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지켜보는 사람들 (1)
아침이 되었다. 아니, 아직은 새벽에 더욱 가까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가문의 대공자, 아이른 파레이라를 담당하는 시종은 부지런히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주인보다 늦게까지 자고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하품을 하고, 간단하게 씻은 뒤 옷매무시를 다듬는다.
그리고 하녀에게 부탁했던 요깃거리를 받아든 뒤 소영주의 방앞에 선다.
똑똑똑.
“공자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응,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서니, 이미 대부분의 준비를 마친 아이른 파레이라의 모습이 보였다.
시종이 생각했다.
‘하루를 못 넘길 줄 알았는데…….’
벌써 사흘째다. 아이른이 아침 일찍 일어난 것이 말이다.
누군가는 그게 뭐가 그리 대단하냐고 묻겠지만, 대단한 것이 맞다.
소영주는 10년 넘게 일찍 일어났던 적이 없었으니까.
‘심지어 그냥 일어나 있기만 하는 게 아니지.’
수련을 시작한 날부터 따지면 4일째인가.
상념을 마친 시종이 공손한 말투로 말했다.
“여기, 식사입니다.”
“고마워.”
샌드위치를 몇 번 씹지도 않고 삼킨 뒤, 우유 한 모금.
또 하나의 샌드위치를 해치운 뒤, 또 우유 한 모금.
그렇게 순식간에 식사를 끝낸 아이른이 푸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이 또한 예전과 달라진 점이었다. 그는 원래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았다.
걷는 것조차 꺼릴 정도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열량이 필요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검을 휘두르기 위해서는 많이 먹어야 해.’
아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 수 없는 꿈은 여전히 자신을 괴롭혔고, 꿈이 멈추지 않는 이상 자신은 꼼짝없이 검을 들어야만 했다.
저항은 할 수 없었다. 어제 억지로 잠을 청해 보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눈이 떠진 후에는 가만히 누워 있는 것조차 고역이었다.
게다가 검을 수련하는 것이 그리 힘들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아니, 힘든 것은 맞지만, 그러니까…….
‘……보람이 있다고 해야 하나.’
아이른이 조심스럽게 생각했다.
검을 드는 순간에는 어제 축적된 근육통이 올라오고, 수련을 끝마칠 때쯤엔 그보다 더한 아픔이 몸 곳곳을 삘렀다.
그런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마치 새로운 도피처를 찾은 느낌이었다. 지금까지는 잠이 그 역할을 했었다.
“오늘도, 연무장에 가실 겁니까?”
시종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아이른이 정신을 차렸다.
염려 가득한 눈빛.
그는 이를 무시했다. 그리고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알겠습니다.”
아이른은 방을 나섰고,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시종이 그의 뒤를 따랐다.
복도에서 청소하고 있던 하녀들이 둘을 보고 소곤댔다.
“와, 또?”
“신기하네. 살면서 이런 광경을 볼 줄이야…….”
하녀들뿐만이 아니었다.
아침 일찍 업무를 보던 고용인들도, 순찰을 돌고 있던 경비들도, 먼저 연무장에 나와 있던 병사들도 달라진 대공자의 모습을 보고 입을 놀리기 바빴다.
“도련님이 또 나왔군. 벌써 사흘…… 아니, 나흘째인가?”
“이제 정신을 차리신 건가? 그런 거라면 참 좋을 텐데…….”
“헹. 나는 안 믿어. 사람이 그리 쉽게 바뀌겠어? 지금 와서 바뀔 거였으면 진즉에…….”
“하긴, 그것도 그래.”
놀람, 경악, 그리고 긍정보단 부정이 더욱 많이 섞인 뒷말들.
아이른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말소리를 들은 건 아니지만 주변 분위기는 읽을 수 있었다.
자신은 게으름뱅이이긴 해도 바보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해했다.
화도 안 났다.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게 정확했다.
10년 넘게 귀족의 의무를 저버린 자신이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아이른 파레이라는 무기 진열대에서 항상 사용하던 목검을 집어 든 뒤, 조용히 자세를 잡았다.
“후우.”
심호흡.
그리고 정신 집중.
이를 위해 조용히 눈을 감고 한 사내를 떠올렸다.
그는 검을 휘두를 때면 그 무엇에도 휩쓸리지 않고 집중을 유지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멋 모르는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도. 심지어 천둥 번개가 내려칠 때도.
그런 것에 비하면, 지금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후우우.”
그런 생각을 하자 정말로 도움이 되었다.
다시 한번 숨을 고른 아이른이 조용히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힘차게 내리쳤다.
휘이익!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수직 베기.
많은 이들이 구경하는 가운데, 나태 공자의 긴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 * *
“워우, 오늘도 하고 계시네.”
“그러게 말입니다.”
성문의 아침 경비를 끝마친 선임 경비병 둘, 그리고 신참 경비병 하나가 연무장을 찾았다.
몸을 단련하러 온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나태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열정적이라 할 만한 인물들도 아니었으니까.
경비들이 이곳을 찾은 이유는 다름 아닌 파레이라 가문의 유명인, 나태 공자의 수련 장면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기 경과를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게으르기로 소문난 그가 얼마나 오래 수련을 이어 가는가?’ 하는 내기 말이다.
물론 대공자를 깔보고 업신여기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파레이라 가문에서 근무해 온 병사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지금의 상황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넘어가기에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했다.
이 정도 여흥도 없으면 빡빡해서 살 수가 없다.
최고참 경비병의 경우에는 손해만 잔뜩 본 셈이 되었지만 말이다.
“설마 4일 연속해서 연무장에 나오실 줄이야…….”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가이른 자작 아들내미가 꽤 세게 말을 했다고. 뭐 듣기로는 대놓고 말한 수준은 아니더라도, 못 알아들으면 바보일 정도로 제대로 망신을 줬다던데…….”
“젠장, 그런 정보를 왜 혼자만 알고 있는 건데!”
“제가 미쳤습니까? 내기하는 마당에 그런 걸 선배한테 알려 주게? 그리고 선배 빼고는 다 알고 있더구먼.”
‘흐흐, 아마 오기로라도 일주일은 버틸 겁니다’ 하고 코가 큰 경비병이 최고참의 돈을 뜯어내며 중얼거렸다.
“으음…….”
선배들이 또다시 투덕거리고 있을 때, 최근에 고용된 신참 경비병은 내기가 아닌 대공자 자체에 집중하고 있었다.
돈을 걸 만큼 여유가 있지도 않을뿐더러, 그보다는 소문만 무성했던 유명인을 관찰하는 쪽이 더욱 흥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오래 구경할 생각은 없었다.
어떤 오명을 쓰고 있던 상대는 귀족, 윗사람의 수련을 대놓고 바라볼 정도로 겁이 없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런 생각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신참은 어느새 진지한 표정으로 나태 공자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에 집중했다.
‘……대충 시간만 보내는 느낌이 아닌데?’
정말로 그러했다.
아이른 파레이라는 신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성실하게, 몰입하여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고작 나흘밖에 안 된 것 가지고 무슨 호들갑이냐’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안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조차 제대로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은 말이다.
원래 사람이 그렇다.
아무리 동기부여 되는 말을 들었다 하더라도, ‘내일 일어나자마자 열심히 해야지’ 하고 생각했다 하더라도 이를 해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은 어제 세운 계획보다 현재의 잠을 더 소중히 여기니까.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들었다 해도 끝이 아니다.
무거운 검을 들고 수련을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고통은 쌓여 가고, 의지는 깎여 나간다. 다음 날 아침 찾아올 근육통은 덤이다.
자신 또한 비슷했다. 처음 검을 들었던 다음 날, 내리 사흘을 도망 다니며 수련하지 않겠다고 징징댔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공자님은, 한 번도 그런 기색을 내비친 적이 없다.’
평생 운동이라곤 해 본 적도 없는 사람이.
마치 오랫동안 이를 해 왔던 사람처럼.
신참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나태 공자의 검술은 형편없다.
근력이 부족해 검의 무게를 소화하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 숨을 제대로 고르지 못한다.
일찍부터 검을 잡은 동년배 귀족들과 비교할 수 없는 건 물론이고, 신체 건강한 장정 중 아무나 데려와도 저보다는 위력적인 모습을 보여 줄 것이다.
하지만 정신력만을 떼놓고 평가한다면, 지금 저 소년의 모습은 결코 고참 경비병들이 비웃을 만큼 우스운 게 아니었다.
오히려 대단하다고 봐야 옳았다.
아니.
지금의 저 눈빛을 보면, 어쩌면 그보다도 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주변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최고참 경비병이 자신의 어깨를 툭툭 치고 있었다.
“아야, 왜 그러시는…… 헙.”
신참은 끝까지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표정을 굳히고는 한 곳을 바라봤다.
자세는 어느새 공손해져 있었고, 어깨도 잔뜩 내려갔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크와앙!
작고 앙증맞은, 하지만 왠지 모를 위엄이 느껴지는 울음소리.
온통 붉은색으로 칠해진 전설의 동물, 그리핀의 포효였다.
그리고 그 위에 타고 있는 것은 열한 살에 ‘요술사’의 칭호를 얻은, 파레이라 가문의 빛나는 미래.
나태 공자 아이른 파레이라의 배다른 여동생, 키릴 파레이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