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달라진 것은 (2)
“……?”
일리아 린제이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중간 평가 이후 한 번도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았던 아이른이다. 그런 그가 이렇듯 불쑥 찾아온 것도 사실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대뜸 손을 내밀다니.
‘이게 뭐지? 팔찌? 그리고…….’
“편지랑 선물이야.”
소년의 입에서 뒤늦게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런 그의 얼굴도 소녀와 다를 바가 없었다. 무표정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일리아처럼 차가운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평소의 무미건조한 모습과는 다르게, 조금 더 인간적인 면모가 느껴졌다.
허나 그런 것을 자세히 신경 쓰기에는 일리아의 상황이 여유롭지 않았다.
당혹스러움을 숨기며, 그녀가 서늘한 어조로 말했다.
“선물? 그리고 편지? 갑자기 뭔데.”
“음, 갑작스럽나.”
“설명해 봐. 무슨 생각으로 이런 걸 주는 거야?”
일리아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연을 끊는 것과 같았던 자신의 말을 듣고도 선물을 주다니. 편지는 또 뭐고?
자연스럽게 말투는 점점 날카로워졌다.
허나 아이른은 그런 것에 전혀 영향받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 그녀의 앞에 섰을 때보다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여동생이 하나 있어, 나.”
“뭐?”
갑자기 튀어나온 뜬금없는 소리에 일리아의 무표정이 깨졌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건 말건 아이른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걔가 사람 대하는 게 서툴거든. 감정 표현하는 것도, 자기 생각을 남한테 말하는 것도. 그래서 이런저런 오해로 다툰 일도 꽤 있는데, 다음 날에 일어나 보면 항상 머리맡에 편지가 놓여 있었어. 선물하고 같이.”
동생 나름의 화해 방법인 거지, 여기까지 말한 그가 일리아 린제이의 눈을 바라봤다.
그녀도 상대의 눈을 바라봤다.
계속해서 대화가 이어졌다.
“너도 알겠지만, 나도 그리 말을 잘하진 못해. 무슨 말부터 해야 할 지도 모르겠고, 정리도 안 되고, 그냥 어렵더라.”
“…….”
“그래도 시간을 들여서 글로 쓰니까, 꽤 괜찮아. 동생이 왜 편지를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아.”
“이런다고 내가, 다시 널 도와줄 거 같아?”
일리아가 말했다.
아까보다 더욱 차갑게, 더욱 날카롭게. 왜 그러는지 이유조차 제대로 모르면서 그랬다. 거둬들였던 험악한 기세도 다시금 피어올랐다.
물론 아이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엷은 웃음을 지으며 상대의 손에 편지와 선물을 쥐여주고선,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괜찮아.”
그 말을 끝으로 아이른 파레이라는 떠나갔다. 정말로 그런 걸 바라는 게 아니라는 듯이.
일리아 린제이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소년이 건넨 편지, 그리고 꽃 모양의 장식이 있는 팔찌를 바라보다가, 이내 무기 진열대에 검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
“뭐야?”
“린제이? 설마 숙소로 들어가나?”
“벌써? 왜?”
컨디션이 좋지 않아 휴식을 취하던 몇몇이 놀란 듯이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리아 린제이가 개인 수련을 거른 적은 여태껏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검술관 최고의 노력가로 알려진 아이른만큼이나 독한 것이 그녀였으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일리아는 그런 말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이번에는 주변의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그저 걸었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소년의 편지를 읽었다.
읽고, 또 읽었다.
‘기분 나빠.’
내용은 별것 없었다.
그때의 행동으로 기분이 나빴을 수도 있다는 걸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
미안한 말이지만, 그렇다 해도 자신은 그때의 일을 후회하고 있지 않다는 것.
그러나 그 모든 것과 상관없이, 화해하고 싶다는 것.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간단한 내용에 견디기 힘든 화가 치밀었다.
‘이 선물도…….’
일리아가 책상에 놓인 팔찌를 바라봤다.
은색 팔찌. 화려하지 않지만 묘한 기운이 느껴지는 게, 귀한 물건임을 알 수 있었다. 아마 가문에 연락해서 받아 온 듯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팔찌에 음각된 무늬가 복수초(Adonis)라는 것이, 과거에 있었던 어떤 일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 중요했다.
“후우.”
입에서 뜨거운 입김이 흘러나왔다.
우연의 일치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나태 공자라는 소문까지 난 녀석이 자신의 사적인 사정을 알 리가 없다는 것을. 아니, 애초에 그렇게 나쁜 녀석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짜증이 났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소녀는 그 상태로 길고 긴 시간을 방안에 서 있었다.
“…….”
몇십 분이 지났다. 몇 시간이 지났다.
검술관의 가장 성실한 수련생도 수련을 멈추고 잠에 빠져들 때까지, 그 이후에도 일리아 린제이는 서 있는 자세를 유지했다.
그리고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의 분노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그녀가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였구나.”
아이른 파레이라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았다.
마음도, 행동도, 자신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진 건 자신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그 뒤로도 잠들지 않고 상념 속에 밤을 지새웠다.
* * *
새벽이 밝았다. 아니, 밝았다는 표현은 옳지 않았다.
오전 4시를 조금 넘긴 시각, 여름이 지나고 짧아진 해 때문에 아직은 하늘이 어두울 때였으니까.
하지만 그 이른 시각에도 불구하고 대연무장에는 아이들이 있었다.
심지어 그 수가 스무 명이 넘었다.
높아진 체력, 검술관의 효과 좋은 회복 마법 지원, 그리고 날이 갈수록 뜨거워지는 수련생들 사이의 경쟁심 덕분이었다.
물론 아이른 파레이라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그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지쳐 쓰러져 있었던 한여름에조차 새벽 훈련을 이어 가던 독종이었다.
예전보다 상황이 훨씬 나아진 지금 와서 게을러질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후우우웅!
“으으, 아침이라 그런가? 힘이 안 들어가네. 너는 안 그래?”
“괜찮아.”
“신기하다니까. 교양 수업 때도 자는 건 한 번도 못 봤는데. 혹시 밤에도 안 자나?”
“딱히 그런 건 아니야.”
그런 그의 옆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주디스가 함께하고 있었다.
잠이 덜 깬 듯 졸린 표정, 그러면서도 동기들보다 위력적인 검술을 펼치는 소녀를 보며 주변에 있던 수련생들이 질투에 찬 시선을 보냈다.
명문가의 지도를 받지도 않았으면서도 검술관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을 갖춘 그녀가, 그것을 가능케 한 그녀의 재능이 못내 부러웠던 것이다.
헌데, 그러한 시선은 비단 붉은 머리 소녀에게만 쏟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많은 아이들의 눈동자가 그녀의 옆에 있는 아이른 파레이라를 향해 꽂혔다.
‘부럽다. 나도 주디스랑 대련할 기회가 있었으면…….’
‘아니, 주디스가 아니라도, A클래스 누구라도 좋으니까…….’
‘제길. 나도 최상위권 녀석들하고 친분을 쌓아 놨어야 했는데.’
그렇다. 대연무장에 있는 수련생들 대부분은 아이른 본인이 아닌, 그가 중간 평가 때 다져 놓은 주디스와의 친분을 질시하고 있었다.
앞서 말했듯이 검술은 상대가 있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기술이고, 수련 과정에 있어서 훌륭한 상대가 있느냐 없느냐는 굉장히 중요했다.
대륙의 수많은 방랑 검객들이 자신보다 고수를 찾아다니며 대련을, 가르침을 청하는 이유가 달리 있는 게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B클래스는커녕 C클래스에서도 꼴찌라 할 수 있는 아이른이 주디스를 독점하고 있는 것은 굉장히 애석한 일이었다.
물론 그러한 생각과 별개로, 수련생 중 누구도 그녀에게 다가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붉은 머리 소녀는 무지하게 성격이 더러웠으니까.
아마 중간 평가 때의 일이 아니었다면 아이른 역시 주디스와 친해질 수 없었을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아이들은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둘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허나 잠시 후, 그들의 시선은 다시금 아이른 파레이라 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명문 린제이 가의 천재, 일리아 린제이가 돌연 그를 향해 다가갔기 때문이다.
‘뭐야? 갑자기?’
‘대연무장엔 왜? 설마 아이른한테 할 말이 있어서 일부러 찾아온 건가?’
‘사이 나빠진 거 아니었나?’
가문의 검술을 남에게 보여 주는 걸 꺼리는 일리아 린제이다.
때문에 그녀의 수련은 늘 인적이 드문 소연무장에서 행해졌었다.
그런데 지금 처음으로 개인 수련 시간에 대연무장에 발을 내디딘 것도 모자라, 사이가 멀어진 것처럼 보였던 아이른 파레이라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이니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응?”
“뭐지?”
하지만 은발 소녀가 보인 행동은 별 것 없었다.
나태 공자가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간 뒤 1~2초간 시선을 응시하는 것.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후 그녀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연무장을 벗어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주디스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뭐야? 저년?”
아이른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처럼 이유를 몰라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봤다. 뒤돌아서는 일리아의 왼쪽 손목에 자신이 선물한 팔찌가 채워져 있던 것을 말이다.
‘다행이네.’
대화는 없었다. 표정도 여전히 냉담했다.
하지만 자신의 진심을 받아 줬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아이른의 입이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뭐야? 방금 웃었어?”
“그랬나?”
“그랬나는 무슨. 뭔 일이야?”
“별일 아니야.”
“진짜 웃기는 연놈들이네. 한 명은 갑자기 와서 사람 꼬나보다가 휙 하고 가 버리고, 다른 한 명은 그거 보고 실실 처 웃고 있고. 도대체 뭔 생각들인지.”
주디스는 이 말을 하는 내내 아이른을 유심히 쳐다봤다.
그의 표정을 통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유추해 보려는 속셈이었다.
대놓고 물어보는 건 뭔가 간질거렸고, 모르고 넘어가자니 심사가 살짝 뒤틀렸던 것이다.
허나 소년의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계속해서 그 상태를 유지했다.
뭔가를 얻어 내는 건 무리였다.
결국 포기한 소녀가 퉤 하고 침을 뱉은 뒤 검을 들었다. 괜히 짜증 나는 새벽이었다.
그런데 그때, 또 한 명의 인물이 아이른 파레이라를 향해 다가왔다.
이번에도 수련생들의 호기심 가득한 시선이 모여들었다. 주디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브랫?”
“아이른 파레이라.”
아이른의 앞에 멈춰선 브랫 로이드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일리아와는 달랐다.
누가 봐도 용건이 있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검술관 최상위권들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나태 공자를 보며, 주변 수련생들은 제각각 상상의 나래를 펼쳐 갔다.
‘오늘 무슨 날인가?’
‘브랫은 또 왜? 혹시 또 결투를 신청하려고? 아니, 결투는 아니고 대련인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다. 그럴 리가 없다.
저번 결투에서 비등한 모습을 보여 줬다면 모를까, 허망하리만치 일방적인 패배를 당했던 아이른 파레이라다.
한 달이 지난 지금이라 해서 결과가 달라질 리 없다는 건 브랫 로이드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터다.
그러면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어떠한 연유로 이른 새벽부터 일부러 아이른을 찾아와 말을 건 것일까?
“왜?”
“앞으로 종종 교류 좀 하고 살자.”
“……그게 무슨?”
“말뜻 그대로다. 주디스랑 그러는 것처럼, 앞으로 왕래 좀 하면서 서로 부족한 부분도 채워 주고 그러자고. 검술 쪽으로.”
최상위권 수련생이 최하위권 수련생에게 하는 깜짝 제안.
대연무장의 아이들은 결투 신청을 들었을 때만큼이나 깜짝 놀란 눈으로 브랫 로이드를 쳐다봤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