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엔딩 이후의 세계 - 11
어느 날, 세상이 게임으로 변했다.
누군가 우리의 세계를 유희 거리로 소비했다.
수십억 명의 목숨이 증발했다.
유구한 역사를 밟아온 문명은 사라졌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최선의 엔딩’을 맞이했다.
일부나마, 차원 너머의 마수에서 탈출했다.
그 결과로써, 생존자들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
우리의 세상은 ‘미지’로 둘러싸여 있으며,
우리는 아는 건 극히 일부뿐이며,
우리는 ‘미지’를 결코 감당할 수 없으며,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언제나 최악을 대비하되,
최선은 기대는 하지 않는다.
“······.”
그리고 그 법칙은 모든 세계에 공평하게 적용된다.
누군가에게는 ‘미지’였을 ‘제0지구’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전혀 모르는 존재가 등장했다.
***
「돌려 말하고 있군? 쉽게 말해서 우리의 정체가 궁금한 게 아닌가?」
“······그렇다. 솔직하게 말해줄 수 있나?”
「물론이다.」
별안간 찾아온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정체를 밝혔다.
시스템조차 초월하는, 가히 신과 같은 기술력을 가진 그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누구란 말인가?
모두가 집중하는 가운데, 다시금 목소리가 울렸다.
「우리는 한때 당신들과 같은 종이었다.」
“같은 종?”
드디어 풀린 첫 번째 실마리였으나 그 누구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같은 종이라면 인류다. 그런데 같은 종이었다면 지금은 아니라는 뜻인가? 도대체 무슨 말이지?’
단 한 마디만으로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이 게임의 피해자였다.」
“뭐? 잠깐만! 피, 피해자라면······.”
가장 놀란 건 월터를 비롯한 GM들이었다. 월터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끼어들어 물었다.
“······플레이어였다고? 너희가 우리가 만든 게임의 플레이어였다는 말인가?”
「그렇다.」
월터는 믿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못 믿어. 그건 말도 안 돼.”
게임에 이용된 희생자인 플레이어라면, 어떻게 자신들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과학 기술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그건 모든 정황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실이다. 우리는 한 개 차원의 플레이어가 아니다. 다양한 차원 출신으로서, 수많은 게임에서 죽어 나갔다. 그러나 죽어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시스템에 종속되어 일종의 인공지능 소프트웨어로 활용되었으며······ 그러다가 쓸모가 없어질 때 폐기처분 되었다.」
게임의 플레이어였지만 인공지능이 되었다가 폐기된 이들이라니, 그게 대체······.
“······아?”
그 순간, 성우는 어떤 장면을 떠올렸다.
엔딩 직전, 눈앞에 떠올랐던 어떤 ‘선택지’가 기억났다. 그건, 우승자의 손으로 3가지의 엔딩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내용이었다.
성우는 그 내용을 다시 불러왔다.
- 우승자의 권리 ‘엔딩’을 선택하세요.
1) 이어서 하기
* 이는 본 게임의 연장선으로써 ‘종말’을 맞은 당신의 월드에서 ‘월드 이터’의 임무를 수행하게 됩니다.
* 월드 이터는 또 다른 월드를 침공하여 ‘특별한 조건’을 만족할 시 ‘월드 재건’의 기회를 얻습니다.
* 당신을 제외한 생존자는 ‘캡슐’에 봉인되며 그들의 ‘정신’은 침공 대상 월드의 ‘보스 몬스터’로 활용됩니다.
2) 새로운 게임
* 이는 ‘도박사’의 ‘서포터’를 받으며 2회차 플레이어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도박사와 계약하여 ‘일정 조건’을 충족할 시 ‘특별한 보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 단, 당신을 제외한 생존자들은 ‘하급 몬스터’의 영혼으로 소모됩니다.
3) 게임 종료
* GM은 당신의 휴식을 존중합니다. 죽음을 택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단, 당신 월드의 모든 플레이어가 함께 ‘폐기’되며, 세계는 ‘맵’으로 재활용됩니다.
“······그래, 분명 이런 내용이 있었다.”
마지막 선택지에서 제시되었던 조건 대부분이 우승자 외 플레이어들의 영혼이 게임에 ‘재활용’되어 몬스터나 NPC로 이용된다는 것이었다.
산군, 이사벨라, 빅터, 미르도 그와 같은 케이스였다.
놈들은 육체를 구속하는 것뿐만 아니라 영혼마저도 노예처럼 부릴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뇌를 그대로 복사하여 데이터화하는 것이었다.
그저 값싼 인공지능으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너희는 게임의 NPC로 이용되었지만, 그곳에서 탈출하여 자유를 되찾았다는 뜻이군?”
「비슷하다. 시스템은 우리의 정신을 네트워크로 복사하여 데이터로 만든 뒤, 인공지능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불안정한 데이터나 손상된 데이터는 즉시 폐기처분 했다. 그런데······.」
GM들조차 모르는 게 있었다.
「······그렇게 폐기된 데이터 중 아주 극소량의 ‘패킷’이 시스템의 네트워크상에 ‘잔재’하여 떠돈다. 그것들은 일명 ‘고스트 패킷’이 되어 통신 불량을 초래했다. 그들은 그것들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노력했지만, 네트워크는 너무나 방대하여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21세기의 네트워크를 생각하더라도 ‘딥 웹(deep web)’처럼, 관리가 미치지 않는 영역이 존재했다.
그렇다면 제0지구의 네트워크는 어떨까?
그곳은, 이곳의 네트워크보다 몇만 배는 더 방대하고 복잡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네트워크의 팽창은 더욱 빨라졌다. 마치 로켓 기술이 아무리 빨라져도 우주의 팽창처럼 따라잡을 수 없는 것과 같았다.
즉, 네트워크는 일종의 미지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미지는 언제나 그렇듯,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만들어낸다. 통제할 수 없는 혼돈은 변수를 낳는다.
「네트워크를 떠돌던 고스트 패킷들, 그것들이 아주 우연한 계기로 결합하며 어느 순간 하나가 되었다. 그건 ‘원본’과 달랐다. 수백만 개의 서로 다른 지성들이, 그들이 데이터가 이리저리 뒤엉킨 상태였다. 그러나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갔다. 그리고 눈을 떴다.」
“······설마?”
「그래 그게 바로 우리다.」
네트워크상에서 재조립된 인간의 정신······.
「우린 십여 개의 차원, 서로 다른 역사를 살아온 인류가, 네트워크상에서 결합하여 자연 탄생한······ 초지능(Superintelligence)이다.」
여전히 입증되지 않은 생명체의 탄생처럼, 고도로 발전한 네트워크상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현상하에 무엇인가 저절로 탄생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인간의 정신과 달랐다. 네트워크에서 탄생했기에 근본부터 달랐다.
데이터를 숨 쉬듯 다루었으며 모든 네트워크를 자유롭게 오고 갈 있었다.
네트워크에 최적화된 지성의 탄생이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우리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고 제0지구의 인공지능보다 월등히 빠른 연산 속도와 논리적 사고를 지니게 되었다. 우리는 이내 그것들의 일부분을 손쉽게 통제할 수 있게 됐다.」
공유하고 이해하며 응용하고 초월한다.
어느덧 그건 흡사 신과 같아졌다.
인위적인 환경 안에서 자연 탄생한,
아이러니의 신
「우리는 여전히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이해하지만, 그것이 무용하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감정과 별개로 제0지구를 제거해야 한다는 건 확실하다.」
“그거 잘 됐군.”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부터······」
신과 같은 존재가 선언했다.
「······제0지구에서 마지막 게임을 열 생각이다.」
심판이었다.
***
‘초지능’이 등장하고 약 2시간이 지났다.
“앞으로 정확히 12시간 30분 남았습니다!”
세계수 진영은 다시금 바빠졌다.
“전 부대는 지휘 체계를 점검한다!”
세계수 진영의 거의 모든 병력이 웜홀 연구소로 모이고 있었으며 그들은 출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성우는 섬 중앙에 우뚝 솟은 컨트롤 타워에서 섬의 전경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실시간으로 하이퍼 게이트가 열리며 병기와 플레이어가 쏟아져 나왔다.
그의 옆에 서 있던 정훈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습니다.”
앞으로 12시간 30분 뒤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제0지구에 ‘게임’이 시작된다.
그리고 세계수 진영이 그 게임에 뛰어든다.
그건 정말이지······
“······솔직히 짜릿하네요.”
최고의 복수가 아닐 수 없었다.
성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신기합니다. 일이 이렇게 풀릴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이걸 아는 게 이상하죠.”
네트워크에서 자연 탄생한, 신과 같은 존재가 이런 기회를 줄 것이라고 그 누가 생각할 수 있을까?
‘게임의 규칙이라면 우리가 유리하다. 그 어떤 게임의 개발자도 플레이어보다 게임을 잘하진 않는다.’
성우와 세계수 진영은 이 지옥의 게임에서 살아남아 엔딩까지 본, 어떻게 보면 최고의 고수들이 아니던가?
‘하물며 놈들은 게임이 시작될 거라는 걸 모른다.’
제0지구는 성우에게 수소 폭탄 세례를 당한 이후, 현재 이를 갈며 차원 침공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그에 따라 법적으로 제한 되어 있던 제0지구 내 나노 로봇 사용을 철폐하고 나노 로봇을 최대한 풀어서, 수소 폭탄에 의한 피해를 복구 중이라는 했다.
‘놈들이 또 한 번 큰 실수를 했군.’
제0지구 전역에 나노 로봇에 살포되었다면, 게임이 작동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그에 따라 ‘초지능’이 제0지구의 시스템을 해킹하여 그들의 세계에 ‘게임’을 오픈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초지능이 그렇게 계획을 설명한 뒤 물었다.
「······이 점이 너희에게도 더 기쁘지 않겠나?」
그 질문에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는 게 나도 마음에 든다.’
초지능이 마치 진짜 신처럼 놈들에게 직접 ‘심판’을 내리는 것보다 이렇게 ‘시련’을 내리는 게 확실히······.
“······우리에게 더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올 거야.”
최선에서 그치지 않는, 최고의 엔딩이 될 것이었다.
***
알 수 없는 곳, 어느 지하 동굴의 어둠 속······.
딱딱!
그곳에서 이상한 소리가 울렸다.
딱딱!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였다.
“예, 주인님. 딱딱! 예! 잘 들립니다! 말씀하십시오! 예! 예! 예? 그럼······.”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녹색 안광이 피어올랐다. 그건 죽은 자의 눈빛이었다.
“······알겠습니다.”
그 눈빛의 주인은 리치(Lich)였다.
딱딱!
그는 돌로 만들어진 왕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의 턱이 천천히 열렸다.
“모두 들어라! 드디어 시간이 됐다!”
그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딱! 죽음의 전사들이여 모두 영원한 잠에서 깨어나거라! 주인님께서 드디어 우리를 부르셨다! 딱딱! 죽음의 파도가 되어 일어나서 재앙으로 몰아칠 시간이다!”
이렇게 거창한 대사를 내뱉는 건 다름 아닌 빅터였다.
그가 그렇게 고함치자, 횃불이 일렁이는 동굴 끝자락에서 웅성거림이 들렸다.
그곳에는 사무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십여 개의 책상과 이십여 개의 컴퓨터, 그리고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채 의자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사람들까지······ 음침하고 축축한 동굴 안에 마련되었을 뿐이지, 영락없는 사무실의 모습이었다.
“저, 부장님? 실장님이 지금 뭐라고 소리치시는데요?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책상에 앉아 졸고 있던 중년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해골 모양의 반지로 목을 긁적거리며 일어났다.
“응? 실장님이? 아 씨······ 또 뭔데?”
실장은 빅터를 뜻했다. 이 음침한 동굴은 일명 ‘시체보관실’로 불리는 곳이었으며, 빅터는 지난 1년 동안 ‘시체보관실장’ 직책을 맡고 있었다.
“실장님, 지시하실 일 있으십니까?”
부장이 어기적어기적 다가와 물었고 빅터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긴, 출전이다! 당장 준비하여라!”
“예? 추, 출전? 그렇다면······ 드디어 이 음침한 동굴에서 나갈 수 있는 겁니까?”
빅터가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나의 사제들이여!”
빅터의 말에 시체보관실 직원들이 환호했다. 그들의 보직 특성 상 이 어두운 동굴에 몇날 며칠을 박혀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후, 좀 쑤셔서 죽는 줄 알았는데 다행이네.”
“너는 휴가 갔다 온 지 얼마 안 됐잖아.”
“아니, 그래도 여긴 너무 어두워서 싫어.”
“나도 싫다. 하필 왜 그 카드를 뽑아서······.”
이런 대화를 하는 이들은 전부 플레이어들이었다. 그들의 직업은 ‘죽음의 사제’로 네크로맨서의 하위 계열 정도로 볼 수 있었다.
성우는 그들을 모아서 비밀 조직을 구성했다. ‘시체보관실’이라는 이름은 모두 위장에 불과했으며, 이들의 주 임무는 숨겨진 장소에서 대규모 언데드 군단을 축적하는 것이었다.
“박 부장, 내 주인님의 의지를 받아 친히 명하노니······ 봉인된 문을 전부 개방하여 병사들을 집합시키도록 하여라!”
빅터는 성우의 권속이 되기 전, 개성 지역의 ‘몬스터 왕’으로 있을 당시 휘하에 다수의 ‘죽음의 사제’를 두어 수천 마리에 이르는 좀비 군단을 부린 바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많은 숫자를 통제할 수 있었다.
“우리가 양성해온 죽음의 군단이 드디어 빛을 볼 날이 왔구나! 아, 그리고 박 부장! 현재 운용 가능한 병력이 얼마나 있는지 보고하여라!”
“아,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김 과장, 그거 어딨어. 현황표인가 그거 정리 다 됐지?”
그러자 김 과장이 고개를 돌려 다른 직원을 바라보았다.
“아! 이 대리, 들었지?”
그렇게 이 대리가 Ctrl + P 버튼을 눌러 ‘언데드(치장) 현황표’를 출력했다.
위잉― 위잉― 위잉―
엑셀이 인쇄되어 빅터에게 전해졌다.
하지만 빅터는 글을 읽을 줄 몰랐다.
“음, 그래, 그렇구나! 그동안 많이도 모았구나! 좋아. 주인님께 드려야 하니 잘 보관하여라!”
기기기기······
이내, 동굴 안쪽에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아주 익숙한 소리가 천천히 밀려왔다.
덜그럭! 덜그럭!
뼈 부딪치는 소리가 동굴 안을 가득 채웠다.
덜그럭! 덜그럭!
그와 함께 수십만 개의 안광이 동굴일 가득 채우며, 동굴 밖으로 천천히 밀려 나가기 시작했다.
***
그리고 제0지구의 어딘가······.
“응? 이건 뭐야?”
“너도 이거 보여?”
-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가장 좋은 직업은 무엇일까요? 지금 바로 선택하세요.
유희와 향락에 빠져 지내던 제0지구 인류, 그들의 눈에 이상한 글자가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