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새로운 변화 (1)
당황스러운 발언.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주디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아이른 파레이라와 가장 가깝게 지낸 그녀였기에 확신해서 말할 수 있었다.
브랫 로이드가 녀석에게 얻어갈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이다.
‘브랫…… 재수 없는 녀석이긴 하지만, 검술 실력까지 무시할 순 없으니까.’
A클래스 수련생과 B클래스 수련생이 대련한다고 하면 대부분의 경우는 A클래스가 승리를 거둘 것이다.
허나 그렇다고 전자가 후자에 비해 모든 방면에서 앞선다고 말할 수는 없다.
10가지 항목이 있다고 치면 A클래스 수련생이 8~9항목에서는 우위를 보이더라도, B클래스 수련생 역시 한두 항목 정도에서는 잘난 구석이 있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브랫과 아이른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10이면 10, 100이면 100. 모두 브랫 로이드가 우위야.’
물론 아이른도 장점이 없지는 않았다.
정적인 자세에서 펼쳐지는 수직 베기는 상위권 수련생들에 비해서도 꿀리지 않았다.
특히 브랫과의 결투 직전에 보여 줬던 검만큼은 아직도 주디스의 머릿속에 남아있을 정도로 대단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특별했던 것은 그 순간뿐. 이후 아이른이 펼치는 동작에선 그때만큼 인상적인 무언가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몹시 궁금했다.
저 재수 없는 파란 머리 귀족 녀석은 도대체 뭘 보고 아이른 파레이라에게 이런 제안을 건넨 걸까?
물론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녀는 말도 섞고 싶지 않을 정도로 브랫 로이드를 싫어했으니까.
그런 주디스를 대신해 멍하니 서 있던 나태 공자가 질문을 던졌다.
“음, 내 입장에서야 좋지만…… 괜찮겠어?”
“무슨 말이지?”
“그러니까…… 너는 나보다 훨씬 실력이 좋잖아. 모자란 부분도 없고. 상부상조하려면 내가 너보다 뛰어난 점이 하나라도 있어야 하는데…….”
아이른이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뜻을 전달하기에는 충분했고, 대화를 엿듣고 있던 주변 수련생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자신의 주제를 알고 있다면, 이 제안은 거절하는 것이 옳다. 주디스마저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제안의 당사자인 브랫 로이드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그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아이른 파레이라, 충고 하나 하지.”
“어?”
“더는 너 자신을 낮춰 표현하지 마라.”
“낮춰 표현하다니…….”
“말 그대로다. 귀족으로서의 자부심을 품으며 당당하게 말하고, 당당하게 행동하란 말이다.”
브랫의 눈동자가 뜨겁게 타올랐다.
적지 않은 답답함, 그리고 약간의 분노가 담긴 모습.
아이른은 눈앞의 소년이 왜 이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허나 상대를 이해할 수 없는 건 로이드 가의 혈통 또한 마찬가지였다.
“네놈은 파레이라 가문의 혈통을, 귀족의 핏줄을 타고났다. 위에서 남들을 이끌어줄 자격을 갖고 태어났지. 그리고 이곳 크로노 검술관에 들어와 누구보다 끈질기게 노력했고, 중간 평가를 통해 보여 줬다. 자신이 귀족의 의무와 책임을 다할 능력을, 굳건한 심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야.”
“…….”
“네가 운 좋게 귀족의 핏줄만 타고난 머저리였다면…… 그러니까, 퍼진 소문처럼 10년간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권리만 누리고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게으른 모습을 계속 보였더라면 그래도 된다. 자신 없이, 평민이고 노예고 할 것 없이 모두에게 고개 숙인 채로 살아도 상관없다. 하지만.”
잠시 뜸을 들인 브랫이, 조금 전보다 강한 어조로 자신의 말을 마무리했다.
“내가 보기에 넌, 충분히 귀족 가문에 어울릴 만한 행동과 능력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니까 그에 맞는 당당한 모습을 보이라는 말이다. 내가 그렇듯이.”
“…….”
아이른 파레이라는 한참을 대답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평생을 ‘나태 공자’라고 괄시받았던 자신이다.
다른 가문의 귀족들은 물론이고 영지민들, 심지어 가문의 하인들마저 심심찮게 자신의 뒷말을 하던 것을 소년은 안다.
그럼에도 반박하지 못했던 건, 자신이 그런 취급을 받을 만한 못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 브랫의 오만하면서도 직설적인, 그래서 더욱 솔직하게 느껴지는 칭찬은 진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아, 네네. 고귀하신 귀족 나리들끼리 서로 똥꼬 긁어 주는 건 이쯤하고요.”
물론 모두가 브랫의 말에 뭔가를 느낀 건 아니었다.
평민인 주디스의 경우가 그랬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다는 표정을 지은 뒤 브랫을 바라보며 말했다.
“말 돌리지 말고, 그래서 뭔데?”
“뭐 말이지?”
“아이른이 너보다 나은 구석이 하나쯤은 있다고 생각하니까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거 아니야. 그게 뭐냐니까? 나도 좀 같이 알자.”
“멍청하기는. 그렇게 오래 붙어 있어 놓고도 모르나?”
“뭐? 이 새끼가…….”
“자, 잠깐! 주디스!”
당장이라도 달려들려는 붉은 머리 소녀를 아이른 파레이라가 말렸다.
다행히 그녀는 더 이상 날뛰지 않았다.
대신 살인이라도 할 것 같은 눈빛으로 퍼랭이 귀족 녀석을 노려봤다. 브랫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나 끝까지 말을 아끼지는 않았다.
다시금 아이른 쪽을 바라본 그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집중력이다.”
“……집중력?”
“그래, 집중력.”
휘익
브랫 로이드가 들고 있던 목검을 치켜 올리고 자세를 잡았다.
그러자 수련생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는데, 그 광경이 퍽 어울렸다.
귀족은 귀족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주디스가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브랫은 검을 휘둘렀다. 깔끔한 수직 베기.
그는 흔들림 없이 동작을 수행하며 말을 이어 갔다.
“중간 평가가 끝나고 했던 고민이 있어.”
휘익!
“아이른이나 나나 노력하는 시간은 거기서 거기인 것 같은데, 도대체 왜지? 왜 그렇게 성과에 차이가 났지?”
휘익!
“솔직히 이해할 수 없었어. 물론 저 독종 녀석이 나보다 조금 더 열심히 하긴 했지만…… 그래 봤자 절대적인 시간으로 따져 보면 얼마 차이 없거든. 나는 그게 이상했다.”
그의 말을 들은 몇몇 수련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이상하게 생각하긴 했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최고의 노력가라고는 하지만,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24시간이라는 틀을 넘어 하루에 30시간, 50시간 홀로 노력할 수는 없는 것이다.
때문에 노력의 상향 평준화가 이뤄진 지금에 와서는, 독보적이었던 그의 노력이 다소 빛이 바랜다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브랫 로이드의 생각은 달랐다.
“이상한 게 아니었어. 당연한 거였다. 저 녀석은 수련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한 줌의 집중력도 잃지 않았고.”
휘익!
“나는 잃었지. 어떨 때는 하루 중 잠깐조차도 만족스러운 집중력을 발휘하지 못했어.”
휘익!
“어떤 날은 기분이 좋지 않아서. 어떤 날은 날씨가 더워서. 어떤 날은 수업 때 무리하다 보니 힘이 빠져서, 지쳐서, 또 어떤 날은 그냥 게을러서.”
휘이익!
“집중력을 유지하지 못했지. 그러면서도 스스로 위안했어. 시간은 채웠으니 됐다고. 이쯤 하면 충분히 노력한 거라고 말이야.”
브랫 로이드의 검이 변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형편없어졌다. 처음에 보였던 정교한 검로는 사라지고, 타격점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
마치 집중력이 떨어진 상태로 억지로 검만 붙잡고 있는 모습 같았다.
“그래서는 안 됐는데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브랫은 검을 거두었다.
어느새 연무장은 숨 막힐 듯한 정적이 감돌았다.
거의 모든 수련생들이 생각에 잠겨 자신을 돌아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슬쩍 둘러본 로이드 가의 장자가, 파레이라 가문의 장자에게 물었다.
“하여튼.”
“…….”
“너는 어떻게 그런 집중력을 하루 종일 유지할 수 있는 거지?”
“으음.”
질문과 동시에 수많은 시선이 날아들었다. 아이른은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노력할 수 있는 이유는, 고도의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꿈. 그것밖에 없었다.
허나 그것은 남에게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었고, 설령 말한다 한들 브랫에게 도움이 될 만한 내용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그냥…… 잘 모르겠는데.”
“……뭐,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다. 천재들은 다 비슷한 말을 하고는 하니까. 그냥 하니까 됐다, 나도 잘 모르겠다, 같은.”
“아니, 내가 천재라니, 그게 무슨…….”
“천재 맞지. 노력의 천재.”
“…….”
“매일같이 열 시간이 넘는 노력을 이어 가면서도 한 번도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는 사람이 평범하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한숨을 내쉰 브랫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검술을 펼쳤다.
조금 전에 보여 줬던 것과는 전혀 다른, 제대로 된 크로노의 검술.
그것을 지켜보던 아이른 파레이라는, 브랫이 보여 주는 동작들이 자신이 항상 애먹던 부분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부분에서 항상 균형이 흔들려. 더 중심을 낮게 하고 움직이는 게 좋다.”
“여기서는 손이 너무 빨라. 발과 몸에 맞춰서 한 번에 내질러야 동작이 엇나가지 않고 제대로 뻗는다.”
“마음을 조급하게 할 필요 없어.”
“어? 어…… 고마워. 정말 고마워.”
순식간에 다섯 가지 동작을 펼친 뒤, 이해하기 쉬운 설명을 첨언하는 브랫.
그런 그를 보며 아이른은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마냥 고마워하기에는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나는 딱히 알려 줄 게 없는데…….”
“됐어. 나중을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지.”
“투자?”
“그래. 집중력을 올리는 방법이든, 예전에 보여 줬던 그…… 이상했던 검술이든, 그 밖의 뭐든. 나한테 알려 줄 수 있을 정도로 생각이 구체화되면 그때 갚아. 알겠어?”
“그래. 꼭 그럴게.”
브랫은 아이른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신형을 돌렸다.
브랫 패밀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간 건 아니었다.
그가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주디스의 앞으로 다가갔다.
“너와도 앞으로 교류하고 싶은데.”
“하! 나랑? 장난쳐?”
“장난 아니다.”
“지 혼자 잘난 새끼가 말을 잘하네.”
주디스가 이죽거렸다.
그는 귀족이 싫었고, 귀족인 티를 내지 못해 안달인 브랫 같은 녀석은 더욱 싫었다.
그런 녀석과 교류니, 대련이니 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그때, 브랫이 또다시 의외의 말을 건넸다.
“너는 창의성이 있지.”
“엥?”
“가문의 검술에만 익숙한 나에 비해 상황 대처가 훨씬 자유분방하고, 공격 시에 의외성 넘치는 시도도 자주 하는 편이야. 지금의 나에겐 부족한 부분이다.”
“뭐야, 왜 또 지랄인데.”
주디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말투가 딱딱하기 그지없었지만, 어찌 됐건 지금 브랫은 자신을 칭찬하고 있었다.
소가 닭 보듯 하는 것을 넘어 서로 앙숙처럼 굴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도 불편했다.
허나 푸른 머리의 귀족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물론 내가 얻어가는 게 있는 만큼, 너 역시 나로부터 얻어가는 게 있을 거라고 자부한다. 어때? 앞으로는 좀 살갑게 지내보지?”
“……됐으니까 꺼져.”
“그래. 너도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다, 일단은.”
그 말을 끝으로 브랫 로이드는 돌아갔다.
지켜보던 아이들도 각자 할 일을 하러 몸을 돌렸고, 주디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부들부들 떨다 바닥을 걷어찼다.
아이른 파레이라는 가만히 서서 브랫이 남긴 얘기를 곱씹었다.
“흠흠.”
그리고 브랫을 포함한 아이들을 몰래 지켜보고 있던 검술관주가, 기꺼운 듯 웃음을 보이며 대연무장을 떠나갔다.
* * *
“후우.”
늦은 밤, 침대에 누운 나태 공자가 숨을 내쉬었다.
브랫이 했던 말이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집중력…… 확실히 생각해 볼 만한 부분이야.’
노력의 양을 더 늘릴 수는 없다. 지금도 한계까지 쥐어짜고 있으니까.
없던 재능을 개화할 수도 없다. 그런 게 가능했다면 세상은 천재로만 넘쳐났을 테니까.
하지만 ‘집중력을 끌어올리는 것’은 앞의 두 가지보다는 가능성이 느껴졌다.
이를 통해 노력의 밀도를 높인다면, 순도를 높인다면 더 빠른 성취를 얻을 수 있으리라.
“후우.”
아이른이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앞의 두 가지보다 가능성이 보인다고는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결코 아니었다.
당장 지금의 집중력도 자신 잘해서 끌어올린 게 아니다. 순전히 꿈의 영향을 받았을 뿐이다.
‘어떻게 해야 집중력을 높일 수 있을까?’
소년의 머리가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해졌다.
허나 그것도 잠시, 그는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매일 회복 마법을 받는다고는 하지만 그 이상의 힘든 일정을 따라가고 있는 아이른이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서 숙고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
소년은 깨달았다.
자신이 매일같이 꾸던 꿈이, 어딘가 달라졌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