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최종 평가 (2)
세상의 온갖 재능 있는 이들을 다 모아 놓은 크로노 검술관이지만, 그중에서도 아이른 파레이라는 유독 특이한 인물이었다.
대단한 모습이든, 대단치 않은 모습이든, 그가 보여 줬던 모습은 예비 수련생들의 머릿속에 강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물론 대단한 일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중간 평가가 끝난 직후, 처음으로 검을 쥐는 것이 허락되었을 때.
당시의 아이른 파레이라는 교관들의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신비로운 검격을 보여 줬었지만, 수련생들 중에 이를 파악한 이는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일리아 린제이, 브랫 로이드, 주디스를 포함한 대여섯 명 정도.
하지만 지금의 나태 공자가 뿜어내는 분위기는, 그보다 훨씬 강렬했다.
알아차리지 못할 수가 없을 만큼.
고오오오오
소리가 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언가 들리는 것 같다. 거대한 무언가가 기지개를 켜고 일어서는 것 같은 느낌.
예전과는, 아이른이 처음 검을 들었을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지금 자리에 모인 예비 수련생들 중 이를 느끼지 못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당연했다. 그들 모두가 지난 8개월간 피나는 노력을 해 왔으니까.
세상 어디에 내놔도 모자람이 없는 실력을 키웠으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 중에서도 가장 크게 이변을 느끼고 있는 것은 중간 평가 이후 한 차례 결투 신청을 했던 브랫 로이드였다.
‘인정할 수 없어!’
허나 푸른 머리에 고귀한 피가 흐르는 소년은, 아이른 파레이라를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중심으로 형성된 무거운 분위기도.
그를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일리아 린제이도.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어!’
누구보다 아이른을 인정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단정 지어 말했다. 그는 붙을 거라고. 그보다 가파른 성장을 보인 예비 수련생은 없다고.
정식 수련생의 자리 중 하나는 나태 공자의 차지라고.
하지만 이럴 줄은 몰랐다.
잠재력뿐만이 아니라.
미래의 아이른 파레이라가 아니라.
현재의 아이른 파레이라마저도, 그마저도 자신을 뛰어넘었을 거라는 생각은, 소년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비참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안 돼.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별거 없을 거야.’
꿀꺽 침을 삼킨 브랫 로이드가 자신을 진정시켰다.
맞다. 별 볼 일 없을 것이다.
분위기는 거창하지만, 자신의 아성을 넘을 정도로 대단한 무언가를 보이는 건 어려울 것이다.
일리아 린제이의 시선도 그냥, 그냥 마지막 순번을 바라보는 평범한 눈빛에 불과할 거다.
하늘검을 끌어낸 것은, 자신이다.
“……그래야만 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브랫 로이드.
그런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른 파레이라가 무대를 향해 나아갔다.
저벅저벅
평범한 발소리에, 평범한 걸음걸이.
하지만 뭔가 달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 자체가 달라 보였다.
지금의 아이른 파레이라는 아이른 파레이라가 아니었다. 교관을 포함한 모두가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꼈다.
물론 당사자도 마찬가지였다.
사내의 검을 재현하기 위해, 지금껏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던가.
“후우.”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사내의 호흡이었다.
전신의 근육을 긴장시키고 이완시킨다.
사내의 준비 상태였다.
그 이후로 이루어진 움직임도 마찬가지였다.
걸음걸이, 검을 드는 동작, 적당히 발을 넓히고 자세를 취하는 부분까지. 사내의 것과 닮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허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여기까지는 보름 전에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 나태 공자는 놓치고 있었던 진실로 중요한 부분에 비로소 닿을 수 있었다.
‘마음.’
의지.
끊임없이 검을 휘두르며, 고통과 인내 속에 구슬땀을 흘리며 사내가 나아갈 수 있게 해 준 강철 같은 의지.
그것이 덧씌워졌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적을 베어 버리려는 의지가, 소년의 몸에 내려앉았다.
‘온전히 알 수는 없어.’
안타까운 일이었다. 꿈과 현실을 오가며 집요하게 파고들었지만, 여전히 모른다.
그가 베려고 하는 대상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 정도로 충분했다.
우우웅-
한곳으로 모인 강인한 집중력이 검을 타고 흘렀다.
후우우웅!
그리고 내리쳐졌다. 힘의 방출과 함께, 강철의 의지 역시 앞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앞에 있는 모든 것을 베어 버리는 힘.
그것이 꿈이 아닌 현실에 펼쳐졌다.
* * *
카라카 교관이 눈을 약간 찡그렸다.
대단한 기세다. 도저히 16살 어린 나이라곤 볼 수 없는 묵직한 중압감이다.
허나 훌륭한 것은 분위기뿐.
검을 들고 선 그의 자세는 빈틈투성이였다.
‘아무리 가능성을 평가하는 장소라고는 하지만, 실전성이 너무 떨어진…….’
평소 부드러운 성격과는 다른 냉정한 이성으로 평가를 이어가는 와중이었다.
후우우웅!
아무런 예고도 없이 아이른 파레이라 수련생의 철검이 떨어져 내렸다.
물론 영향받을 일은 전혀 없었다. 수련생과 자신 사이의 간격은 5미터.
검을 집어던지는 것이 아닌 한 공격에 노출될 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허나 카라카는 피했다.
피할 수밖에 없었다.
검이 없는 지금, 자신의 앞으로 날아오는 무언가를 막아 내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이 부지불식간에 들었다.
콰과과과과과광!
“…….”
자리에서 벗어난 카라카 교관이, 자신이 있던 장소를 쳐다봤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마른 침만 꿀꺽 삼켰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교관들도, 조교들도, 그들을 빙 둘러싼 100여 명의 예비 수련생들도.
그 누구도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대신,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연무장의 바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휘이이잉-
바람이 불어온다. 예기치 못하게 발생한 흙먼지가 걷어지고, 아이른 파레이라가 만든 광경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대검의 길이를 아득히 뛰어넘는, 거대한 상흔(傷痕).
바닥을 가로지르는 믿을 수 없는 흔적을 보며, 아이들이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날도 서지 않은 검인데…… 아니, 애초에 뭐로 벤 거지?’
이해할 수 없는 일.
하지만 분명히 일어난 일.
예비 수련생들은 혼란에 빠졌다. 조교들조차 그들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대부분이 산전수전 다 겪은 용병들인 그들로서도, 지금 16세 소년이 보여 준 일을 납득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그때, 침묵을 지키고 있던 이안 검술관주가 나섰다.
“잠시 정숙하지. 아직 최종 평가는 끝나지 않았으니.”
평소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는 존댓말을 쓰는 관주였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했다.
잠시 눈가를 찌푸린 그가 아이른과 아이른의 검, 그리고 그가 만든 거대한 흔적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말했다.
“이거 막판에 평가가 어려워지는구만. 교관들과 잠시 얘기할 게 있으니, 모두들 조금 더 기다려 주게.”
누구 말이라고 거부할까.
조교들과 예비 수련생들은 관주의 말에 따라 얌전히 자리를 지켰다.
물론 얌전한 것은 겉모습뿐이었다. 머릿속으로는 온갖 생각이 넘실넘실 흐르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것이 가능하지?
합격할 줄은 알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이야?
그럼 1등은 어떻게 되는 거지? 아이른 파레이라인가? 아니면 일리아 린제이인가?
어쩌면, 아이른 파레이라가 수석을 차지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누구나 할 수밖에 없는, 자연스레 생겨나는 의문.
그래서, 과연 누가 최종 평가의 승자인가?
모두가 쉽사리 판단하지 못했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대단한, 믿을 수 없는 참격을 선보인 것은 사실이다.
허나 일리아 린제이의 검도 그에 못지않았다. 솔직히 말해 실전성으로만 보면 훨씬 대단했다.
그녀의 앞에 선 자신을 생각하기만 해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으니까.
하늘을 지배하는 폭풍 속에서, 예비 수련생들은 각자의 몸을 건사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아이른의 검도 그녀 못지않아. 준비 자세나 빈틈을 보면 실전성은 부족하지만…… 그래도…….’
요컨대, 지향점이 너무나도 달랐다.
절대적인 기준을 들어 평가하기가 너무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일까?
검술관주와 교관들이 회의 끝내 내놓은 결론은 이것이었다.
“일리아 린제이 수련생.”
“네.”
“그리고 아이른 파레이라 수련생.”
“예.”
“미안하다, 기다리게 해서. 사실 이런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어. 추상적인 시험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와 교관들 나름의 객관적인 기준이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안 되겠어. 평가가 너무 어려워.”
“…….”
“…….”
“그래서 말인데, 한 번 더 하지. 각자 자신 있는 부분을 한 번 더 보여다오.”
술렁이는 예비 수련생들.
허나 소란은 잠깐이었다. 입을 다문 그들은 이내 일리아 린제이와 아이른 파레이라, 두 소년 소녀를 향해 시선을 모았다.
먼저 움직인 것은 린제이 가의 두 번째 천재였다.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좋아. 이번에도 기대해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은발 소녀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처음 하늘검을 펼쳤을 때보다 다소 긴장한 얼굴.
이마에서 한 방울 땀 줄기가 흐르고 떨어졌다. 직후 일리아의 검이 시작되었다.
가문의 것과는 전혀 다른, 오로지 크로노 검술관에서 얻은 심득만을 토대로 한 검술. 브랫 로이드의 눈이 또다시 커졌다.
주디스는 분노한 가운데도 단 한 번도 그녀의 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윽고, 아이른 파레이라의 차례가 다가왔다.
관주가 입을 열었다.
“항상 느끼는 건데, 너는 볼 때마다 나를 놀랍게 하는구나.”
“…….”
“이번에도 날 놀라게 할 수 있겠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관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아이른을 바라봤고, 예비 수련생들도 시선을 모았다.
브랫 역시 괴로운 와중에 계속해서 고개를 들고 있었다.
잠시 후, 아이른 파레이라의 두 번째 검술도 마무리되었다.
재차 고개를 끄덕인 관주가 교관들의 눈을 한 번씩 쳐다본 뒤, 엄숙하게 선언했다.
“기다리는 건 싫을 테니, 곧바로 최종 평가의 결과를 말해 주지. 아, 지금의 등수만으로 정식 입관을 결정하는 건 아니야. 물론 90퍼센트 이상이 여기서 결정되긴 하지만, 최종 면담도 남아 있으니까…… 하여튼, 역순으로 호명하지.”
장난기 하나 없는 노인의 입에서 하나씩 이름이 호명되었다.
낮은 순위의 수련생들은 좌절했고, 높은 순위의 수련생들은 기뻐했다.
애매한 순위의 아이들은 머리가 복잡해진 가운데 면담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4위, 주디스. 3위, 브랫 로이드. 차석…… 아이른 파레이라. 수석 일리아 린제이. 모두 평가 치르느라 고생했다. 면담에 대해선 추후 알려 줄 테니, 이만 돌아가 쉬어도 좋다.”
이변은 없었다. 대부분의 예상대로, 수석은 일리아 린제이의 차지가 되었다.
하지만 모두의 머릿속에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그녀가 아니었다.
“…….”
뒤돌아서 숙소로 돌아가는 나태 공자를 보며, 예비 수련생들은 저마다 다른 생각을 품었다.
그렇게, 검술관의 1년 중 가장 중요한 행사가 끝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