 갈 길 갈래.”

“…….”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가고, 내가 보고 싶은 방향을 보면서 해도 충분히 닿을 수 있겠지. 내 방식대로 증명하고, 내 방식으로 행동하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 마스터의 경지에도 닿을 수 있을 거고…… 아마 이그넷, 그 괴물 같은 작자도 긴장해야 할걸?”

여기까지 말한 일리아 린제이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자신의 길을 걷는다고는 했지만 여전히 이그넷이라는 사람이 의식은 되는 모양.

물론 이상할 건 없었다. 지금의 소녀는 타인의 말에 휘둘려서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이그넷의 앞에 서려고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그녀의 모습이, 굉장히 빛나 보였다.

그때, 일리아가 돌연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생각해?”

“어?”

“어떻게 생각하냐고. 지금의 나.”

“음? 어…….”

오늘은 당황할 일이 너무 많이 생긴다. 아이른은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까지 남의 시선, 남의 말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다짐했으면서 도대체 왜 저런 질문을 한단 말인가?

이런 생각도 들었지만, 일단은 품고 있던 마음을 그대로 털어놓기로 했다.

소년이 솔직한 자신의 마음을 말했다.

“대단해.”

“그래?”

“응. 힘든 일을 이겨낸 것도 대단하고, 검술관보다 더 큰 세계를 생각하고 있던 것도 대단하고, 소드마스터를 상대할 생각을 하는 것도…….”

대부분의 삶을 침상 위에서 보낸 아이른 파레이라다.

하지만 그도 소드마스터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는 안다.

대륙을 통틀어 봐도 100명이 채 안 되는, 검의 최고봉에 위치한 존재가 바로 마스터였다.

‘그런 대단한 경지를 20세에 달성하고…… 심지어 일리아는 20살이 되기 전에 오르려고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얘기.

하지만 왠지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실현시킬 것 같은 사람.

그야말로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상의 사람 같았다. 그녀도, 이그넷도.

그렇기에 이야기에 몰입하는 게 사실 쉽지는 않았다.

마치 현실의 이야기가 아닌 동화책을 읽는 느낌이랄까.

“흐음.”

그 대단한 동화책의 등장인물이 팔짱을 꼈다.

표정이 미묘했다. 뭔가가 마음에 드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애매한 분위기.

혹시 말실수를 한 건가? 아이른은 자신도 모르는 새 주눅이 들었다.

그 때, 일리아가 팔짱을 풀었다.

그리고 소년의 가슴팍을 툭 치며 말했다.

“그렇게 얼빠진 대답 하지 마.”

“응?”

“긴장 풀지 말라는 뜻이야.”

“그게 무슨 말…….”

뒤늦게 이해한 아이른이 말을 멈췄다. 그가 놀란 표정으로 일리아를 바라봤다.

허나 그녀는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

슬쩍 뒤돌아본 그녀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더 열심히 해. 안 그러면…… 순식간에 격차를 벌려 버릴 테니까.”

아까보다 더 밝은 미소와 함께, 그녀가 소연무장을 떠났다.

아이른은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자리에 서 있었다.

“…….”

남의 이야기였다.

자신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분명 그러했다.

그렇기에 일리아 린제이의 말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환상 송 동화의 나라에서나 일어나는 얘기라는 생각이 내내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었다.

허나 일리아의 마지막 말. 이그넷과 마찬가지로 긴장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순식간에 격차를 벌려 버릴 거라고.

그러한 말을 듣는 순간, 소년은 자신이 동화책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근

조금이지만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조금이지만 불꽃이 피어오른다.

물론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이 정도의 열기로는 소년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덩어리를 녹일 수 없었다.

실제로 아이른은 지금의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 불꽃이 피어났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

그 생소한 감정 속에서, 아이른 파레이라는 오랜 시간 어둠 속에 서 있었다.

* * *

며칠 후, 최종 면담이 시작되었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격려와 조언, 그리고 합격 여부 전달. 대부분의 아이들은 결과를 받아들였다.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며 감사를 표하고, 누군가는 아쉬운 마음으로 작별 인사를 고하고.

물론 특이한 경우도 없진 않았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결국 원하던 대로 됐구만. 이제 속이 좀 시원한가?”

“예, 시원합니다. 하지만 수석을 달성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일리아 린제이가 차분히 말했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던 관주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래 보이긴 하네. 중간 평가 때보다 훨씬 좋아 보여.”

“관주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내 가르침은 무슨. 네가 잘한 거지. 됐고, 나가 봐.”

“그간 감사했습니다.”

일리아도, 관주도, 옆의 아메드 교관도 결과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은발 소녀에게 그런 건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이안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허나 그것도 잠시.

다음으로 방에 들어온 예비 수련생의 말에, 관주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정말인가?”

“예.”

“네 성적은 나무랄 데 없다. 시험 결과만을 말하는 게 아니야. 검술관에서의 네 모습은 다른 아이들의 귀감이 될 만큼 훌륭했다. 아집을 버리고 단점을 고쳤고, 장점은 더욱 갈고닦았지. 개인적으로도 너에게 거는 기대가 커.”

“……죄송합니다. 더는 자신이 없습니다.”

브랫 로이드의 목소리에선 아무런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다 타 버린 양초와 같았다. 표정도, 눈동자도.

지켜보던 관주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뜻대로 하거라.”

관주의 말에 브랫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꾸벅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서는 소년을 보며 관주가 세 번 연속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경우가 가끔 있지.’

객관적으로 훌륭한 재능을 타고났음에도, 더 뛰어난 천재의 출현에 마음이 꺾이는 경우 말이다.

검술관에서도, 검술관 밖에서도 몇 번 경험했다. 린제이 가의 칼 린제이가 대표적인 경우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물가로 소를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먹는 것은 오로지 소의 마음에 달려 있다.

‘부디 마음의 반전을 일으킬 계기가, 저 아이에게 찾아오기를.’

관주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음 예비 수련생을 불렀다.

단정한 모습으로 들어오는, 다른 아이들보다 살짝 어른스러워 보이는 소년.

“아이른 파레이라 수련생.”

“예.”

“최종 평가, 인상적이었다. 솔직히 말해 관주 일을 하는 동안에 가장 놀랐어.”

“감사합니다.”

“중간 평가 끝나고 면담 내용, 기억하지?”

“예? 아, 예.”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화제가 변했지만, 확실히 기억난다. 그때의 면담에서 아이른은 일리아에 대한 상담을 부탁했다.

또 그와 별개로 자신이 원할 때 언제든 가르침을 청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았다.

그리고 이는 반대의 경우도 가능했다.

관주가 먼저 그에 대한 말을 꺼냈다.

“너에게 해 줄 조언이 하나 있다.”

“경청하겠습니다.”

“그 전에 질문도 하나 하지.”

“그 또한 경청하겠습니다.”

하나의 조언. 하나의 질문.

일반적인 면담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아메드 교관은 억지로 표정을 관리하며 마음속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아이른은 예상과 전혀 다른 상황에도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이윽고 이안의 입에서 질문이 흘러나왔다.

“아이른 파레이라 수련생. 자네는…… 검을 드는 이유가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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