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크로노의 낙제생 (1)
1년간 이어질 크로노 검술관의 대장정.
그것이 시작되고 나흘의 시간이 지났다.
첫날과 같은 인간 한계를 시도하는, 최후의 1인만이 남을 때까지 치러지는 지옥 행진은 더 이상 없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커리큘럼 역시 고되긴 매한가지였다.
초반 4개월간은 검을 잡는 것이 금지된 채 기초 체력 단련 만을 해야 하기에 더욱 그러했다.
‘기본도 없는 상태로 검을 잡아 봤자 문제가 생길 뿐이지. 검술 교육은 중간 평가가 끝난 이후부터다.’
교관의 말을 들은 예비 수련생들이 한숨을 푹푹 쉬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발언 이후로, 아이들은 군인과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기상! 일어나라!”
“으으…….”
“벌써?”
“하아…….”
오전 5시 기상.
6시 집합 후 2시간 동안 훈련.
9시 반까지 식사 및 개인 정비를 하고 또다시 훈련.
그리고 이어지는 오후 훈련과 하루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정신 수련 및 교양 수업.
이것이 크로노 검술관에서 하루 동안 진행하는 일과였다.
‘후, 이것만 들으면 오늘 하루도 끝인가.’
‘질린다, 질려. 이 짓을 1년 동안 해야 한다니…….’
‘피곤하다. 잠깐 눈이라도 붙일까.’
적지 않은 아이들, 특히 뒷자리의 아이들이 꾸벅꾸벅 잠을 자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성인이라도 소화하기 힘든 훈련을 마친 뒤에 하는 것이 지겨운 이론 강의라니.
특히 ‘강해지고 싶다’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는 아이들에게 이 시간은 수면 시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이를 가만히 두고 볼 교관이 아니었다.
“어이, 거기! 졸지 마라!”
“지금이 휴식 시간인 줄 알아? 크로노 검술관은 무기만 잘 휘두르는 바보를 키워 내는 곳이 아니다!”
“검사로서의 덕을 갖추기 위해서는 육체가 아닌 머리의 단련도 필요한 법! 교양 수업을 등한시하면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이다!”
겸양, 명예, 약자 보호 따위의 말을 늘어놓으며 교관이 호통을 쳤다.
그냥 하는 경고가 아니었다.
크로노 검술관은 예부터 기사 이상으로 수련생들의 올바른 가치관 함양에 힘을 쓰는 단체였다.
실제로 졸업생들은 대륙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수많은 위업을 쌓았고, 그것이 현재 검술관의 위명을 더욱 드높이고 있는 이유기도 했다.
예비 수련생들 또한 그 사실을 대부분 알고 있었고, 모르는 이들도 교관의 진지한 말에 분위기를 파악했다.
결국, 아이들은 저녁 식사 시간이 되기 전까지 몸과 마음의 긴장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후, 그래도 밥은 맛있네.”
“맞아. 밥까지 별로였으면 진짜…….”
“하아. 이제 좀 쉴 수 있겠구나.”
저녁 7시.
이제는 정말로 모든 일정이 끝났다.
이때부터는 호랑이 같은 교관도, 눈을 부라리고 있는 조교들도 아무런 터치를 하지 않는다.
검술관 밖으로 나가는 것만 아니라면 무엇을 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
물론 엄한 사고를 칠 녀석들은 없었다.
그런 짓을 할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누워 있고, 쉬고 싶은 마음이었으니까.
그렇게 아이들 대부분이 각자의 숙소로 돌아가려는 때였다.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식당 안을 가득 채웠다.
“아! 깜빡하고 하지 않은 말이 있으니, 지금 전파하겠습니다.”
“네!”
“모든 연무장과 실내 체력 단련실, 그 밖의 훈련을 위한 장소는 항시 개방이니 자율 훈련을 하고 싶은 예비 수련생분들은 어느 때든 이용하시면 됩니다.”
“…….”
인자한 표정으로 말을 마친 뒤 식당을 나서는 카라카 교관.
아이들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하나둘씩 욕설을 터뜨렸다.
개중에는 아이의 입에서 나온 거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심한 것들도 있었다.
물론 아닌 수련생도 있었다.
대부분이 달리기 평가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아이들로, 그들은 카라카의 말이 없더라도 따로 야간 훈련을 이어 갈 생각이었다.
아이른 파레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식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선 뒤, 천천히 소화를 시킨 그가 체력 단련실로 걸음을 옮겼다.
좋고 싫음 따위의 감정이 하나도 담겨 있지 않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 * *
영지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하체를 단련하는 낯선 기구.
그 앞에 선 아이른 파레이라가 자신의 체력 테스트 등수를 떠올렸다.
‘최하위.’
그랬다.
죽을힘을 다해, 말 그대로 자신의 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노력했으나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그저 아주 조금의 시간을 더 버텼을 뿐.
어찌 보면 발악이라 봐도 좋았다.
그러나 소년은 실망하지 않았다. 좌절하지도 않았다.
‘지금의 등수가 미래의 결과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교관의 말에 위안을 얻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원래 이럴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려고 온 것이 아니다.’
아이른 파레이라는 검사를 꿈꾸지 않는다.
대단한 인물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이 길을 걸어온 누군가를 꺾을 생각 따윈 전혀 없다.
그저 가만히만 있었던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간다.
그것이 그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였다.
‘나아가자.’
생각을 마친 아이른이 기구에 올라타 자세를 잡았다.
처음 사용하는 거라 어색했지만, 남들이 하는 것을 봤기에 사용 방법은 알고 있었다.
심호흡을 한 그가 다리에 힘을 주었다. 종일 이어진 훈련으로 인해 몸이 고됐지만, 정신만은 금속처럼 단단한 상태였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눈엔 그런 소년의 내면이 보이지 않았다.
단련실의 예비 수련생 중 하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야, 나태 공자께서 자율 훈련까지 하네?”
“…….”
명백한 비아냥.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말을 들은 다른 아이들도 입을 씰룩였다. 그리고 서로의 눈치를 보더니, 못 참겠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푸흐흐, 그러게 말이야.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하면 뭐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나?”
“어이가 없네. 그럴 거면 진작 열심히 하지, 왜 15살이나 먹을 때까지 아무것도 안 했대?”
“체력 테스트할 때 보니까 가관이던데. 혼자 왕국 횡단이라도 한 것처럼 침 질질 흘리면서 뛰어 놓고는 꼴찌나 하고.”
“도대체 무슨 염치로 크로노 검술관에 들어온 걸까.”
은근한 조롱이 아니었다. 노골적인 비난이었다. 단순히 체력 테스트에서 꼴찌를 해서라고 하기에는 정도가 심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테스트 최하위를 한 인물이 딱 보기에도 별다른 노력을 안 한 몸뚱이를 가지고 있으며.
그런 주제에 수련생들 중 가장 많은 나이를 먹었고.
심지어 헤일 왕국에선 ‘나태 공자’라는 멸칭까지 가지고 있는, 크로노 검술관에 들어온 것조차 이해하기 힘들 정도의 인물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앞다투어 아픈 말을 쏟아냈다.
“후읍!”
아이른은 당황하지 않았다.
영지에서도 숱하게 겪어 왔던 일이니까.
물론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었다. 육체의 타격엔 굳은살이 생기지만, 마음의 상처는 멍이 들 뿐 나아지지 않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소년에게는 도피할 곳이 있었다. 바로 몸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잠시 검 목걸이를 손에 쥔 아이른이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주변의 소리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안식을 찾은 그가 두 다리로 무거운 기구를 밀어내며 하체 단련을 시작했다.
꿈속 사내가 검을 휘두르듯.
자신이 지난 한 달간 검을 휘둘러 왔듯, 단단하게.
“쳇. 들리면서 안 들리는 척하기는.”
“그냥 신경 끄자. 어차피 금방 떨어질 놈인데.”
아무런 반응이 없자 아이들은 이내 아이른으로부터 신경을 껐다.
그리고 하기 싫은 표정으로 각자의 단련에 집중하였다.
빡빡하다고는 하나, 첫날의 테스트처럼 지옥 같은 하루는 아니었기에 일반적인 수련생들은 모두 여력이 남아 있었다.
단지 정신적으로 지쳤기에 마지못해 나온 것일 뿐.
그렇게 단련실은 뜨거운 열기 속에 고요를 되찾았다.
하지만 잠시 후.
워밍업을 마치고 본격적인 단련을 시작하는 한 수련생에 의해, 침묵이 깨졌다.
“와…….”
“…….”
은발의 소녀는 지극히 기본적인 동작을 소화하고 있었다.
검술의 기본이 되는 등 근육. 그리고 이를 단련하기 위한 바벨 중량 운동. 전혀 특별할 것 없는 모습이었다.
허나 무게가 중요했다.
다른 예비 수련생들의 두 배, 아니 세 배가 넘어가는 무게는, 웬만한 베테랑 용병조차 땀을 뺄 정도로 육중한 것이었다.
‘어떻게 저게 가능하지?’
‘나보다 한 살 어리다고 알고 있는데…….’
‘아무리 린제이 가의 천재라지만 저게 말이 돼?’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몸이야? 다른 종족인가?’
억눌린 신음.
그리고 그보다 더욱 많은 수의 시선들.
그 눈빛 속에 들어있는 감정은 아이른 때의 것과는 전혀 달랐다.
경악, 경탄, 경외.
오히려 열등감은 담겨 있지 않았다.
대륙에서 손꼽는 천재와 비교되기에, 자신이라는 존재가 너무나도 초라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일리아 린제이를 ‘경쟁’의 상대로 보지 않았다. 자신보다 한 차원 위에 있는 사람으로 받아들였다.
아이른 파레이라를 경쟁 상대로 보지 않는 것과 정확히 반대의 이유.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쳇.”
“……젠장.”
체력 테스트 전체 2위를 달성한 붉은 머리 소녀 주디스.
그리고 그녀의 뒤를 이어 3위에 오른 고위 귀족 브랫 로이드.
이들은 다른 수련생들과 달랐다.
분노, 질시, 열등감, 투쟁심, 그리고 그 외의 뜨겁고 사나운 감정들.
그것들이 한데 뭉쳐 전신을 뜨겁게 만들었다.
둘은 은발 소녀의 빛나는 존재감을 집어삼켜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듯, 더욱 뜨거운 불꽃이 되어 눈을 치켜떴다.
그러나 일리아 린제이의 시선은 둘을 향하지 않았다.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자신을 둘러싼 관심을 무덤덤하게 넘기며 제 할 일에만 집중했다.
이에 수련생들도 입맛을 다시며 각자의 일로 돌아갔다.
주디스와 브랫 로이드 역시 인상을 찡그릴 뿐, 일리아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저기.”
“……?”
“잠시 괜찮으면, 얘기 좀 해도 될까?”
“……응?”
루틴을 마친 은발 소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화 상대는 주변이 어떻게 돌아가든 신경 쓰지 않고 하체 단련에만 집중하던 소년, 아이른 파레이라였다.
“…….”
“……!”
수석과 꼴찌.
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의 만남에, 최상위권을 포함한 모든 수련생들의 이목이 순식간에 집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