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폭풍전야 (3)
“주디스?”
“왜 말끝 높이냐? 내가 온 게 이상해?”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한 말이야. 나 성격 더러운 거 알면서 맨날 진지하게 반응하네. 웃기는 놈이야.”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주디스는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물론 종일 그러고 있지는 않았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그녀가 벤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한가하면 얘기나 잠깐 할래?”
“음…….”
한가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엄청 바쁜 건 아니었다.
게다가 주디스가 이렇게 분위기를 잡고 대화하자 한 것도 처음이었기에, 호기심 때문에라도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른은 고개를 끄덕인 뒤 벤치에 앉았다. 주디스도 그 옆에 털썩 앉았다.
그렇게 1분 정도, 아무 말도 없이 밤하늘을 쳐다보던 소녀가 입을 열었다.
“준비는 잘돼 가?”
“어? 준비?”
“당연히 최종 평가지. 이제 보름도 안 남았는데 내가 다른 얘기 하겠어?”
“아…….”
솔직히 말하면, 의식하고 있지 않았다.
자신도 안다. 최종 평가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날의 결과에 따라 지난 1년간의 노력이 빛을 발할지, 아니면 헛수고가 될지 결정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지금의 아이른에게는 그것보다 훨씬 더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그냥, 열심히 하는 거지.”
물론 그 말을 곧이곧대로 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대답에 힘이 없구만.”
“으음.”
“하긴, 넌 원래 항상 그렇지.”
“……너는 어때? 자신 있어?”
이번엔 아이른이 물었고, 주디스가 곧바로 되물었다.
“무슨 자신?”
“붙을 자신?”
“붙는 거야 당연한 건데 왜 물어봐. 그거 말고 일리아, 그 재수 없는 년 이길 수 있냐고 물어봐야지.”
“……이길 수 있어?”
일리아의 이름을 그대로 따라 말하면 재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느낌이기에, 그냥 생략하고 말했다.
다른 이들이 그녀를 싫어한다는 건 알지만, 그녀가 가장 먼저 자신을 도와준 소중한 존재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허나 주디스에게 있어서 일리아는 나쁜 년일 뿐이었다.
그녀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아니, 열심히만 하는 거로는 안 되지? 하여튼 이겨. 아무튼, 이겨.”
“그래.”
“뭐야. 반응 좀 더 해 봐.”
“어떻게…….”
“하, 됐다. 진짜 재미없는 놈이야, 너는.”
“미안.”
소년의 사과를 끝으로 둘 사이에 정적이 감돌았다.
말없이 양발로 번갈아 바닥을 차는 주디스. 그런 그녀를 따라 소심하게 발장난을 치는 아이른.
먼저 입을 연 것은 붉은 머리 소녀였다.
“나도 미안해.”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놀랍게도 사과였다.
당황한 아이른은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주디스 성격에 사과라니?
아니, 그 전에 그녀가 자신에게 사과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소년은 멍하니 상대를 바라봤고, 주디스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한동안 신경 못 써 줬잖아. 처음에는 대련도 해 주고, 너 어색한 동작도 가르쳐 주고 그랬는데.”
“어? 아아…….”
“관주님 검무 이후에는 거의 신경 못 써 준 거 같아서. 그게 미안해서 와 봤어.”
“아니, 그런 거로 미안해할 필요는 전혀 없는…….”
“나 고아야.”
불쑥 치고 들어오는 발언.
아이른은 입을 다물었다.
그 또한 친어머니를 잃긴 했지만, 부모 한 명 없다는 주디스의 말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녀도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계속해서 이야기를 늘어놨다.
“뭐 불쌍히 여겨 달라고 말 꺼낸 건 아니고, 그냥…… 어린애가 악착같이 살려다 보니 할 만한 일이 소매치기니 좀도둑질이니 하는 것밖에 없고, 그렇게 막 살다 보니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다 그 모양 그 꼴이고, 어른이든, 애새끼든 가릴 것 없이…….”
“…….”
“하여튼, 그래서 누군가한테 고마워할 일도, 고맙다고 말할 일도 없었어. 그래서 중간 평가 때 네가 나 건져내러 왔을 때 고맙다는 말을 못 했어. 사실 지금도 대놓고 하는 건 오글거려서 못 하겠고.”
“그건…….”
“그래서, 그 대신 이것저것 챙겨 주고, 알려 주고, 뭐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름대로 신세 갚으려고는 했는데, 정신 차려 보니까 이렇게 됐네. 그래서…… 미안하다고 하는 거야.”
후우, 여기까지 말한 주디스가 숨을 내쉬었다.
다소 속이 후련해진 것인지, 그녀의 표정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보다 한결 편해 보였다.
아이른은 여전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멍하니 상대 얼굴만 바라봤다. 덕분에 주디스가 고개를 돌리자마자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다시, 소녀의 입이 열렸다.
“붙어.”
“응?”
“무조건 붙으라고, 최종 평가. 붙어서, 예비 딱지 떼고 정식으로 크로노 검술관 입관해서, 수련생 되면…….”
“…….”
“이런 찝찝한 기분 남지 않을 정도로 제대로, 더 열심히 도와줄 테니까, 그러니까 무조건 붙어. 알았지?”
아이른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멍청해 보이는 모습. 피식 웃은 주디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탁탁 털었다.
그리고 소년의 등을 팡팡 두드려 주었다.
“그럼 누나는 간다. 열심히 해.”
그 말을 끝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주디스.
붉은 단발이 찰랑거리며 멀어진다. 아이른은 한참이나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살짝 내리고 곰곰이 생각했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주디스가 미안할 일은 없었다.
미안해야 할 건 오히려 자신이었다.
“나는 지난 두 달간, 아무도 신경 못 써 줬는데…….”
소홀해졌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주디스는 여전히 일주일에 한 번은 자신을 찾아와 이것저것 신경을 써 줬다.
그녀만 그런 것이 아니다.
브랫 로이드도 바쁜 와중에 적지 않은 조언을 해 주었고, 선물을 건넨 이후로는 일리아 린제이도 다시 자신을 챙겨 줬다.
예전보다 함께하는 빈도가 줄었을지는 몰라도, 그들의 마음 씀씀이마저 줄어든 것은 결코 아니었다.
‘반면에 나는, 행동뿐만이 아니라 마음도 멀어져 있었지.’
그랬다. 자신은 오로지 꿈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사내의 검에만 매몰되어 주변을 신경 쓰지 못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소년은 그 신비로운 사내와 가까워지기 위해 최선을 다할 터였지만…… 그것과 별개로, 주디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신세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오히려 신세를 갚아야 하는 것은 자신이다.
일리아에게, 브랫에게, 주디스에게 정말이지 많은 것을 받았다.
반면에 자신이 준 것은 없다. 줄 시간조차 이젠 없다. 당장 2주일 후에는 최종 평가니까. 아이른은 뒤늦은 후회를 느꼈다.
‘아니, 늦진 않았어.’
그렇다. 늦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최종 평가에서 떨어진다면 몰라도, 붙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주디스의 말마따나 모두가 정식으로 검술관에 입관한다면, 더 오래 인연을 지속할 수 있다.
소홀했던 과거를 갚기 위한 미래를 보낼 수 있다.
비로소 안도감이 들었다. 아이른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신기하네.’
눈을 감은 소년이 지난날을 돌아봤다.
평생을 방안에만 갇혀 있었다. 기쁨도, 노여움도, 슬픔도, 즐거움도 모두 우울과 무기력증에 뒤덮여 드러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허나 검술관에서의 삶은 소년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매 순간 자신에게 놀랐다.
물에 빠진 주디스를 구해 줄 때, 기분이 상한 일리아 린제이에게 선물을 건넬 때, 결투를 청해 온 브랫 로이드의 앞에 당당히 섰을 때…… 그때마다 자신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구나,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구나 하는 생소하고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지난 1년은, 자신도 모르는 자신을 하나씩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나를 알아간다.
내 마음을 알아간다.
낯설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나태 공자는 실로 오랜만에 자신의 육체가 아닌, 동작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텁
벤치에 걸쳐 놓은 목검을 잡는다. 자신이 있었던 연무장의 중심으로 걸어간다. 자세를 취한 뒤 조용히 호흡한다.
그리고 놓치고 있던 것을, 뒤늦게나마 쫓아간다.
‘……겉모습만 흉내 내는 게 문제였어.’
그렇다.
겉치레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그 안의 것이 중요했다.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에 소년은 눈을 감았고, 명상을 시작했다.
저녁의 찬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갔지만, 소년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자세를 유지할 따름이었다.
* * *
“갔다 왔어.”
“그래.”
“안 물어봐? 잘하고 있는지?”
“어련히 잘하고 있겠지. 저번에도 말했지만, 그 녀석은 무조건 붙어. 네가 따로 신경 써 주지 않아도.”
“말 진짜 재수 없게 하네. 귀족들은 원래 다 이렇게 싸가지가 없냐?”
“로이드 가의 장자는 어릴 때부터 예절과 교양에 관해 모자람 없이 교육받는다.”
“근데 왜 이 모양이냐고.”
“보는 사람마다 싸가지 없어 보이면 그 사람들이 문제가 아니라 네가 문제겠지. 교정이 필요한 것 같은데.”
“지금 나 교육 못 받았다고 돌려 까는 거?”
“됐고, 시작하자.”
손을 내저은 브랫 로이드가 검을 들었다.
그러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굉장히 밀도 높은 물의 구체. 그것이 소년의 전신을 단단하게 감싸고 있는 느낌.
도저히 틈이 보이지 않는다. 답답함마저 느껴진다.
그 모습에 주디스가 억지웃음을 지었다.
“언제 봐도 재밌네.”
브랫 로이드와 주디스, 둘은 최종 평가에 대비해 힘을 합치기로 했다.
서로가 서로의 실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고, 잠재력을 보여 주기에도 적합한 상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들에 대한 교관들의 평가는 나날이 높아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주디스는 알고 있었다.
현재의 자신은, 브랫의 라이벌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있는 상태라는 것을.
‘일리아는 이길 수 있을지 몰라도, 이 녀석은…….’
오랫동안 합을 맞춰 왔기에 더욱 잘 알았다.
지금의 녀석은 괴물이었다.
없는 틈도 만들어내는 것이 자신이 지향하는 검술이지만, 이놈의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호흡을 무너뜨리는 것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말이다.
‘정식 수련생이 된 후에는, 내가 이긴다.’
일리아 린제이도.
브랫 로이드, 너도.
타는 듯한 좌절감을 투쟁심으로 승화시키며, 주디스도 따라 검을 들었다.
이윽고 실전을 방불케 하는 대련이 펼쳐졌다.
둘뿐만이 아니었다.
최종 평가를 얼마 남기지 않은 지금, 대연무장에 모인 예비 수련생들 하나하나의 눈에 예리한 기운이 머물렀다.
쒜에엑!
쒜엑-!
“후웁, 훕!”
“하아, 하아!”
중간 평가 전날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운 분위기. 그 속에서 정교하게 가다듬어지는 각자의 깨달음.
이를 멀리서 지켜보는 관주와 교관들의 눈에,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 * *
2주일 후.
바야흐로 크로노 검술관의 정식 입관을 건, 최종 평가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