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검을 들다 (1)
크로노 검술관은 검사 양성을 목적으로 한다.
빡빡하고 고된 커리큘럼 때문에 편한 분위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항시 엄격한 규율, 기강을 원하지는 않는다.
군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도 지금 예비 수련생들 사이의 분위기는 훨씬 밝고 쾌활했다.
바로 강당에서 했던 아메드 교관의 말 덕분이었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자유롭게 검을 휘두를 기회를 주마.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휘둘러라.
그리고 느껴라. 4개월 전과 달라진 육체에서 나오는 검의 위력을 말이야.’
100일이 훨씬 넘는 기간 동안 검은커녕 막대기조차 잡아보지 못했던 아이들에게 있어서 이것보다 설레는 발언은 없었다.
약 100명의 예비 수련생들은 편한 동기와 이야기를 나누며, 콧노래를 부르며, 혹은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한 채로 대 연무장으로 이동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신나 보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붉은 머리 소녀 주디스였다.
“거북아- 거북아- 보검을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
“뭐야, 왜 그렇게 쳐다봐?”
“……아니, 그냥 처음 들어 본 노래여서. 조금 과격하기도 하고.”
“그래? 나 어렸을 때 살던 동네에서는 많이들 불렀는데.”
아이른 파레이라의 당황한 표정에 주디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깊게 생각할 건 아니었다. 소녀는 다시 웃음을 지으며 새로운 노래를 흥얼거렸다.
“두껍아- 두껍아- 헌 검 줄게, 새 검 다오. 내놓지 않으면 튀겨 먹으리…….”
“…….”
아이른은 여전히 주디스의 노래가 당혹스러웠지만 더는 티 내지 않았다.
반응은 오히려 그들의 뒤편에서 나왔다.
“저게 갑자기 미쳤나? 그렇지 않습니까, 로이드 님?”
“흠.”
패밀리 일원 중 하나인 랜스 페터슨의 말에 브랫 로이드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봐도 주디스의 분위기는 평소와 달랐다.
원래의 그녀는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는, 마치 신경이 잔뜩 곤두선 고슴도치 같은 모습만을 보여 왔으니까.
‘아니, 고슴도치는 저년한테 갖다 붙이기는 너무 앙증맞지. 독이 잔뜩 오른 뱀 정도로 하자.’
하여튼 그랬던 녀석이,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발랄하게 행동햇다.
랜스 페터슨이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물에 빠진 후에 머리가 이상해지기라도 한 걸까요?”
“뭐, 자기 구해 준 사람한테까지 날 세울 정도로 미친년은 아니었나 보지.”
“그건 그렇지만, 으…… 그래도 완전 어이없네요. 저런 행동이 자기랑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그러니까.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네.”
“맞아, 맞아.”
나머지 브랫 패밀리 둘 역시 랜스 페터슨의 말에 동조했다.
그들은 주디스의 달라진, 발랄하고 쾌활해진 분위기를 꽤 오래 조롱했다.
그러면서 브랫 로이드의 눈치를 봤다.
이렇듯 리더의 라이벌을 말로 깔아뭉개면, 그가 기분 좋은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하지만 브랫의 생각은 주디스에게 머물러 있지 않았다.
소년은 그녀보다 더 앞줄에서 걸어가고 있는 인물, 일리아 린제이의 흔들리는 은발을 바라봤다.
‘아이른 파레이라와 일리아 린제이…… 둘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대부분은 알아차리지 못했겠지만, 그는 느꼈다.
아이른에게만 특별한 호의를 내비치던 일리아가 오늘은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음을.
오히려 다른 수련생들보다 더욱 거리를 두는 듯한 모습을 보였음을 말이다.
확실한 건 아니었다. 판단의 근거라고는 강당에서 둘이 서로를 스쳐 지나갈 때 보였던 순간의 어색함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좀 더 지켜보면 알 수 있겠지.’
고개를 끄덕인 브랫이 이 일을 머리에 담아 뒀다.
허나 계속해서 곱씹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잠시 후에 있을 일이 너무나도 기대됐기 때문이었다.
소년이 불끈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기분 좋은 미소를 지은 브랫이 주디스, 아니 그 옆에 있는 나태 공자 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녀석은 검을 수련한 시간이 거의 없는 수준이라고 했지.’
그럼 모를 것이다. 지난 4개월간 자신이 느껴왔던 갑갑함을.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느끼는 설렘을.
그렇기에 녀석은 자신의 경쟁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중간 평가에서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여 줬음에도 말이다.
‘적어도 검술관에 있는 동안에는…….’
브랫이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 가고 있을 때였다.
어느새 예비 수련생들의 눈앞에 대 연무장의 모습이 펼쳐졌다.
중간 평가가 치러졌을 때와는 전혀 다른 풍경.
이런저런 체력 측정 도구들이 있을 때보다 훨씬 깔끔했고, 훨씬 넓어 보이는 공터가 그들을 맞이했다.
하지만 아이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한쪽 구석에 진열된 수많은, 각양각색의 목검들.
수련생들의 눈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앞서 말했듯이 두 시간 동안, 마음껏 검을 다룰 기회를 주겠다. 조교들의 통제하에 원하는 목검을 집도록 해라!”
“네!”
“넵!”
아메드 교관의 허락이 떨어졌다. 조교들은 예비 수련생들을 무기 진열대로 인도했다. 그 과정이 무척이나 매끄럽고 빨랐다.
그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륙에서 최고라 평가받는 크로노 검술관에 입관할 정도로 검에 재능이 넘치고, 흥미 있고, 그렇기에 한창 어렸을 때부터 무(武)의 길을 걸어왔을 아이들이다.
더 기다리게 하는 것은 고문하는 것과 같았다.
그리하여 수련생들이 목검을 고르는 과정은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힘찬 기합 소리와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하압!”
후웅!
“타핫!”
후우웅!
“흐으읍!”
쒜에에엑!
각자 원하는 형태의 목검을 쥐고 홀린 듯이 검을 휘두르는 수련생들.
그들 대부분이 이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검을 잡은 것이 너무나도 오랜만인 탓에 원하는 움직임이 나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위력의 상승은 물론이고, 자세와 동작 하나하나가 이보다 매끄러울 수 없을 정도로 펼쳐지고 있었다.
“와, 이 동작이 이렇게 잘 된다고? 예전에는 세 번 시도하면 한 번 제대로 할까 말까 했는데…….”
“훨씬 더 과격하게 휘둘러도 중심이 안 무너진다!”
“아무리 목검이라 그래도, 검이 이렇게 가벼웠었나?”
몇몇은 자신들이 혼잣말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고, 나름 침착한 아이들조차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연신 검을 휘둘렀다.
아메드와 카라카 교관이 그 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봤다.
‘당연하지. 단순히 힘과 스테미너만 키워 준 게 아니니까.’
단순히 고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크로노의 단련과 회복 시스템은 수련생들의 신체 능력을 모조리 끌어올렸다.
근력과 지구력, 스피드와 같은 직관적인 면만이 아니라 협응력, 밸런스, 정확도와 같은 정량적으로 측정하기 어려운 부분까지 전부 말이다.
물론 남들이 보기에 직관적이지 않다고 해서 당사자들까지 모르는 것은 아니다.
예비 수련생들은 각자의 검술을 뽐내며 몸 구석구석을 점검했고, 기뻐했다. 희열에 빠졌다.
허나 그런 즐거운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 사이에 무거운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만만한 놈이…….’
‘아무도, 아무도 없어.’
‘젠장! 내가 성장한 것만큼, 다른 놈들도 모조리 발전했어!’
그렇다.
오랜만에 검을 쥔 기쁨에 잠시 잊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경쟁의 틈바구니에 있었다.
자신의 성장에만 마냥 기뻐하고 있기에는 상황이 녹록지가 않았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 하나 나약한 자가 없다!
그 불편한 진실에 수련생들의 눈초리가 점차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바빠졌다.
타인의 수준을 더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
“…….”
한 명, 한 명, 그리고 또 한 명.
그렇게 동기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던 아이들의 시선이, 어느덧 한 명에게 모였다.
중간 평가 수석 일리아 린제이?
아니었다.
입관 초기부터 두각을 나타냈던 주디스도, 브랫 로이드도, 그 밖의 다른 상위권 수련생들도 아니었다.
아이른 파레이라.
여전히 검을 들지 않고 멍하니 서 있는 그를 보며 누군가가 생각했다.
‘저놈은 검을 수련한 적이 없다고 했지?’
아니, 조금은 있었나?
그래 봤자 얼마 되지 않았다고 들었다. 끽해야 한 달 정도. 그에 대한 정보를 떠올린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모를 것이다. 자신들이 얼마나 이때를 기다려 왔는지.
몇 년 동안이나 검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자신들에게 있어서 지난 4개월의 기다림이 얼마나 큰 괴로움이었는지, 타는 목마름이었는지.
나이만 많은 저 애송이 녀석은 절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저렇듯 느긋한 모습을 보이는 거겠지.
“오.”
“움직인다.”
시선을 느꼈음인가.
지금껏 가만히 있던 아이른 파레이라가 움직였다.
무기 진열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를 보며 누군가는 호의를, 누군가는 적의를 품었다.
그리고, 소년이 검을 잡았다.
터업-
일반적인 훨씬 크고 무거운.
평범한 사람은 버겁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대검(大劍).
그러나 지금의 아이른에게는 그리 부담스러운 무게가 아니었다.
예전과는 전혀 달라진 자신의 몸을 느끼며, 그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후우.”
나태 공자는 인생을 낭비해 왔다.
나태 공자는 게으른 인생을 보내 왔다.
나태 공자는 검을 수련한 기간이 극도로 적다.
심지어, 나태 공자는 검에 대단한 뜻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옳은 말이다. 이 모두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태 공자는 누구보다 간절히 이 순간을 고대해 왔다.
꿈속 사내의 검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충족시킬 수 없는 찢어질 듯한 갈망 속에서, 오로지 목에 걸린 검 장신구 하나만으로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그렇기에 곧바로 움직이지 못했다.
기회가 주어졌다고 해서 곧바로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가벼운 감정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가까스로 마음을 다스린 아이른이 재차 숨을 내쉬었다.
일렁이는 흥분 속에서 곧은 심지가 서는 게 느껴졌다.
“후우.”
사실 잘 모르겠다.
지금의 이 감정과 기분이 자신의 것인지, 아니면 매일 밤 자신의 꿈에 나타나는 사내의 것인지. 그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지금 중요한 건 아니다.
잡념을 떨쳐버린 나태 공자가 하늘 높이 검을 치켜세웠다.
그리고.
후우우우웅!
그 누구보다 힘차게 검을 내려 베었다.
* * *
“어?”
주디스가 멍청한 소리를 냈다.
아이른 파레이라 때문이었다.
그녀가 유일하게 마음을 연, 특이한 동기가 지금 막 검을 휘두른 참이었다.
녀석이 보여 준 건 수직 베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떨어지는 사선 베기와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단순한, 검술의 기본동작 중 하나였다.
무게감 있는 대검이 빠르게 내리꽂힌 만큼 꽤 위력은 있지만, 특별할 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뭐지?’
뇌가 가려운 듯한 이상한 감각.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기분에 주디스가 주변을 돌아봤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아이른으로부터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몇몇은 아니었다.
“……!”
“…….”
“…….”
아메드 교관이 평소보다 더욱 굳은 얼굴로 소년을 바라봤다.
카라카 교관이 평소와 전혀 다른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봤다.
수련생 중에서는 일리아 린제이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살짝 커진 눈이 그녀가 평소와 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다른 모든 이들을 제치고 소년의 앞으로 나서는 한 명이 있었다.
“아이른 파레이라. 네게 대련을 신청한다.”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모습의 브랫 로이드가, 나태 공자의 앞에서 자세를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