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27화 (27/388)

◈ 10. 새로운 변화 (3)

단순히 눈빛만 변한 것이 아니었다.

저벅저벅,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오는 소년의 몸에서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풍겼다. 각자의 수련에 집중하던 수련생들의 이목이 또다시 집중되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가끔 말도 안 되는 사건을 일으키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아이른은 눈에 잘 띄지 않는 타입이다.

나이가 많기에 키가 조금 더 크고, 나쁘지 않은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 외에는 그다지 튀는 면모가 없었다.

그런 그가 시선을 잡아끄는 묘한 기운을 풍기고 있으니, 흥미가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스윽

아이른은 신경 쓰지 않았다.

검을 들었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주변인이 느끼지 못할 만치 조용히 숨을 들이마시고, 또 들이마시고.

그렇게 고요 속에 집중하던 그가, 눈을 부릅뜨며 검을 움직였다.

후웅!

“…….”

“…….”

그리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후웅!

후우웅!

아이른 파레이라는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펼치는 검술은 오늘 수업 때 배운 크로노 기본 검술의 응용. 경쾌한 보법에서 이어지는 반격의 검날이 매섭게 번뜩였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소년의 현재 모습은 그가 벤치에 눕기 전에 보여 줬던 것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별거 없네.”

“그러게. 갑자기 무게 잡아서 뭔가 깨달음이라도 얻은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우리 수준에서 그렇게 쉽게 되겠냐? 수십 년 수련한 검의 고수들한테도 있을까 말까 한 일인데.”

“하긴, 그렇지? 그런데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려면 그런 경험이 한 번쯤은 있어야 된다고 하더라고.”

별다를 것 없는 나태 공자의 모습에 예비 수련생들이 하나둘씩 시선을 거뒀다.

잠시 잡담을 나누던 그들은 이내 개인 수련에 몰입하였다.

아이른은 이번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평소와 다름없이 베고, 휘두르고, 찌르기를 반복할 뿐.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났다.

검을 거둔 소년은 또다시 구석 벤치로 걸어갔다.

그리고 다소곳이 눕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이들의 시선이 다시 한번 모였음은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병이라도 걸렸나?”

“뭔 개소리야, 이 자식이.”

“아니, 네가 봐도 이상하잖아.”

주디스의 으르렁거리는 듯한 발언에 브랫 로이드가 표정을 구겼다.

“밥 안 먹고, 잠 안 자고 24시간 내내 검 휘둘러도 탈 없을 만큼 튼튼한 녀석이 두 시간도 안 돼서 두 번씩이나 벤치에 드러눕는데, 너는 저게 정상인 것처럼 보여?”

“아 몰라, 닥쳐.”

“이 자식이 감히 로이드 님께…….”

“에뤨뷃루베롤뤨뤺.”

친위대들이 눈을 부라리자 주디스가 듣기 싫다는 듯 귀를 틀어막았다.

물론 브랫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 역시 아이른의 이상 행동에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결국 참지 못한 붉은 머리 소녀가 벤치로 향했다. 몸이 아픈 거라면 회복실에 가는 게 어떻겠냐고 말이라도 건넬 생각이었다. 아니, 실제로 그렇게 했다.

허나 아이른의 대답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아, 괜찮아. 그냥 수련 중일 뿐이야.”

“뭐? 수련?”

“응. 그런데 잘 안 되네. 처음부터 잘될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뭐가 잘 안 되는데.

도대체 이게 어딜 봐서 수련인 건데.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이른이 다시 벤치에 누워 눈을 감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주디스는 궁금증만 더 커진 채 터덜터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어이없네.”

“무슨 얘기 했는데?”

“수련 중이니까 신경 쓸 거 없다는데?”

“뭐?”

황당한 건 브랫 로이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뿐만 아니라 주디스의 말을 들은 모든 예비 수련생들이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아이른 파레이라를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태 공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조용히, 자신의 내면에 집중할 따름이었다.

* * *

사내의 감각을 재현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세계 자체가 다르지 않은가. 아무리 비슷한 환경을 조성했다고 한들, 꿈속에서 느꼈던 심상을 현실로 끌어내는 데는 여러 가지 장애물이 있었다.

머릿속의 뿌연 안개를 걷어내어 이미지를 선명하게 만든다.

그러한 이미지를 자신의 마음속에 똑같이 새긴다.

아니, 새긴다는 표현은 옳지 않았다. 아주 잠시만 집중력이 흐트러져도 이미지는 일그러지고, 망가졌다.

마치 물 위에 온전한 그림을 그리는 듯한 난도. 아이른의 표정이 자꾸만 일그러지려 했다.

심지어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으음…….”

꿈을 통해 쌓아 올린 집중력을 벼리고, 가다듬어 날을 세운다.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도 잊고, 머리칼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도 잊고, 코끝에 은은하게 파고드는 주변의 냄새도 잊는다.

오감을 비롯한 모든 감각을 한데 모아 마침내 물 위에 심상을 그려낸다.

하지만 그렇게 완성된 그림은, 아이른이 벤치에서 일어나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 정도에서 끝나면 좋을 텐데,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검을 휘두를 때쯤이면 이미 원래의 형상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망가져 버린다.

‘또 실패구나.’

물 위에 그려진 그림을 품고 움직이면서도 이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것.

가까스로 현실로 끌어온 사내의 감각을 일상생활에서도 유지하는 것.

이것이 작금의 아이른이 느끼고 있는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다.

‘다시 해 보자.’

물론 아이른 파레이라는 포기하지 않는다. 실망조차 하지 않는다.

한두 번의 고난으로 좌절하기엔, 그가 검술관에서 쌓아 왔던 실패가 너무나도 많았다.

그러한 실패의 역사가 쌓여 성공의 탑이 만들어진다는 것 또한,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두려움에 짓눌려 시도조차 않는 소년은 더 이상 없었다.

손바닥으로 뺨을 짝 소리 나게 두드린 나태 공자가 다시금 벤치로 걸어갔다.

그런 그를 주변의 예비 수련생들이 한심하게 바라봤다.

‘또 저러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뭔 생각인지 진짜…….’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입관 초기의 비웃음을 중간 평가의 기적으로 되갚아 준 전례가 있었으니까.

녀석 편을 들어주는 주디스의 지랄 맞은 성격을 감당하기도 싫고.

하지만 아닌 건 아닌 거였다.

그들의 눈으로 볼 때, 저건 도무지 수련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냥 도피에 불과했다.

그래, 그것이야말로 옳았다.

아이들은 나태 공자가 상위권 수련생들에게 벽을 느낀 나머지, 다시 예전 게으른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른 파레이라는 신경 쓰지 않았다.

수련생이 아닌 조교들조차 눈초리가 곱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데 심력을 낭비할 여력이 없었다.

꿈속 사내의 검.

꿈속 사내의 감각.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무언가.

그것을 위해 아이른은 벤치에 누웠고, 눈을 감았다.

아니, 감으려는 순간이었다.

“흐음…….”

“…….”

자신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 푸른 머리의 소년.

바로 브랫 로이드였다.

지근거리에서 느껴지는 그의 노골적인 시선에 아이른의 집중력이 흐려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물었다.

“할 말이라도…….”

“그거.”

“응?”

“네가 수련하고 있다고 말하는 그거.”

브랫이 아이른에게 손가락을 가리켰다.

시비를 거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보기에는 이 오만한 도련님의 표정이 너무나도 밝았다.

마치 뭔가를 깨달았다는 얼굴.

잠시간의 정적을 뚫고 그가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드러누워 자는 게 아니라, 명상 수련이구나!”

“……명상 수련?”

“그래! 사제들이 마음을 가다듬고, 자신을 되돌아보기 위해 하는 거. 맞지?”

아니었다.

아이른은 그저 자신의 꿈을 현실로 옮겨오고 싶었을 뿐이고, 그에 가장 적합한 자세를 찾다 보니 누워서 눈을 감게 된 것뿐이었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그렇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가 대충 얼버무렸다.

“음, 뭐…… 비슷한 거려나.”

“그래. 들어본 적 있어. 몇몇 검사들 사이에서 사제들의 수행법이 유행하는 중이라고. 확실히 기억났다.”

브랫의 말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정신력이 중요한 종교인들의 방식이다 보니 집중력 높이는 데 꽤 효과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느니, 어떤 유명한 검사가 명상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어 마스터의 경지에 들어섰다느니, 네가 수련이라고 했을 때 진즉에 알아챘어야 했다느니.

조용하면서도 흥분이 담긴 목소리에 아이른의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하지만 착각을 잡아 줄 만한 깜냥은 없었기에, 소년은 그저 침묵을 지켰다.

“좋아. 그럼 나도 한번 해 본다.”

“…….”

“그런데 좀 특이하긴 하군. 명상 자세가 원래 이랬던가?”

“……그냥 나는 나한테 편한 자세로 한 것뿐인데.”

“그런 건가? 뭐, 그럼 네 방식대로 해 보지.”

“아니 꼭 그럴 필요는…….”

“쉿. 집중할 거야. 너도 네 하던 일 해라.”

말을 마친 브랫이 옆의 벤치로 가서 털썩 누웠다. 그리고 아이른처럼 복부에 손을 모은 뒤,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는 확신했다. 최근 아이른이 보인 드높은 성과가 이것 덕분이라고.

녀석의 최대 장점이라 할 수 있는 집중력이 바로 이 명상에서 비롯되었을 거라고.

그렇다면 자신 역시 유의미한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좋아.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자.’

명상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음을 명경지수의 상태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브랫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자 수련으로 인해 빠르게 뛰던 심장박동이 느려졌다.

‘괜찮은데?’

느낌이 나쁘지 않다.

한동안 주디스 그 멧돼지와 어울리면서 성격을 버렸었는데, 오랜만에 안정을 찾은 느낌.

브랫 로이드는 마음을 어지럽히는 온갖 잡념들을 걷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조금 더 평온하게.

조금 더 조용하게.

조금 더…….

“로이드 님!”

깜짝!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브랫이 눈을 떴다.

옆을 보니 랜스 페터슨이 쪼그려 앉은 자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왜?”

“저기…… 주무시는 것 같아서…….”

“…….”

잠깐의 침묵 속에서 브랫이 고개를 돌려 시계탑을 바라봤다.

벌써 두 시간이 지난 시점.

브랫은 시치미를 떼기로 했다.

“음. 잔 게 아니다. 아이른이 한 수행방법을 따라 했을 뿐이야.”

“…….”

“그, 그. 명상이라고, 사제들로부터 시작되어 지금은 고위 기사들도 즐겨 하는…….”

“그래? 그 명상인지 뭔지 하면서 원래 코도 고는 거야?”

자신을 지나쳐가며 툭 내뱉는 주디스.

어쩔 줄 모르며 민망하게 있는 랜스 페터슨.

그리고 그의 옆에 서있는 나머지 두 친위대들.

“…….”

브랫은 말없이 연무장을 떠났다.

붉어진 그의 얼굴을 봤지만, 아이른은 모른 척을 하기로 했다.

* * *

아이른 파레이라는 여전히 수련을 이어갔다.

성과는 없었다. 여전히 물 위에 그린 그림을 유지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다.

예비 수련생들의 비웃음은 조금 더 커졌다. 물론 신경 쓰지 않았다.

의외인 것은 브랫 로이드가 여전히 명상 수행을 이어 간다는 점이었다.

“자세가 문제였네. 가부좌 자세로 하는 게 정석이라는군.”

“등신아, 너는 소용없다니까? 그냥 쟤가 특이한 거야.”

“그건 해 보고 나서 판단해도 안 늦어.”

주디스한테 욕까지 먹었지만 브랫은 괘념치 않았다.

머리가 굳어 있던 예전이라면 모를까, 관주의 조언을 들은 그는 달라졌다.

자신이 오만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남들 역시 자신만큼 뛰어난 부분이,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전히 타인을 인정하는 것에 거부감이 들었지만, 그렇기에 이번 시도는 더욱 가치 있었다.

‘지금처럼 관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다 보면, 내 안의 편협함도 점차 사라지겠지.’

생각을 마친 브랫이 연무장 구석으로 향했다. 그리고 사제들이 하듯 가부좌를 튼 뒤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예비 수련생들은 그마저도 무시했다.

그들의 눈에, 둘은 그저 시간을 낭비하는 거로만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한 달의 시간이 지난 후, 상황은 달라졌다.

“아이른 파레이라 수련생. 오늘부터 B클래스다.”

“예.”

브랜든 필립스 교관의 말에 아이른이 대답했다.

불만을 표하는 이는 없었다. 놀람을 표하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어느 시점을 계기로 아이른 파레이라의 실력이 가파른 속도로 성장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어느 시점’이 명상을 시작했던 때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휘익!

“내가 이겼다.”

“이런 썅, 이거 무효야! 한 번 더 해!”

“무효는 아니지만, 다시 하는 건 얼마든지 환영이야.”

검술관 차석을 놓고 다투던 주디스, 그리고 브랫 로이드.

우열을 가릴 수 없던 둘 사이에, 점차 간극이 생기기 시작했다.

앞서가는 이가 누군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검을 치켜드는 브랫 로이드의 얼굴에 자신감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