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28화 (28/388)

◈ 11. 최고의 스승

새해가 밝았다. 예비 수련생들이 검술관에 들어온 지는 9개월이 지났고, 날씨는 완연한 겨울로 접어들었다.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불어왔다.

다행히도 그에 영향을 받는 아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후욱, 훕!”

“젠장, 잘 안 되네!”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는 이들의 몸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몇몇은 날씨를 잊을 만치 뜨거운 땀방울을 한가득 흘리고 있었다.

그랬다.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계절이겠지만,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는 예비 수련생들의 입장에서는 여름보다 겨울이 훨씬 나았다.

물론 휴식 중에야 몸이 식겠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연무장 근처에 있는 휴게실은 언제든지 사용 가능했고, 많은 이들이 사용해도 충분할 정도로 공간도 넓었으니까.

허나 오로지 ‘휴식’을 위해서만 휴게실을 찾는 예비 수련생은 아무도 없었다.

뭔가 잘 풀리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소년 하나가 중얼거렸다.

“좀 막히네. 명상이나 하다 올까?”

“나도. 계속 집중이 안 돼.”

“나도 갈래.”

명상을 하러 우르르 몰려가는 아이들.

심지어 그들이 끝이 아니었다. 휴게실 내부엔 이미 몇 명의 선객들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들을 멀리서 지켜보던 아메드 교관이 빙긋 웃으며 생각했다.

‘저 혈기왕성한 나이대의 수련생들이 자발적으로 명상을 하게 될 줄이야.’

검사의 성장은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구잡이 노력이 아닌 ‘올바른 방향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목적지는 전방에 위치해 있는데 왼쪽으로 달려간다든가, 오른쪽으로 달려간다든가, 심지어 뒤로 전력 질주를 하는 경우가 생긴다면 낭패를 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열심히 달려나가는 노력의 당사자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거다.

‘명상은 그런 문제점을 해결하기에 무척 좋은 수단이지.’

무거운 검을 내려놓고 편안한 자세를 취한다.

머리의 열기를 식히고, 떠다니는 잡념을 걷어낸다.

이후 가라앉은 흥분과 찾아온 평온 속에서 오롯이 집중하다 보면, 마음의 시야가 넓어지고 그간 놓치고 있던 많은 것들을 깨우치게 된다.

계속해서 실수하고 있던 부분.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

충분히 잘하고 있기에, 더욱 갈고 닦아 자신의 강점으로 만들어야 할 부분.

그렇듯 과거의 발자취를 차분하게 되짚어보고, 현재의 자신을 명징하게 응시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허나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메드는 수련생들에게 명상을 추천하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교관들이 그러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혈기왕성한 10대 초반의, 젊다고 하기도 민망한 어린 나이.

그런 예비 수련생들을 가만히 자리에 앉혀 두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경쟁의 장에 놓인 탓에 가뜩이나 초조하고, 여유가 없을 아이들에게 직관적이지 않은 방식의 수행방법을 추천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지금 상황은 다르다.

나태 공자, 아이른 파레이라.

고위 귀족의 혈통, 브랫 로이드.

이 둘이 눈이 부실 정도로 확실한 성장을 보여 줬기 때문이었다.

‘교관의 추상적인 조언보다는, 동기들의 확실한 성과가 훨씬 설득력이 있지. 두 수련생이 정말 큰 역할을 했어. 특히…….’

교관의 눈이 한쪽을 향했다.

남을 깔보는 듯한 오만함 대신 자신을 드높이는 당당함을 온몸에 두르고 있는 소년, 브랫 로이드.

아메드는 명상을 처음 시도한 아이른 파레이라보다도, 그의 행동이 검술관에 더욱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왔다고 판단했다.

저 도련님은 모두가 비웃어대던 아이른의 수련법을 편견 없이 바라봤고, 자신의 방식으로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다른 수련생들에게 아낌없이 베푼 뒤, 이를 통해 다른 이들로부터 더욱 많은 성취를 얻어갔다.

받아들이고, 베풀고, 그를 통해 더욱 많은 것을 받아들인다.

무엇 하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브랫의 다소 편협했던 처음 모습을 알기에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원래도 그랬지만, 더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연무장을 떠나려는 때였다.

기척도 없이 나타난 이안 관주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괜찮지?”

“헉! 네? 무슨…….”

“아이들 수준 말이야.”

“아…….”

뒤늦게 고개를 끄덕인 아메드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대단한 재능들이 모였습니다. 열정도 넘치고, 누구 하나 게으른 사람 없고…….”

“게다가 최근에 더 성장했지. 아이른하고 브랫 덕택에 말이야.”

“예. 명상의 효과를 보는 아이들이 꽤 많습니다. 감히 말하는데…….”

역대 예비 수련생들 중 최고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아메드 교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는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8년 전에도 대단하긴 했지만, 전체적인 수준으로 보면 이번 아이들을 뛰어넘는 기수는 없었던 것 같군.”

“예.”

“흠…….”

관주가 턱을 쓰다듬었다. 그의 시선이 대연무장에 모인 아이들을 천천히 훑었다. 아메드는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의 관주지만, 지금의 대화에 뭔가 의도가 담겨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아마 지시가 뒤따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이안이 입을 열었다.

“아이들을 모아주게.”

“예, 알겠습니다.”

“강당 말고 여기로.”

아메드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떴다.

뭔가 전파할 사항이 있을 때는 항상 강당을 이용했다.

그런데 지금은 대연무장으로 예비 수련생들을 모으라고 하니,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허나 그러한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뒤늦게 이어진 관주의 말이 그의 귓가에 꽂혔다.

“지금의 아이들이라면, 알아먹는 녀석들이 꽤 나오겠구만.”

“……!”

아메드 교관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안 관주가 무슨 일을 할지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지금 당장 모으겠습니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양 깊은 아메드였지만, 피어오르는 흥분을 누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 * *

“젠장.”

주디스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유야 많았다. 자기 밑이라고 생각했던 브랫에게 최근 열세를 보이는 것도, 수련생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명상이라는 것도 무척 짜증 났다.

‘도대체 가만히 앉아서 뭔 짓거리들을 하기에 그렇게 쑥쑥 크는 거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좀이 쑤시는 짓거리를 하느니, 한 번이라도 검을 더 휘두르는 게 낫다.

주디스는 여전히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아이들이 뭐라고 하건.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결과만 놓고 보면 명상에 빠진 녀석들은 괜찮은 성취를 얻고 있고, 자신은 그렇지 못했다.

그 사실이 소녀에게 상당한 스트레스를 주고 있었다.

‘빨리 끝났으면 좋겠네.’

그런 차에 예정에 없던 집합이 생기니 표정이 불퉁해질 수밖에 없었다.

별거 아니면 관주실 앞에 몰래 침이라도 뱉어야지.

주디스가 그런 생각을 하며 앞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원형으로 자신을 둘러싼 수련생들을 슥 훑어본 관주가, 깜짝 발언을 터뜨렸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최종 평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헉!”

“흡!”

“……!”

곳곳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직 최종 평가가 진행되기까진 100일 가까운 시간이 남지 않았는가?

아이들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허나 이안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중간 평가처럼 정량화된 무언가를 측정하는 방식은 아닙니다. 다소 추상적이긴 하지만, 나는 최종 평가에서 수련생 여러분들의 ‘잠재력’을 보려고 합니다.”

자신의 강점이 어디에 있는가.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이 어떤 것이며, 그를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해 왔는가. 그 노력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 것인가.

관주의 부가설명이 더해졌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관주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렵게 생각할 거 없습니다. 그냥 자기가 생각하기에 가장 잘난 부분을 검으로 보여 주면 됩니다. 일격필살의 의지를 담아도 좋고, 상대의 눈을 현혹시키는 변화무쌍한 검술을 펼쳐도 좋습니다. 쾌검도 나쁘지 않겠죠. 자신의 가능성을 보여 주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을 해도 괜찮다는 뜻입니다.”

“…….”

수련생들 사이에선 여전히 침묵이 감돌았다.

아까보다 낫긴 했지만, 그래도 머리가 복잡해질 수밖에 없는 평가 기준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나의 검은, 뭐지?’

아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어떠한 검사가 되고 싶은지 진지한 얼굴로 생각했다.

비슷한 고민을 예전부터 하고 있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신의 사고를 더욱 구체화하기 위해 노력했고, 단단히 꼬여 버린 밧줄을 쥐어 든 듯 표정을 찡그렸다.

그때.

크로노의 검술관주가 검을 빼 들었다.

스르릉-

검집과 검이 스치는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주목됐다. 의도한 바였다.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은 이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운이 듬뿍 담긴 탓에 먼 거리에서도 똑똑히 전달되었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마냥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90일이 넘는 시간이 있는 만큼, 여기 있는 누구나 자신의 가능성을 꽃피울 수 있을 거라고, 그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조촐하나마 선물도 하나 준비했습니다. 늙은이가 제멋대로 추는 검무(劍舞)에 불과하지만, 부디 얻어가는 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말이 끝이었다.

입을 다문 관주 이안은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너울너울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야?”

“갑자기?”

뜬금없이 펼쳐지는 관주의 검무에 곳곳에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시였다. 소란은 빠르게 가라앉고 언제 그랬냐는 듯 침묵이 찾아왔다.

단순한 고요함이 아니었다.

몇 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 수련생들은 늙은 검객의 검에 정신을 뺏길 수밖에 없었다.

“…….”

“…….”

대륙 최고라는 명성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의 미래를 움켜쥔 검술관의 주인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안의 정체를 몰랐더라도 똑같았을 것이다.

아이들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검무 자체에만 몰입해, 주변의 모든 것을 잊을 수밖에 없었다.

휙-

휘익-!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게.

경쾌하면서도 묵직하게.

물처럼 잔잔하다가도 불처럼 난폭하게, 폭발적이게.

그야말로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의 심상이 허공에 그려지고, 또 그려진다.

그 강렬한 이미지는 검무를 보고 있는 수련생들의 뇌리에 각인된다.

깊게 각인된다.

“흠.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건투를 빕니다.”

어느새 검무를 마친 관주가 미소와 함께 자리를 떴다. 휘적휘적 팔을 저으며 걸어가는 모습이 영락없는 시골 할아버지였다.

허나 떠나는 그에게 인사를 건네는 수련생들은 아무도 없었다.

못 박힌 듯 서 있던 그들은, 그 뒤로도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되었다.

* * *

‘볼 때마다 감탄밖에 안 나오는군.’

아메드 교관은 이안 관주의 뒤를 따르며 생각했다.

예전에도 본 적 있지만,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아무리 재능이 넘친다고 한들, 한참 경험이 부족한 어린아이들에게 한 번의 검무로 깨달음을 선사하다니.

심지어 같은 깨달음도 아니다.

이안의 검은 한 가지 성질만을 담고 있지 않았다. 수십, 수백 가지가 넘는 묘리들이 한데 어우러져 도도한 흐름을 이어 가는 것이다.

덕분에 검무를 본 수련생들은 자신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혹은 가장 염원하고 있던 부분을 받아들일 수가 있다.

‘역시 관주님은…… 대륙 최고의 검술 스승이시다!’

대륙 최강의 검사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의견이 갈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륙 최고의 스승이 누구냐는 질문에, 아메드 교관은 대답을 망설일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지극한 존경심!

그것이 가슴속에 샘솟는 것을 느끼며, 그가 자신이 느낀 감정을 토해내려는 순간이었다.

“신기하단 말이지.”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수련생 하나가 말이야, 내 검무를 보고도 얻어간 것이 없어 보여서 말이야.”

“아…….”

아메드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대륙 어디에 내놔도 부족하지 않은 영재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모두가 성취를 얻을 수는 없는 법이다.

100여 명의 수련생들 중 절반이라도 깨닫는 것이 있다면, 대성공이라고 할 만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아이들이 얻어가는 게 있을 것 같다!’

확신에 가까운 감이었고, 아마 이안 역시 이를 짐작하고 있을 터였다.

그런 그가 한 명의 수련생 때문에 고민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으니, 아메드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관주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 그의 생각은 바뀔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얻어갈 생각이 없었어.”

“예?”

“내 검무를 보지 않았단 말이야. 눈으로는 보고 있었지만, 마음은 온통 다른 곳에 가 있더군. 마치 더욱 매력적인 무언가를 쫓느라 정신 팔릴 틈이 없는 것처럼.”

“…….”

“알겠나? 누굴 말하는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일리아 린제이는 아니었다. 입관 목적이야 어쨌든, 관주를 향한 그녀의 존경심은 결코 부족하지 않다.

주디스 역시 마찬가지. 말괄량이에 고집이 세긴 하지만, 녀석만큼 크로노 검술관에 절박한 이는 없을 테니까.

브랫 로이드도, 랜스 페터슨도, 아니 대부분의 수련생들이 그럴 터였다.

어렸을 때부터 검에 인생을 바친 아이들이 관주의 검을 무시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꼭 골라야 한다면…….

“아이른 파레이라 수련생……입니까?”

관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웃을 뿐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메드가 믿기 힘들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는데,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뒤늦게 흘러나왔다.

“궁금해. 정말 궁금해. 도대체 뭘 바라보고 있는 건지. 하지만…….”

“…….”

“지금 당장은, 그런 호기심보다 다른 감정이 더 강하구만.”

스승으로서 살짝 자존심이 상할 정도야.

속으로 툴툴거린 노인이 허허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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