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중간 평가 (2)
변수가 없을 것 같던 크로노 검술관의 중간 평가에 이변이 발생했다.
그 주인공은 아이른 파레이라.
입관할 때만 해도 모두의 괄시를 받았던, 압도적인 꼴찌였다.
물론 지금도 그런 것은 아니다. 4개월이라는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으니까.
그는 주변의 반응을 무시한 채 어마어마한 훈련량을 소화해 냈고, 그를 비웃었던 이들을 역으로 무시할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온 상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 정도로 대단한 퍼포먼스를 보일 정도는 절대, 절대 아닌데……!’
고귀한 혈통의 적자, 브랫 로이드가 표정을 굳혔다.
몸은 정해진 동작을 수행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으나 그의 머리는 달랐다.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모든 게 아이른 파레이라 때문이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작금의 상황을 어떻게든 파악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그때, 또 하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기다려, 이 개새끼들아아아아아!”
자신과는 다른 천한 핏줄, 그럼에도 항상 차석의 자리를 놓치지 않아 자신의 자존심을 짓뭉갰던 건방진 소녀.
주디스마저 예상보다 훨씬 이른 시점에 반복 동작 코스를 마무리했다.
점차 멀어지는 붉은 머리를 바라보며 브랫이 이를 부드득 갈았다.
‘생각 없는 새끼들!’
그렇다. 저들은 지금 잘못된 판단으로 움직이고 있다.
전체 코스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자신의 한계를 냉철하게 파악하지 않고 주변 분위기에 휩쓸리고 있다.
멍청한 짓이다.
무리한 초반 페이스가 후반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안 봐도 뻔한 이야기였다.
‘나는 달라!’
중간 평가 코스가 공개되고 열흘간 그야말로 철저한 계획을 짰다.
최고의 기록을 달성하기 위해 어떻게 체력을 배분해야 하는가, 부족한 부분은 무엇이고 좋은 부분은 무엇인가.
그에 따라 내가 보충해야 할 부분은 또 무엇인가.
그런 내적인 부분과 별개로 외적인 부분까지, 예를 들어 평가 당일의 컨디션 유지를 위해 같은 식단을 유지한다든가 하는, 정말 사소하고 자잘한 부분까지 완벽하게 관리했다.
그렇기에 자신했다.
이번에야말로 주디스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압도적인 천재인 일리아 린제이는 무리지만, 차석의 자리는 자신이 차지할 것이라고.
그런데…….
‘진정해. 불안해하지 마!’
짝!
박스 점프를 끝낸 브랫 로이드가 자신의 뺨을 찰싹 때렸다.
그래. 진정할 필요가 있어.
남들이 어떻게 움직이든 상관없어. 나는 내가 닦아 놓은 길을 간다.
그 길을 믿고 달리다 보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속으로 다짐한 뒤, 다시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덕분에 브랫은 예상했던 시간대에 무사히 첫 번째 코스를 완료할 수 있었다.
1, 2, 3등과 차이는 있지만 충분히 해 볼 만한 거리였다. 그는 여유가 있었으니까. 전혀 무리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재차 이를 악문 소년은 계획보다 살짝, 아주 살짝 속도를 올려 두 번째 코스를 달려나갔다.
* * *
브랫 로이드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그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두 번째 코스를 달리는 아이른 파레이라의 상태는 무척 좋았다.
체력적으로 전혀 무리가 없었다.
오히려 자신도 몰랐던 몸 구석구석에 익숙해지면서 더 훌륭한 퍼포먼스를 선보일 준비를 완료한 참이었다.
‘어제까지의 내 상태, 내 기록은 잊어버리자.’
아이른은 안정적인 호흡 속에서 생각했다.
어느 속도로, 어떻게 체력 안배를 해야 이 새로운 육신으로 최고의 기록을 뽑아낼 수 있을까.
굉장히 추상적이고 어려운 작업.
허나 놀랍게도 그는 별다른 오차 없이 이를 계산해 내는 데 성공했다.
향상된 시야와 통찰력 덕분이기도 했고, 약간의 운이 더해진 덕분이기도 했다.
분명한 호재였다.
아이른은 자신에게 가장 효율적인 페이스로 모랫길을 질주했고, 이내 지근거리에 있는 은발의 소녀를 발견했다.
일리아 린제이.
무한 경쟁의 장인 비정한 크로노 검술관에서, 홀로 고고한 자리에 앉아 있는 자.
천재인 주디스도, 고귀한 핏줄인 브랫 로이드도 한 번도 닿지 못했던 그녀가 바로 앞에 있는 것을 본 순간, 아이른은 자신의 가슴이 조금씩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
그것은 아주 작은 불씨였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하루에도 몇 번씩 피어오르는, 그런 흔한 불씨보다도 훨씬 작은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른에게 있어 그 불씨는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
‘이게 무슨 기분이지?’
알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평생을 자신 안에만 갇혀 살았던 아이른은 꿈이라는 기연을 통해 난생처음 사회 속으로 들어갔고, 난생처음 타인과 경쟁했다.
투쟁심(鬪爭心)이라는 감정을 이해하기엔, 아이른의 경험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그렇기에 고민했다.
지금의 이상적인, 자신이 생각하기에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페이스를 유지해 나갈 것인가.
아니면 이 알 수 없는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미래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더욱더 박차를 가할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빠져 있을 때였다.
은색과 금색, 두 아름다운 색이 그려 오던 선 사이로 용암처럼 뜨겁고 붉은 선 하나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후억, 커헉, 후웁, 흐랴아아아아압!”
엉망진창의 호흡. 그 뒤를 잇는 우렁찬 기합 소리.
주디스의 목소리였다. 생각에 빠져 있던 아이른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질주하는 붉은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야아아아아아압!”
또 한 번 뜨거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직후 주디스의 속도가 한층 더 빨라졌다.
그녀는 안정적인 자세로 뛰고 있던 아이른 파레이라를 제친 뒤, 그 앞에 있던 일리아 린제이마저 추월했다.
그리고 더욱 거리를 벌리며 앞으로 치고 나갔다.
아이른은 생각했다.
‘엄청 무리하는 것 같은데, 괜찮을까?’
얼굴에 걱정이 떠올랐다. 가슴을 간질이던 불꽃이 숨을 죽이고 숯처럼 은은하게 변해 갔다.
일리아 린제이는 달라지지 않았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일을 해나갈 뿐이었다.
* * *
‘젠장! 제길! 시발! 젠장!’
끝도 없이 욕설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불이라도 삼킨 것처럼 가슴이 뜨거웠다. 폐가 타는 것 같고, 몸을 휘도는 핏물은 화로 속의 쇳물인 듯했다.
주디스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몸이 한계에 봉착했다는 사실을.
당장이라도 휴식을 취해 이 열기를 식히지 않는다면, 무언가 단단히 잘못될 것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육신보다 더욱 뜨거운 마음속 분노가, 붉은 머리 소녀를 끊임없이 달리게 하고 있었다.
‘절대 안 져! 절대로! 무조건 이겨!’
지고 싶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입에 물고 으스댔을 브랫 로이드도, 거기에 더해 대륙의 천재라 평생을 칭송받고 살아왔을 일리아 린제이도 짜증 났다.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였다. 인생 편하게 살아온 녀석들에게 꺾이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하물며 15년 동안이나 게으르게 살아온 나태 공자 새끼한테 질 수는 없었다!
“허억, 크허억, 씨, 크흡, 팔! 하악!”
물론 그녀도 알고 있었다.
아이른 파레이라가 지난 4개월 동안 얼마나 대단한 근성을 보였는지를.
자신도 그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달리고, 움직이고, 발악하긴 했지만, 결국 녀석이 검술관 최고의 노력가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그러면 검술관에 들어오기 전부터 자신이 해 왔던 것들은? 전부 없던 게 되는 건가?
이대로 순순히 포기해야 할 정도로 가치 없었던 시간인가? 과거의 시간들이?
‘젠장, 몰라!’
주디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 알고 있다. 세상이 원래 그렇다는 걸.
자신이 일리아나 아이른을 보고 불합리함을 느끼는 것처럼, 다른 누군가도 자신을 보고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는 걸.
자신 또한 남들이 보기에는 박탈감을 선사할 정도로 재능 넘치는 존재라는 걸. 다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딴 건 상관없다.
분노하자.
이유야 어찌 됐건 마음껏 화내고, 짜증 내고, 욕하고, 지랄하고 그러자.
투쟁심이건 승부욕이건 열등감이건 모르겠고, 모조리 써먹자.
그 뜨거운 것들을 연료로 한계를 돌파하자.
저 게을렀던 새끼가 그랬던 것처럼!
“으아아아아압!”
주디스의 입에서 세 번째 포효가 터졌다. 그러자 더는 빨라질 수 없을 것 같던 다리가 또 한 번 빨라졌다.
그녀 역시, 명백하게 한계를 돌파하고 있었다.
“허억, 허억.”
한동안 순위가 유지되었다.
주디스, 일리아 린제이, 아이른 파레이라, 브랫 로이드.
적발, 은발, 금발의 선이 그어지고,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푸른 선이 뒤를 쫓았다.
그보다 꽤 떨어진 곳에서 뒤죽박죽의 색들이 5번째 자리를 두고 경쟁을 벌였다.
그리고 마침내, 중간 평가의 마지막 코스가 시작되었다.
호수를 마주한 주디스는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다. 잠깐이라도 멈췄다가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푸하, 흡. 푸하! 흡!”
달라진 환경, 달라진 동작.
하지만 주디스는 여전했다.
소녀는 여전히 분노했고, 여전히 뜨거웠다. 그렇기에 계속해서 움직일 수 있었고, 계속해서 1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만약 이 페이스대로 결승선을 통과할 수 있다면, 자신의 최고 기록을 엄청나게 단축하는 셈이 되니까 말이다.
기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하지만, 기적은 쉽게 일어나지 않기에 기적이라 불리는 법.
호수에 들어간 주디스의 몸이 점차 느려졌다.
조금씩, 조금씩. 그러다가 순식간에.
이상을 느꼈을 때는 늦은 상태였다. 이내 그녀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깊은 물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고요한 가운데 그녀는 생각했다.
‘젠장.’
모든 걸 포기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차가운 호수 속이기 때문일까.
주디스는 언제 분노했냐는 듯이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추락하며 위를 쳐다봤고, 일리아 린제이가 자신을 추월해 가는 것을 확인했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표정 없는 얼굴.
아직도 한참 여유가 있어 보였다. 주디스가 허탈하게 웃었다.
‘진짜 괴물 같은 년. 뭘 먹고 컸길래 저러지?’
분했다.
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년은 종자부터 다른 년이었다. 자신이 따라잡을 수 없는, 그런 인간.
붉은 머리 소녀는 인생 처음으로 완벽한 패배감에 휩싸였고,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었다.
그러자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숨을 쉴 수 없음에도 무척 개운했고, 자신만 못한 녀석들이 자신을 앞지를 것을 알면서도 별달리 화가 나지 않았다.
‘이제 곧 아이른 파레이라도 나타나서 앞지르겠지. 아마 브랫 로이드, 그 재수 없는 녀석이 세 번째로 들어올 테고. 그다음엔…… 제길, 이건 좀 짜증 나네.’
주디스는 자신의 생각을 취소했다.
아이른 파레이라…… 그래, 브랫 로이드 녀석까지는 인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녀석들이 자신을 제치는 건 솔직히 짜증 났다.
물론 그래봤자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녀는 여전히 가라앉는 중이고, 곧 정신을 잃을 터였다.
실제로 시야가 점점 흐릿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니, 감으려 했다.
덥석.
‘뭐야?’
자신의 목을 휘감는 팔.
그 상태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또래 수련생들보다 조금 더 큰 소년.
주디스는 흐린 눈으로 상대를 살폈고, 이내 머리끝까지 열이 뻗치는 걸 느꼈다.
‘아이른 파레이라! 이 미친 새끼가…….’
검술관에 남을 수 있냐, 없냐가 걸린 평가다. 거기에 더해 대륙 최고의 검사 중 하나인 이안 관주의 상이 걸린 평가였다.
그런 중요한 시점에, 경쟁에서 이탈해 자기를 구하러 온다고?
‘이 병신은…… 도대체가…… 뭐가 중요하고 뭐가 안 중요한지도 모르고…….’
물속만 아니었다면 쌍욕을 퍼부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주디스는 정신을 잃었고, 아이른은 그런 그녀를 기어코 호수 밖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뒤늦게 도착한 조교가 응급 처치를 실시했다. 이를 잠시 지켜보던 나태 공자가 다시 결승선을 향해 몸을 던졌다.
물론 그것은 다른 수련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제한 시간을 초과한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이 될 평가를 도중에 관둘 아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도 움직이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주디스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결승선을 통과했다.
비로소, 이변이 속출했던 크로노 검술관의 중간 평가가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