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검을 들다 (2)
분위기가 급변했다.
4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빡빡한 커리큘럼 속에 갇혀 살던 예비 수련생들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통제를 벗어나 돌발 행동을 벌인다는 것은 쉽사리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안정이 깨졌다.
그것도 누구보다 교관들의 지도에 잘 따르던 브랫 로이드에 의해서 말이다.
‘브랫 로이드가 결투 신청을?’
‘아무리 자유롭게 검을 휘둘러도 된다고 했지만, 저건…….’
‘좀 위험한 거 아니야?’
심각해진 아이들이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슬금슬금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곳의 총 책임자인 아메드 교관이 있는 방향이었다.
예상 밖의 상황에서 과연 그는 어떤 판단을 내릴 것인가.
“…….”
안 된다. 당연히 안 된다.
아메드와 카라카 교관이 동시에 생각했다.
예비 수련생들에게 자유 시간을 준 것은 어디까지나 완급 조절을 위해서였다.
이를 망각하고 선을 넘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긴다. 재능과 열정이 넘치는 아이들일수록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럼에도, 둘은 단칼에 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브랫 로이드의 뜨거운 눈동자.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아이른 파레이라의 신비로운 검술.
그것들이 냉정해야 할 교관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냥 하게 해 주지?”
“……관주님.”
어느새 대연무장에 나타난 검술관주 이안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이들은 깜짝 놀랐고, 아메드는 곤란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허나 관주의 뜻은 변함이 없었다.
“괜찮아. 뭘 걱정하는지 알고는 있네만, 가끔은 예외를 둬야 할 때도 있는 법이지. 나는 그게 지금이라고 생각하고.”
그가 고개를 돌려 브랫 로이드를 바라봤다.
침착함을 되찾은 듯 살짝 고개를 숙인 채로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
허나 이안은 알 수 있었다.
저 소년의 마음속이 얼마나 뜨겁게 달구어져 있는지. 눈동자를 마주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항상 절제하던 브랫에게 있어서 오늘의 일은 파격(破格). 어쩌면 정체를 깰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군.’
크로노 검술관은 재능있는 인재들의 성장을 돕기 위해 존재하고, 검술관의 규칙과 일정은 그러한 목표로 나아가는 과정을 매끄럽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아이의 성장을 막으면서까지 지켜야 할 필요는 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관주가 이번에는 다른 쪽, 브랫 로이드의 맞은편에 있는 상대를 쳐다봤다.
그리고 허허,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여전히 읽을 수가 없군.’
이맘때 아이들이 품고 있는 생각은 대충 살펴도 손바닥 보듯 알 수 있어야 정상이거늘.
살짝 고개를 저은 노인이 조용히 소년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른 파레이라.”
“예.”
“브랫 로이드 수련생이 네게 결투를 신청했다. 어떻게 할 거냐? 받아 줄 거냐?”
나태 공자가 침묵했다.
그러자 연무장 전체가 조용해졌다. 교관과 조교를 포함한 수백 명의 시선이 한 명에게로 쏠렸다. 그에게는 처음 있는 낯선 상황이었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답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진검은 아니다.
하지만 장신구도 아니다. 지금 아이른 파레이라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분명 ‘검’이었다.
신비로운 꿈을 꾼 이래로, 검을 들고 있는 소년은 흔들린 적이 없다.
말을 마친 아이른은 지그시 상대를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자세를 갖췄다.
“…….”
브랫 로이드가 움찔했다.
하지만 물러서진 않았다. 짧게 호흡한 그 역시 검을 들고 자세를 갖췄다.
균형 잡힌 롱 소드 형태의 목검이 유려한 궤적을 그렸고, 몇몇 곳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손꼽히는 검술명가(劍術名家) 출신인 일리아 린제이만은 못하겠지만, 브랫 로이드 역시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훌륭한 혈통을 타고났다.
아이들은 새삼 상위권 수련생과 자신의 격차를 깨닫고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승부의 결과를 예상했다.
브랫이 이길 것이다.
도대체 그가 왜 아이른 파레이라에게 결투를 신청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그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방금 나태 공자가 보여 주었던 수직 베기가 전혀 비범하게 느껴지지 않았으므로.
물론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
주디스를 비롯한 몇몇 수련생, 그리고 교관들은 섣부른 판단을 유보한 채 둘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검술관주가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부터 브랫 로이드 수련생과 아이른 파레이라 수련생, 둘의 결투를 진행하겠다. 참관인의 자격으로 한쪽이 위험하다고 판단될 시 곧바로 개입할 것을 미리 말하지. 동의하나?”
“네!”
“예.”
두 소년이 동시에 대답했다.
관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결투의 시작을 알렸다. 브랫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아이른은 고요하게 식은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후.
모두의 생각보다 훨씬 빠른 시점에, 결과가 났다.
* * *
교관으로부터 허락받은 2시간의 자유 시간이 끝난 후, 크로노 검술관은 곧바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예비 수련생들은 다시금 빡빡한 일정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게도 커리큘럼의 시작은 시험이었다.
입관 초기에 카라카가 체력 테스트를 했듯, 이번에도 교관들은 수련생들의 실력을 면밀히 관찰했다.
자세, 간격, 동작의 정교함, 판단력, 걷는 법, 그 밖에 검술의 카테고리 안에 있는 다양한 요소들…….
그 모든 것을 종합하여 평가하고, 등수를 매겼다. 그리고 비슷한 수준에 따라 4개의 집단으로 나누었다.
이 모든 과정을 끝낸 아메드 교관이 강당에 집합한 예비 수련생들을 향해 말했다.
“일리아 린제이, 브랫 로이드…… 이상 열 명, A클래스에 속한 수련생들은 앞으로 나의 지도를 받는다.”
일리아 린제이, 브랫 로이드, 주디스를 포함한 최상위권 10명.
그들에게는 나머지 90명의 수련생들보다 훨씬 가혹하고 고된 수련이 예약되어 있었다.
허나 그 사실에 슬퍼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기뻐했다.
교관들이 어렵고 힘든 것을 요구한다. 그 말은 자신들의 역량을 인정했다는 뜻이다.
더 많은 것을 얻어갈 자격이 있다고 공언한 것이다.
‘반드시 합격해서 정식 수련생이 되겠어.’
‘어떻게든 버텨 주마.’
‘교관님의 가르침, 모조리 흡수해서 최고의 검사가 되겠습니다!’
A클래스 소속 아이들의 마음속에 웅장한 자부심이 차올랐다.
“다음으로. 마크 우드러프, 알프레드…… 아메야 키클랜드. 이상 호명된 35명은 앞으로 B클래스다. 오늘부터 새로 합류한 브랜든 필립스 교관의 지도를 받는다.”
“브랜든 필립스다. 기대해도 좋다. 기억에 남을 만한 가르침을 베풀 테니.”
“예!”
B클래스에 속한 예비 수련생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그들의 표정 역시 밝은 편이었다. 최상위권인 A클래스는 아니지만, 그들 역시 평균을 웃도는 상위권의 인재들인 것이다.
게다가 앞으로 무엇을, 얼마나 배우느냐에 따라 위로 올라갈 기회 또한 열려 있었다. 클래스는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 때문에, 오히려 B클래스의 몇몇 수련생들은 A클래스보다 더욱 뜨거운 열의를 보이고 있었다.
‘젠장!’
‘내가 C클래스라고? 이 내가?’
‘뭔가 잘못된 거 아니야? 나는 중간 평가 1차 합격자인데…….’
반면 C클래스의 아이들은 누가 봐도 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럴 만도 했다. 그들 모두가 대륙 어디를 가도 영재 소리를 들을 만한 재능 넘치는 자들이었으니.
하지만 그들은 알아야 했다. 뛰는 놈 위에는 나는 놈이 있고, 그중에서도 더욱 높게 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어서 빨리 자신의 현 위치를 자각하고, 상위 클래스 수련생들을 앞지르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그래야만 이 치열한 경쟁의 장에서 살아남아 다음 스테이지로 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분합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 만큼 더 노력하십시오. 죽을 만큼 노력하십시오. B클래스로, A클래스로, 더 나아가 최종 평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검술관의 정식 수련생이 되기 위해서는 이대로는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네!”
“각오가 되었습니까?”
“네!”
“좋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빠른 시일 내에 상위 클래스로 올라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휴식을 취하고, 내일부터 정식 수업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카라카 교관이 웃는 얼굴로 말을 마쳤다.
허나 아이들은 웃을 수가 없었다.
“젠장.”
“좋아, 어디 해 보자.”
그 누구도 휴식을 취하지 않았다. 50명이 넘는 C클래스 인원 모두는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연무장을 찾았다.
정식 수업 이전엔 검을 잡을 수 없다는 조교들의 말에도 숙소로 들어가지 않고 체력단련실을 찾았다.
그런 그들의 기세에 B클래스 하위권 몇도 발길을 돌렸다.
불안감을 느낀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A클래스, 그리고 A클래스를 노리는 B클래스 상위권 수련생들도 애초에 쉴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또다시, 검술관 전체에 날 선 긴장감이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들보다 한참 뒤처진 출발선에, 한 명의 예비 수련생이 있었다.
“뭐야. F클래스는 혼자야?”
“그럴 만도 하지. 원래는 세 클래스만 있을 예정이었다면서? 그런데…….”
“검에 관해서 아무것도,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 하나 때문에, 클래스가 하나 더 생긴 셈인가?”
“뭐, 그런 거지.”
“브랫은 도대체 뭐 때문에 저런 놈한테 결투 신청을 한 걸까?”
“그러게 말이야.”
유일한 F클래스 소속, 아이른 파레이라.
그를 두고 몇몇 아이들이 의문을 표했다.
그들로서는 이해가 안 갈 수밖에 없는 게, 아이른이 예상보다 더욱 처참하게 결투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그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오로지 수직 베기밖에 없었다. 그 외의 것은 정말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이는 교관들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임시로 F클래스를 담당하게 된, 즉 아이른의 전속 교관이 된 룬 타르할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선 베기, 그리고 수직 베기. 이 두 개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군. 기본적인 것조차도.”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지. 배운 적이 없는데 어떻게 처음부터 잘하겠어? 다만 당황스럽긴 하군. 우리 검술관에 입관한 녀석들 중에 이토록 검에 대해 문외한인 녀석은 지금껏 한 명도 없었거든. 뭐 잡설은 여기까지 하고. 흠!”
룬 타르할이 검을 들어 올렸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든 것보다도 훨씬 큰 대검. 그 상태로 기세를 흩뿌리니 절로 무거운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질문 하나 하지. 남들보다 훨씬 늦게 검을 든 네가, 다른 수련생들을 따라잡으려면 뭐가 필요할까?”
나태 공자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
“노력입니까?”
“아니. 재능이다.”
부우우웅!
룬 타르할이 검을 내리그었다.
그러자 엄청난 바람이 주변에 휘몰아쳤다.
“노력은 중요하다. 카라카 교관이 말했듯이, 개인이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C클래스의 수련생이 B클래스가 될 수도, A클래스가 될 수도, 어쩌면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남들보다 몇 년 이상 뒤처진 너에게까지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야.”
부우웅!
부우우우웅!
계속해서 검이 휘둘러졌다.
위력적이면서도 기본에 충실한, 비교적 익히기 쉬운 난이도의 대검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오랜 시간 검을 들어온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아이른 파레이라 같은 검의 초심자라면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룬 타르할 교관은 꽤나 어려운 과제를 내주었다.
“일주일이다.”
“…….”
“일주일 안에 지금 보여 준 기본 대검술을 익혀라. 성공하면 곧바로 C클래스에 편입시켜 주마.”
“실패하면 어떻게 되죠?”
“달라지는 건 없다. 그대로 F클래스에 남아 검술을 배우겠지. 하지만.”
한번 뜸을 들인 룬 타르할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그 정도의 재능도 없다면, 제 발로 검술관을 나가는 편이 나을 거다.”
콰악!
어깨에 걸쳐져 있던 대검이 바닥에 꽂혔다. 시선도 마찬가지. 위압적인 눈빛이 꼴찌 수련생의 얼굴에 날아들었다.
아이른 파레이라는 위축되지 않았다.
브랫의 결투를 받아 줄 때처럼 단단한 모습으로, 그가 대답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하라고, 잘. 열심히 하는 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
룬 타르할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겁을 주기 위해 억지로 지었던 표정이 사라지고 평소의 순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최선을 다해 가르칠 것을 약속했고, 아이른 역시 최선을 다해 배울 것을 다짐했다.
* * *
일주일의 시간이 지났다.
임시로 F클래스를 담당했던 룬 타르할 교관은 회복실 업무로 돌아갔다.
나태 공자 또한 F클래스를 떠나 C클래스로 편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