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네크로맨서-224화 (224/244)

# 224

74) 붕괴 그리고 반격 - 3

단 한 방, 성우는 이 모든 걸 단숨에 끝낼 단 한 방을 품고 있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오직 그 결정적인 한 방을 꺼낼 시간만을 기다렸다.

’때가 왔다.’

성우는 좀비 히포그리포에 올라탄 채 마왕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천근궁’에 ‘천근살’을 걸었다.

‘신을 죽일 수 있는 무기······.‘

신살자(神殺者)

그 시위를 천천히 잡아당겼다.

구一 우一 우一 우一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파동이 일어나며 일대의 공기가 뒤흔들렸다. 마치 맨손으로 공간을 뒤트는 느낌이었다.

성우는 어깨가 끊어질 듯한 통증을 이겨내며, 앞으로 튕겨 나가려고 하는 시위를 붙잡고 더욱 팽팽하게 당겼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버텨라!’

성우가 타고 있던 ‘좀비 히포그리포’가 그 무지막지한 힘을 견디지 못하고 태풍을 만난 새처럼 상하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대로 조준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맞추지 못하면 낭패다.’

이 상태로는 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바닥에 내려앉을 수도 없었다. 지상은 마왕의 촉수 다발로 뒤덮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뒤를 받쳐!”

성우는 뒤에서 따라오던 ‘본 와이번’ 무리를 급히 앞으로 움직여, 몸으로 좀비 히포그리포를 받치게 했다.

마치 오작교처럼, 대여섯 마리의 본 와이번들이 힘을 더하자 시위를 조금 더 당겨도 견고하게 지지가 되었다.

- 해당 무기에 ‘성검’의 힘이 적용됩니다.

* ‘마왕’을 타격할 시 추가 데미지가 부여됩니다. (+2,000%)

그리고 ‘용사 특전’의 ‘성검’ 효과를 적용하여 오로지 마왕만을 위한 제대로 된 한방이 완성되었다.

우우우우一

기묘한 공기가 살 끝에 감돌며 성우의 손등을 툭툭 건드렸다.

‘신중해야 한다.’

성우는 시위를 함부로 놓지 않았다.

‘놈은 이 공격을 막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

마왕은 성우의 접근을 지켜보고 있었다. 8개의 팔이 모두 봉쇄되었지만, 완전히 무력화된 건 아니었다.

놈의 왼쪽 머리, 4개의 뿔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당장이라도 광선을 발사할 준비를 끝마친 것이었다.

’그러나 놈도 한 방뿐이다.’

이미 2개의 머리는 광선을 사용했다.

‘제대로 맞추는쪽이 이긴다.’

성우와 마왕은 서부의 총잡이처럼 마주 본 채, 단 한 발의 승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놈이 또 다른 수를 꺼냈다.

“응?”

온몸에 엉겨 붙어 있던 지옥 생명체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시커먼 연기를 발산하더니, 돌처럼 굳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뭐지?’

뒤엉킨 채 돌로 변해가는 괴물들, 지옥의 풍경을 조각으로 표현하면 저런 모습일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괴한 장면이었다.

쩌적一 쩌적一 쩌적一

그렇게, 마치 몸에 콘크리트를 발라 굳힌 것처럼, 단단한 ‘갑옷’이 생성되었다.

이어서 그 표면 위로 검은색 기호들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물리적인 방어력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닌 듯 했다.

우一 웅一 우一 웅一

갑옷이 빛을 발하며 진동하더니, 마왕의 몸뚱이에 붉은 방어막이 한 겹 덧씌워졌다.

광역 방어 스킬이었는데, 언뜻 보기에도 아주 단단해 보였다. 성우는 순간 고민했다.

‘저거, 뚫을수 있나?’

뚫을 수 있었다. 그건 확실했다. 무려 세계수를 고사시킨 무기가 아니던가?

그런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저 방어막을 뚫은 뒤 숨통까지 끊을 수 있을까? 만일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또 한 번 새로운 고난이 열릴 것이었다.

’뭐가 됐든 일단 쏴야 한다.’

어차피 이미 당긴 화살이었고, 이미 적용한 ‘성검’이었다. 무를 수는 없었다.

그때,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덮쳐 왔다.

“저리 비켜!”

레드 드래곤, 이사벨라였다.

그녀는 ‘순간 이동’ 마법을 사용하여 성우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이사벨라? 뭘 하려는······.“

“내가 장애물을 부순다! 그 틈을 노려!”

이사벨라는 그렇게 외치고 성우를 앞질러 나갔다. 성우는 당겨놓은 시위를 천천히 내리며 이사벨라의 뒷모습을 살폈다.

마왕의 공격에 제대로 당하여 추락한 이후 그 꼴이 정상은 아니었다. 비늘이 벗겨지고 뒤집혀, 온몸이 너덜너덜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드래곤이었다.

’믿고 기다린다.’

그녀의 등 뒤로 빛으로 만들어진 창대가 떠올랐다. 총 5개, 그것들이 직선으로 쏘아져 마왕의 몸, 두껍게 부풀어 오른 ‘갑옷’ 위에 처박혔다.

퍽! 퍽! 퍽! 퍽! 퍽!

이후 그녀의 머리 위로 동그란 구슬들이 떠올랐다. 그것들은 그대로 날아가 마왕의 가슴팍 근처에서 폭발했다.

퍼一엉! 퍼一엉! 퍼一엉!

마왕의 몸뚱이가 앞뒤로 흔들렸고 붉은 막이 설탕 녹듯 사라졌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갑옷 위에 초시계 아이콘이 떠오르더니, 시간이 빠르게 지나듯 순식간에 부식되어 가는 게 아닌가?

퍼서서서一

‘역시 드래곤, 거의 다 뚫었다.’

그렇게 3종의 마법을 연달아 퍼부어 댄 뒤, 가까이 접근하여 입을 쩍 벌렸다.

콰과과과과과一

반쯤 으스러진 ‘갑옷’ 위로 시뻘건 불기둥, ‘드래곤 브레스’를 뿜었다.

그와 동시에 마왕의 왼쪽 머리, 4개의 뿔에서 붉은 광선이 쏘아졌다.

’마지막 광선, 쏘았다.’

놈은 이사벨라를 떼어내기 위하여 결국 마지막 광선을 사용했다.

퍼— 어— 어— 엉—

드래곤 브레스와 마왕의 광선이 교차하며 양쪽 모두 적중했다.

“으으으······.“

이사벨라는 성우의 등 뒤로 날아가 또 한 번의 추락했다. 아무리 드래곤이라지만, 이번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러나 성우의 시선은 그녀를 따라가지 않았으며, 오로지 정면을 향했다.

‘빈틈, 열렸다.’

성우는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 이사벨라가 뚫어 놓은 그 빈틈을 향해 화살을 겨누었다.

‘완전히 열렸다!’

마왕의 가슴팍은 통째로 녹아버린 상태였다. 갈비뼈마저 으스러져 큼직한 구멍이 뚫렸는데, 그 내부가 훤히 보였다.

쿠— 웅— 쿠— 웅—

심장 박동 소리, 울컥거리며 피를 쏟아내는 거대한 심장······ 그리고 그 심장에 박혀 있는 누군가의 얼굴······ 얼굴?

심장에 눌어붙어 있는 얼굴은 강석이었다.

‘저게 본체다.’

그 순간, 놈이 격하게 몸을 뒤틀어대기 시작했다.

하체의 ‘촉수 다발’을 땅속에 지렛대처럼 박아 넣고는 상체를 이리저리 뒤흔드는 것이었다.

“무슨 짓이지?”

침착하게 꺼내 놓던 모든 수가 뚫리자 할 수 있는 건 최후의 몸부림뿐인걸까?

‘젠장, 제대로 조준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성우의 일격을 방해할 수 있었다. 심장의 위치가 이리 저리 바뀌며 정확한 사격이 어렵게 만들었다.

“윽, 으······ 서, 선배!”

그 격렬한 움직임에 팔을 구속하고 있는 이들이 한계에 달하기 시작했다.

“뭐, 뭐든 빨리 좀······ 이제는 못 버텨······.“

투— 둑! 투— 둑!

또 다른 팔을 옭아매고 있던 대산맥의 왕의 ‘뿌리’까지 끊어지기 시작했다.

‘저건 어떻게든 즉사만은 피하겠다는 몸부림이다.’

놈의 마지막 저항은 무식했지만 성가셨다.

심장에서 아주 살짝 빗나가, 옆구리나 배를 맞추면 숨통을 끊지 못할 수 도 있었고 그렇게 되면 판이 다시 바뀔 수도 있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하지만 여기서 더 지체할 수는 없었다.

- 그림리퍼 유지 시간 (00:03:51)

성우의 힘 그 자체인 ‘그림리퍼 소환’ 스킬이 종료되기 직전이었다. 즉, 당장 끝내지 못하면 다음 승부 따위는 없었다.

“그렇다면······.“

성우는 놈의 가슴을 향해, 그 안을 향해 쏘아지듯 날아갔다.

‘······다소 극단적인 방법을 쓴다!’

성우는 화살을 정확하게 겨누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무조건 맞게 만든다.’

목표물의 바로 앞, 놈의 가슴 안으로 직접 들어가 빗나갈 가능성을 0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파지지지지!

그때, 놈의 심장에서 시퍼런 번개가 흘러나왔다. 저건 마왕이 아니라 본체, 강석의 힘이었다.

성우가 접근하는 걸 눈치채고 몸 안으로의 진입을 원천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심지어 녹아내린 갈비뼈에서 길쭉한 가시가 돋아나기까지 했다.

‘상관없다.’

성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 ‘황혼 습격’이 시작됩니다.

그는 좀비 히포그리포의 등을 박차고 한줄기의 검은 연기가 되어 쏘아져 나가, 순식간에 놈의 뚫린 가슴 안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놈의 심장 근처에 착지, 검은 연기를 헤치고 나오는 순간······.

푹!

뼈에서 뻗어 나온 길쭉한 가시가 등에 내리꽂혔다. 놈이 더 빨랐다.

눈앞이 아찔해졌다.

푹! 푹!

이어서 바닥에서 올라온 2개의 가시가 왼쪽 허벅지, 복부를 관통했다.

“큭······.“

순간 정신을 놓을 뻔했지만, 간신히 버텼다. 그리고 정신을 놓기보다 앞서······.

쩌— 어— 어— 엉!

당겨두었던 시위를, 먼저 놓았다.

- ‘신살자(神殺者)’가 발동합니다.

살이 시위를 떠나는 순간, 천장에서 날아든 가시가 오른쪽 눈알을 뚫고 들어왔다.

그리고 놈의 심장에서 번져 나온 시퍼런 전류가 성우의 온몸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 월드 보스 몬스터 ‘마왕(완전체)’을 사냥하여 700,000,000골드를 얻었습니다.

그게 마지막 메시지였다.

* * *

성우는 죽었다.

벌써 두 번째 죽음이었다.

마치 예정된 컷 신처럼 주마등이 떠오르려고 했지만, 억눌렀다.

’다음 순간이 중요해.’

다시 눈을 뜰 것이었다. 그렇기에 잡 생각을 버리고 다시 찾아올 감각을 기다렸다. 빠르게 반응해야만 했다.

‘놈의 죽음을 눈으로 확인해야만 한다.’

’마왕(완전체)’을 죽였다는 메시지는 확인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 ‘플레이어’를 살해했다는 메시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월드 이터를 잡았을 때는 분명 몬스터, 플레이어 2개다 떠올랐다.’

월드 이터나 마왕 모두 플레이어가 초월적인 몬스터로 변한 케이스였다.

그렇기에 본체, 플레이어도 죽어야지만 일이 마무리되는 셈이었다.

‘설마 뭔가 더 남았나?’

이내 눈앞에 밝아지기 시작했다.

* * *

- 네크로맨서 직업 특성으로 ‘부활’ 하셨습니다. (대기시간 31일)

이는 여의도에서 ‘본 드레이크’에게 죽었을 때 알게 되었던 네크로맨서의 ‘히든 능력’이었는데 그동안 한 번도 죽지 않았기에 아주 오랜만에 발동되었다.

몸에 뚫린 구멍들이 메워지고 전격 공격으로 타버린 살갗이 복구되었다.

“하아······.”

그리고 폐 속으로, 숨이 천천히 차올랐다.

“후우······.”

다시 감각이 돌아왔다.

- ‘그림리퍼’의 사용 시간이 종료되어 ‘리치’의 힘을 사용할수 없습니다.

* 특별한 조건을 만족하여 특수 스킬 ‘태고의 죽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성우의 힘이 다했다.

모든 걸 쏟아부어, 정말 아슬아슬한 순간에 제대로 된 일격을 넣은 것이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졌다.’

성우는 마왕의 몸 안을 살펴보았다.

이 거대한 육신에서 생기라는 게 완전히 사라졌다. 마치 축축한 동굴처럼 딱딱한 느낌이 들었다.

’이건 확실히 죽었다.’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심장은 사분오열되어 사방에 흩어져 있었으며 천근살은 심장을 터뜨리고 지나가 저 안쪽, 어둠 속 어딘가에 박힌 채 반짝거렸다.

그리고 그 심장에 박혀 있던 본체, 강석의 몸 역시 아무렇게나 나동그라져 축늘어져 있었다.

‘이건 시체다.’

성우는 느낄 수 있었다. 죽었다.

그런데······.

츠츠츠츠츠—

기괴한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가루가 되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기괴한 현상에 성우는 뒤로 물러서며 ‘겨울 포식자’를 들어 올렸다.

츠츠츠츠츠—

그 가루들은 무리 비행을 하듯, 한곳으로 모이더니······.

츠츠츠츠츠—

재조합되기 시작했다.

사람의 형태로, 뼈, 내장, 핏줄, 피부가 달라붙었다. 곧 눈알이 만들어졌고, 그 눈알이 이리저리 구르다가 성우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강석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부활이었다.

“······.“

그가 새로운 얼굴로 슬며시 웃었다.

“아쉽겠지만, 너만 살아날 수 있는 게 아니야.”

성우는 당황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성우는 대답 대신 그를 천천히 살폈다.

‘부활 주문서인가?’

놈은 이미 여러 차례 부활했다. 그럴 때마다 마왕의 모습이, 더욱 기괴한 모습이 되어 되살아났다.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플레이어의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즉 마왕의 권능은 아니었다.

놈이 부활한 몸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주변에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는 마왕의 심장 파편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인정해. 내가 실수했어.”

놈은 성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말 큰 실수······ 너를 이용해서 잡스러운 방해물을 제거한다는 게 정작 가장 큰 방해물을 만들어낼 줄이야? 이거 전에도 말했었나? 어쨌든 그 뜻은······.”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쿵!

그와 동시에 성우의 등 뒤, 마왕의 가슴에 뚫린 구멍이 붕괴하며 내부가 어둠에 잠겼다.

- 주의! 해당 공간이 붕괴합니다. (탈출하지 않으면 함께 ‘소멸’합니다.)

“······이제 너만 죽으면 모든 게 끝난다는 걸 뜻하기도 해.”

마왕의 시체가 붕괴, 아니 응축되기 시작했다. 살점이 으그러지며 안쪽을 향해 흘러들어왔다.

쿠— 구— 구— 구— 구—

그러면서도 안쪽 살점은 뜨겁게 끓어 오르며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이건 단순한 폭발의 징조가 아니었다.

이곳을 구성하고 있는 힘, 마나가 미친 듯이 요동치며 심상치 않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성우는 놈을 노려보았다.

“전부 실패하고 자폭 공격 시도라? 정말 악당다운 마지막이야.”

놈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자폭이면 같이 죽는 건데······.”

그러더니 끓어오르는 벽면, 마왕의 살점에 손을 척, 하고 얹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난 이걸로 죽지 않아. 엄밀히 말하면 내 일부잖아? 그리고 나한테 악당이라니?”

놈이 허탈하게 웃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악당 같나? 아니, 전혀 아니지. 나도 너와 같은 입장이야. 너도 알잖아?”

“뭘?”

“우리는 전부 게임판의 말일뿐이라는 걸 말이야. 아직도 이해 못 하겠나? 그저 역할이 다를 뿐이야. 나는 그저 조금 진취적이고 현명한 역할을 맡은 거고, 너는······ 보수적이고 고집스러운 역할이야.”

성우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정정하지. 악당이면 보통 모든 사건의 원흉, 흑막을 뜻하는데 너는······ 사실상 그냥 앞잡이에 가깝잖아?”

성우의 빈정거림에 놈은 피식 웃으며 심장 파편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쿠— 구— 구— 구— 구—

그러는 동안에도 붕괴는 가속화되었다. 벽과 천장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앞잡이? 그래, 그 심정 이해해. 열 받을 거야. 어떻게 잘 살아남은 뒤 이놈 저놈 쓰러뜨리고 생존자들 위에 군림해왔잖아? 네가 아주 잘난 놈인 줄 알았을 텐데······ 결국 아무것도 못하는 그심정, 이해해.”

성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곧 네 게임은 끝날 텐데, 혹시 마지막으로 물어보고 싶은 거 있나? 이 게임에 대해서 너보다 내가 잘 알잖아? 예를 들면 엔딩을 맞은 서버의 플레이어가 어떻게 처리되는지, 나는 좀더 잘 알아.”

놈이 비꼬듯 물었고 성우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궁금하긴 한데, 다른 게 있어.”

성우의 고분고분한 대답에 놈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어디 말해 봐.”

성우는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바라 보았다. 그리고 다소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태고의 죽음이 뭔지 아나?”

놈은 인상을 찌푸렸다.

“······뭐?”

놈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성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간테스도 모르고 크로노스도 모르더니, 이것도 알 리가 없지. 무슨 스킬인지 설명이 안 쓰여 있어서 말이야.”

놈이 경계하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것이었다.

“그럼 그냥······ 사용해봐야겠군.”

그 순간, 성우의 손아귀에서 보라색 빛줄기가 터져 나왔다.

차— 자— 자— 자— 자!

그 빛줄기는 그물 형태로 짜이며 일정 지역을 감싸기 시작했다.

- 주의! 해당 지역에 ‘태고의 죽음’이 시작됩니다.

* ‘필멸 그물’ 안의 시간이 매우 빠르게 흐릅니다.

그렇다.

“뭐, 뭐야? 또 무슨······.”

‘태고의 죽음’은 ‘시간’이었다.

생명체의 죽음, 근본적인 죽음은 시간에 의해서 좌우된다.

보라색 그물 안의 시간이 수백만 배로 흐르기 시작했다.

후— 우— 우— 우— 우—

공기도, 마왕의 몸뚱이도, 성우가 들고 있는 무기도, 그리고 그물 안에 서 있는 두 사람의 육체까지······ 시간의 흐름에 휩쓸리며 빠르게 삭아갔다.

오로지 정신, 두 사람의 사고(思考)만이 현재의 시간에 남아 있었다.

성우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색깔이 빠르게 변하고 주름이 잡혔다. 늙어 가는 것, 죽어가는 것이었다.

성우는 고개를 들어 강석을 바라보았다.

“미, 미친······ 이게······.”

놈의 당황한 얼굴 위로 주름이 파여갔다.

“네가 자폭 공격을 안 한다고 했으니, 내가 대신했어. 이게 진짜 자폭이야.”

한 마디, 한 마디마다 목소리가 변했다. 중후해졌다가 쉰 소리가 났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 갔다.

“지, 지금 무슨 미친 짓을······ 컥!”

지금, 마왕의 몸뚱이는 완전히 응축되어 탈출할 수 없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시간이 없었다.

두 사람은 어느새 서 있기도 힘든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크, 커······구, 굳이, 이렇게 해야했나? 자살이라니? 넌 원래 그렇게······ 영웅 심리가 있는 놈은 아니었잖아?”

영웅 심리라,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성우는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영웅 심리로 동귀어진(同歸於盡)을 택한건 아니었다.

다른 근거가 있었다.

“미안하지만, 나, 나는······안죽어.”

성우는 몸이 문드러지는 고통 속에서도 미소를 지었다.

“그 아이템, 부활 주문서, 너만 가지고 있을 줄 알았어?”

성우는 그렇게 말하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웬 양피지였다.

[아이템 정보]

- 이름 : 부활 주문서(위치지정)

- 등급 : 특수

- 분류 : 소비

- 효과 : 사망 시 지정된 위치(수원)로 부활합니다.

아주 오래전, 김포국제공항의 비밀 상점에서 구매했던 물건이었다.

“드디어 끝났어.”

성우가 말했다. 그건 선언이었다.

”······.”

그 선언에 강석은 반론하지 못했다. 그러다니 마침내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정말······ 개처럼 달려온 삶이었는데, 이렇게 망해버리다니······.”

그는 그동안의 고난을 되돌아보듯 천장을 올려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천천히 성우를 내려다 보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기 시작했다.

그는 허탈한 표정으로 성우를 바라보았다.

“네크로맨서······.”

”······.”

“그놈들은 정말 악질이야.”

“ 누구?”

강석은 떨리는 손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이 게임을 만들고 통제하며 즐기는 놈들, 게임 마스터(Game Master), 그들이 여길 보고 있고 곧 널 찾아올 거야.”

“날 찾아와? 왜?”

“네가 우승자나 다름없으니까.”

우승?

“그럼 언제 찾아오지?”

그는 들어 올렸던 손을 떨어뜨렸다. 더는 말할 힘조차 없는 듯했다.

그리고는 기침을 연거푸 토해내더니, 힘겹게 마지막 한 마디를 내뱉었다.

“지금, 바로 지금······.”

어쩌면, 엔딩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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