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크로노의 낙제생 (2)
사실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조합이긴 했다.
15살이라는, 평균보다 훨씬 많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형편없는 모습을 보인 아이른 파레이라였다.
한마디로 검술관 최악의 낙제생.
중간 평가까지 가기도 전에 나가떨어질 것처럼 보이는 그에게 말을 거는 수련생은 지금껏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그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던, 심지어 차석에게조차 관심을 보이지 않던 린제이 가의 검술 천재가 말을 걸다니.
‘뭐지? 둘이 혹시 아는 사이였나?’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접점이 없는데…….’
‘뭘까? 도대체.’
묘한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아이들은 하던 것을 멈춘 채 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봤다.
주디스와 브랫 로이드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강렬한 눈빛을 뿜어내는 둘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원하는 바를 알아낼 수 없었다.
둘의 대화 소리가 무척이나 작았기 때문이었다.
“…….”
“…….”
곁에 있는 것이 아닌 이상 들을 수 없을 정도의 소곤거림이 이어졌다.
주로 수석이 말하고, 낙제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반문하는 듯 입을 열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말은 일리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결국 누구도 둘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엿들을 수 없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난 뒤, 은발 소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단련을 이어 갔다. 다른 수련생들로 하여금 엄청난 박탈감을 느끼게 하는 혹독한 단련을.
“흐아압!”
아이른 파레이라 역시 자신의 단련을 이어 갔다.
일리아와는 비교하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가벼운 중량.
하지만 표정만큼은 누구보다 진지했다. 순식간에 자신의 운동에 몰입한 소년이 힘찬 기합 소리를 터뜨렸다.
허나 집중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일리아 린제이에 이어 또 다른 수련생이 그를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야.”
“…….”
“무시해? 사람이 불렀으면 대답을 해야 할 거 아니야?”
평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체력 테스트 2위라는 기염을 토한 붉은 머리 소녀, 주디스.
그녀의 틱틱대는 말투에 아이른 파레이라가 뒤늦게 대답했다.
“그래, 미안. 왜? 나한테 볼일이라도…….”
“너한텐 볼일 없고.”
주디스가 아이른의 말을 탁 잘랐다.
마치 너 따위 녀석에게 관심이 있겠냐는 듯한 말투였다.
소녀가 못마땅한 표정을 유지한 채 아이른의 곁에 바짝 붙었다.
그리고 귓가에 대고 조용히 물었다.
“방금, 저 애랑 무슨 얘기 했어?”
“…….”
“도대체 무슨 비밀 얘기길래, 그렇게 조용히 얘기한 거야? 혹시 원래 알던 사이? 아니, 그냥 무슨 얘기 했는지 다 말해 줘. 처음부터 끝까지.”
“…….”
“어서.”
주디스는 막무가내였다. 마치 독불장군처럼. 아이른은 당황했다.
하지만 그 감정이 길지는 않았다.
눈앞의 소녀가 까칠한 성격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고, 비슷한 타입을 겪어 본 적도 있다. 여동생 키릴 말이다.
게다가 어려운 부탁을 해 온 것도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인 아이른이 입을 열었다.
“별거 아니야. 그냥…….”
“쉿. 작은 소리로 말해. 나한테만 들리게.”
“……진짜 별거 아닌데. 그냥 단련 기구 쓸 때의 자세 같은, 그런 것들을 알려 주고 갔어.”
“나보고 그걸 믿으라고?”
주디스의 말투가 사나워졌다. 감정이 격해진 게 입김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귀가 뜨거웠다.
자신의 말을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아이른으로서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소년이 담담한 표정으로 재차 말했다.
“어. 단련할 때 내 자세가 좋지 않아 보였는지, 이것저것 알려 주더라고. 실제로 처음 사용하는 기구들이기도 해서 도움도 많이 됐…….”
“정말로? 정말 그게 다야?”
“진짜야. 거짓말 아니야.”
귓속말을 멈춘 주디스가 뒤로 물러나 아이른을 쳐다봤다.
귀여운 얼굴.
하지만 표정은 죄인의 자백을 받아 내는 고문관처럼 무서웠다.
물론 걸릴 게 없었던 아이른은 당당했고, 주디스는 쳇 하고 불쾌한 티를 내며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아이른이 한숨을 쉬었다.
“후우.”
주디스의 행동도 이해는 되었다.
구름 위의 사람처럼 압도적인 성적을 낸, 그러면서 누구와도 교류할 생각이 없어 보이던 수석이 갑자기 자신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경쟁심에 불타는 차석의 입장에서는 궁금할 만도 할 것이다.
하지만 아이른 역시 일리아 린제이의 생각을 알 수 없었고, 그렇기에 해 줄 수 있는 말도 없었다.
‘왜 굳이 나한테 도움을 준 거지? 연민? 동정?’
잠시 생각하던 아이른은 고개를 저었다.
고민해 봤자 답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었다. 사실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것보단 이 시간을 소중하게 사용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다.
남들보다 많은 세월을 낭비한 만큼, 자신은 훨씬 더 많은 노력을 쏟아야만 했다.
다시금 마음을 다잡은 아이른이 단련을 이어 가려 했다.
하지만 불청객은 또 있었다.
어느새 자신의 앞까지 다가온 체력 테스트 3위, 브랫 로이드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왜.”
“궁금한 게 있어서 물어보려고 하는데…… 일리아 린제이 양과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나한테 말해 줄 수 있나?”
“…….”
“아, 가능하면 주디스랑 한 말도.”
자신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한 채로, 차석과 똑같은 질문을 하는 브랫 로이드를 보며 아이른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 * *
예비 수련생들이 크로노 검술관에 입관한 지 열흘이 지났다.
하루 동안의 일과는 여전히 똑같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육체 단련, 그리고 잠깐의 교양 수업. 아이들의 표정이 하루하루 썩어 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젠장, 이런 거일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체력 중요한 거야 당연히 알지. 하지만 4달이나 검을 못 잡게 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그러니까.”
물론 아무런 낙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힘들고 괴로운 환경이지만, 그렇기에 서로서로 더욱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각자의 이름조차 모른 채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던 모습은 한참 전에 사라졌다.
마음이 맞는 수련생들끼리 식사를 함께하고, 자유 시간에 수다를 떠는 모습은 이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되었다.
허나 무리를 이루지 않는 사람도, 흔치 않지만 존재했다.
“후읍, 후읍, 흡!”
달리기 코스를 뛰는 주디스의 전신에서 땀이 흘러나왔다.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붉은 머리칼, 잔뜩 찡그려진 얼굴이 그녀가 얼마나 힘든 상태인지 말해 줬다.
그런데도 그녀는 거의 쉬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 휴식을 핑계로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떠는 것과 반대로 고독하게, 홀로 수련을 이어 나갔다.
모랫바닥 코스 근처에서 쉬고 있던 브랫 로이드가 멈춰서며 중얼거렸다.
“독한 새끼.”
정말이지 대단한 녀석이다.
자신 또한 정신력으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그것은 고위 귀족으로서의 자부심이었다.
아랫것들을 품기 위해 태어난 그는 혈통의 무게를 알았고, 그렇기에 어릴 때부터 누구보다 충실한 삶을 보내 왔다.
하지만 주디스 앞에서는 살짝 빛이 바랬다.
‘내가, 평민에게 밀리다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드높은 프라이드는 냉철한 자기 객관화에서부터 시작된다.
자신을 속이는 순간부터 자부심이니, 자존심이니 하는 것들 전부가 진창에 처박히게 되는 것이다.
“젠장.”
“왜 그러십니까, 로이드 님?”
“혹시 기분 안 좋은 일이라도…….”
“혹시 주디스, 그 천한 녀석이 시비라도 걸었습니까?”
그가 나직이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수련생들이 하나둘씩 비위를 맞추는 말을 건넸다.
브랫이 그들을 쳐다봤다.
신분의 고하를 인정하지 않는 크로노 검술관에서 스스로 자신의 밑으로 들어온 모자란 놈들. 하지만 영 못 쓸 정도는 아니었다.
제대로 된 버팀목만 있다면 충분히 제 몫은 할 수 있을 녀석들이니까.
그렇기에.
‘나만 바라보고 의지하는 놈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그렇게 생각한 고위 귀족 가문의 장자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별거 아니다. 이제 그만 일어나자.”
“헛. 벌써…….”
“못하겠으면 천천히 따라와라. 하지만 할 수 있으면 죽을힘을 다해 쫓아와.”
절대로 지지 않겠다. 로이드 가의 장자로서 최선을 다해 널 꺾어 주마.
브랫 로이드는 강하게 다짐하며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 코스 위를 힘겹게 달려나갔다.
그때였다. 저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체 세우고.”
“커헉, 허억!”
“힘들어도 입으로 숨 쉬지 말고, 코로 쉬어. 발목 돌아가지 않게 집중하고.”
“헉, 허억, 크허억!”
몹시 아름다우면서도 무미건조한 소녀의 음성, 그리고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헐떡거리는 기분 나쁜 소리.
브랫 로이드는 그것들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고 있었다.
‘일리아 린제이, 아이른 파레이라…….’
아단 왕국 최고의 천재와 헤일 왕국 최악의 게으름뱅이라는 기괴한 콤비.
사실 콤비라고까지 표현하는 것은 무리가 있긴 했다.
린제이 가의 재녀가 나태 공자를 케어해 주는 것은 아주 잠깐일 뿐, 대부분의 시간은 주디스처럼 자신의 수련에만 힘썼으니까.
하지만 그 잠깐이라도 둘이 엮이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 브랫의 뒤를 따라오던 모든 수련생들이 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신경 쓸 필요 없지.’
그러나 브랫 로이드는 이에 별 관심이 없었다.
관계가 궁금하긴 하지만, 사실 저 두 명은 자신과 별 상관이 없는 녀석들이다.
일단 한 명은 자신이 넘볼 수 없는 재능을 가졌다.
사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린제이 가의 아성에 겁먹을 필요따윈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저 귀하신 몸은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아이른 파레이라의 경우는…….
‘……완벽하게 반대의 이유다.’
평생 노력이라곤 해 본 적 없는, 뒷배를 써서 들어왔을 것이 분명한 검술관의 낙제생.
그런 그가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한들 자신에게 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발버둥조차 오래 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이야 수련생 녀석들의 조롱 때문에, 일리아 린제이의 격려 덕분에 열심히 하고 있지만…….
‘그 자극에 익숙해지는 순간 다시 돌아가겠지. 예전의 너로.’
나태 공자가 ‘나태 공자’로 불리는 건 다 이유가 있는 법.
근거 없는 소문은 없다.
생각을 마친 브랫 로이드가 둘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다시 모랫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목표는 차석이다.’
“허억, 허억!”
“같이 가요, 로이드 님!”
힘든 얼굴로, 그러나 나름 진지한 표정으로 브랫 로이드의 뒤를 따르는 친위대들.
상위권과 비교하면 부족했지만, 그들 역시 검술관 밖의 동년배 아이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노력을 쏟아왔다.
혹은 그에 준하는 재능을 갖췄거나.
그렇기에 브랫과 비슷한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아이른 파레이라 따위는 고려할 가치조차 없다고.
심지어 그들보다 한참 밑인 하위권의 수련생들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른 파레이라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 * *
시간이 흘러갔다.
10일, 그리고 10일. 예비 수련생들이 입관하고 한 달.
수련생들은 슬슬 검술관의 일과에 적응해 가기 시작했다.
크로노의 평가는 절대평가. 즉 합격을 위해 경쟁할 필요가 없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모두가 사이좋게 통과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적인 얘기도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나태 공자는 빼고.
아이른 파레이라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 * *
또다시 시간이 흘러갔다.
2개월째. 계절이 바뀌어 슬슬 해가 길어질 무렵.
이때쯤부터 몇몇 수련생들이 자율 훈련을 포기했다. 하루 동안 해야 할 일과가 빡빡해졌기 때문이다.
시간이 늘어난 게 아니었다. 훈련 난도가 말도 안 되게 높아졌다.
상위권을 제외한 아이들 대부분이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체력과 부상은 문제가 아니었다.
크로노 검술관의 회복실은 무척이나 유능했고, 룬 타르할 교관은 어떻게든 수련생들을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랬다. 정신력만 충분하다면, 아이들은 여전히 저녁 시간 후의 자율 훈련에 충실할 수 있었다.
단지 그러지 못했을 뿐이다.
물론 아이른 파레이라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나갔다.
* * *
또, 또다시 시간이 흘러갔다.
입관 3개월째. 찌는 듯한 더위에 수련생은 물론이고 조교들도 지쳐 갈 때.
이제는 대다수의 수련생이 자율 훈련을 포기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점점 더 고되지는 일과를 소화하고 나면 손 하나 까딱하기 싫었다.
교관의 엄포가 아니었다면 저녁조차 거르고 잠에 빠지는 이들이 배는 늘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일리아 린제이, 주디스, 브랫 로이드로 이뤄진 최상위권 3인방은 여전히 자율 훈련에 성실히 임했다. 죽어라 했다.
훌륭한 재능 덕분에 남들보다 조금 대충해도 됐지만, 셋 중 누구도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브랫 로이드의 친위대 몇 명, 그 밖의 성실한 몇 명. 도합 열 명의 아이들은 거르지 않고 훈련을 이어 갔다.
그리고 아이른 파레이라는, 당연하게도, 이 열 명의 수련생들에 포함됐다.
여전히, 계속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보였다.
그때부터였다.
크로노 검술관의 예비 수련생들은, 더 이상 나태 공자를 나태 공자라 부를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