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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6화 (6/388)

◈ 2. 지켜보는 사람들 (3)

새벽이슬이 곳곳에 맺혀 있는 이른 아침. 파레이라 영지의 병력이 피곤한 얼굴로 연무장에 들어섰다.

따스한 이불 속에서 보내는 늦잠이 간절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정규 훈련일 만큼은 지켜야 했으니까.

병사들이 하품을 쩍쩍하며 오와 열을 맞추기 시작했다.

“거기 뭐 해!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이 새끼들이 빠져가지고! 그래서 고블린 한 마리나 잡을 수 있겠어?”

기사 하나가 병사들을 엄하게 꾸짖었다.

하지만 그 역시 귀찮은 것은 부하들 못지않았다.

어느덧 그의 나이 마흔. 이제는 젊은 날의 불꽃 같던 열정도, 의지도, 머리숱도 없다. 그저 해야 하는 일이니까 할 뿐.

‘젠장, 어제 마신 술 때문에 머리도 아픈데.’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다 보니 당연히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기사는 시빗거리를 찾기 위해 주변을 살폈고, 저 멀리서 훈련을 구경하던 노인에게 퉁명스럽게 소리쳤다.

“거기!”

“나 말인가?”

“그래, 거기! 도대체 뭡니까! 병사들 훈련을 외부인이 보고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아니 뭐, 특별한 전술 훈련도 아니잖아? 그냥 체력 단련 아니야?”

“하지만…….”

“애초에 영주님께 허락도 받았는데 뭐가 문제야? 그냥 조용히 구경만 하고 있을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일 보게.”

“……거기! 맨 뒤에! 똑바로 하지 못해!”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기사가 엄한 곳에 화풀이를 했다. 지적당한 병사가 찔끔 놀라 더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연무장 구석의 노인, 방랑기사 브란 서머빌이 쯧쯧 하고 혀를 찼다.

‘영 아니구만. 다들 정신 상태가 글러 먹었어.’

칠십이 넘어 예전의 위용을 거의 잃어버렸지만, 40년 전만 해도 그 무시무시한 마인(魔人)들을 상대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싸웠던 브란 서머빌이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군기가 바짝 빠진 이곳의 병력은 도저히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물론 파레이라 영지만의 얘기는 아니었다.

지난 몇 년간, 그가 머물렀던 영지의 대부분은 이와 비슷한 수준의 병사들을 데리고 있었으니까.

‘평화에 잔뜩 찌든 탓이지. 요즘 것들은 정말 문제야, 문제…….’

브란 서머빌이 고개를 저었다.

물론 평화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거기서 나오는 여유 덕분에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가 서려 있고, 자신과 같은 늙은이도 전쟁 용사랍시고 여기저기서 대접받는다.

파레이라 영주관에 머물 수 있는 이유도 그 덕분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했다.

지금의 평화를 더욱 오래 즐기고, 만끽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런 소리 해 봤자 꼰대 취급밖에 못 받긴 하겠지만.’

노쇠한 방랑기사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연무장의 입구 쪽을 바라봤다.

때마침 화사한 금발을 가진 소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피부를 확인한 브란이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저 녀석이 소문이 자자한 나태 공자구만.’

파레이라 영지에서 보낸 시간은 고작 하루에 불과했지만, 노인은 이미 아이른에 관한 소문을 대부분 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평생을 떠돌며 살다 보니 웬만한 이야기에는 빠삭했으니까.

심지어 저 소년이 이웃 영지의 아들내미에게 모욕을 당했고, 그 때문에 뒤늦게나마 검술 수련에 매진하고 있다는 것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브란 서머빌은 생각에서 멈추지 않고 소리 내서 웃음을 흘렸다.

“허허, 허허허.”

“왜 또 지랄이야, 저 영감탱이.”

병사들을 지도하던 기사가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노인에게도 들렸지만 무시했다.

그리고 나태 공자가 목검을 빼 들고 구석으로 이동하는 것을 지켜봤다.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은 물론 아니었다.

‘검을 아주 우습게 보는 놈이구나.’

검을 익히는 것을 무겁게 볼 필요는 없다. 그랬다가는 웬만한 기사 가문이 아니고는 입문조차 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검을 가볍게 보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적어도 듣기 싫은 말 들었다고, 평생 관심도 없었으면서 홧김에 시작하는 행위는 절대로 좋게 봐줄 수가 없었다.

‘오늘이 보름째라고 했던가? 딴에 꽤 애쓰긴 한다만.’

이제 슬슬 힘에 부칠 때가 올 것이다. 어쩌면 오늘 그만둘 수도 있고.

원래 ‘홧김에’라는 것이 그렇다.

처음에는 뭐든 할 수 있을 것처럼 뜨겁게 타오르다가도, 장작이 다 타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갑게 식어 버린다.

그리고 꺼진 불은 웬만해서는 다시 타오르지 않는다.

브란은 그렇게 포기하고 사라진 풋내기들을 수도 없이 많이 봤다.

심지어 영재, 천재 소리를 듣던 재능 넘치는 젊은이 중에서도 말이다.

그렇기에 말할 수 있었다.

저 녀석은 안 된다고.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기 때문이 아니라, 저따위 불순한 의도로 가볍게 검을 대하는 자세가 문제라고 말이다.

“흠, 그래도 구경은 해 볼까…….”

속으로 온갖 푸념을 다 늘어 놓던 것과는 다르게, 브란 서머빌은 나태 공자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딱히 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다 늙어 은퇴 직전인 그가 젊은이들 사이에 껴서 검을 휘두를 수도 없고. 체력 단련을 하는 병사들 쪽도 딱히 재미없어 보이고.

그렇게 노인은 나무 그늘 밑에 놓인 의자에 앉아 금발의 소년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아침 훈련을 끝내고 돌아갈 때도.

소년이 점심 식사를 마치고 다시 수련을 시작할 때도.

심지어 어둑어둑 땅거미가 몰려오고, 사람들 대부분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을 때까지도.

브란 서머빌은 결국 나태 공자가 하루의 수련을 마칠 때까지 계속해서 관찰을 이어 갔고, 그가 연무장을 떠나고 난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볍게 등을 두드리며 주변을 서성이던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지난 보름간 놀고 있었던 건 아니네.”

하지만 저렇게 무리해서야, 내일도 나오는 건 힘들겠지. 젊은 놈이라 그런지 적당히를 몰라.

푸념을 하면서도 노인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연무장을 나왔고.

나태 공자 또한 같은 시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열흘의 시간이 지났다.

한 명은 수련하고, 한 명은 지켜보고, 판에 박힌 듯이 똑같은 시간이 말이다.

* * *

휘익!

휘이익!

한적한 연무장에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나태 공자 아이른 파레이라가 목검을 휘두르는 소리였다.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첫날의 경악은 사라지고, 이제는 모두가 대공자의 아침 수련을 으레 있는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른이 대단한 성취를 얻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나태하다’라는 오명을 벗어 가고 있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것뿐.

남들보다 몇 년이나 뒤처진 비실이에게 기대할 만큼 검술은 녹록한 게 아니었다.

“…….”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나태 공자의 가능성을,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도, 하나에 불과했지만 분명 있었다.

브란 서머빌.

영지 사람이 아닌, 그러나 지난 열흘간 잠시도 빠짐없이 아이른의 수련 광경을 지켜보던 그가 속으로 생각했다.

‘완전히…… 잘못 판단하고 있었어.’

단순히 소년의 재능을 잘못 평가한 것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아예 사람의 본질 자체를 잘못 보고 있었다.

그것을 뒤늦게 깨달은 노인의 이마에 더욱 깊게 주름이 파여 갔다.

‘단순히 저열한 열등감, 쥐뿔도 없는 자존심을 태워서 피우는 불꽃인 줄 알았는데…….’

불꽃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젊은 천재들 대부분이 불꽃 같은 삶을 보내며 실력을 끌어올린다.

누군가는 열정을, 누군가는 재능을, 누군가는 욕망을 불태우면서 자신을 보다 밝은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이는 생 대부분을 태워 버린 노인은 할 수 없는, 젊은이들만의 특권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태 공자가 장작으로 쓰는 것은 기껏해야 알량한 자존심에 난 상처, 그로 인한 열등감 정도.

그것의 지속 시간이 얼마나 짧은지 누구보다 잘 아는 브란이었기에, 나태 공자를 그렇게 낮게 평가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태 공자는, 아니 아이른 파레이라는 불꽃이 아니었다.

그는 찬란한 젊음을 태워 나아가는 소년들과는 전혀 다른, 마치 강철을 두드리는 대장장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거지?’

노인은 아이른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쇠를 두드리는 것은, 금속을 두드리듯 자신을 단련해 나가는 것은 무척이나 지루한 작업이다.

장작도 없이, 불꽃이 주는 화려함도 없이 매일 정해진 것을 해나가는 것은 웬만한 사람들은 꿈도 꿀 수 없는 고통이라 할 수 있었다.

칠십 넘는 세월을 살아온 브란의 기억 속에서도 그것이 가능했던 건 손에 꼽는 몇 명뿐.

그조차도 이제는 세상에 없는, 나이 지긋한 사람들일 뿐이었다.

‘그런데…… 저 젊은, 아니 어린 소년에게서, 그런 이들의 분위기가 느껴진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일이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 소년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빈틈없이 검술을 연마하고 있다.

평생을 무언가에 매진해 온 사람처럼.

이미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아왔던 것처럼.

오싹-

브란 서머빌의 등에 소름이 쫙 돋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생각했다.

아무리 대단한 영웅이라 해도 지긋한 나이가 되어서야 완성할 강철의 의지.

그것을 15살에 완성한 자가, 계속해서 검의 길을 걸어간다면…… 과연 그 끝은 어떻게 될까?

‘재능은 문제도 되지 않을 것이다. 남들보다 늦은 시작도,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저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인도해 줄 좋은 스승만 있다면.

그렇다면…….

“헙!”

여기까지 생각한 노인이 화들짝 놀라 육성으로 소리쳤다.

이를 들은 연무장 관리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열흘 내내 풍경처럼 가만히 있던 노인이 이상행동을 보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게 끝이 아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방랑기사가 급한 일이 있다는 듯 자신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질문했다.

“저, 저기. 관리인 양반! 내 하나 물어보지!”

“예, 예, 나리! 편하게 물어보시죠.”

“저기 저 수련하고 있는 소영주님 말일세. 혹시 따로 검술 스승은 없는 건가?”

“아…….”

연무장 관리인이 잠시 뜸을 들였다.

영지 내부의 일을 외지인에게 알려 줘도 되는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차피 별일도 아닌데. 속으로 중얼거린 관리인이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영주님께서 곧 검술 스승을 붙여 줄 거라고 하셨습니다. 공자님께서는 딱히 대단한 성취를 바라고 하는 게 아니니 필요 없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저렇게 열심히 하시는데 스승이 없는 건 좀 그렇죠. 잘못하다 다칠 수도 있고…….”

“그, 그렇지. 그러면 혹시, 검술 스승이 누구인지도 말해 줄 수 있나?”

“뭐 숨길 건 없죠. 오른 주크란 기사님입…….”

“안 돼!”

“뭐, 뭐야?”

검술 스승의 이름을 들은 브란 서머빌이 크게 소리쳤다. 깜짝 놀란 연무장 관리인이 뒷걸음질을 쳤다.

노인은 관리인이 그러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빠르게 연무장을 떠난 그가 방으로 들어가 종이 두 장을 꺼냈다.

하나는 파레이라 남작에게 보내는 편지.

브란은 그 편지에 대놓고 썼다. 오른 주크란 기사는 안 된다고.

그따위 녀석에게 나태 공자를, 아니 대공자를 맡기는 것은 가능성을 진창에 처박는 행위와 같다고 말이다.

‘오른 주크란…… 그 녀석이었지. 정규 훈련 전날에 술 처마시고 병사들에게 빽빽 소리 지르던 녀석!’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런 몹쓸 녀석에게 저 보석 같은 소년을 맡길 수는 없었다.

어느새 브란은 파레이라 영지의 누구보다도 아이른 파레이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 진심 어린 걱정과 기대를, 노기사는 두 번째 종이에 꾹꾹 눌러 담았다.

“좋아, 다 썼다!”

두 번째 문서도 완성되었다.

살짝 웃음을 띤 방랑기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부리나케 영주와의 만남을 청했다.

파레이라 남작은 굳은 얼굴로 브란 서머빌이 건네 준 문서들을 읽어 보았다.

특히 두 번째 것을 더욱 자세히.

‘……정말로, 내 아들에게 잠재력이 있단 말인가.’

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명문, 크로노 검술관.

그곳의 입관 추천서를 손에 든 그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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