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8화 (8/388)

◈ 3. 크로노 검술관 (2)

시작은 앞에서부터였다.

갑작스러운 교관의 출현에 깜짝 놀란 아이들이 표정을 굳혔다.

자신의 주변을 감싼 공기가 무거워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게…….”

“으음!”

중간, 그리고 뒤에 있는 이들도 이를 피해 갈 순 없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자 강당 전체가 아메드 교관이 내뿜은 기세로 가득 차 버렸다.

아이들은 난생처음 느끼는 압박감에 답답함을 감추지 못했다.

“끄윽.”

“으…… 으윽…….”

수련생들 대부분이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최소 3년 이상 검의 길을 걸어온 이들. 그러나 진짜 강자의 기운을 이겨 내기엔 육체도, 정신도 부족했다.

그들은 채 10초도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후우, 후, 후우.”

“하아아…….”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재능 있다’라는 수준을 뛰어넘는, 소위 ‘기재’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특별함을 가진 이들.

그런 아이들은 아메드 교관의 기세를 감당해 냈다.

누군가는 타고난 성격을 바탕으로.

누군가는 정신력을 바탕으로, 또 다른 누군가는 육신의 우월함을 바탕으로.

물론 아이른에게는 전부 해당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

소년은 무너지지 않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지도 않았고, 비틀거리지도 않았다. 그저 굳은 표정으로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의 볼썽사나운 모습을 생각하면 분명 고무될 만한 일.

하지만 아이른은 우쭐하지 않았다.

그저 목에 걸려 있는 검 모양 장신구를 꼭 쥐고, 나뭇결의 촉감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고마워 키릴.’

생에 처음으로 무언가에 도전하는 오빠를 위해 동생이 애정을 담아 만든 물건.

사실 굉장한 효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 아메드 교관의 기세를 이겨 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검’을 쥐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검을 들고 있을 때의 ‘그 사내’는, 어떠한 외부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제 일을 해나갔다.

‘그 사내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지만…….’

후우, 아이른이 옅은 숨을 토해냈다.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꿈속 사내를 지켜봤다.

덕분에 검에 의지하는 동안만큼은, 그가 보였던 강철같은 의지를 조금이나마 빌려올 수 있었다.

그래, 그냥 그런 거다.

자신이 잘나서 교관의 기세를 버티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나태 공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노인네가 괜히 추천한 건 아니네.’

강당의 예비 수련생들을 지켜보던 교관 아메드, 그가 아이른 파레이라 쪽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저 빈약한 신체로 어떻게 서 있는지는 아직 몰랐다.

허나 이유가 중요한 건 아니었다. 버티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이유 따위야 앞으로 천천히 알아보면 된다.

살짝 입꼬리를 올린 그가 몇몇 군데 더 시선을 보냈다.

화로에서 꺼낸 듯 강렬한 붉은빛 머리칼을 가진 소녀.

자신 앞에서 잔뜩 위세를 떨었던 로이드 가의 아들내미.

그리고 그 어떤 아이들보다도 평온한 얼굴로, 자신을 또렷이 응시하고 있는 은발의 아이.

‘린제이 검가(劍家)의 두 번째 천재…… 오빠보다 더한 재능을 타고났다더니. 명불허전이군.’

나쁘지 않아. 썩 괜찮아.

혼잣말을 중얼거린 아메드가 자신의 기운을 갈무리했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압박감이 사라졌다. 주저앉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아이들이 거친 숨을 토해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자신의 할 말을 이어 나갔다.

“앞서 말했듯이, 그대들은 아직 수련생이 아니다. 예비 수련생이지.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본 검술관의 훈련 과정은 상당히 힘들고, 두 번의 평가는 그보다 더욱 혹독하다.”

“…….”

“…….”

“그 모든 것을 이겨 내고 1년 후에도 무사히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다면, 그때는 앞에 붙은 ‘예비’라는 말을 떼 주겠다. 물론 정식 수련생이 되면 그보다 더한 지옥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말이야.”

흐흐흐, 하고 웃는 아메드 교관을 보며 예비 수련생들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입관식도 하지 않았는데 엄포부터 늘어놓다니.

이곳에 모인 이들이 평균 12~13세 나이임을 생각하면 울음이 터져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허나 그런 모습을 보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의 눈이 빛났다.

기세 때문에 여전히 다리가 후들거리고, 전신에 땀이 비 오듯 쏟아지더라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것에 꺾일 정도로 나약한 이들은 애초에 크로노 검술관에 발을 들일 수 없다.

물론 아메드 교관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빙긋 웃은 그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입관식 같은 거추장스러운 예식은 없다. 일단 숙소 배정부터 하고, 자잘하게 알아 둬야 할 것들도 따로 통지하지. 알겠나?”

“알겠습니다!”

“앞으로 대답은 짧고 간결하게 ‘네!’로 통일한다. 알겠나?”

“네!”

“좋아. 조교들의 지시에 따라 행동해라.”

그 말을 끝으로 아메드 교관은 강당을 떠났다. 그 즉시 조교들의 건조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예비 수련생들은 들어라. 각자에게 배부된 예비 번호가 있을 것이다. 1번부터 100번까지, 이쪽으로.”

“101번부터 200번까지는 이쪽으로 와라!”

“201번부터 300번은 나를 따라와라!”

“거기! 빨리빨리 움직여!”

위압적인 분위기에 휩쓸린 아이들이 정신없이 움직였다. 아이른 파레이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평생을 햇볕 아래 꽃처럼 자라 왔던 그는 검술관의 거친 말투에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실수는 없었다.

조교들의 지시를 불만 없이 따라간 아이른은 무사히 식사를 마치고 몸을 씻은 뒤, 배정된 방의 침대에 몸을 눕힐 수 있었다. 무려 독방이었다.

하지만 편하지 않았다.

무섭고 두려웠다. 약간이지만 후회도 되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든 소년이 낯선 촉감의 이불을 머리까지 뒤덮었다.

동생이 선물해 준 검 목걸이를 쥔 채로, 나태 공자는 잠에 빠져들었다.

* * *

크로노 검술관의 둘째 날.

400명이 조금 넘는 예비 수련생들은 오전 10시에 대(大) 연무장에 집합했다.

빡빡한 스케줄은 아니었다. 여독을 풀도록 배려를 해 준 걸까.

충분한 수면 시간과 질 좋은 아침 식사, 그리고 약간의 휴식 시간이 보장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로이드 가의 장자, 브랫 로이드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평소보다 깔끔하게 머리가 손질되었어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가 불편한 표정으로 저 먼 곳에 조용히 서 있는 은발의 소녀를 쳐다봤다.

‘일리아 린제이…… 저 자식은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린제이 백작 가문.

아단 왕국 최고이자, 대륙에서도 손에 꼽히는 검의 명가(名家). 크로노 검술관에 전혀 뒤처지지 않는 명성을 가지고 있는 곳.

영주인 조슈아 린제이는 검사들 중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으며, 그의 첫째 아들인 칼 린제이는 젊은 세대 중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천재로 대륙에 위명을 떨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일리아 린제이는 그런 자신의 오빠보다도 더욱 커다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았다.

한마디로 이곳에 있을 이유가 전혀 없는 자라는 뜻이다.

‘젠장, 이래서야 수석 가능성은 완전히 없어지는 거잖아!’

브랫 로이드가 이를 부드득 갈며 생각했다.

자만이 아니었다.

자신은 여섯 살 때부터 검을 수련했다. 그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명사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남들보다 훨씬 일찍, 빠르게 이 길을 달려왔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확신했다.

정말로 재수 없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자신은 자신의 욕심에 걸맞는 빛나는 결과를 달성해 가문의 명성을 드높일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젠장!”

욕설을 내뱉은 브랫이 바닥의 돌멩이를 걷어찼다.

누군가를 노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돌멩이는 먼 거리를 날아가 우연히 한 소년의 발치에 부딪혔다.

평범한 예비 수련생들보다 한 뼘 정도 키가 큰 금발의 소년.

그의 얼굴을 확인한 브랫 로이드가 들릴 정도로 크게 혀를 찼다.

“쯧, 저 자식은 나이 처먹고 왜…….”

아이른이라고 했던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하여튼 저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일리아 린제이와는 정반대의 이유 때문이었다.

어중이떠중이 녀석이 크로노 검술관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탓이다.

딱 봐도 남들보다 많아 보이는 나이.

그런데도 불구하고 별달리 단련된 것 같지 않은 육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뻔했다.

‘뒷배가 있겠지. 아니면 뇌물을 잔뜩 먹였거나.’

브랫 로이드는 혈통과 가문을 중시하는, 뼛속까지 오만한 귀족이다.

허나 그에 어울리는 재능과 의지도 갖추고 있는 소년이었다.

그런 그가 보기에, 아무런 노력도 없이 이 자리에 서 있는 아이른 파레이라는 귀족의 격을 낮추는 놈팡이에 불과했다.

‘평민보다 못한 놈.’

브랫이 옆을 쳐다봤다.

물감으로 칠한 듯 붉은 머리칼의 소녀가 보였다.

앳되고 귀여운 얼굴과 달리 꽤나 단련된 듯한 몸, 그리고 굳은살이 단단하게 박여 있는 손바닥도.

‘이름이 뭐였지…… 주디스였나? 아무튼.’

그래, 차라리 이런 녀석이 낫다.

존경받을 자격이 없는 무능한 귀족보다야, 최선을 다해 발버둥 쳐 온 것으로 보이는 이 평민 소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똑같이 브랫을 마주 보고 있던 소녀가 입을 열었다.

“뭘 봐, 새끼야.”

“……?”

“뭘 꼬라보냐고.”

“지, 지금 나한테 한 말인가?”

“그럼 여기 너 말고 나 쳐다본 사람이 누가 있는데.”

“어, 어…….”

브랫은 말문이 막혔다.

평민이 확실한 소녀가 자신에게 반말하는 것도 놀라웠지만, 욕을 하는 것은 그것을 넘어 경악이었다.

문지기인 줄로만 알았던 흉터 사내가 교관이라는 걸 알았을 때보다 충격이 더 심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한 그가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이, 이 버릇없는 자식이! 나는 거베라 왕국의 명문, 로이드 백작가의 소영주다. 너 따위 것이 무례를 범할 정도로…….”

“지랄.”

빨간 머리 소녀, 주디스가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상대하기 싫다는 듯 홱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 모습을 본 브랫은 또다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아까보다 훨씬 짧았고, 이윽고 소년의 얼굴에 뜨거운 분노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 씹어먹어도 모자랄…….”

“아아, 모두 주목.”

안타깝게도, 오늘의 브랫은 운이 없었다.

어느새 나타난 교관 때문에 그는 하려던 말을 끊고 분노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예비 수련생들 속에서 그가 앞을 바라봤다.

짙은 턱수염이 있는 웃는 상의 사내.

눈썹 흉터 교관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깜빡 속인 두 문지기 중 하나였다.

‘젠장, 기분 진짜 더럽네.’

“하하, 반갑습니다. 나는 앞으로 여러분들을 가르칠 교관들 중 하나인 카라카라고 합니다. 모두들 잠자리는 어땠습니까? 나쁘지 않았죠?”

“네!”

“식사도 괜찮았고요?”

“네!”

“다행입니다. 컨디션도 모두 좋아 보이는군요. 아주 좋아요.”

브랫 로이드가 기분이 나쁘거나 말거나 새 교관, 카라카는 자신의 할 말을 계속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의 성격이 아메드 교관보다 둥글게 느껴진다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몇 분 정도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던 카라카 교관이 짝하고 손뼉을 쳤다.

가벼운 손동작임에도 불구하고 멀리까지 소리가 퍼졌다.

예비 수련생들은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느끼고 긴장한 눈빛으로 교관을 바라봤다.

그 분위기를 즐기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일까.

카라카는 한참을 무거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잠시 후.

빙긋 웃음을 지은 그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