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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30화 (30/388)

◈ 12. 폭풍전야 (2)

저 녀석이 왜 여기에 있지? 주디스가 처음으로 한 생각이다.

가끔 아이른을 보러올 때를 제외하면 그녀는 항상 작은 연무장에 홀로 있었으니까. 의아한 일이었다.

허나 그러한 생각은 얼마 이어지지 못했다.

일리아의 기세가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빠드득

주디스가 입을 꽉 다물었다.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 이를 갈았고, 덕분에 신음을 흘리는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붉은 머리 소녀는 옴짝달싹 못 한 상태로,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일리아의 말을 가만히 듣는 수밖에 없었다.

“네가 날 싫어하든, 날 욕하든, 내 가문을 무시하든 상관없어.”

“너 같은 사람들이 뒤에서 뭐라고 떠들든, 영향 가는 건 하나도 없으니까.”

“그래. 영향 가는 건 하나도 없어. 나는 이번에도 수석을 할 거야. 저번 시험 때 그랬듯이. 앞으로도 그럴 것처럼.”

“가문의 검술? 필요 없어. 이곳, 크로노 검술관에서 배운 것만으로도…….”

“……너희들보다 앞선다는 걸 증명하는 건 쉬운 일이야.”

평소와 다름없는 조용한 말투.

그러나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내용.

하지만 이 은발 소녀의 말에 반박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수련생 중 몇몇은 일리아 린제이의 뒷말을 즐겨 하는 이들이었지만, 그들조차 벙어리가 되어 어떠한 말도 꺼내지 못했다.

주디스는 그 사실에 분노조차 하지 못했다.

똑같았으니까. 자신조차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으니까.

‘제길!’

시원하게 말하고 싶다.

네깟 게 뭐냐고, 지랄하지 말고 최종 평가 때 한번 보자고, 그 잘난 린제이 가의 명성을 땅에 처박아 주겠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싶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으직

주디스가 입안을 깨물었다.

연약한 속살이 파이고 피가 배어 나왔다. 주르르 흐를 정도는 아니지만 찝찔한 맛이 감돌 정도는 되었다.

뒤늦게 따라오는 알싸한 고통. 소녀는 한동안 부족했던 독기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정신을 차린 그녀가 후읍, 숨을 들이마셨다.

뒤늦게나마 재수 없는 명문가 녀석에게 욕을 해 주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그만해라.”

둘 사이에 끼어든 소년, 브랫 로이드가 말했다.

푸른색 머리에 어울리는 차분한 말투가 팽팽하던 긴장감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물론 주디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끼어들지 말고 꺼…….”

“여기서 일 더 커지면 퇴관이야.”

브랫이 주디스, 그리고 일리아 린제이를 쳐다본 뒤 고갯짓을 했다.

두 명의 조교가 있는 방향이었다. 자신을 예의주시하는 것을 느낀 일리아가 기세를 줄였다.

후우, 크게 숨을 내쉰 주디스도 입을 다물었다. 불만에 찬 눈빛만은 여전했지만.

은발 소녀는 상대의 시선을 받아 주지 않았다.

언제 화를 냈냐는 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수롭지 않은 걸음걸이로 멀어졌다.

등을 돌려 사라지는 그녀를 보며 주디스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린제이 가의 검술.”

그때, 브랫 로이드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보다 큰 목소리. 그리고 아까보다 살짝 흥분한 듯한 목소리.

일리아의 걸음이 멈췄다. 그녀도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듯 등을 보이고 멈춰선 소녀의 뒤에서, 계속해서 브랫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400년 전 하늘을 지배하던 마족, 마룡왕을 잡고 생긴 이름이지? 하늘검 말이야.”

“……그런데?”

“보고 싶어서.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 줄 일 없어.”

“아쉽네. 싫다면 강요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이거는 알아둬.”

잠시 뜸을 들인 브랫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하늘검을 보이지 않으면, 수석은 내가 한다.”

“…….”

일리아 린제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몇 초간 멈춰 있던 그녀는 뚜벅뚜벅 걸어갔다.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허나 브랫의 말을 완전히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오랜만에 다른 사람으로 인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물론 지금 가장 뜨거운 사람은 주디스였다.

잠시 멍하니 있던 그녀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후우, 저, 개, 후우, 같은 새끼, 흡, 내가 반드시, 박살 낸다!”

“말이나 똑바로 해. 그리고 네가 잘못했어.”

“난…… 저 자식도…… 아니, 그러니까…… 후우, 닥쳐 그냥!”

“그러지.”

“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길길이 날뛰는 주디스를 놔둔 채, 브랫이 검을 들었다.

차분한 듯 보이지만, 그의 가슴은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뛰고 있었다.

* * *

일리아 린제이, 주디스, 그리고 브랫 로이드 사이에 있었던 다툼은 빠른 속도로 예비 수련생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일리아가 했던 광오한 발언도, 당연히 함께 퍼져 나갔다.

의외로 분노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한 경쟁의 장이긴 하지만, 1등은 이미 정해진 싸움이라는 것을 말이다.

린제이 가를 넘어서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벽을 넘어선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어두운 곳에서 행해지는 뒷말밖에 없었다.

씁쓸한 현실이었다.

‘수석은 내가 한다.’

하지만 브랫의 이 말 이후로 아이들은 달라졌다.

손에 꼽힐 만큼 재능 넘치는 소년.

허나 감히 최고의 자리를 넘보지는 않았던 지극한 현실주의자.

그런 그가 하늘 위의 존재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것은 지금껏 가라앉아 있던 아이들의 자존심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나는 패배하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게 아니야!’

그렇다.

누군가에게 패배하기 위해 이곳에 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다.

수련생들은 최고의 검사가 되기 위해 이곳에 왔다.

꽤 오래 잊고 있었던 사실을, 브랫 로이드가 알려 줬다.

주디스가 알려 줬다. 일리아 린제이와 정면에서 맞섬으로써 말이다.

‘더, 더 할 수 있다!’

‘단순히 최종 평가에서 살아남는 수준으로는 만족 못 해!’

‘내가 이긴다! 검무의 깨달음이라면 나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어떻게든 이겨 주마!’

모두의 눈빛이 달라졌다.

현실적인 목표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누군가에게 깨지고 부서지고 좌절하기 전으로 돌아간 예비 수련생들.

그들이 내뿜는 열기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다. 겨울이라는 날씨가 무색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인물은, 차가운 머리 색을 가진 로이드 가의 장자였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일리아 린제이와의 갈등 이후, 자신에게 물었다.

가능하냐고. 정말로 자신의 말을 지킬 수 있냐고.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해 볼 만하다’라는 거였다.

관주의 가르침 이후 자신은 성장했다.

좁았던 시야가 넓어지고, 경직됐던 사고는 유연해졌다.

그로 인해 수많은 이들의 장점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했고, 소화했다.

그 독한 주디스조차 이제는 자신보다 아래였다.

‘……뜨겁다.’

거기에 투쟁심이 더해졌다.

사실 그는 승부욕, 호승심, 투쟁심 따위의 단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흥분의 감정들은 냉철한 이성을 어지럽히기에, 철저하고 효율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데 방해만 될 뿐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가슴속에 활활 타오르는 이 불꽃이 얼마나 폭발적인 힘을 끌어내는지. 미래를 본 건 아니지만 브랫은 벌써부터 알 수 있었다.

“브랫! 이 부분 말인데…….”

“느끼한 새끼야! 대련하자!”

“로이드 님? 이럴 경우에는 어떻게 하는 편이…….”

브랫 로이드의 불꽃을 알아차린 건 브랫 당사자만이 아니었다.

예비 수련생들 또한 밝게 빛나는 그를 알아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브랫은 정말이지, 눈이 부실 정도로 빛이 났으니까.

어느새 브랫의 주변엔 수많은 아이들이 함께였다.

같은 천재인 일리아와는 상황이 달랐다.

벽을 세우고 자신만의 길을 걷는 그녀와 달리, 브랫은 모든 이를 품었다.

도움을 줬고, 도움을 받았다. 밝고 뜨거운 분위기는 계속해서 크기를 키워 검술관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렇게 두 달이 넘는 시점이 지났을 때.

브랫은 자신이 확실하게 성장했음을 인지했다.

‘나쁘지 않군.’

자신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자신을 오만하다 말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로이드 가의 장자로서, 그저 자신의 위치를 잘 아는 것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보다 우월한 자신을 일부러 후려칠 필욘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일리아 린제이에게 도전할 생각도 전혀 한 적 없었다. 그녀는 자신보다 위에 있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정해져 있으니까.

허나 지금, 그가 정해놨던 세상의 틀이 조금씩 깨어져 나가고 있었다.

‘정해진 건 없다. 나보다 못났다고 생각했던 이도 나를 뛰어넘을 수 있다.

주디스도, 아이른 파레이라도 나보다 강해질 수 있다.’

그렇기에, 자신도 일리아 린제이를 뛰어넘을 수 있다.

자신감에 가득 찬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태양처럼 밝아 보였다.

물론.

“음.”

빛이 모든 곳을 비추는 건 아니었다.

태양이 아무리 찬란하다 한들 그림자는 있다. 그리고 그림자 짙은 어두운 곳에서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지금의 아이른 파레이라가 그랬다.

브랫 로이드의 발언 이후, 나태 공자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시들시들해졌다.

예비 수련생들은 그를 완전히 경쟁에서 배제했다.

압도적인 잠재력을 가지고 있기에, 그의 합격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현재 그의 실력이 한참 부족한 것 또한 사실이다.

실전 같은 대련을 펼칠 경우, B클래스 이상 수련생 중 그를 꺾지 못할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심지어 C클래스 몇몇에게도 질 가능성이 다분하다. 이것이 아이른에 대한 평가였다.

요컨대, 지금의 그는 인정받는 동시에 인정받지 못했다.

그의 미래가 찬란할 것을 알지만,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실력이 그 빛을 바래게 한다.

덕분에 현재 아이른 파레이라는, 더욱 뜨거워진 경쟁의 장에서 혼자 동떨어진 외딴 섬과 같은 취급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나태 공자는 오히려 지금의 분위기를 반겼다.

남들 다 얻은 검무의 깨달음도 없어도, 검을 휘두르는 시간을 극단적으로 줄여도, 그렇게 아낀 시간을 무의미해 보일 수도 있는 명상에 투자해도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는 지금이 편했다.

조용히 집중하기에 이만큼 좋은 환경은 없었다.

그렇듯 잔잔히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벤치에 누워 있던 아이른 파레이라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목검을 들었다.

육체를 움직이는 수련을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명상의 방법을 바꾼 것뿐.

약 30분 정도 자세를 유지하던 그가 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게 맞아.”

확신에 찬 목소리.

흔치 않은 일이었다.

나태 공자는 항상 자신이 없었다. 확신이 없었다.

모든 것이 처음인 그에게 있어서 이처럼 단호하게 ‘옳다’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 특별한 일이었다.

그 정도로 느낌이 좋았다.

아이른이 조용히 생각했다.

‘내가 재현하고 싶은 것은 꿈이 아니라, 꿈속의 남자였어.’

꿈에서 봤던 낡은 집을, 아담한 마당을, 듬성듬성 난 잡초와 불어오는 바람까지 중요했던 거라면 누워서 하는 명상이 맞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소년이 닮고 싶은 것은 오롯이 사내였고, 온전한 사내의 검이었다.

그렇다면 사내의 모습에 보다 가까운 자세를 취해야 한다. 검을 든 상태로 명상을 행해야 옳다.

허나 이것만으로 모든 것이 완성된 것은 아니다.

‘뭔가가 더 필요한데.’

방향은 맞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원하는 지점에 닿기 위해서는 뭔가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금 당장 고민해 봐야 얻는 것은 없다.

조급하게 두드려 봤자 문이 열리는 대신 자신의 손이 아플 뿐이다.

집착을 버린 아이른이 재차 검을 들었다.

그리고 명상에 빠지려는 순간이었다.

“설마, 그거도 명상?”

뒤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소년이 눈을 떴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아이른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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