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엔딩 이후의 시대 - 8
상황은 정리됐다.
아사달을 덮친 ‘징벌의 불’은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했고 3방향에서 이루어진 ‘비스트 테러’ 역시 모두 진압되어 한 줌의 경험치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큰 피해는 없었다.
이내 경수가 성우를 찾아와 상황을 보고했다.
“······현재 1급 경계 태세 유지하고 아사달 주변 50km 이내의 모든 장소를 수색 중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를 추가 테러를 경계해야 했으며 피해 복구를 위한 후속 조치도 필요했다.
“그리고 오리지널스 조직원 238명을 생포했으며 사살한 숫자는 그보다 많은데 음, 정확한 숫자는 아직 집계 중입니다. 아, 그리고 예전에 재건 동맹을 이끌었던 이영환 회장, 그 인간 기억하십니까? 그 인간도 이번에 붙잡혔습니다. 참나, 오리지널스 심판관이었더군요.”
‘화이트 울프 감식반’이 이 회장과 그 일당을 끝까지 추적하여 결국 놈들을 생포한 것이었다. 집요한 추적 끝에 거둔 성과였다.
“그 노인네를 이용하면 한국 서버에 기생하고 있는 오리지널스 조직원들을 줄줄이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건 정보국장에게 맡기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세요.”
이처럼 오히려, 적들이 쏟아부은 모든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냄으로써, 적의 세력이 크게 약화한 듯했다.
다만, Z는 사라졌다.
유일하게 그를 목격한 바 있는 지수가 증언하길, 징벌의 불을 이용한 공격이 실패하자 도주를 택했고 지수가 서둘러 놈을 추적했지만,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했다. 아무래도 미리 준비해둔 포탈을 이용한 듯했다.
“Z, 그자는 상당한 실력자였어요. 그리고 숨기고 있는 게 더 있는 듯했는데, 반드시 다시 돌아올 거예요. 더 큰 무기를 들고요······ 화를 면하기 위해서는 먼저 찾아내서 제거해야만 해요.”
지수가 우려를 표했다. 그런 놈이 살아 있는 한 언젠가 더 큰 재앙을 불러올 것이 뻔했다. 하지만 성우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아마 곧 만나게 될 겁니다.”
당장은 그놈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가 닥쳐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우는 경수를 바라보았다.
“지금 즉시 ‘무제한 폐쇄 작전’을 시작해주세요.”
무제한 폐쇄 작전, 그건 웜홀이 다시 열릴 때를 대비한 방어 계획이었다.
섬의 연구 시설을 완전히 폐쇄하고 그 주변에 거의 모든 병력을 투자하여 아무것도 밖으로 나올 수 없게 만드는 작전이었다.
“······알겠습니다. 수소 폭탄도 미리 스탠바이 해두라고 명령하겠습니다.”
경수는 총괄통제실장으로서 가장 먼저 웜홀 연구소의 보고를 받았기에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제한 폐쇄 작전’이 성우 입에서 나오는 날이 오다니, 표정이 절로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최악의 시나리오가 시작된 것이었다.
“아직 몇 시간의 여유가 있으니 서두르기보단 철저하게 대비해주세요. 제가 이미 몇 명을 보내놨습니다.”
성우는 이미 ‘산군’과 ‘부속실장’은 웜홀 연구소로 보내두었다. 그들이 선제 조처를 할 것이었다.
“그럼 아마존에 가 있는 이사벨라도 호출할까요?”
“아, 그쪽도 제가 먼저 연락했습니다.”
모두가 웜홀 근처로 모이기 시작했다.
***
우우우우―
마법 공학 엔진을 단 배들이 줄지어 드넓은 해역으로 나아갔다. 21척의 배에 총 489명이 탑승해 있었다.
Z의 ‘결사대’였다.
저 망망대해 어딘가에 있을 숨겨진 섬, 그 안의 특별한 연구 시설, 그곳이 이들이 목표였다.
“우리는 즉시 섬과 연구 시설을 점령하고 Z님이 오시기를 기다린다!”
오리지널스 조직원 중에서도 정예 중의 정예로 구성된 이들은 평균 레벨 19에, 월드 곳곳에서 공수해온 특별한 아이템으로 무장했다.
그간 세계수 진영과 정면으로 맞서 싸울 힘이 부족하여 비스트 테러 따위로 항전해온 오리지널스지만, 적어도 이들만큼은 세계수 진영의 군대와 견주어볼 만하다는 게 자체적인 평가였다.
우우우우―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감 넘치게 바다를 가르며 돌격했는데······ 얼마 못 가서 멈춰 서고 말았다.
“무슨 일이지?”
함대의 지휘를 맡은 중년의 멕시코 남자, 알바레스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자신이 명령을 내린 적도 없는데 함대 전체가 우뚝 멈춰 선 것이었다.
“그, 그게······.”
그런데 관측 승무원은 정찰용 마법 드론으로 무언가를 목격했는지 꽤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듯 몇 번이고 마법 드론이 보내오는 장면을 확인하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했다.
“······드, 드래곤입니다.”
“뭐?”
그 말에, 알바레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뭐라고? 드래곤? 드래곤이 나타났다고?”
“그, 그렇습니다.”
그는 서둘러 갑판으로 나갔다.
“저쪽입니다!”
갑판병이 하늘 한쪽을 가리켰다.
“마, 맙소사······.”
그것은 새파란 창공에서 검은색의 거대한 날개를 펼친 채 함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그건 분명 드래곤이었다.
“······.”
알바레스는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못했다.
드래곤이라니, 489명의 정예 부대지만, 다른 무엇도 아닌 드래곤을 이길 수 있다고는······ 자신하지 못했다.
훙― 훙―
드래곤은 무슨 목적인지 날개를 천천히 펄럭이며 함대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알바레스는 맹수 앞에 선 피포식자처럼 몸이 굳는 걸 느꼈다.
‘레드 드래곤이 아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세계수 진영 소속의 이사벨라는 아니야. 조금이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의 적이 아닐 수도 있으니······.’
그런데 그 ‘블랙 드래곤’의 등 뒤에 사람이 있었다. 붉은 머리칼의 여인이 턱을 괸 채 누워있었다.
“어? 사람?”
사람이라면 말이 통하지 않을까? 알바레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입을 움직여 무어라고 말하는 게 보였다. 드래곤에게 말하는 걸까? 어쩌면 공격하지 말라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 대화 내용은 알바레스의 기대와 달랐다.
“자, 미르 때가 왔어.”
그리고 드래곤의 등에 타고 있는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 그녀가 바로 세계수 진영의 악명 높은 레드 드래곤, 이사벨라였다.
“첫 번째 실습이니까 지금부터 집중해. 그리고 내가 가르쳐준 대로 해봐. 깡그리 쓸어버리는 거다.”
이사벨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하품을 쩍, 했다. 그것만으로도 목구멍에서 불이 일렁거리며 회색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선생님이 가르쳐준 대로면······ 너무 상스러워요.”
미르는 마치 큰 고민이라는 듯 말했다.
“뭐? 사, 상스러워? 내가 상스러워?”
“아? 그게 제가 아직 언어구사력이 미흡해서······.”
“웃기지 마! 넌 말만 잘하는 놈이잖아!”
이사벨라는 소리를 지르며 미르의 등을 손바닥으로 퍽퍽 내리쳤고 미르는 움찔거리며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지금 같은 순간은 상스러움, 그게 필요할 때야. 그냥 빨리해! 가장 드래곤 다운 제압 방법 첫 번째, 기억하지? 자, 당장 시작해. 빨리!”
미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날개를 접고 하강했다.
“오, 온다!”
그 움직임에 결사대의 함대, 갑판 위의 플레이어들이 다급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들이 대응할 틈도 없이 미르는 순식간에 해수면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그 큰 입을 쩍 벌리자 목구멍 안에서 검은 일렁거림이 터져 나왔다.
콰아아아아아!
검은 브레스가 선두의 배 2척에 쏘아졌다. 레드 드래곤의 화염 브레스와 달리, 독과 산성을 내뿜었다.
“으아아아!”
철로 만들어진 경비선이 치즈처럼 녹아내렸다.
“그래, 그거야! 목에 힘 더 주고! 더 멀리!”
눈 깜짝할 사이에 3척의 배가 으스러지고 녹아버리며 메케한 연기를 내뿜었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고 출렁이며 파도가 일어났다.
“내 화염 브레스만큼은 아니지만 네 것도 꽤 멋진데? 좋아 계속해! 그게 바로 드래곤이야!”
하지만 이사벨라의 기대와 달리 미르는 브레스를 멈춘 뒤 캑캑거리더니 딸꾹질을 시작했다.
“끅! 으, 매스꺼워······ 전 아무래도 선생님 방식과 안 맞는 것 같아요.”
“뭐라고?”
“솔직히 아빠 방식이 좋아요.”
“아오, 진짜!”
미르는 제 고집대로 전투 방식을 바꿨다.
- 주의! 해당 지역에 ‘대강령(大降靈)’이 시작됩니다.
이게 ‘아빠의 방식’이었다.
허공에서 검은 연기가 터져 나오더니 해수면 위로 뭉게뭉게 뻗어 나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얀색 물체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절그럭! 절그럭!
스켈레톤이었다.
“마, 막아!”
그것들은 배 위로 올라타 선루 갑판을 순식간에 장악했다. 그리고 선실을 향해 밀고 들어갔다. 곳곳에서 육탄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폭발!”
펑! 펑! 펑! 펑!
미르가 소리치자 함대의 이곳저곳에서 시체가 폭발하며 배에 큼직한 구멍을 뚫었으며 그 충격에 배가 뒤흔들리며 갑판병들이 와르르 넘어졌다.
“11번 함이 장악당했다!”
하물며, 미르가 소환한 스켈레톤 중에서는 거대한 바다뱀의 모습을 한 ‘시 서펜서’ 등도 있었다.
그것들의 그림자가 배 아래에서 꿈틀거리며 움직이더니, 어느 순간 기둥처럼 치솟아 배를 휘어 감았다.
꽈드드드!
수십 미터의 몸뚱이로 배를 칭칭 동여매고 힘을 주자, 배가 뒤틀리며 구겨졌다. 그리고 그대로 바다 아래로 잡아끌었다.
“가라앉는다!”
“으아아! 빠, 빨리 나가!”
탈출하지 못한 플레이어들은 배와 함께 수장되었다.
“······푸!”
일부는 헤엄쳐 나와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지만······.
치이이······
어느새 머리 위에서 보라색의 맹독 구름이 피어올라 맹독성 비를 뿌려댔다. 물 밖으로 겨우 나오니 더 끔찍한 액체를 뒤집어썼다.
“악! 어, 얼굴이 녹고 있어!”
“저 비를 맞지 마!”
그야말로 지옥도가 펼쳐졌다.
“역시 저는 이쪽이 재밌어요!”
하지만 미르는 이 상황이 퍽 즐거운지, 조금 전과 다르게 실실 웃었다. 이사벨라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크로맨서는 도대체 왜 나한테 이 자식을 맡긴 거야? 이건 드래곤이 아니라 완전 리치잖아!”
결사대는 섬을 밟아보지도 못한 채 수장되고 말았다.
***
웜홀 연구소 지하 3층, 그곳에 네크로맨서가 도착했다. 그 외에도 지수, 경수, 정훈까지 세계수 진영의 고위 인사들이 대거 동행했다.
“오셨습니까?”
연구소장, 헨드릭스가 그들을 맞이했다. 웜홀의 이상 현상과 씨름하느라고 진땀을 뺐는지 가운을 벗고 반 팔만 입고 있었는데, 우락부락한 팔뚝이 드러났다. 연구소장이 아니라 경비대장이라고 해도 믿을만했다.
“죄송합니다. 원인을 규명하지 못했습니다.”
이번 사태는 연구원들이 해결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물며 제0지구 출신인 GM들조차 그 이유를 규명해내지 못했다.
“알아낸 게 전무합니다. 면목 없습니다.”
도대체 누가 어떻게 웜홈을 복구하고 있는지, 일말으 단서조차 찾지 못한 것이었다.
‘결국, 그 존재를 맞이하는 수밖에 없다.’
웜홀이 열리는 걸 막을 수 없다면, 그곳에서 뭐가 나오는지 확인한 뒤 대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이 미스터리의 진실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었다.
“아, 왔는가?”
산군이 사무용 의자에 앉아 성우에게 손을 흔들었다.
“혹시 내가 없을 때 반응이 왔나?”
산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별 건 아니었어. 그냥······ 자네를 빨리 데려와 이곳에 앉히라고 이제 5시간 남았다고 종용하더라고?”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겠다만, 적어도 성우를 만나기를 희망하는 것으로 보였다.
대체 왜지?
“아, 그리고 전쟁을 준비하라는 의미심장한 말도 들은 것 같은데, 이게 또 내가 비몽사몽 한 와중에 듣다 보니 그들이 우리랑 싸우겠다는 건지, 아니면 같이 힘을 합쳐 다른 싸우자는 건지 그게 헷갈려서 말이야.”
싸우다니?
전쟁은 항상 준비하고 있었다만, 그 대상이 누가 될지, 그게 문제였다.
“세계수 진영 전체에 재난 대비를 명령하세요. 그리고 수면 아래에 있는 ‘군단’의 봉인을 해제해주시고요.”
앞으로 5시간 뒤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
세계수 진영은 한 달에 한 번씩 재난 대피 훈련을 시행했다. 마치 민방위 훈련처럼 재난 상황을 가정하여 대피와 방위 훈련을 하는 것이었다.
애애애애애―
그런데 지금은 실제 상황이었다.
아사달 도심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실제 상황임을 알리며 통제를 따르고 정해진 행동 지침에 따라 행동하라는 안내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삐이이이―
그리고 수백 마리의 히포그리포 편대가 이곳저곳을 오고 가며 피난 감독했다.
“남부 주민 여러분은 피난 요원의 인도에 따라 B4 구역으로 이동하세요!”
혜연은 그 히포그리포 편대의 지휘관으로서 ‘그리핀’ 돌풍이를 타고 날아다니며 피난 현장을 통제했다.
“조심히 내려갑시다!”
주민들은 아사달 지하 곳곳에 설치된 ‘지하 계단’을 통하여 지하 피난 시설로 들어갔다.
“좋습니다. 지금처럼 천천히 이동하세요.”
지하 계단은 어둡고 긴 복도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런 복도가 아사달 지하에 수백 개에 달했는데, 그것들은 전부 단 한 곳으로 이어졌다.
“거의 다 왔습니다.”
복도 천장의 이정표가 목적지를 안내했다.
- 제1 방공호 (250m)
세계수의 뿌리 아래, 무연이 심혈을 기울여 지은 거대한 방공호가 존재했다. 천여 명의 건축가들이 3개월에 걸쳐 설계한 곳으로, 웬만한 공격으로는 무너지지 않을 곳이었다.
그곳에는 무려 1년을 버틸 수 있는 물자가 비축되어 있었으며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처럼 다양한 아공간(亞空間)으로 연결된 아이템들이 비치되어 물리적 공간,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
“자, 모두 자리에 앉아서 방어막을 설치합시다! 평소보다 2배씩 집중하세요! 시작합시다!”
한호의 아버지, 정호는 ‘제1 방공호 센터장’으로서 방공호의 추가 방어막 전개를 담당했다.
우우우우······
25명의 ‘개척자’가 힘을 합쳐 쌓아 올리는 대규모의 ‘안전 구역’은 이 거대한 방공호 안에 두 번째 방공호를 설치하는 셈이었다.
이처럼 외부 성벽, 신목의 그늘, 방공호, 대규 안전 구역까지, 아사달이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한 곳이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네 줄로 차례차례 입장합니다! 모두 요원들의 통제에 따라주세요!”
그곳으로 세계수 진영의 주민들이 줄지어 들어오는 중이었다. 매달 한 번씩 연습했기에 피난 과정은 큰 혼란 없이, 아주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한편, 우선 피난 대상인 노약자들은 ‘특별 전용 통로’를 통해 입장할 수 있었다.
“자, 우리는 이쪽으로 갈 거예요! 반장, 맨 뒤에서 모두 들어가는지 확인하세요!”
한 무리의 아이들이 그 특별 전용 통로 앞에 등장했다.
“얘들아, 부모님은 이따가 방공호 안에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은 걱정하지 말고 선생님들을 따라오세요! 자자, 앞으로 가요.”
이 아이들은 ‘세계수 아카데미’의 어린 학생들로 수업 도중에 급히 피난 온 것이었다.
“장난치지 말고 친구 등에서 눈 떼지 마!”
그리고 그런 아이들 사이에서도 맨 뒤에 서서 남다른 역할을 맡은 녀석들이 있었다.
“떠들지 말고 앞으로 가!”
게임이 유지되는 한 전시를 항상 가정해야 하는 만큼, 반 내에서도 반장이 어느 정도의 ‘지휘권’을 가지고 아이들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야! 대열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그들 중에서도 녹색 견장을 단 남자아이가 있었는데, 녀석은 맨 뒤에 서서 아이들을 시시때때로 갈궜다. 마치 양 떼를 통제하는 목양견 같았다.
“야! 여기 오기 전에 교실에서 들었잖아! 혼잡해서 혼자 떨어지면 위험해!”
“아, 알았어······.”
“그래. 화내서 미안해. 그런데 지금은 훈련하는 게 아니잖아? 조금만 참자.”
“······응.”
그 녀석은 혜연의 친척 동생이자 ‘최강 돚거’의 열열한 팬보이인 영인이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직접 겪은 게 많은 녀석이었기에 진취적이고 드센 편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13세 미만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초급반’의 반장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영인의 앞을 막아섰다.
“이야······ 이제는 대장 노릇도 하고 있네? 너 이 자식, 날로 대단해지는데?”
그 목소리에 아이들의 걸음이 멈춰섰다. 그리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목소리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그 사람이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 한호 형!”
그건 한호였다.
“오랜만이다? 잘 지냈지?”
그는 트리 가드의 지휘관인 만큼, 아사달에 남아 피난 현장을 지휘하고 있었다.
“우와! 저기 봐! 혀, 현무다!”
그의 등장에 아이들은 난리가 났다.
“헐! 진짜다! 진짜 현무야!”
“뭐야 그럼, 영인이랑 친하다는 게 진짜였어?”
아이들 사이에서 세계수 진영의 지휘관들은 영웅 대접을 받았는데, 그들 중에서도 네크로맨서·발키리·현무는 그야말로 선망의 대상이었다.
아이들은 초롱초롱한 눈빛을 쏟아내는 가운데, 영인이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한호에게 다가왔다.
“오, 견장 멋진데? 학교 졸업하면 당장 트리 가드로 채용해야겠는데?”
하지만 녀석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또 큰일이 벌어진 거죠?”
영인이 녀석은 언제나 강직한 편이었지만, 게임을 겪은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이런 상황 속에서는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나며 약해졌다.
특히나 영인은 그 난리 속에서 아버지를 잃었고 처절한 전투를 수차례 직접 겪은 만큼, 이런 상황이 본능적으로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한호는 녀석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별일 없을 거야. 우리는 그때보다 훨씬 강해. 그리고 너도 그때보다 몇 배는 강해졌잖아?”
한호의 격려에도 영인은 마주 웃지 못했다.
“정말이에요? 진짜······ 아무 일도 없을까요?”
한호는 영인의 어깨, 녹색 견장을 쓰다듬었다.
“그래, 무슨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이제 아무 문제 없어. 예전처럼 또 이기면 돼. 생각해 봐. 우리가 진 적이 있었냐? 없지?”
녀석은 그제야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한호가 피식 웃고 돌아섰다.
“무슨 일 생기면, 1승 추가하고 올게. 넌 친구들이 다치지 않게 네 임무를 확실하게 수행해.”
***
그리고 예정된 시간, 5시간이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