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네크로맨서-226화 (226/244)

# 226

75) 마지막 시스템 오류 - 2

이 게임의 정체는 무엇일까?

누구나 한 번쯤 그런 의문을 품었다.

누가 왜 이런 일을 일으켰을까?

우리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할까?

하지만······.

그런 의문은 사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하루하루 살아남기 바빴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몬스터가 ‘어디에 서 왔는가?’보다 ‘어떻게 죽여야 하는가?’를 탐구했으며 아이템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보다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에 집중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말 그대로 ‘플레이어’가 되었다.

“이제다 끝나가긴 하나 봐?”

하지만 이제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직접 등장한걸 보면?”

마지막 기회가 왔다. 지금 알지 못하면 영원히 알수 없을 것이었다.

성우는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어떤 존재가 이곳에 와 있다는 알 수 있었다.

“방금 그 목소리는 뭐야?”

“또 뭐가 나타나는 거야?”

그리고 다른 플레이어들 역시 고개를 치켜세우고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시스템 오류는 또 뭐고?”

“휴식 마법이 안 써지는데?”

그들도 시스템을 붕괴시킬 때가 되었다고 말한,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내 다시금······.

「오랫동안 지금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허공을 울리는 여성의 목소리, 지금까지 소극적으로 개입했을 때와 달리 직접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시스템이 이곳을 지켜보고 있음을 알면서도, 시스템의 눈을 가리며 대놓고 나타난 것이었다.

플레이어들이 웅성거렸다. 그들로서는 낯선 상황이었다.

모두가 성우를 바라보는 가운데 그가 그 목소리에 반문했다.

“지금? 지금은 뭐가 다르지?”

「보안이 가장 허술해질 때죠. ‘센티널’이라고 하는, 당신을 감시할 눈과 나를 방해할 손이 현저히 사라졌어요. 게임이 결말에 이르면서 많은 인력이 다른 게임으로 이동 배치되었으니까요.」

다른 게임? 센티널? 인력? 이동 배치?

‘그렇다면······.‘

성우는 직감했다.

역시 ‘시스템’이라는 건, 초월적인 존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구사하는 기적 같은 일이 아니었다.

‘다수의 인력으로 움직이는 조직이다.‘

즉, 다분히 ‘인위적’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오류로 멈출 수도 있고 어떻게든 붕괴시킬 수 있다는 것이겠지······.‘

즉, 이 시스템을 운영하고 게임을 유희로 즐기는 자들은 적어도 ‘절대적인 존재’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대체 너희는 누구지?”

그 근본적인 물음에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났으니, 성우는 오랫 동안 품어 왔던 질문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왜 우리한테 이런 짓을 하지?“

하지만 원하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미안해요. 당신이 분노하고 있고 진실을 추구하고 있다는 걸 잘 알아요. 하지만 시간이 없어요. ‘센티널’ 숫자가 줄었기에 제가 통제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졌지만, 그들이 대처할 거예요. 움직여야 해요.」

“ 역시······.”

성우는 피식 웃었지만, 괜스레 짜증이 치솟았다.

“역시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그동안 조력자랍시고 성우를 이리저리 움직였지만, 여태껏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시간 부족을 변명으로 일방적인 요구를 하고 있었다.

성우는 그 점이 거슬렸다. 시스템과 다를 바 없이, 반강제적으로 성우를 조종하려고 한다.

「시간이 없어요. 나를 믿는 게 당신들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걸, 알고 있잖아요? 전부 당신들을 위한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성우는 직감했다.

이건 어떤 대단한 존재의 화법이 아니다. 다분히 인간과 비슷한 존재가 감정을 담아 설득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존재는 공짜로 선의를 베풀지 않는다.

‘순수한 선의가 아니야. 우리를 도와서 얻을 수 있는 나름의 이익이 있을거야.’

성우는 팔짱을 끼고 본 드래곤에 기댔다. 다분히 여유를 드러내는 자세였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집을 부려 볼 생각이었다.

“좋아. 급한 불부터 끄는 게 우선이긴 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적어도 네가 누군지, 통성명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마지막 순간만큼은 게임판 위의 말이 되지 않을 생각이었다.

“협력을 위해서는 각자의 입장을 알아야 하잖아? 짧게라도 말해줘. 너는 왜 시스템을 파괴하려고 하지?”

「모든 설명에는 시간이 걸려요.」

“짧게라도 날 이해 시켜 봐. 이런 어마어마한 판을 짤 정도의 잘난 분이 요약 정도는 할 줄 알겠지?”

단 한마디라도 들을 수 없다면 움직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좋아요. 나 역시 이 게임의 GM과 같은 종족이에요. 다만······.」

주저함, 목소리 에 변화가 느껴졌다.

「······우리 종족에도 우리처럼 이런 게임을 즐기는 걸 반대하고 막고자 하는 이들이 있어요. 그리고 아주 오래전부터 GM과 대립하고 투쟁해왔죠. 사상적이고 정치적인 대립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궁극적인 정의를 위한 투쟁이에요.」

대의를 말한다. 지금까지 거쳐온 많은 인간처럼 뻔뻔한 대의를······.

성우는 다시 한번 느꼈다. 이들은 역시나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다.

“뭐······ 인권이나 환경을 위해 싸우는 시민 단체 같은 건가?”

「맞아요.」

이로써 확실해졌다. 저들은 ‘종족’이다. 복잡한 사회를 이루고 사는,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종족이다.

「더 자세한 건 시스템을 파괴한 이후에 이야기하도록 해요.」

목소리에 조급함이 묻어 나왔고 성우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지금 바로 시스템을 붕괴 시킬 수 있는 곳으로 당신들을 보낼 거예요. 그곳은 스킬, 아이템 등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들이 작동하지 않아요. 그래서 그 안으로 들어가면 저도 간섭할 수 없어요.」

생각해보면 스킬과 아이템은 시스템에 의해 탄생한 것인 만큼, 그걸로 시스템을 부수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그럼 어떻게 부수지?”

「오로지 당신 세계에 존재하는 ‘물리적인 힘’으로 특정 장치에 충격을 가해 시스템을 셧다운 시켜야 해요.」

“쉽게 말해서 그냥 힘으로 때려 부수면 된다는 거잖아?”

「맞아요. 아이템이 아닌 다른 무기를 준비해주세요.」

성우는 고개를 돌려 경수를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성우의 등 뒤에 파란색의 거대한 포탈이 열렸다.

우우우우—

조력자가 연 것으로 시스템을 붕괴시킬 수 있는 장소로 통하는 듯했다.

「지금은 이 시스템을 제가 통제하고 있지만, GM이 이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서 다른 월드로 갔던 센티널을 복귀시키고 있어요. 얼마 못 버텨요. 제가 그것들을 막는 사이에 저 포탈로 들어 가서 ‘메인 코어’를 파괴해서 ‘링크’를 끊어야만 해요.」

그때, 경수가 다가와 무언가 내밀었다.

“이런 거면 되겠습니까?”

그건 일명 ‘빠루’라고 불리는 ‘쇠 지렛대’였다.

“뭘 때려 부수기에는 이게 딱 좋죠.”

마법 공학으로 만들어진 아이템이 아니라, 지구의 주물 기술로 만들어진 물건이었기에 앞서 조력자가 말한 스킬과 아이템이 먹히지 않는 곳에서 쓸 수 있었다.

다행히 그런 물건이 적지 않았는데, 공성 병기 설치나 비행선 수리를 위한 공구들이 상당량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선배, 옆에서 대충 듣고 있었는데 설마 이제 진짜 끝이에요?”

한호와 지수가 성우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시스템 오류’를 한번 목격한 적 있기에 어느 정도 상황 파악을 하고 있었다.

“그래, 하지만 어떤 끝인지가 중요해.”

성우는 쇠 지렛대를 집어 들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스킬을 사용할 수 없다면, 나 혼자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이 필요해.’

한호와 지수와 달리, 다른 플레이어들은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성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직전에 그랬듯, 그 어떤 상황이라도 성우를 따를 것이었다.

성우는 그들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러분, 오늘 밤에 파티를 약속했는데 조금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쇠 지렛대로 포탈을 가리켰다.

“우리는 이 포탈 안으로 들어가 이 게임을 끝낼 겁니다. 그리고 오늘 밤 열린 파티의 목적은······.”

모두가 성우의 입을 바라보고 성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승리가 아니라 자유 독립일 겁니다. 다 같이 이 게임을 끝내러 갑시다.”

성우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포탈 쪽으로 걸어갔다.

플레이어들 역시 의연하게 무기를 들어 올렸고 성우를 따라서 포탈을 향해 줄지어 나아갔다.

마지막 진격이 었다.

* * *

- 비정상적@$D 접RMS입니%[email protected]! ! 접근GKTLF수 없%$니!!!

기괴한 오류 메시지와 함께 성우와 플레이어들은 한 해변에 도착했다. 본디 시스템상 플레이어 접근이 제한된 장소인 듯했다.

“주변을 경계하라!”

플레이어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지며 대열을 형성해나가는 동안에 성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다?’

모래사장이 엄청난 넓이로 펼쳐져 있어서 고개를 들어 저 안쪽, 우거진 숲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사막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성우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대강령’을 시도했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

애초에 그런 능력이 없던 것 같았다.

「여기에요.」

역시나 허공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여기는 흔히 말하는······ 당신들이 흔히 말하는 ‘버뮤다 삼각지대’의 중심에 있는 섬이죠.」

버뮤다 삼각지대라니? 흔히 ‘마의 삼각지대’라고 알려진 괴담의 장소가 아니던가?

“섬? 꽤 큰 것 같은데 원래 있는 섬인가?”

「약 7년 전부터 만들어진 인공섬이죠.」

“7년?”

게임이 시작되기 한참 전이었다.

「이 게임은 하루아침에 시작되지 않아요. GM들은 게임으로 만들기 알맞은 세계를 물색하고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인스톨(Install)’ 과정을 거쳐요. 이 섬이 그 모든 과정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죠.」

인스톨, 말 그대로 게임을 설치할 시간이 필요하다는뜻이었다.

지구를 게임으로, 지옥으로 만들어버린 게 하루아침에 벌어진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무려 7년 전부터 차곡차곡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침공’이었다.

「모든 지구의 버뮤다 삼각지대에는 자연 상태의 ‘웜홀’이 존재해요. 그래서 손쉬운 차원 이동 통로로 이용할 수 있죠. 당신이 다른 차원으로 이동할 때도 사실, 해당 포탈이 이곳의 웜홀과 맞닿게 열려서 포탈과 웜홀을 동시에 통과하게 되는 거죠.」

버뮤다 삼각지대를 지나던 항공기와 선박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경우가 왕왕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 ‘웜홀’이 있다는 음모론도 있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란 말인가?

「혹시 이 섬과 웜홀과 시스템 작동 방식에 대해서 더 궁금하신 게 있나요? 얼마든지 자세하게 설명해드릴 수 있어요.」

다분히 따지는 목소리였다. 조금 전, 성우가 협박하듯 캐물었던 게 언짢았던 것일까?

“됐어.”

「시간이 없는데 다행이네요.」

성우는 말없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섬 안쪽에 시스템을 관장하는 시설이 있어요. 그곳을 찾으세요. 그리고 그 내부에 있는 공 모양의 ‘메인 코어’를 파괴하세요. 앞으로 제가 시스템을 통제할 수 있는 시간은 한 시간 남짓 이에요.」

“한 시간······.”

하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건 사막처럼 펼쳐진 드넓은 해변과 그 끝자락, 긴 장벽처럼 이어지는 우거진 숲뿐이었다.

“그게 어디쯤인데?”

「미안하지만 여기부터는 저는 관여할 수 없어요. 이곳은 특수 격리 공간으로 분류되어 시스템을 통한 접근이 불가능해요. 더 깊숙이 접근하면 이렇게 목소리로 안내해줄 수 없을 거예요.」

“뭐? 시스템을 통한 접근이 뭔데?”

「쉽게 말해, 게임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들, 더 나아가 게임을 통제하는 모든 툴과 명령어가 이곳에서는 힘을 쓸 수 없어요.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통제를 벗어나 GM, 자신들을 위협할 경우를 대비한 장소죠. 당신들처럼 자연 탄생한 생명체가 직접 들어갈 수밖에요.」

시스템을 만들었지만, 시스템의 폭주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는 건 시스템의 통제가 풀리면, 그 GM이라는 놈들도 내 스켈레톤에 죽을 수 있다는 뜻인가?’

GM은 절대적인 존재가 아닌 걸 넘어서, 어쩌면 생각보다 쉽게 죽을 수도 있다.

“어쩌면······.”

성우는 잠깐 어떤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돌려 경수를 찾았다.

“경수 씨, 수색에 나서야 합니다. 최대한 빨리 최대한 넓은 구역을 정찰해 주세요.”

이용할 수 있는 아이템과 스킬이 없었기에 발로 뛰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걸 커버할 수 있는 인력이 이렇게나 많이 모여 있다.

해변은 세계수 진영의 플레이어들, 아니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움직이죠.“

섬 전체를 쥐잡듯 뒤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이들은 섬 전체로 흩어져, 이 게임의 원흉을 찾기 시작했다.

* * *

가장 먼저 시설을 발견한 건 첸이었다. 그가 무어라고 소리쳤는데, 시스템이 꺼진 상태이기에 ‘자동 번역’ 기능이 사라져 알아들을 수 없었다.

“네크로맨서님! 이쪽입니다!”

다행히도 중국어가 가능한 사람이 옆에 붙어 통역해주었다.

“여기에 지하로 내려가는 길이 있습니다.”

두껍게 쌓인 낙엽을 긁어내자 바닥에 백색의 금속 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레버가 달려있어서 손쉽게 열 수 있을 듯했다.

철컹!

문이 열리자 차가운 공기가 흘러나왔다.

“이게 확실히 그 시설이겠죠?”

한호가 물었고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호야, 신호탄 쏴.”

경수가 신호탄 몇 개를 챙겨 왔고, 먼저 시설을 발견할 시 신호탄을 쏘아 알리기로 했다.

퍼一 엉!

허공에서 붉은 신호탄이 터졌다.

“우리 먼저 내려갑시다.”

성우 일행은 사다리를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그러자 지하 시설 내의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감지 센서가 있는 모양이었다.

‘감지 센서? 그렇다면 무인 시설이 아닐지도 몰라. 이 아래 누군가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GM이 이곳에 있을 수도 있었다.

“조심하세요. 제 감각도 제대로 기능하지 않고 있어요.”

지수의 말처럼 사실상 모든 능력치가 초기화된 상태였다.

즉, 완전히 일반인이 된 셈이었다.

‘지금이라면, 오우거 같은 게 한 마리만 나오더라도 몰살당할지도 모른다.’

그간의 전투 경험은 어디 가지 않았으나, 아무리 그래도 칼도 들어가지 않는 대형 몬스터와 맞서는 건 불가능할 것이었다.

물론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한, 그런 비현실적인 몬스터 역시 존재할 수 없었다.

저벅一 저벅一

성우는 백색의 복도를 걸어갔고 그의 등 뒤로 스무 명이 따라 들어왔다.

저벅一 저벅一

고요 속에서 복도의 끝자락, 문 앞에 도착했다. 성우가 슬쩍 손을 내밀자, 그 문 역시 역시나 센서가 있는지 저절로 열렸는데······.

“······사무실?”

내부는 다소 익숙한 풍경이었다.

“여기 뭐죠?”

정말 사무실을 연상케 했다.

지구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다소 이질적인 인테리어였지만, 이곳이 어떤 용도의 공간인지 대번에 느낄 수 있었다.

책상과 의자, 컵과 모니터······ 인간과 닮은 존재가 일하는 공간이 분명했다.

“선배, 이거 너무 키보드인데요?”

한호가 무언갈 들어 보였다. 투명한 디스플레이 위에 자판 같은 게 배열되어 있었다.

현대 기술보다 몇 배는 앞서 있는 기술로 보였지만, 키보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응? 영어 자판 배열? 이거 설마 자동으로 해석 되는 건가?”

디스플레이 위에 떠 오른 건 다름 아닌 ‘알파벳’이었다.

‘자동 해석? 그럴 리가 없다.’

성우는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컵을 들어 올렸다. 그것의 손잡이 부분에 영어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이상했다.

시스템이 꺼졌으니 언어를 통역해주는 기능도 꺼진 상태가 아니던가?

‘대체 뭐야.’

지금 이 풍경들, 인위적인 걸 넘어서······ 인간적이다.

틱—

그때, 한호가 그 ‘키보드’ 같은 물건의 어떤 버튼을 눌렀고 그와 방의 정중앙에서 무언가 치솟았다.

우— 웅—

“뭐야!”

사람들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응? 지구?”

지구본, 정확히는 지구 모양의 홀로그램이었다. 그리고 그 위로 떠 오르는 수많은 글자, 전부 영어였다.

대륙과 국가별로 어떤 숫자들이 실시간으로 집계되고 있는 듯했는데, 그 숫자는 ‘viewer’라는 항목이었다.

viewer, 시청자······.

“이거 공식 채널 방송의 시청자를 표시하는 걸까요?”

지수가 물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 홀로그램 한쪽, 호주 대륙을 가리켰다.

“그러기에는 숫자가 너무 커요. 억 단위잖아요? 여기는 십억이고······ 우리 지구에는 이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없어요.”

이어서 성우가 다른 곳을 짚었다.

- ON AIR : WORLD 34

“그 사람들은 이걸 보고 있군요. 34번째 지구, 그러니까 게임을······.”

그 순간, 지수가 성우의 팔을 끌어당겼다. 성우는 지수와 함께 바닥에 쓰러지며 책상 뒤로 굴러 들어갔다.

무언가 그들이 서 있던 자리를 스쳐 지나가며 홀로그램을 뚫고, 그 뒤의 벽에 처박혔다. 벽에 구멍이 뚫렸다.

쩡! 쩡! 쩡!

그걸 시작으로 몇 발의 빛줄기가 날아들었고 일행 중 한 명이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첸의 동료였다.

“······윽!”

그의 가슴은 화염 마법에 맞은 것처럼 타들어 가는 중이었다.

“피해!”

모두가 사무실 곳곳으로 몸을 숨겼다.

’역시 누군가 있었다.’

성우는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며 쇠 지렛대를 들어 올렸다.

“이런, 갑자기 시스템이 왜 다운됐나 했더니······하하,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안쪽 문이 열려 있었고 그 안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알루미늄으로 만든 듯한 특이한 복장을 한 사람들······.

그래, 그건 분명 사람들이었다. 7명의 사람이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쩡! 쩡! 쩡!

레이저를 발사하는 총이었다.

“네크로맨서? 네놈 맞지?”

그중 가운데 있는 남자가 말했다.

“여기까지 오다니? 시스템이 완전히 꺼져서 들어오는 줄도 몰랐어. 이건 내부에 조력자가 없는 한 불가능한 일이야.”

“그것도 다른 월드로 직원들이 대부분 빠진 틈을 노린 걸 보면 확실히 내부에 미친놈이 하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재밌다는 듯 킬킬 웃었다.

‘한국어를 써? 아니, 한국어가 아니다.’

그의 입과 목소리가 일치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영어로 말하고 있지만, 어떤 기능에 의해 한국말로 번역되는 듯했다.

“너희는 누구지?”

성우는 책상 뒤에 몸을 숨긴 채 물었다. 남자가 콧방귀를 뀌더니 대답했다.

“우리는 너희가 사는 32월드의 GM이다. 이건 너희의 주인이라는 뜻이야.”

그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모든 능력이 사라졌으며 무기라고는 쇠 지렛대를 비롯한 공구 몇 개뿐이니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뭐? 32월드?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런 짓거리를······ 32번이나 했다는 건가?”

“비슷해. 이미 36월드까지 개척되었고 올해 안에 41월드까지 ‘인스톨’될 거다.”

그는 너스레를 떨며 천천히 다가왔다.

“아 그리고 네가 ‘월드 이터’가 되었다면 네가 33월드를 침공하는 베스트 시나리오가 완성되었을 텐데, 정말 아쉬워. 사람들이 그쪽을 가장 좋아하거든. 일종의 타락이잖아?”

지수가 군용 단검을 역수로 쥐고 왼쪽으로 튀어나갈 준비를 했다. 성우는 발바닥에 힘을 싣고 오른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너희는 누구지?”

“딱 보면 몰라?”

그가 양팔을 벌렸다.

“제0지구의 인류다.”

인류라니?

신 같은 절대적인 존재도 아니고 외계에서 온 종족도 아니라 다른 차원의 인류라고?

이에 한호가 꽥, 하고 소리쳤다.

“웃기지 마라! 같은 인간끼리 이런 짓을 한다고? 너, 너! 외계인이지?”

놈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 우리와 너희가 어떻게 같은 인류지? 뻔뻔한 생각하고는?”

“우리는······ 그래, 너희의 미래의 모습이 될 수도 있는 존재다. 물론, 그 미래를 우리가 삭제했지만 말이야.”

성우는 지수와 눈을 마주쳤다. 타이밍을 맞춰서 튀어나갈 준비였다. 하지만······ 아무 능력 없이 저 광선을 피할 수 있을까?

힘들 것 같았다.

“여기까지 온 건 솔직히 놀랐어. 내가 지금까지 기획하고 중계해온 그 어떤 ‘프로그램’보다 짜릿한 결말이라니까?”

쩡!

놈은 그렇게 말하며 성우가 몸을 숨긴 책상에 광선을 쏘았다. 책상이 쩍, 하고 쪼개지며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그래도 네크로맨서, 너는 정말 대단했어. 도박사들은 난리를 쳤지만, 시청자들은 이편을 더 좋아하거든? 너는 우리 통틀어서 손에 꼽는 인기 캐릭터가 될 거야.”

놈은 주저리주저리 말을 이어가면서도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물론 네크로맨서는 언제나 인기있는 직업이었지만, 이 정도로 엄청난 군단을 부린 건 유례 없단 말이야? 그래서 더 아쉬워.”

놈은 어느 정도 다가오다가 우뚝 멈춰섰다. 그에 따라 튀어나가 덮칠 준비를 하던 성우와 지수 역시 자세를 낮출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네크로맨서? 하나만 물어볼게.”

“······.”

“이제 네 군단은 어디에 있지?”

또 한 번 한 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너희가 아무것도 못 하는 걸 보니 이것도 꽤 재밌네? 그래, 사실 그 엄청난 군단도 전부 내가 준 힘이란 말이다!”

쩡! 쩡! 쩡! 쩡!

무차별 난사에 책상과 온갖 기물이 으스러지고 터지며, 그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쩡! 쩡! 쩡! 쩡!

성우 일행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준 힘에 취해서 희망을 품고 달려왔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못 하잖아? 너희는 그냥 게임 속 캐릭터에 불과해! 그러니까 그냥 그런 줄만 알고 살았어야지!”

오랜만에 무력감이 들었다.

’사실이다. 내가 할수 있는게 없다.’

하지만 성우는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힘을 잃었지만, 예전과 달랐다. 그 동안 축적해온 경험이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분명 방법이 있을 거다.’

성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사격이 멈췄다. 놈이 다시 입을 열어 그 비열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봐! 입이 있으면 욕이라도 해보라고! 응? 네 그 잘난 군단은 어디에 있지?”

그때였다.

“여기에 있다!”

어디선가 누군가 외쳤다.

“네크로맨서의 군단, 여기에 있다!”

정훈의 목소리였다.

성우는 고개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함성이 몰아쳤다.

“가자!”

“돌격!”

수백, 수천 명의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함성과 발 구름, 분노와 살기······ 그 엄청난 기세에 당장이라도 땅이 꺼질 것처럼 건물이 통째로 뒤흔들렸다.

“우리가 바로 그 군단이다!”

GM들이 뒷걸음질 쳤다.

정훈을 비롯한 세계수 진영의 ‘사람’들이 복도를 가득 채우며 달려와 사무실 안으로 치고 들어왔다.

“저것들을 잡아!”

정말 네크로맨서의 군단처럼 수백, 수천 명의 사람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진격에는 그 어떤 주저함도 없었다.

“돌격!”

다만, 죽은 자의 군단이 아닌, 산 자의 군단이었으며 시스템의 힘이 아닌, 순순한 인간의 힘이었다.

그들이 GM들을 향해 돌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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