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퍼펙트 엔딩 - 1
이 게임을 만든 이들, 일명 GM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제0지구’라고 불렀다.
수많은 차원에 존재하는 지구 중에서 원점이나 다름없는 존재라는 뜻이었다.
그런 ‘중심주의’ 사상은 집단 전체를 배타적으로 그리고 폭력적으로 만들었다.
더 나아가 인도주의를 잊게 했다.
그렇게 제1지구에서 시작하여 제38지구까지, 다른 차원의 인류를 약탈하고 학살했으며 더 나아가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그 끔찍한 악행을 약육강식의 법칙 혹은 앞서 나간 이의 권리이자 혜택으로 합리화하며,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오는 중이었다.
그렇게 한없은 자유와 쾌락을 누렸다.
하지만······.
-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기에 가장 좋은 직업은 무엇일까요? 지금 바로 선택하십시오.
어느 날, 그 게임이 그들에게 찾아왔다.
“이, 이게 뭐야?”
“너도 이거 보여?”
- 1차 직업 선택이 종료됩니다.
* 선택에 실패한 분들은 다음 기회에!
“서, 설마 이거······.”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놀았던 다른 모든 차원의 인류가 그러했듯 당황했다.
끼에에!
“저거······ 고, 고블린?”
“마, 맞잖아! 도망쳐!”
그리고 두려움에 빠졌다.
그들도 결국 한낱 인간, 그 근본적인 한계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한 상태였다.
“그 검, 검 좀 이리 줘 봐! 빨리!”
다른 차원의 지구와 다르지 않은, 엇비슷한 양상의 게임이 시작되었다.
다만······.
“저건 또 뭐지?”
우우우우!
“······비행선?”
그들이 상대해야 할 건 갑자기 나타난 몬스터뿐만이 아니었다.
“저건 게임 후반부에나 나오는 마, 마법 공학 비행선이잖아?”
이번 게임은 훨씬 더 어려운 난이도였다.
***
게임이 시작된 지 1시간이 지났을 무렵, 수만 명의 제0지구 시민들이 돔 형태의 ‘쉘터’에 모여 있었다. 비상 피난한 것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허술한 무기를 하나씩 쥐고 있었다. 게임 시작과 동시에 시작된 ‘직업 선택’으로 주어진 기본 무기였다.
“이봐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게임 시스템이 오류를 일으킨 거죠?”
“제발 제대로 된 설명 좀 해줘요!”
쉘터 밖에서 익숙한 몬스터들, 게임 속에 등장하는 몬스터에 의한 학살을 목격했기에 이들은 침착하게 기다릴 수가 없었다.
이에 정부 요원들이 나섰다.
“자자, 국제 계엄 사령부에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든 시스템이니까 금방 해결될 거예요! 모두 침착하세요!”
그러나 시민들을 설득할 수는 없었다.
“당신이라면 지금 마음이 놓이겠어? 얼마 전에 플레이어들한테 핵폭탄도 맞았는데, 그때도 잘 통제하고 있었다고 말했었잖아!”
“당장 이 문제 해결하세요! 그리고 우리가 입은 피해를 제대로 보상해야 할 겁니다!”
약 1년 전에 벌어졌던 ‘네오 알렉산드리아’ 붕괴 사건은 제0지구 인류에게 크나큰 충격으로 남았다.
장난감에 불과하다고 믿어오던 플레이어들의 반란, 그것도 단순한 소요 사태가 아니라, 유례없는 대폭발로 제0지구의 최대 도시가 통째로 사라졌다.
바로 이 순간, 그 끔찍했던 순간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한 차례 항의를 끝낸 이후, 여기저기 모여 앉았다.
그들은 지금 이 상황에 관하여, 이런저런 추측을 늘어놓았다.
“설마 게임 시스템이 해킹된 건가?”
“응? 해킹이라니, 대체 누구한테요?”
“음, 그건······.”
그들이 떠올릴 수 있는 그만한 적, 그건 단 한 명뿐이었다.
“······네크로맨서?”
제32지구의 최강자였으며 끝내 ‘월드 이터’를 잡아내고 끝내 게임의 우승자가 되었던 자, 그리고 3가지의 선택지를 벗어나 최초로 제0지구에 반기를 든 자······.
“마, 말도 안 돼요. 미개한 과거 인류들이 우리 기술을 이해하는 걸 넘어서 해킹까지 한다고요? 그건 불가능한 일이죠.”
그들은 최악의 추측을 애써 부정했다.
“그런데 해킹 여부를 떠나서 정말로 게임이 시작된 거라면······ 여기는 절대로 안전하지 않아요. 다들 아시잖아요?”
“알죠. 게임 방송을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니까······ 곧 퀘스트가 쉘터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도록 강제할 겁니다.”
고블린 따위는 ‘쉘터’의 철문을 뚫을 순 없었지만, 오랫동안 게임을 지켜보며 즐겨온 이들은, 더 큰 재앙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여기에 던전이 생길 수도 있어요. 제8지구 생존 게임에서 벌어졌던 중국 서버 그 아파트 서바이벌 퀘스트 기억하세요?”
“아, 기억나죠. 워낙 대박 에피소드여서 최근에도 몇 번이나 돌려봤어요.”
“맞아요. 아직도 다시 보기 상위권에 있더라고요? 아무튼, 그렇다면 그것처럼······.”
그런데 이들의 대화를 유심히 지켜보는 수상한 눈빛이 하나 있었다.
“와, 얘들 이거 봐라? 꽤 재밌네?”
젊은 동양인 남자였다.
그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피식 웃었다. 비웃음 같았다. 이상함을 느낀 사람들은 그 남자에게 시선을 던졌다.
“무슨 게임 동호회 정모처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저렇게 진지하게 하고 있냐? 참나, 이 세계 사람들도 제정신은 아니구나?”
남자는 여전히 홀로 낄낄거렸고 결국 중년 남자 한 명이 다가가 따져 물었다.
“뭐요? 당신 뭐가 그렇게 웃겨요?”
젊은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네? 아······ 이 게임 너무 재밌지 않아요? 이번 게임도 아까 그 무슨 아파트 에피소드 못지않게 흥미진진할 것 같은데?”
그 말에 일대의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어떤 철부지라도 지금 이 순간에 꺼낼만한 말은 아니었다.
다분히, 도가 지나쳤다.
“뭐?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
“아니, 지금 이 상황이요. 꽤 짜릿하지 않아요? 그런데 다들 왜 이렇게 흥분하셨담? 그런 자세로는 이 게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거, 다들 잘 알고 계시지 않아요?”
“너 이 새끼, 미쳤어?”
중년 남자는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그는 젊은 남자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손가락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밖에서는 쉘터에 들어 오지 못 한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있다고! 그런 농담할 때야?”
중년 남자가 물꼬를 틀자 여기저기에서 동조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그래요! 말조심해요! 많은 사람이 가족들이랑 연락도 안 된다고요!”
“아무리 세상이 미쳐 돌아가도 게임이랑 현실을 구분 못 하는 놈이 있어?”
그런 동시다발적인 비난에도 동양인 남자는 굴하지 않았다.
“흠······ 게임이랑 현실? 그거 구분 못 하는 놈들이 대체 누구지? 하하. 정상은 다수를 위한 개념이라더니, 여기서는 내가 비정상일 수밖에 없겠네.”
“이 사람 지금 뭐라는 거야?”
“이런 새끼는 당장 쫓아내요!”
그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팔짱을 낀 채 그 상황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 저, 저 사람······.”
누군가 손을 들어 올려 그를 가리켰다. 검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프, 프, 플레이어야!”
플레이어?
엄밀히 말하면 게임이 시작된 지금, 이곳에 있는 모든 생존자가 ‘플레이어’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자신이 ‘플레이어’라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 플레이어란, 게임에 이용되는 저급한 인류를 뜻했기 때문이다.
“······뭐?”
즉, 이곳, 제0지구에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될 사람이었다.
“그래! 맞아! 제32지구, 네크로맨서의 동료 중 한 명이잖아! 그 최강돚거! 그, 그, 그! 이상하게 입고 다니는 미친놈!”
그렇다. 이상하게 입고 다니는 미친놈, 제0지구 내에서 그런 이미지로 알려진 플레이어, 그는 바로 한호였다.
“그, 그놈이 여기에 왜 있어!”
그제야 한호의 주변으로 달려들어 손가락질을 해대던 사람들이 물러섰다.
이들 모두 게임 방송을 즐겨 보는 만큼 뒤늦게 한호를 알아본 것이었다.
“뭐, 여기가 요즘 재밌다길래 놀러 왔죠.”
한호는 그 사이에서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이 자신을 알아본 게, 유명인이 된 것처럼 사뭇 기분 좋았다.
“어때요? 이제 조금 더 재밌어졌죠? 그럼 제가 더, 더 재밌는 거 보여줄게요. 자자, 다들 집중하세요!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그 순간, 의 등 뒤에서, 6개의 손이 피어올랐다. 그 기괴한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게 뭔지 알고 있었다.
“······아, 아수라!”
- 주의! 해당 지역에 ‘화신 발현’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서 거대한 녹색 형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현무(玄武)였다.
그 우악스러운 광경을 실제로 목격한 이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모든 이들이 빳빳하게 얼어붙은 채,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려 빠르게 자라나는 그 괴물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으아아아!”
다소 뒤늦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비명은 이내 쉘터 이곳저곳에서 연쇄적으로 발생하여 돔 전체를 쩌렁쩌렁 울렸다.
대혼란이 일어났다.
“겨, 경비!”
사람들이 무질서하게 흩어졌고, 그 사이를 뚫고 쉘터 경비대가 달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어? 저, 저게 뭐야!”
하지만 경비들마저 평소에 사용하던 무기가 아니라, 게임 시작과 동시에 직업 선택 후 지급된 무기를 들고 왔다.
어쩔 수 없었다. 게임이 시작되며, 세계 전역에 퍼져 있던 ‘나노 로봇’들이 통상 무기를 모두 삭제했기 때문이었다.
즉, 대부분 1레벨의 플레이어 수준이었다.
“에이 이게 뭐야? 전부 1,000골드짜리잖아? 갑자기 재미없어졌다.”
초보자가 만렙에게 덤비는 수준이었다.
“자, 상황 정리합시다!”
한호가 그렇게 말하자, 피난민 사이에 숨어 있던 세계수 진영의 플레이어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제213기동대, 작전 시작합니다.”
그들이 숨겨두고 있던 휘황찬란한 무기를 꺼내 들었다. 경비들이 들고 있는 무기와는 비견할 수 없는, 최고급 장비였다.
“지금부터 벌레 소굴 소탕 작전을 시작한다! 저항하는 놈들은 살려두지 마라!”
제0지구 제압이 시작되었다.
아주 손쉬운 일이었다.
“마, 막아!”
“어떻게 막습니까?”
몇몇 경비들이 본분을 다하기 위해 맞서 싸웠지만, 애당초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컥!”
전투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장면이 몇 차례 벌어지자 돔 전체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손쉬운 작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사이, 몇몇 대원들이 쉘터와 연결된 ‘비밀 시설’로 침투하여 그곳에 있는 거대한 기계 장치의 전원을 내려버렸다.
그건 시스템 관리자 ‘센티널’이었다.
“B44 지역 센티널 확보!”
센티널은 게임 시스템의 관리자 AI로, 어느 정도 게임 시스템을 조작할 수 있었다.
당장은 게임 초반이기에 저들이 상황 파악조차 제대로 못 하고 어설프게 대응하고 있었지만, 이내 다수의 센티널을 바탕으로 시스템을 장악해나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었다.
그럴 경우, 시스템을 조작하여 제0지구의 인류에게 상당한 성능의 아이템을 공급하는 등, 꽤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전면 침공을 시작하기에 앞서, 소수 정예의 요원들을 쉘터에 침투시켜 ‘센티널’을 제거하는 게 첫 번째 작전이었다.
그리고 다수의 ‘센티널’을 장악할 시 얻을 수 있는 전략적 성과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럼 이로써 웜홀 주변 12개 센티널을 전부 무력화시켰습니다.”
“오케이! 원정 사령부에 다차원 공략 준비를 끝마쳤다고 연락해요!”
버뮤다 삼각지대 일대를 두르고 있는 ‘쉘터’ 그곳마다 비치된 센티널들이 웜홀을 통제하고 있었는데, 그것들을 전부 무력화시킴으로써 놈들의 ‘웜홀’을 손에 넣은 것이었다.
한호는 쉘터에 마련된 ‘게이트’ 앞에 섰다.
우우우우―
이 게이트는 웜홀과 연결되어 있어, 다른 차원으로 이어지는 문 역할을 했다.
“자, 드디어 다른 세계를 구하러 갈 준비가 끝났군?”
한호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거칠게 요동치는 게이트들 내려다보았다.
“기다려라, 우리가 구하러 간다!”
제0지구의 웜홀을 장악함으로써, 지금까지 제0지구에게 착취되어 온 ‘제1지구’부터 ‘제38지구’까지를 구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내 백여 명의 플레이어들이 다른 차원으로 갈 준비를 마치고 게이트 앞에 도열했다.
“우리의 목적지는 제35지구입니다. 그곳은 현재 평균 레벨 6정도이며, 메인스트림 2, 레이드 보스 몬스터 단계에 있습니다.”
“어렵지 않겠는데요?”
“음, 그렇죠?”
“빨리 출발합시다!”
해방, 그리고 복수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