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성장 (3)
이안.
크로노 검술관의 주인이자, 대륙의 최강을 논할 때 결코 빠지지 않는 위대한 이름.
마음만 먹으면 훨씬 더 커다란 부와 명예를 움켜쥘 수 있는, 신분과 혈통을 초월한 입지적인 존재.
이 설명만 듣는다면 다가가기조차 힘들 정도로 고압적인 분위기를 뿌리고 다닐 사람인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보게. 자네 아단 왕국 출신이라고 했지?”
“네, 넵! 아단에서 용병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비, 비록 검술관 사람은 아니지만, 이렇게나마 크로노 검술관의 정점이신 이안 님을 뵐 수 있어 영광…….”
“아니, 그런 겉치레는 필요 없고. 나 몇 살 정도로 보이나?”
“예?”
“아단 사람들은 문화와 예술을 각별히 사랑하지. 심미안도 괜찮고. 그러니 말해 보게. 내 나이가 몇 정도로 보이나?”
“어…… 그게…… 쉰…… 다섯…… 정도?”
아단 출신 조교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말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검술관주의 나이는 올해로 90이었고, 겉모습 역시 아무리 잘 쳐 줘야 70은 넘어 보였으니까.
허나 이안은 조교의 말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상대의 어깨를 두드려 준 관주가 아메드 교관을 쳐다보며 말했다.
“조교분들을 아주 잘 뽑았구나, 아메드. 마음에 들어.”
“예.”
“다음 달부터 이쪽 봉급은 두 배로 올려드리게.”
“……예, 관주님.”
“그래, 다른 조교 양반들은 내 나이가 몇 정도로 보이나?”
“쉬, 쉰도 안 된 나이로 보입니다!”
“아닙니다! 아무리 많이 봐줘야 마흔다섯 정도로 보입니다!”
“무슨 소리! 어떻게 봐도 마흔을 갓 넘은 정도로밖에…….”
“너 이 새끼, 아무리 그래도 적당히……!”
빙긋 웃으며 재차 질문을 던지는 이안을 보며, 조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말도 안 되는 나이들을 내뱉었다.
처음의 얼어 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풀려 버렸다.
당연한 일이긴 하다. 검술관주 이안은 성격 좋고 권위가 없기로 유명했으니까.
크로노 검술관 출신이 웬만한 기사들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는 데는 이안의 훌륭한 인품도 큰 몫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메드 교관과 카라카 교관은 각을 풀지 않은 자세로, 말없이, 조교들과 농담 따먹기를 하는 관주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확실히 관주님만 한 인격자는 찾아보기 힘들지.’
능히 나라 하나를 건국할 만큼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욕심이 없었다.
오히려 기사들보다 더욱 기사도를 중시하고, 사제들보다 더욱 양민들의 구원에 힘썼다.
때로는 그런 호구 같은 태도에 휩쓸린 몇몇 하룻강아지들이 건방진 모습을 보일 때조차 이안은 역정을 내는 법이 없다.
그럼에도 두 교관은 관주가 무서웠다.
일견 평온해 보이는 표정 깊은 곳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몇 번뿐이지만 지켜본 적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가 보지 못한 모습들이…….’
‘훨씬 더 많겠지. 30년을 넘게 봐 왔지만, 여전히 관주님의 속은 알 수가 없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조교들과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던 관주가 천천히 그들 쪽으로 시선을 틀었다.
둘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인자하고, 상냥하고, 때로는 그게 지나쳐 시골 노인네처럼 보일 정도로 속이 없어 보이는 양반.
그가 평소와 마찬가지로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이번 수련생들이 어느 정도 성취를 달성했는지…… 한번 구경이나 해 볼까?”
* * *
“저 아이는 나쁘지 않군.”
“저 녀석은…… 영 별론데? 최근 훈련을 게을리 한 티가 나.”
“하체가 조금 부실해. 안타깝다, 안타까워.”
정체를 숨긴 채 은밀히 진행된 수련생 사찰. 검술관주 이안은 일견 성의 없어 보이는 모습으로 아이들이 자율훈련하는 모습을 돌아봤다.
그럼에도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지난 4개월간 빠짐없이 수련생들을 지켜봐 왔던 조교들보다도 더욱.
“와…… 어떻게 달리는 거 잠깐 본 것만으로도 바로 알아채시지?”
“심지어 저쪽은 그냥 서 있는 모습만 보고도 유연성에 문제가 있는 걸 바로 간파하셨어.”
‘당연한 일이지.’
조교들이 조심스레 소곤거리는 걸 들은 아메드가 피식 웃었다.
꽤나 눈이 좋다고 자부하는 자신조차 관주와 비교하면 태양 앞의 반딧불이었다.
단언컨대, 대륙에서 이안보다 깊은 통찰력을 지닌 존재는 인간 중엔 없을 터. 물론 카라카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둘은 조교들과는 다르게 조용히 뒤를 따랐다.
생각보다 훨씬 엄격한 관주의 기준에 안타까워하면서.
하지만 그런 이안조차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수련생이 있었다.
바로 거베라 왕국의 고위 귀족, 브랫 로이드였다.
구슬땀을 흘리며 중간 평가 항목의 동작 하나를 반복 수행하는 소년을 보며, 이안이 처음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꽤 괜찮은 아이가 들어왔구만.”
“로이드 가의 장자입니다. 영리하고 재능 있는 아이죠.”
“그래 보여. 평가 당일에 맞춰 컨디션을 조절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이는군. 게다가 몸 상태를 보니 지금껏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 같고…….”
기억해 둬야겠어. 이안이 조용히 중얼거렸고, 교관과 조교들은 기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다소 오만하긴 하지만, 브랫 로이드는 누구나 좋은 평가를 하고 있는 우수한 수련생이었다.
그런 그가 칭찬받자 마치 자신들이 칭찬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흠. 좋아.”
“저 녀석도 쓸 만하네.”
“이거 생각보다 괜찮은데? 자네들이 열심히 가르친 덕인가? 허허허.”
다행히 그 이후로도 여러 수련생들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에 따라 지도자들의 얼굴도 점차 밝아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매일같이 험한 소리를 내뱉고, 굴리고 했던 녀석들이지만 어디까지나 아이들이 잘되기를 바라서 그랬던 것이니까.
그리고 그들의 눈앞에 한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모두는 숨을 죽이고 이안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대륙에서 세 손가락, 아니 두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천재.
대 크로노 검술관에서 단 한 번도 수석을 놓친 적 없는 괴물.
일리아 린제이.
‘과연, 저 소녀를 보고 관주님께선 어떤 평가를…….’
‘아무리 이안 님이라고 해도 엄청 놀라겠지?’
‘그럴 수밖에 없겠지. 저 나이에 저만한 성취를 거둔 사람은 역사상으로도 몇 없을 텐데…….’
그런 지도자들의 예상이 맞았던 것인지.
검술관주는 훨씬 더 오랫동안 대륙의 천재를 바라봤다. 무려 1분씩이나.
평범한 수련생들을 거의 본 듯 만 듯 지나쳤던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차이였다.
하지만 그 긴 시간 끝에 이안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들의 생각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불쌍한 녀석. 자신의 길을 가도 좋으련만, 왜 남이 걸었던 길에 그리 집착할꼬…….”
“…….”
“세상이 그리 만들었음인가…… 쯥. 미련을 버릴 날이 왔으면 좋겠건만.”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조교들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오직 관주와 두 교관만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을 따름이었다.
물론 이에 대해 질문할 정도로 간 큰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속해서 사찰을 돌았고, 마침내 제1단련실에서 또 한 명의 재능 있는 수련생과 마주하게 되었다.
관주가 말했다.
“이 아이인가?”
“예. 맞습니다.”
“확실히 자네들이 왜 걱정하고 있는지 알겠구만. 말려는 봤겠지?”
“당연히…… 하지만 전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마 이번 기수 중 가장 고집이 센 아이일 겁니다.”
어쩌면 검술관 역사상 가장 셀 수도. 카라카 교관이 속마음을 삼켰다.
괜히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었다.
평소에도 악바리 같은 성격을 자랑하며 지독하게 단련을 이어 갔던 소녀지만, 이번에는 정도가 심했다.
거의 자신을 학대한다고 해도 모자랄 수준의 과한 훈련량.
중간 평가 당일의 결과를 위해 컨디션 유지에만 힘쓰고 있는 여타 수련생들과는 달리, 내일이 없다는 듯 몸을 혹사하는 검술관의 차석, 주디스를 보며 모두가 걱정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말려야겠어.”
검술관주 이안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근골이 훌륭하고, 회복력 역시 뛰어나 보인다. 저 주디스라는 아이는 소위 축복받은 육체를 타고났다.
하지만 그런 육체에도 한계라는 것은 존재한다.
무리한 단련을 통해 몸을 망치고 중간 평가를 망친다면 얼마나 원통할까.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안이 천천히 붉은 머리 소녀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조교 하나가 아메드 교관에게 물었다.
“말릴 수 있을까요?”
“당연히 말릴 수 있지. 아마 관주님의 말 몇 마디면 알아먹을 거다.”
“그렇겠죠? 하긴, 관주님이라는 걸 알면…….”
아메드가 고개를 저었다.
이안은 지위로 상대를 억압하는 사람이 아니다. 아마 자신이 크로노 검술관의 관주라는 것도 밝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말에 담긴 진심, 감정, 그리고 무게를 느낀다면, 12살짜리 아이는 자신의 뜻을 꺾을 수밖에 없을 터.
‘다만 그건 궁금하군. 도대체 뭐가 저 악바리 녀석을 폭주시켰을까…….’
분명 뭔가 계기는 있었을 것이다.
한 번도 이겨 보지 못한 일리아 린제이를 제치고 수석을 차지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실질적인 라이벌인 브랫 로이드의 격장지계에 당한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이런저런 추측이 머릿속을 오갈 때였다.
이안이 생각보다 짧게 대화를 끝내고 왔다.
그리고 주디스는 여전히 토가 나올 듯 무거운 중량을 들고 근력 운동을 이어 갔다.
카라카가 놀란 표정으로 다가와 물었다.
“과, 관주님? 설마?”
“허허. 고집이 아주 센 아이구만.”
이럴 수가. 관주님의 말조차 무시하고 무리한 훈련을 이어 가다니.
이쯤 되면 확실해졌다. 주디스는 크로노 검술관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고집이 센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아직 궁금한 게 남아 있었다.
카라카의 옆에 선 아메드가 추가로 질문을 던졌다.
“혹시 이유는 들으셨습니까? 도대체 왜 저렇게 무리를 하는지 말입니다. 저희에게는 통 얘기를 하지 않아서…….”
“아이른 파레이라.”
“네? 아, 네.”
갑작스레 튀어나온 이름에 아메드가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아이른 파레이라, 성실한 수련생이죠.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그 아이 역시 요즘 무리한 단련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주디스처럼요.”
“그렇게 된 거구만.”
“혹시, 주디스 수련생이 지금 저러고 있는 이유가…….”
“그래. 그 녀석 때문이라는군.”
고개를 끄덕인 관주가 설명을 이어 갔다.
자기보다 훨씬 허약하고 연약한 녀석도 온종일 하드 트레이닝을 이어 가는데, 자신이 멈출 이유가 뭐가 있냐고.
자신을 멈추고 싶으면 그 녀석부터 멈추라는 주장을 듣고 있자니, 일단은 그 아이른 파레이라라는 수련생을 만나 보는 것이 순서인 것 같다고.
이안의 말을 들은 아메드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확실히, 그렇게 나오면 아이른 수련생을 멈추는 게 먼저겠군요.”
“그 수련생도 저 녀석처럼 막무가내인가?”
“그런 성격은 아닙니다만…… 이번만큼은 그 녀석도 비슷합니다. 멈추라 해도 도무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실력은 어떻고?”
“솔직히 주디스와는 비교할 게 못 됩니다. 중위권에 간신히 드는 정도…… 물론 그것도 많이 올라온 거긴 합니다만.”
그랬다. 주디스가 아이른을 의식하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누군가와 경쟁하고, 승부욕을 불태우는 건 급이 맞는 상대와 하는 것이니까.
슬픈 말이지만 아이른 파레이라는 주디스와 급이 맞지 않았다.
“뭐, 일단 구경이나 갈까? 두 번째 말썽쟁이 수련생이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말이야.”
말을 마친 검술관주가 1단련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거침없이 2단련실이 있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아무래도 주디스에게 아이른 파레이라의 위치를 들은 모양이었다.
걸음걸이에서 기대감, 흥겨움이 느껴졌다. 그런 이안의 모습을 본 모두가 불편한 마음이 되었다.
‘기대만큼 대단한 수련생은 아닌데…….’
‘장래야 기대되지만, 아직은 다듬을 구석이 많다.’
‘솔직히 이번 중간 평가에서 떨어질 가능성이 크지. 관주님께서 실망하시겠어.’
조교들, 심지어 아이른을 좋게 평가하는 아메드와 카라카조차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먼저 2단련실에 들어간 이안의 표정은, 그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진중한 것이었다.
“…….”
1분이 지났다.
2분이 지났다.
5분,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아이른 파레이라가 보여 준 것이라고는 주디스보다 한참 낮은 중량 운동을 반복하고 있던 것뿐이었다.
며칠 전보다 발전하기는 했지만, 큰 의미는 없는, 그런 수준.
그러나 이안에게는 아니었다.
호수처럼 맑고도 깊은 눈동자가 소년의 내부를 샅샅이 관찰했다.
그렇게 30분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노인이 난감해하며 말했다.
“저 소년을 말리고 주디스도 말릴 생각이었는데, 이거 완전히 망해 버렸구만.”
“그 말씀은?”
“아이른 파레이라라고 했지? 저 녀석, 내버려 둬.”
“내버려 두라고요?”
“그래. 자기가 포기하지 않는 한, 절대 멈추게 하지 마. 중간 평가에 못 나오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야.”
“…….”
예상치 못한 명령, 그리고 예상치 못한 심각한 표정.
분위기가 기묘해졌다. 관주를 제외한 모두가 서로의 눈치를 보며 말을 아꼈다.
“후욱, 훅, 후읍!”
그렇듯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지켜본다는 것도 모른 채, 나태 공자는 계속해서 처절한 단련을 이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