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엔딩 이후의 시대 - 4
달이 짙은 밤, 큰 소란이 땅을 울리고 있었다.
오리지널스의 ‘심판관’ 아드리안은 세계수 진영의 기습에서 탈출한 이후 북쪽에 열린 하이퍼 게이트 부근에 도착했다.
“좋아, 벌써 파티 분위기군?”
그는 조직원 몇 명과 함께 빌딩 옥상에 자리하여 ‘비스트 테러’의 광경을 지켜보았다.
게임을 겪으며 망가질 대로 망가진 도심이었는데, 보스 몬스터들이 헤집고 지나가자 앙상하게 남아 있던 뼈대마저 으스러지는 중이었다.
콰―과―과―과―광!
그런데 사실, 그 광범위한 파괴 대부분은 ‘세계수 함대’의 포격 때문이었다.
4대의 비행선에서 쏟아부은 포탄이 주인 없는 도심을 완전히 일그러뜨리며, 건물 틈바구니에서 기어 다니는 것들을 통째로 박멸했다.
찍! 찍! 찍! 찍!
큰 개만 한 괴물 쥐들이 화염에 집어 삼켜지며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겨우 포격 따위로 우리가 만든 특제 보스 몬스터를 잡겠다고?”
“하하! 어림도 없죠.”
군벌 몬스터를 따라 등장한 ‘잡몹’은 어떻게 밀어낼 수 있다고 해도 ‘보스 몬스터’는 그 정도의 공격으로는 쓰러지지 않았다.
쉭!
화염 사이에서 촉수 한 가닥이 치솟더니······.
퍼―엉!
폭음과 함께 하늘에 떠 있던 비행선 한 척이 기울어지며 빌딩 사이로 추락했다. 그러자 주변에 떠 있던 비행선 3대가 서치라이트를 사방으로 흔들어대며 고도를 높였다. 도주였다.
“워, 이걸로 3대째입니다!”
“뭐야? 비행선도 별거 아니잖아?”
세계수 진영이 자랑하는 마법 공학의 산물, 비행선이 속수무책으로 떨어지는 장면을 보고 있으니, 오리지널스 조직원들로서는 오랜 투쟁 끝에 승리를 거머쥔 것처럼 짜릿한 기분이었다.
“곧 성벽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보다시피 이들이 소환한 것들은 엔딩 이전의 보스 몬스터와 사뭇 달랐다. 인위적인 방법으로 탄생하여 특별한 방법으로 강화에 강화를 거듭한 존재, 흔히 말하는 생물 병기나 다름없었다.
쿵― 쿵― 쿵―
그것들이 회색 연기를 뚫고 검은 도심을 가로질러 아사달의 성벽을 향해 성큼성큼 나아가는 모습은 기괴하면서도 웅장했다.
“정말이지······ 아무리 놈들이라도 신격자가 오지 않는 이상 못 막겠네요.”
신격자, 즉 신격을 가진 플레이어는 세계수 진영에도 단 3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 중 2명이 지금 이곳에 없었다.
아드리안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런데 그 잘난 인간들이 아직도 등장하지 않는 걸 보면 말이지, 내 직속의 블랙 요원들이 일 처리를 꽤 잘 하는 중인 모양이야.”
“블랙 요원······ 이라면? 아!”
블랙 요원은 흔히 간첩을 뜻했다.
아드리안은 오래전부터 세계수 진영에 블랙 요원들을 위장 잠입시켰다. 그리고 이 작전에 발맞춰 후방 교란 활동을 진행하도록 지시했다.
“뭐, 네크로맨서 그놈은 어디에서 뭘 하는지 아직도 못 찾아냈지만, 내가 지시해서 호주에 가 있는 발키리 쪽에는 3명이나 붙여놨거든?”
아드리안의 허세 가득한 말에 조직원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입을 열었다.
“서, 설마 발키리를 아, 암살한 겁니까?”
“뭐? 미쳤냐?”
“······예?”
아드리안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누가 어떻게 발키리를 암살해? 그건 아마 Z님께서 직접 나서야 할 거야.”
“아, 그렇다면······.”
부하는 머뭇거리며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아드리안의 직속 부하가 아니었기에 그 ‘블랙 요원 작전’에 관하여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에 아드리안이 자랑스레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발키리, 그 여자가 돌아올 길, 그러니까 호주에 마련해두었을 ‘하이퍼 게이트’를 부수기만 해도 우리가 세계수를 뜯어 먹고도 남을 시간을 벌어주지 않겠어?”
“······아? 아!”
아드리안은 자랑스러운지 저 혼자 킬킬 웃어댔고,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조직원들은 오오, 하며 적당한 리액션을 해댔다.
“역시 심판관님이십니다.”
“정말,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십니다.”
이렇듯, 모든 것이 원활하게 진행되자 그들은 다소 성급하게 승기를 점치며 기뻐하는 등, 빠르게 고양되어 가는 중이었다.
적어도······.
“그래, 나쁘지 않은 작전이었어.”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흘러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응?”
여자 목소리, 냉소가 담긴 여자 목소리는 그들의 머리 위에서 울렸다.
한껏 흥분했던 아드리안과 조직원들의 머리마저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들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 어떻게······.”
그리고 하나 같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을 헉, 하고 들이마셨다.
건물 옥상,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선 첨탑에 꼿꼿하게 서 있는 누군가······.
“······바, 발키리!”
그건, 발키리, 지수였다.
검붉은 빛깔의 전신 갑주를 입은 여인이 긴 흑발을 휘날리며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놈들이 바짝 얼어붙어 아무런 반응도 취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녀가 그들의 발아래로 무언가를 내던졌다.
툭―
그건 잘린 손이었다.
피로 젖은 팔목 부분에 작은 기호가 하나 새겨져 있었다. 사각형 안에 삼각형이 들어 있는 모양새였다. 그건······ 아드리안이 심어두었던 ‘블랙 요원’을 뜻하는 심볼이었다.
발키리에게 적발되어 사살된 것이었다.
“······힉!”
아드리안은 그제야 사태 파악이 된 듯, 뒷걸음질 치며 품속에 손을 넣었다.
하지만 그의 무기는 그곳에 없었다.
“아······.”
생각해보니 폐공장에서 압수당했다.
그리고 사실 그깟 완드 따위를 손에 쥔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는 걸, 그도 알았다.
훙―
지수가 첨탑에서 몸을 던졌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중력에 이끌려 떨어지지 않았고 중력을 거스르며 그대로 허공에 떠올랐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분명 나쁘지 않은 작전이었어. 그런데, 다음에도 기회가 있다면······ 내 앞에서 손장난칠 때 소리가 안 나는 놈으로 준비해.”
그 순간, 그녀의 몸에서 순백의 광채가 번져 나오며 검은 하늘의 어둠을 층층이 밀어내었다.
이어서 그녀의 등 뒤에서 수백 가닥의 가느다란 빛줄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건 마치 천사가 수백 장의 날개를 펼치는 것만 같았다.
훙― 훙― 훙― 훙―
그리고 그 빛줄기의 끄트머리마다 열매가 맺히듯 부풀어 오르더니 순식간에 사람의 모양으로 자리 잡았다. 정확히는 전사의 모습이었다.
에인헤랴르(Einherier)였다. 무려 199명의 에인헤랴르가 수원의 하늘에, 빼곡히 등장했다.
천상의 군대가 강림한 것만 같았다.
“아······ 이, 이건······.”
앞서 아드리안과 오리지널스 조직원들을 제압했던 ‘제213기동대’는 세계수 진영에서 3번째로 강한 부대로 불리고 있다.
그렇다면, 2번째로 강한 부대는 무엇일까?
“남김없이, 쓸어버려요.”
그건 ‘발키리 부대’였다. 1명의 발키리와 199명의 에인헤랴르, 죽은 전사들의 모인 전투 집단······.
그들이 움직였다.
쉬―쉬―쉬―쉬―쉬―
그들은 발키리를 축으로 하여 반시계방향으로 회전하며 날아들었다. 마치 거대한 빛의 톱날이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카―가―가―가―가―각!
그 톱날과 같은 돌격은 아드리안과 조직원들이 서 있던 옥상을 향해 내리꽂혔고, 단숨에 건물의 상층부를 통째로 갈아 뭉개버렸다.
후두두두······.
콘크리트가 비처럼 쏟아졌다.
“미안하지만, 우리는 아직 쉴 시간이 없어요. 다시 움직여야 해요.”
겁도 없이 아사달의 성벽을 향해 전진하는 보스 몬스터들, 그들의 뒤를 향해 빛의 전사들이 쏘아져 나갔다.
***
보스 몬스터를 향해 쏘아지는 이백 개에 이르는 빛줄기, 발키리 부대의 진격, 그 찬란한 광경을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
“······.”
두꺼운 비늘 갑옷을 입고 보라색 철 가면을 쓴 덩치 큰 남자, Z였다.
철컥― 철컥―
그는 어느 건물의 옥상에 장승처럼 우뚝 서서 발키리 부대의 진격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움직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양손은 여유롭고도 정확하게, 어떤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철컥― 철컥―
일정한 쇳소리, 리볼버를 장전하는 것이었다.
철컥― 철컥―
그건 매그넘(Magnum) 탄환을 사용하는 대구경 리볼버처럼 우악스러운 생김새로, 총알이 실린더에 채워질 때마다 총열에서 기분 나쁜 검은 일렁임을 방출했다.
시이이이―
총 8발의 장전을 마치자 실린더를 회전시킨 뒤, 허리춤의 권총집에 꽂았다.
그러더니 재빨리 뽑아 들며, 저 멀리 날아가는 발키리 부대를 천천히 겨누었다.
“······.”
검지가 방아쇠에 올려지고 힘을 얹자, 노리쇠가 천천히 후퇴, 실린더가 조금씩 돌아갔다.
하지만 거기서 멈춰 섰다.
그는 총구를 거두어 머리 위로 슬쩍 들어 올리더니, 손아귀에서 한 바퀴 회전, 순식간에 다시 권총집에 넣었다. 그리고는 바닥 내려놓았던 큼직한 철제 케이스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의 모습이 옥상에서 사라졌다.
***
난데없이 발생한 시스템 오류로 메신저호의 엔진이 꺼졌다. 메신저호는 동력을 잃고 그대로 천천히 내려앉아 바다 위에 슬며시 안착했다.
“······.”
잔잔한 파도에 따라 메신저호가 나지막이 흔들리고 함교에는 그 철썩이는 소리만이 울렸다.
“······.”
전 승무원들이 침묵하며 대산맥의 왕, 산군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지금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산군이 이상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는 건 눈치챘다.
성우 역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이내 그가 고개를 돌려 성우를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평소와 달리 파랗게 빛났다. 마치 다른 영혼이 들어온 것만 같았다.
‘그래, 확실히 다른 존재가 됐다.’
그 순간, 그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이게 무슨 뜻이지?
성우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저 웃음을 누가 어떤 의미로 짓고 있을지······ 별안간 불안해졌다.
‘대산맥의 왕은 그게 꼭 신 같다고 했다.’
그저 극히 개인적인 감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성우는 그의 판단을 어느 정도 믿었다.
‘그는 분명 이성적인 존재다.’
비록 시스템에 의해 개조되고 재구성된 정신일지라도, 그는 세상을 바라볼 때 자신의 감정에 속아 쉽게 단정 짓는 스타일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 그가 몇 번이고 ‘신’이라고 느꼈다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신이라니, 대체 어떤 의미지?’
시스템이 아닌 시스템을 넘어선 존재, 그런 게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면······ 대체 뭐지?
성우는 산군의 몸을 통해 강림한 이 어떤 존재에 대해 새삼스레 이유 모를 경외감을 느꼈다.
이내 그 존재가 입을 열었다.
“······뭐?”
그런데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가 입을 열어 무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누구도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 %@&@$오 &!&작=$동
성우의 눈앞에 글자가 떠올랐다.
- 곧 웜홀이 열린다.
그 존재가 한 말이었다.
웜홀? 성우는 그 단어 앞에 숨이 턱 막혔다. 설마 제0지구의 2차 침략을 경고하는 건가?
사실 웜홀이 재생되고 있다는 건 성우도 알고 있었다. 버뮤다 삼각지대 해상에 떠 있는 인공의 섬, GM의 시설에 연구원들을 배치하여 웜홀을 항시 감시하도록 했다. 그리고 붙잡은 GM들을 협박하여 그들의 기술을 배우는 중이었다.
그런데 약 4달 전, 웜홀이 복구되고 있다는 관측 결과가 보고됐다. 자연 회복인지, 아니면 건너편에서 어떤 작업을 벌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만, 통로가 열리고 있다는 건 확실하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 한참 남았다고 했는데?’
현재 속도로 볼 때, 웜홀 복구까지 필요한 시간은 앞으로 무려 36년 정도라고 했다.
“웜홀 복구, 그건 알고 있어. 하지만 한참 남아서 아직은······.”
그 존재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아니, 당신의 생각과 다르다. 더 빨리 열릴 것이다. 당신은 그때 그곳에 도착해 있어야 한다. 12시간 11분 31초 남았다.
그 말이 끝이었다.
“······.”
그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떤 존재가 산군의 몸에서 빠져나간 것이었다.
- 시스템 긴급 복구 중(59%)
그리고 모든 게 정상화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산군이 눈을 떴다.
“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성우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열었다.
“그거, 봤나?”
왠지 모르게 못 볼 것 봤다는 표정이었다. 성우는 평소보다 진지하게, 이전에도 그에게 몇 번이고 던졌던 질문을 또다시 했다.
“그게 도대체 뭐지?”
“미친 소리 같지만, 그건······.”
그는 제 생각을 부정하듯 고개를 저었다.
“······신이 분명해.”
역시 그의 판단에는 변함이 없었다.
“신이라······.”
그는 그게 어째서 신이라는 건지 끝내 설명하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이 느낀 그 존재를 조금이라도 설명하기 위해서는 ‘신’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느낌 외에는 마땅한 개념이 없다고 했다.
설명할 수 없지만, 신에 가까운 존재?
성우는 그 설명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바람이 생겼다.
“그런데 그게 진짜로 신이라면, 부디 무관심한 신이었으면 좋겠어.”
신에게 정의와 선을 바라면 안 된다. 초월적인 존재가 우리와 같은 개념의 정의와 선을 지니고 있을 거라는 것 자체가 오만한 생각이다.
‘신의 최선이 우리에게 최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차라리, 아니 부디, 무관심하여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 두기를 바라는 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나도 내 나름대로 최선으로 간다.’
성우는 고개를 돌려 부속실장을 바라보았다.
“실장님, 다 끝났습니다. 출발 준비하세요.”
부속 실장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예! 저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할까요? 혹시······ 곧장 웜홀 연구소로 갑니까?”
얼마 뒤에 웜홀이 열리니 그곳에 있으라는 ‘신’의 메시지, 그건 성우만 본 게 아니었고 부속 실장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은 것이었다.
웜홀이 열린다는 건, 아사달에 가해지고 있는 테러만큼이나 위중한 문제였으니 말이다.
“아니, 아사달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