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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1화 (1/388)

< 나태 공자, 노력 천재 되다 - 이등별 >

◈ 프롤로그 - 어느 촌부의 일기

1.

마을에 새로운 사람이 찾아왔다.

인상이 좋은 편은 아니다. 꽤 험한 일을 겪었는지 눈에 독기가 서려 있다.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것 같은 분위기다.

개인적으로는 내치길 바랐지만, 맘씨 좋은 촌장은 이방인을 받아들였다. 언제나처럼 마찬가지로.

하긴, 그 덕분에 나도 여기 있는 건데 뭐.

나는 신경을 끄기로 했다.

2.

사내가 마을에 정착한 지 사흘이 지났다.

그는 무척 조용하다. 마치 없는 사람처럼. 아마 집 밖에 거의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오지랖 넓은 몇몇 주민들은 호기심을 보였지만, 딱히 관심은 없다.

그저 지금처럼 평화로운 날이 계속되기를.

3.

일주일, 그러니까 사내가 온 후로 열흘이 지났다.

이제는 그가 무엇을 하는지 안다. 담장 너머를 훔쳐본 꼬맹이들이 말해 줬다. 매일 검을 휘두르고 있다고 한다.

사연이 있어 보이더니, 그런 거였나.

여전히 큰 관심은 없다.

나는 아이들이 재잘거리든 말든 내 일이나 하기로 했다.

4.

한 달이 더 지났다.

그는 여전히 자기 집 마당에서 검을 휘두른다.

본 건 아니다. 그냥 그렇게 들었다.

여전히 관심은 없다.

5.

한 달이 더 지났다.

여전히 같다. 남자는 검을 휘두르고, 주민들은 재잘댄다.

복수를 위해 검술을 갈고 닦고 있다느니, 몰락한 기사라느니, 유명한 용병이었다느니.

시끄럽다. 나는 정말로 관심이 없는데.

하지만 그만하라고 말하는 건 더 귀찮은 일이니, 그냥 내 할 일을 했다.

이번에 할 일은…… 낮잠을 자는 거려나.

6.

내일은 그가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러 가야겠다.

무려 반년 동안 수련을 이어 가고 있다. 하루도 빠짐없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지간히 남의 일에 무관심한 나였지만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호기심이 치밀어 오른다.

얼마나 빠를까?

얼마나 묵직할까?

얼마나 대단한 검술을 연마하기에 그런 노력을 보이는 걸까?

내일이면 알 수 있겠지.

7.

실망이다. 무척 실망이다.

검을 모르는 주민들이야 대단해 보이겠지만, 상회 일을 하며 여러 검사를 봤던 나는 알 수 있다.

대단하지 않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그저 그랬다.

담장 너머의 풍경을 등지고 걸어가며 생각했다.

사연이 있을 것이다. 가슴이 미어지고 심장이 탈 것 같은 아픈 사연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 노력이 그를 해결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멍청한 사람. 그리고 안쓰러운 사람.

이제는 진짜 관심 끊어야지.

자기 전에 술 한 잔 마셔야겠다.

8.

가족 하나가 마을에 들어왔다.

퇴역한 용병, 그리고 아들과 딸 하나씩.

그런데 딸의 외모가 무척 고왔다.

웃으며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할 때는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온 줄 알았다.

오랜만이다. 이런 감정은 정말로 오랜만이다.

늦은 밤 일기를 쓰는 지금 이 순간마저도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는다.

내일은 어떻게든 말을 걸어봐야겠어. 꼭 그래야지, 꼭. 여기 적어 놓기까지 했으니 미룰 일은 없겠지.

아, 그리고 중요하진 않지만.

사내는 오늘도 검을 휘둘렀다.

이걸로 3년째였다.

9.

오늘은 참 기분이 묘한 날이다.

더없이 행복한 것은 분명하다. 2년간의 구애가 열매를 맺은 날이니까.

지금 내 옆에는 아리따운 아내, 레마가 잠들어 있다. 그야말로 눈물이 날 정도로 기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말로 이상하게도, 나와 전혀 관계도 없는 그놈이 자꾸만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5년은 참 긴 시간이다.

꿈이 꺾여 염세에 찌들었던 내가 기운을 차리고, 연애하고, 결혼해서 웃음을 찾을 정도로.

옆집 코흘리개 잭슨이 쑥쑥 자라 용병이 되겠다고 마을을 떠나 버릴 정도로.

하지만 그는 변함이 없다.

많은 이들이 희로애락을 수십 번씩 반복할 동안, 그저 자신의 마당에 우두커니 서서 휘두르고, 휘두르고, 또 휘두르고.

처음과 같은 모습으로, 마치 어제 처음 다짐한 것처럼 고행을 이어 가는 사내를 떠올리자니, 알 수 없는 감정이 목을 타고 코에서 눈으로 올라간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상하다. 남들의 관심이 이미 다 떠난 마당에 뒤늦게 그에게 눈길이 가다니.

하지만 나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의 고행이 언제까지 이어지는지, 내일부터는 매일 확인해야겠다.

10.

5년 1개월 12일째.

사내는 검을 수련했다.

11.

5년 2개월 25일째.

사내는 검을 수련했다.

12.

5년 5개월 3일째.

날이 미칠 듯이 더웠다. 그래도 사내는 검을 수련했다.

13.

아이가 태어났다. 나와 레마의 사랑스러운 아이가. 딸, 사랑스러운 나의 딸.

장인어른과 촌장을 비롯한 모두가 새 생명의 탄생을 축하했다. 나와 아내는 웃음을 띤 채로 주민들의 축하를 받았다.

그리고 사내는 수련을 이어 갔다.

6년하고도 2개월, 그리고 27일째였다.

14.

9년 6개월 16일째.

사내는 검을 수련했다.

15.

꼬박 10년이 되는 날.

사내는 검을 수련했다.

16.

아차, 오늘은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오늘이 12년 하고도 3개월 되는 날이었지.

뭐 상관없었다. 어차피 수련하고 있었겠지. 어제 그랬던 것처럼. 사실 이젠 예전만큼 관심이 생기진 않는다.

아침이 되면 해가 뜨고 밤이 되면 달이 뜨는 것처럼,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것처럼, 당연한 일에 이렇게 오래 집착하고 있었다니.

갑자기 지금까지 해 왔던 일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래, 그런 쓸데없는 짓에 신경 쓸 시간에 내 딸 로라와 아내 레마한테나 더 신경 쓰자.

내일부턴 그만둬야지.

진짜로.

……

……

여기까지가 촌부가 쓴 일기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 * *

주름이 가득한 얼굴의 촌부가 이른 새벽 잠에서 깼다.

그는 한 마을의 장이었다. 레마의 남편이었고, 또 로라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젊었을 적엔 매사에 염세적인 성격 나쁜 청년이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따스한 웃음으로 모두를 대하는 그를 마을 사람 모두가 좋아했다. 세월이 그를 변화시킨 것이다.

‘그래. 그 이기적이었던 내가 촌장씩이나 돼서 사람들의 인사를 받는 날이 올 줄이야. 시간의 흐름은 정말이지 대단하군.’

찬 공기를 맞으며 산책을 도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촌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침 일찍 사냥을 나가는 사냥꾼의 인사를 받고, 집 밖까지 새어 나오는 포목점주의 코골이를 듣고, 보수가 필요한 담벼락의 위치를 기억해 두기도 하고.

그렇게 마을의 구석구석을 꼼꼼히 살피던 그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이 마을에서 가장 특이한 사람이 머무는 곳.

‘……오늘로 35년 째던가.’

바로 검을 수련하는 사내의 집이었다.

처음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중에는 관심이 생겼지만 좋은 쪽은 아니었다.

그의 입에는 헛된 노력을 봤을 때나 흘릴 법한 조소가 걸려 있었다.

조금 더 후에 찾아온 감정은 안타까움이었다.

그리고 불쌍함이었다.

하지만 5년, 10년이 지난 후부터는 그렇지 않았다.

지금의 그가 느끼는 감정은, 경외라는 단어가 부족할 정도로 무겁고 거대한 것이었다.

“…….”

도대체 어떤 일을 겪었던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그를 고행으로 내모는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도대체 무엇이.

그런 생각조차 오래전에 지나가 버렸다.

지금의 촌부는 마치 거룩한 무언가를 영접하듯, 달마다 한 번씩 그가 수련하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지금 발걸음을 옮기는 것도 이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평소와는 다른 광경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촌부는 눈을 크게 뜨고 빠르게 움직였다.

“헉, 헉, 허억!”

촌부의 나이는 60이 넘었다.

특별히 병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갑작스레 달려도 괜찮을 정도로 체력이 뛰어난 건 결코 아니었다.

얼마 뛰지 않았는데도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죽으라고 뛰었다.

덕분이었다. 그는 사내가 일으킨 마지막 기적의 끝자락을, 잠시나마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우우웅-

부릅뜬 눈으로 서 있는 노인.

그를 지탱해 주고 있는 거대한 검.

그리고 점차 사그라지고 있는, 하지만 확연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은회색의 빛무리.

그것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촌부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노인이 마지막에 오른 경지.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그가 만들어 낸 빛의 검이 얼마나 거대하고, 또 찬란하게 빛났었는지.

자리에 늦게 당도한 촌부는 보지 못했다. 아마 봤더라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기사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상관없었다. 지금까지 봐 온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노인이 이제껏 쌓아 왔던 노력.

겪어 왔던 고통.

평생의 세월.

그 과정은, 그가 이뤄낸 결실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이었으니.

잠시 노인의 주검을 내려 보던 촌부가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셨기를…….”

* * *

그리고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검을 휘두르던 사내도, 그 사내를 지켜보던 촌부도, 그가 몸담았던 마을도 누구 하나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가 되었을 때.

“……으음.”

파레이라 가문의 장자, 나태 공자 아이른 파레이라가 자신의 전생을 자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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