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29화 (29/388)

◈ 12. 폭풍전야 (1)

이안의 검무가 있은 지 이틀 후, 각 클래스를 맡은 교관들이 동시에 수업 방침을 바꿨다.

“앞으로는 자율 훈련의 비중을 늘린다.”

지금까지의 수업은 교관이 크로노 기본 검술의 형을 가르치고, 예비 수련생들이 이를 따라 하는 식이었다.

각 수련생들의 개성에 따라 다양한 가르침을 내리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유연함은 다소 떨어지는 방식이라 할 수 있었다.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수련생들은 자신이 파고들고 싶은 부분을 집중적으로 연마할 수 있었다.

교관들은 경직된 커리큘럼을 강제하는 대신 질문을 받거나, 혹은 먼저 조언을 건네는 역할에 치중했다.

즉, 수업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서포트하는 쪽으로 바뀌었다는 뜻이다.

“교관님, 이 동작에서 더 힘을 실으려면…….”

“이 연속 동작을 펼치면서 중심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예비 수련생들은 이러한 변화를 적극 환영했다.

재능 넘치는 아이들에게 5개월은 무척 긴 시간이었다. 크로노 기본 검술의 형(形)은 이미 전부 익혔다.

몇몇 이들은 독자적인 길을 개척하고 있었고, 상대적으로 성장이 느린 이들조차 관주의 검을 통해 성장의 실마리를 얻은 차였다.

그렇다.

관주의 그 말도 안 되는 검무가 상황을 완전히 바꿔 버렸다.

‘이거라면 나도 가능성이 있어!’

‘어제 느낀 걸 실전에 써먹을 정도로 다듬기만 한다면…….’

‘비록 지금은 C클래스지만, 할 수 있어! 이 깨달음만 내 것으로 만든다면!’

안 그래도 뜨거웠던 열정이 펄펄 끓어갔다.

뻥 터져 버릴 듯 고양된 수련생들은 늦은 시간까지 지칠 줄 모르고 검을 휘둘렀고, 그러한 분위기는 열흘이 지나도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심기가 불편한 이가 하나 있었다.

“버터 바른 말미잘처럼 느끼한 새끼.”

“?”

갑작스러운 주디스의 욕설에 브랫 로이드가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이 건방진 계집애의 입이 험한 거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지금처럼 말을 섞기도 전에 욕을 먹은 적은 손에 꼽았다.

그가 물었다.

“뭔데?”

“뭐.”

“욕한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없는데?”

“그래?”

“어. 원래 난 이유 없이 욕 자주 하는데?”

“그래. 그럼 하던 일 해라.”

브랫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과 관련된 일은 아니다. 그럼 신경 쓸 필요 없다.

그는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랜스 페터슨을 비롯한 친위대 셋도 마찬가지였다.

“…….”

주디스는 붕 뜬 존재가 되어 그들을 노려봤다.

뚱한 표정이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중얼중얼 혼잣말도 시작했다. 브랫 패밀리는 이번에도 무시했다.

하지만 목소리가 계속해서 커지는 것까지는 무시하기 힘들었다.

평생 들어보지도 못한 괴상망측한 욕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후우.”

집중이 깨진 브랫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귀찮다는 표정으로 주디스에게 다가갔다.

“말로 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지금까지 계속 말하고 있었는데?”

“그 상스러운 단어들은 말이 아니다. 짐승 소리지.”

“진짜 짐승 소리가 뭔지 알려 줘?”

“됐으니까 빨리 말해. 뭐 신경 쓰이는 게 있으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 혹시 아이른 파레이라 때문이냐?”

“걔가 갑자기 왜 나와?”

브랫이 대놓고 물었고, 주디스는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뛰었다.

하지만 끝까지 시치미를 떼지는 못했다.

시선을 돌린 소녀가 살짝 작아진 목소리로, 툭 내뱉듯이 말했다.

“괜찮겠어?”

“아이른 파레이라?”

“……그래.”

많은 것이 생략되었지만, 브랫은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주디스는 아이른 파레이라가 최종 평가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묻고 있었다.

그런 질문을 한 이유도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긴 하지.”

브랫의 말대로였다.

관주의 검무에서 깨달음을 얻은 대부분의 아이들과는 달리, 나태 공자는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한 듯 보였다.

아이른의 얼굴에선 그 어떠한 환희도, 희열도, 흥분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반대였다.

점점 더 말수가 적어지는 그를 보면서, 검을 드는 대신 명상에 빠지는 시간이 길어지는 소년을 보면서 주디스는 적지 않은 불안감을 느꼈다.

남들과 상반된 그의 행동이 꼭 실의에 빠진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떨어질지도 몰라.’

처음이었다.

타인의 일에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이다니. 주디스는 그런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

하지만 염려의 감정을 억지로 없앨 수도 없었고, 그렇기에 브랫의 긍정에 왈칵 짜증이 솟았다.

허나 이어지는 다음 말이 그녀의 표정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물론 그거랑 별개로, 아이른 파레이라는 합격이긴 하지만.”

“어? 뭐라고?”

“그 녀석은 무조건 합격이라고. 최종 평가.”

담담하고 낮은, 그러나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는데?”

“흠. 당연한 거 아닌가?”

“아니, 도대체 뭐가 당연하냐고.”

궁금한 것은 주디스뿐만이 아니었다.

브랫의 친위대, 그리고 그들의 주변에서 열심히 수련하고 있던 이들까지 전부 둘의 대화에 집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최종 평가와 관련해서 저리 자신 있게 예측하는데 어찌 지나칠 수 있겠는가.

브랫은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허나 자신의 생각을 숨기지도 않았다.

한 차례 고개를 저은 그가 주디스에게 말했다.

“최종 평가의 평가 기준이 뭐지?”

“어? 그거야 당연히…… 잠재력이지.”

“그래, 잠재력. 이번 시험에선 ‘현재의 실력’이 아닌 ‘미래의 잠재력’을 측정한다. 또 하나 묻지. 잠재력이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지?”

“어어? 어, 그거야…….”

주디스가 머뭇거렸다.

사실 깊게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관주가 그에 대해 뭐라 뭐라 하긴 했지만 잘 모르겠고, 그냥 ‘다른 놈들보다 세다는 걸 보여 주면 되겠지!’ 정도가 그녀가 생각하던 전부였다.

그렇기에 대답하는 목소리에도 힘이 없었다.

“어, 그러니까, 뭐, 남들보다 열심히 노력하고, 재능 넘쳐서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고, 어…… 그러니까 남들보다 빨리 세지고…….”

“그래. 노력과 재능. 그로 인한 남들보다 우월한 성장 속도. 그게 잠재력이지.”

다행히 브랫은 수긍하며 넘어갔고, 주디스는 속으로 안도했다.

그리고 그것과 별개로 ‘주절주절 돌려 말하는 건 그만두고 본론만 얘기했으면’ 하는 답답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다행히도 소녀의 바람은 곧바로 이루어졌다.

“마지막으로 묻지. 네가 보기에, 검술관에서의 9개월 동안 가장 큰 폭으로 성장한 사람이 누구지?”

“…….”

주디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브랫도 곧바로 답을 말하지 않았다.

허나 상관없었다. 둘의 얘기를 듣고 있던 모두가 같은 이름을 떠올렸다.

‘아이른 파레이라!’

모두가 아이른 파레이라의 처음을 알고 있었다.

입관 초기에 치러진 체력 테스트. 그 이후에 알려진 좋지 못한 소문.

그 소문을 뒷받침하는 형편 없는 몸뚱이.

검사 지망생은커녕 일반인이라고 하기도 힘들 정도로 엉망이었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누구도 나태 공자가 중간 평가에 붙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상은 무너졌다.

아이른 파레이라는 끊임없이 성장했다.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체력을 끌어올렸고, 신체를 발달시켰다.

누구도 닿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일리아 린제이를 바로 뒤까지 쫓아갔고, 소수에게만 허락된 관주의 포상을 받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중간 평가 이후에 치러진 테스트에서 그는 또다시 형편없는 모습을 보였고, 유례없는 F클래스 판정을 받았다.

예비 수련생들은 이번에야말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그로부터 5개월이 지난 현재, 아이른은 B클래스에 당당히 입성해 자신이 검술관 평균 이상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이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마 지금 당장 평가를 받더라도 아이른 파레이라는 합격할 거다. 왜? 교관들 모두가 녀석의 처음을 알고 있으니까. 지금의 검과 그때의 검을 비교하면, 그 자식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으니까.”

“……그러네.”

주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골 기질이 다분하고 성격 나쁜 그녀였지만,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브랫의 말마따나 아이른 이상의 성장 속도를 보여 준 녀석은 아무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터였다.

그 사실에 붉은 머리 소녀는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다른 감정도 함께 느꼈다.

‘지고 싶지 않아!’

그것은 강렬한 투쟁심이었다.

주디스는 지고 싶지 않았다.

비단 현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른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지금은 자신이 훨씬 강했다.

아마 3개월 후인 최종 평가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는 만족할 수 없다.

‘미래의 녀석에게도 지고 싶지 않아!’

1년 후에도.

5년 후에도.

10년 후에도.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먼 미래에도, 주디스는 아이른에게 패배하는 자신을 상상하기 싫었다. 용납할 수 없었다.

이는 그에게 품은 호감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잠재력이고 지랄이고, 무조건 내가 이겨!’

자신도 있었다.

관주의 검무를 통해, 주디스는 자신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깨달았다. 그리고 전율했다.

자신의 앞에 찬란하게 빛나는 이정표를 바르게 따라가기만 하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리라는 것.

붉은 머리 소녀에게 신앙에 가까운 믿음이 자리 잡은 상태였다.

“그럼, 이제 마음 편히 실력 발휘해서 1등 하면 되겠네.”

염려를 걷어낸 주디스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물론 브랫 로이드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무리야.”

“이 자식은 사사건건 내 말에 시비네. 왜? 아이른 때문에? 아니면 설마 너?”

“아니. 물론 나도 너보다 훨씬 낫지만, 그것보단 다른 이유지.”

“하, 그래. 얘기나 들어보자. 뭐 때문인데?”

“당연히 일리아 린제이지.”

“평가 기준이 잠재력이라며?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린제이 가의 혈통이니까.”

날카롭게 상대의 말을 끊은 브랫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대륙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뛰어난 무가(武家) 출신이란 건 미래가 보장되어 있다는 뜻이다. 핏줄에 담긴 재능, 역사가 쌓이며 다듬어진 훈련 방식과 마음가짐, 그리고 보고 배울 가문의 훌륭한 검사들까지. 잠재력이 없다고 평가하는 게 이상할 정도지. 게다가…….”

“게다가?”

“린제이 가를 명문가의 반열에 올린 검술. 그것을 익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일리아 린제이는 최종 평가에서 1위를 할 수밖에 없어.”

“그게 말이 돼?”

“말이 돼.”

브랫이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대륙에서도 손에 꼽는 명문가의 저력이니까.”

“……씨발.”

주디스는 분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녀도 알고 있다. 린제이 가문의 하늘검(天劍)이 얼마나 대단하고 유명한지.

그 대단한 검술을 익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미래가 얼마나 창창해지는지.

그 밖에 브랫이 지껄인 다른 말들도 모조리 맞는 말이었다. 그녀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 씨발, 다 정해져 있는 거 시험은 왜 치는데.’

화가 난다.

가질 거 다 가지고 태어난 주제에 굳이 크로노 검술관에 기어들어 온 일리아 린제이에게도.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초라한 자신에게도 참기 힘든 분노가 타오른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짜증 나는 건 브랫, 그리고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녀석들이었다.

‘병신 반푼이들도 아니고 꽤 실력도 있는 새끼들이, 왜 시작도 전에 지고 들어가는 거야?’

무표정한 브랫의 사타구니를 걷어차고 싶다.

화조차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주변 녀석들의 머리를 후려치고 싶다.

벌써부터 꼬리 내리지 말라고, 발버둥이라도 쳐 보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싶다.

물론 그럴 수는 없었다. 조교의 통제에서 벗어난 다툼은 퇴관 사유니까.

‘팬다고 알아먹을 녀석들도 아니고.’

퉤. 심사가 꼬인 주디스가 침을 뱉었다.

그것만으로는 풀리지 않았다.

소녀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온갖 생각을 했고, 이내 린제이 가의 명성에 흠집을 낼 만한 거리를 찾아냈다.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그녀가 코웃음을 치며 속의 것을 내뱉었다.

“흥, 그깟 가문이 뭐가 대단하다고. 옛날에 대륙 최고 천재라고 말 많던 걔 오빠도, 지금 평민 고아 출신한테 깨지고 남들 앞에 나서지도 못하고 있…….”

오싹

주디스는 말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소름. 서슬 퍼런 검이 턱 밑에 닿은 듯 지독한 살기.

빈민가 뒷골목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섬뜩한 기운에 그녀의 눈이 돌아갔다.

저 멀리서, 은발의 소녀가 검을 늘어뜨린 채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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