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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13화 (13/388)

◈ 5. 성장 (2)

새벽.

평소보다도 더 이른 시간에 일어난 아이른 파레이라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그렇게 한참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익숙한 천장.

낯익은 방 안.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풍경과 친근한 풀냄새, 새소리, 그 밖의 지겨우면서도 정겨운 모든 것들.

소년의 눈에 닿은 모든 것들이 어제와 같았다.

하지만 자신은, 자신의 속마음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어젯밤에 꾼 꿈을 조용히 곱씹었다.

‘오랜만이네.’

최근에는 전혀 꾸지 않았던 꿈.

하지만 신비한 사내의 모습이 나오기 전에는 일주일에 한 번 이상 꼭 꾸었던 꿈.

그곳은 꿈처럼 달콤한 공간이었다.

온통 어둡지만 아늑한 느낌이 들고, 무언가 가득 차 있으나 답답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따스하고 그리운 느낌마저 들어, 어릴 때의 아이른은 이 꿈을 꾸기 위해 억지로 잠을 청하고는 했었다.

마치 죽고 없는 어머니의 품에 안긴 것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렇다.

착각에 불과하다.

이곳이 어머니의 품이 아니라는 것쯤은, 소년 역시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른은 떠나갈 수 없었다.

눈을 뜨고 있으면 엄습하는 불안감이, 침대 밖을 나서면 무겁게 내려앉는 주변의 시선이 두려웠다. 견디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불행한 사건을 겪은 소년은 점차 자신의 안으로 침잠하였고, 꿈속 어두운 장소에서의 시간에 더욱 집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지.’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암막을 밝혀 준 은회색의 검.

흡사 빛의 기둥처럼 느껴지는 그것이 자신의 앞에 나타난 순간, 아이른은 검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벌써 몇 달 동안이나 검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소년은 빛을 움켜쥐었고, 세차게 휘둘렀다. 신비로운 사내가 수없이 휘둘렀던 검로(劍路) 그대로.

그러자 시야를 가리고 있던 검은 장막이 갈라지고 찬란한 빛이 쏟아졌다.

밝고, 더 따스하고, 묘한 청량감이 느껴지는 새하얀 기운.

자신을 가두고 있던 알에서 빠져나온 아이른 파레이라는 한참이나 그 빛을 느꼈다.

눈은 감은 채로. 이전보다 더욱 맑고 또렷한 정신으로.

그리고 그 여운은 잠에서 깬 지금까지도 이어져 소년을 감상에 젖게 만들었다.

“……벗어날 때가 되긴 했지.”

아이른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미 알고 있었다.

과거의 자신이 집착하던 그 꿈이 친모의 품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익숙하고 편안한 듯하지만, 사실을 자신의 앞날을 가로막고 있던 장애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오늘, 소년은 비로소 그 장애물을 넘어섰다.

창문을 열고 바깥 공기를 크게 들이마신 그가 힘차게 말했다.

“넣어 두자, 이제는.”

잊지는 않을 것이다.

과거의 추억은 오래도록 자신을 힘들게 했지만,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소중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이 먹먹하고, 그립고, 울적할 정도로.

하지만 더 이상 얽매이진 않을 것이다.

절대로.

그렇게 생각한 아이른 파레이라는 방을 나섰다. 그리고 새벽 훈련을 위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어제와 똑같은, 내일과 똑같을 하루를 보내기 위해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나태 공자의 내부에서, 지금까지보다 훨씬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 * *

“내가 대충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겠지.”

여느 때와 같은 살벌한 훈련들을 모두 끝낸 후, 크로노 검술관의 예비 수련생 모두가 강당에 모였다.

중요한 전달 사항이 있다는 아메드 교관의 말 때문이었다.

당연하게도, 아이들은 그가 할 말을 알고 있었다.

검술관에 입관하고 난 뒤로 3개월 하고도 20일.

이제는 슬슬 그에 대한 언급이 나올 시기였다.

“그럼, 중간 평가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할까.”

쥐 죽은 듯한 침묵이 장내에 감돌았다. 예비 수련생들 판에 박힌 듯 긴장한 표정으로 아메드 교관을 바라봤다.

‘중간 평가’는 입관하고 처음 겪었던 체력 테스트, 그리고 말일마다 가볍게 치러지던 월말 테스트와는 중요도가 완전히 달랐다.

결과가 기숙사 생활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 이전 시험들과 다르게, 낮은 성적을 보인 예비 수련생들은 짐을 싸야 했기 때문이다.

‘절대로 탈락하면 안 돼. 내가 여기에 들어오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4개월간 그 지옥 같은 일정을 버텼는데 다시 집으로 돌아가라고? 안 돼! 부모님을 뵙는 건 중간 평가도, 최종 평가도 합격해서 휴가를 얻은 다음이야!’

‘죽어도 안 나가. 절대 못 나가!’

무시무시한 눈빛들이 한데 모여 교관에게로 쏟아졌다.

평균 12~13세의 아이들이라곤 하나, 벌써 몇 개월째 지옥 같은 훈련을 견뎌낸 이들.

그렇기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기세가 형성되어 아메드를 압박했다.

물론 경지에 다다른 그에게 영향을 줄 수는 없었다.

오히려 교관은 기특하다는 듯 입꼬리를 살짝 올리기까지 했다.

‘나쁘지 않아. 확실히 전 기수보다 수준이 높아.’

악에 받쳐 각오를 다지고 있는, 어쩌면 자신의 후배가 될 수도 있는 녀석들을 보고 있자니 주책맞게도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한 마음은 특정 아이들을 볼 때 더욱 강해졌다.

‘……대충 서른 명 정도인가.’

시험이 주는 압박감에도 불구하고 평온한 기색을 유지하고 있는 수련생들.

그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지난 월말 평가에서 높은 성적을 거두었다는 점.

사무치는 더위 속에서도 조금씩이나마 자율 단련을 이어 가고 있다는 점.

자신의 위치를 알고, 그렇기에 중간 평가에서 탈락할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의심하지 않고 있다는 점.

즉, 여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중간 평가는 상대 평가가 아닌 절대 평가니까. 자신의 실력에 믿음이 있다면 걱정할 이유가 없어.’

그게 맞지. 아메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건방진 애송이들은 싫어했지만, 근거 있는 자신감을 보이는 것까지 싫어할 정도로 꼰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여유로운 모습을 마냥 지켜보고 있을 정도로 성인군자인 건 더더욱 아니었다.

피식 웃음을 흘린 그가 짝 하고 손뼉을 쳤다.

그러자 강당 앞으로 마법이 발현되었다.

중간 평가가 치러지는 코스 지도, 그리고 테스트 종목에 대한 정보가 상세히 적혀 있는 직사각형의 화면.

모든 예비 수련생들의 눈이 빠르게 이를 쫓았고, 안 그래도 조용하던 강당은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를 더해 갔다.

그러나 그러한 분위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깨졌다.

아이들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신음이, 나중에는 나지막한 욕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말도 안 돼. 저걸 저 시간 내에 어떻게…….”

“이상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너무한 거 같은데?”

“제한시간이 잘못된 거 아니야? 아니면 반복 횟수가…….”

“잘못된 거 아니다.”

불쑥 튀어나온 아메드 교관의 말에 예비 수련생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울 것 같은 얼굴로 앞을 바라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 갔다.

“보면 알다시피, 특별한 건 없다. 첫 번째 반복 동작은 전부 지난 4개월간 배웠던 것들이고, 달리기와 수영은 말할 것도 없지. 너희들은 그저 정해진 시간 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된다. 등수 따위와는 상관없이 말이야.”

굉장히 쉽게 느껴지는 아메드의 설명.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다.

근력, 근지구력, 민첩성, 협응력 등 신체 전반적인 능력을 검증하는 반복 동작은 그 횟수가 무식할 정도로 많았고, 이어지는 달리기 코스 역시 일반 코스가 아닌 높낮이가 있는, 그것도 사람의 진을 빼놓는 모래가 깔린 코스였다.

마지막의 수영 코스가 그나마 평범하긴 했지만, 이 역시 거리가 만만하지 않았다.

그 방증으로, 지금껏 여유를 부리고 있던 서른 명가량의 상위권 수련생들조차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가고 있었다.

이를 본 아메드가 씨익 웃었다.

역시 이 맛이야.

속으로 중얼거린 그가 말을 이었다.

“최종 평가는 정확히 열흘 후, 월말 오전 9시에 시작한다. 절대 평가이니만큼 부디 많은 수련생이 합격했으면 좋겠다.”

“…….”

“아, 참고로 5등 안에 드는 수련생들은 관주님께서 직접 상을 내릴 예정이다. 이걸로 안정권에 드는 수련생들 역시 동기부여가 될 수 있겠지.”

나름 희소식이라고 말한 거지만, 아이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애초에 통과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품이니, 검술관주 참관이니 하는 얘기가 귀에 들어올 리 없었던 것.

물론 아메드 역시 예상한 바였다.

다시 한번 웃음 지은 그가 말했다.

“앞으로 열흘간은 수업이 없다. 식사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자유롭게 보내도록. 휴식을 해도 좋고, 단련을 해도 좋고…… 무운을 빈다.”

이 발언을 끝으로 강당을 나서는 아메드 교관과 조교들.

아이들은 그 뒷모습을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았다. 조용히.

물론 잠깐이었다.

뒤늦게 현실을 파악한 아이들이 절망한 표정으로 울부짖었다.

“아오!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그러니까! 최종적으로 정식 입관하는 사람이 20명도 채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중간 평가부터 이렇게 빡빡하게…….”

“이대로라면 시간 내에 들어오는 게 20명은 될까?”

“많이 잡아도 30명이 안 될 것 같은데…… 하아.”

“이거 따져야 하는 거 아니야?”

“씨…… 검 한번 못 배워 보고 돌아갈 수는 없는데……!”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분위기.

어쩔 수 없었다. 많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이 검에 인생을 바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기에.

그렇기에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거대한 벽이 다가오자 진한 좌절감에 몸서리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난리 통에서도 여전히 침착한 이는 있었다.

“로이드 님! 괜찮겠죠?”

“당연히 괜찮지! 로이드 님이 너랑 같냐? 합격은 물론이고 관주님한테 상 받는 것도 확정이야!”

“아니, 그거야 네 말대로 당연하고, 우리 걱정하는 건데…….”

“걱정하지 마. 너희도 충분히 할 수 있어.”

“저, 정말요?”

“그래. 아슬아슬하기야 하겠지만 죽을힘을 다해서 움직이면 무조건 들어올 수 있어. 설마 나 못 믿어?”

아닙니다! 믿습니다! 따위의 우렁찬 목소리가 뒤이어 터져 나왔다.

아랫것들의 다짐에 대충 반응한 브랫 로이드가 몇몇 아이들을 훑어봤다.

서른 명의 상위권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기량을 가진 녀석들.

일리아 린제이, 주디스, 그 외의 몇…….

아무리 보수적으로 생각해도 위험요소는 없었다.

자신은 무조건 5등 안에 든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마지막으로 한 소년을 바라보았다.

‘……이상하단 말이지.’

자신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끈덕지게 단련을 이어 가는 녀석.

그런데도 여전히 중위권에서 올라오지 못하고 있는 녀석, 아이른 파레이라.

놈은 분명 이번에 떨어질 것이다.

첫인상과는 다르게 나름 귀족의 긍지가 있는 자였지만, 그것만으로 극복할 수 없는 수련 기간의 격차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왜 자꾸 저놈에게 눈길이 가는 거지?’

이해할 수 없었다.

평소에도 알 수 없는 놈이었지만, 오늘은 더욱 이상했다.

분명 똑같은 외관에, 똑같이 무표정한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뭔가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오늘의 아이른은, 라이벌로 점찍은 주디스보다도 더욱 그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고 있었다.

‘나만 느낀 것도 아니야.’

일리아 린제이를 제외한 모두.

최상위권인 주디스와 상위권인 자신의 패밀리, 그리고 중위권과 하위권에 위치한 대부분의 수련생들이 아이른 파레이라를 힐끔힐끔 곁눈질하고 있었다.

브랫 로이드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억지로 시선을 돌린 그가 추종자들을 향해 말했다.

“……일단 코스부터 천천히 돌아보자. 파악하는 의미에서.”

“네!”

“네! 로이드 님!”

“알겠습니다!”

로이드 패밀리는 그렇게 떠나갔고, 다른 아이들 역시 삼삼오오 무리를 이뤄 강당을 벗어났다.

일리아 린제이와 주디스처럼 개별 행동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이른 파레이라는 후자였다.

검 목걸이를 쓰다듬던 그는 눈을 감은 채 생각에 빠져 있다가, 뒤늦게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나태 공자는 남은 열흘간 자신의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합격 가능성과 상관없이 말이다.

그리고 일주일 후.

“흠, 역시 전해 듣는 것보다는 직접 보는 게 훨씬 낫지.”

예비 수련생들의 운명이 결정될 중간 평가가 시작되기 사흘 전.

온 대륙에 명성을 떨치는 크로노 검술관의 정점이, 지부에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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