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2
74) 붕괴 그리고 반격 - 1
지수는 레벨에 관심이 없었다.
‘레벨이나 랭킹은 숫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랭킹, 즉 레벨이 강함의 척도가 될 수는 있겠지만 절대적인 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오직 생존과 승리였고 레벨은 그에 따라오는 성장과 보상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구태여 레벨 업에 목매어 몬스터를 쫓아다닐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발목을 잡힐 줄이야?
‘그 레벨이, 지금 당장 필요해.’
지금 당장 2개의 신격을 사용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장 25레벨에 도달해야만 했다.
끄에에에!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에도 지옥 생명체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촤악! 촤악!
지수는 그것들을 무수히 베어 넘겼다. 이것들도 경험치였다만······ 지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레벨 업을 위해서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대로 이런 하급 몬스터만 잡아서는 온종일 해도 모자랄 거야.’
시간이 없었다. 더 빠른 방법이 필요했다.
지수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가 후방에 밀집해 있는 수많은 플레이어를 보는 순간, 문득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아, 그거다.’
지수는 즉시 경수를 찾아갔다.
“지수 씨?”
경수는 후방 병력 통제에 정신이 없었지만, 지수가 다가오자 곧장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후방까지 찾아왔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라는 뜻이라는 걸 직감한 것이다.
“바쁘실 테지만 부탁이 있어요.”
“뭐든 말씀하세요. 바로 준비하죠.”
경수는 전투 보조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최전방에서 싸우는 이들이 승리할 수 있게 지원하는 것, 그게 그의 임무였다.
“경험치 카드 좀 구해주세요. 한 장이 아니라 여러 장이 필요해요.”
경험치 카드는 말 그대로 경험치를 올려주는 아이템으로, 일반적인 루트로는 구할 수 없는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수십만의 플레이어들, 세계 각지에서 날고 기던 그들 중 누군가는 그 아이템을 가지고 있을 것이었다.
“경험치 카드요?”
“어려울까요?”
경수는 오래전부터 다수의 플레이어를 통제하는 방법을 고민해왔으며 그를 위해 ‘총괄통제실’을 세웠다.
그를 통해 이곳에 있는 모든 플레이어를 손에 쥐고 통제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전수 조사하여 해당 아이템을 찾는 건······.
“아뇨, 금방 구할수 있을겁니다.”
시간문제였다.
* * *
- 팀플레이로 인해 ‘시너지 효과’가 부여됩니다.
성우는 의아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성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건만 갑자기 하나의 시너지가 업그레이드되었다.
[시너지 목록]
13) 죽음의 조율자들(히든)
- 구분 : 직업 시너지
- 조건 : ‘리치’ 단계의 죽음 마법 사용자 5명 이상
- 효과 : 전용 스킬 ‘궁극’ 단계로 격상(랜덤 1종), 특수 스킬 ‘묵시록 4기사의 권능(강화)’을 얻을 수 있다.
‘······리치가 5명?‘
다섯 번째 리치가 탄생했다는 뜻이었다.
그에 따라 ‘묵시룩의 현현’ 시너지는 ‘죽음의 조율자들’로 변경되었으며 ‘묵시룩 4기사의 권능’ 스킬이 업그레이드된 듯했다.
[스킬 정보]
- 이름 : 묵시록 4기사의 권능(강화)
- 등급 : 초월
- 분류 : 패시브
- 소모 : -
‘죽음 조율자들’ 시너지가 지속하는 한, 아래와 같은 ‘추가 효과’가 70분 동안 부여됩니다.
1) 전쟁의 권능(강화) : 심연 속에 봉 인된 ‘종말의 군단’을 소환하며 ‘지휘 권한’을 얻습니다.
+ 강화된 능력에 따라, 모든 군단을 ‘제한 없이 동시에’ 소환할 수 있습니다.
2) 기근의 권능(강화) : 일정 지역 내(10km)에 심연과 연결된 ‘죽음 도래지’를 조성합니다.
+ 강화된 능력에 따라, 죽음 도래지 중심에 ’죽음의 탑’을 소환합니다.
3) 역병의 권능(강화) : 범위 피해 마법 및 저주 마법의 효과가 대폭 상승합니다. (+400%)
+ 강화된 능력에 따라, 적의 시체에서 ‘죽음 벌레’가 발생하여 적을 공격합니다. (1구당 10마리)
4) 죽음의 권능(강화) : 주변에서 발생한 죽음으로부터 힘을 얻습니다. (하나의 죽음 당 모든 스킬 효과 +1%)
+ 강화된 능력에 따라, 하나의 죽음 당 최대 권속 수가 1씩 증가합니다.
기존에 있던 스킬에 추가 효과가 하나씩 붙었다. 그런데 이건 단순히 하나 더 붙은 정도가 아니라, 배로 강화된 듯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밖의 상황을 알 수 없으니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성우는 의문을 뒤로하고 서둘러 구덩이 밖으로 기어나갔다.
“큭, 네, 네크로맨서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반 토막 난 히포그리포 옆, 숨을 헐떡이는 남자, 특별공격대원이었다.
“······거, 거의 다 당했습니다.”
그는 그 한 마디를 남기고 그대로 죽었다. 그의 주변에 시체가 가득했다.
히포그리포와 특별공격대들이었다. 그들은 하늘에 떠 있었기에 엄폐할 수 없었고 붉은 번개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된 것이었다.
“······.”
성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왕이 날린 광역 스킬 ‘악의 하르마게돈’에 의한 피해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붉은 구름에서 쏟아진 수천 가닥의 번개, 그 재앙이 피해간 곳은 거의 없었다.
‘단 한 방에 거의 모든 게 파괴되었다.‘
11대의 비행선이 완파되어 추락했으며 거의 모든 히포그리포가 번개에 짓이겨졌다. 사방에 깃털과 핏물이 흐트러져 있었다.
방대한 공간이 폐허로 변해있었다.
땅이 뒤집히고 나무가 으스러졌다. 그리고 그것들이 상하좌우 없이 뒤죽박죽 뒤섞이며 사방천지에 기괴한 미로가 형성된 상태였다.
끄에에에!
그 미로 곳곳에서 지옥 생명체들이 기어 나와, 생존자들을 사냥하는 중이었다.
“으아아! 사, 살려줘요!”
사방에서 비명이 들렸다.
그러나 문제는 이제 시작이었다. 고난은 폭풍을 맞이할 때가 아니라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이후에 움트는 법이었다.
- ‘악의 하르마게돈’의 후폭풍으로 ‘마왕의 점령지’가 생성되었습니다.
* 20분간 ‘악의 하르마게돈’에 의해 파괴된 지역이 ‘마왕’의 권역이 됩니다.
좋지 못한 소식이었다.
악의 하르마게돈은 일대를 초토화하는 걸 넘어서, 그 모든 지역을 마왕의 권역으로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이러면 문제가 큰데······.”
성우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소환 스킬을 사용해봤다.
- 이 공간은 ‘특정 신격’에 의해 지배 받는 ‘신의 권역(權域)’입니다. 이곳에서는 다른 신격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역시나 권속 소환 등, 공간을 다루는 스킬을 사용할 수 없었다.
이는 완벽한 낭패였다. 히든 스킬인 ‘죽음의 조율자들’을 얻었거늘, 모든 곳이 놈의 권역이 되었으니 사용할 수 없었다.
‘일단 움직인다.’
그래도 이미 소환된 권속은 다룰 수 있었기에 완전히 무방비 상태는 아니었다.
성우는 언데드 군단을 되살렸다. 주변에 널브러져 있던 뼈들이 다시 일어섰다.
덜그럭! 덜그럭!
성우는 백여 마리의 병력을 이끌고 지옥 생명체를 제거해나가며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들을 최대한 구출했다.
그렇게 십여 분을 나아갔을 때, 저 멀리, 정훈의 모습이 보였다.
“구조대가 올 때까지 버틴다! 쏴라!”
그는 이십여 명의 특별공격대를 추슬러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부상이 심각해 보였으며, 끝없이 밀려오는 지옥 생명체에 포위되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덜그럭! 덜그럭!
전멸 직전이나 다름없는 순간이었다.
“성우씨?”
성우가 제때 도착할 수 있었던 건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성우의 언데드 군단이 돌격하여 일대의 지옥 생명체를 쓸어버렸다.
“괜찮으십니까?”
정훈의 얼굴은 피로 흥건했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는 듯했다. 아마도 회복 스킬로 상처는 회복한 상황일 것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다른 분들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모인 숫자는 삼십여 명에 불과했다. 아직 수많은 이들이 저 폐허 곳곳에 흩어져 있을 테였다. 지수, 한호, 리웨이, 첸 등······.
“마왕은 아직 건재합니다.”
그들은 쓰러진 나뭇더미 뒤에 은폐하여 저 멀리, 산처럼 우뚝 솟아 있는 마왕을 바라보았다.
콰—앙!
폭음과 함께 마왕의 머리 위로 시뻘건 화염이 흩어졌다. 드래곤 브레스였다. 이내 놈의 머리 위로 레드 드래곤이 스쳐 지나갔다.
“이사벨라는 멀쩡해 보이네요.”
“그런 것 같습니다.”
모든 게 뒤집히는 충격 속에서도 이사벨라는 그리 큰 타격을 입지 않은 듯했다.
“제가 봤는데, 벼락이 떨어지는 순간 온몸을 두꺼운 방어막으로 감싸더라고요.”
하긴, 드래곤은 브레스나 피어만 쓸 줄 아는 게 아니었다.
드래곤이라는 종족은 애초에 절정에 이른 마법사이기도 했다.
쿵! 쿵! 쿵!
그 둘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었다. 이사벨라는 공중 기동력을 이점으로 마왕을 압박했다.
“둘의 싸움이······ 이사벨라가 오래 가진 못할 겁니다. 우리도 다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성우가 보기에 이사벨라가 마왕을 무너뜨리지는 못할 것 같았다.
놈은 이사벨라와 전투 중에도 실시간으로 상처를 회복하는 중이었다.
끅! 끅! 끅!
지옥 생명체들이 마왕의 상처 부위로 기어올라 뒤엉켰는데, 그것들의 몸이 녹아내리며 마왕의 몸뚱이와 하나가 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뼈와 피부가 복구되는 것이었다.
“그사이에 놈의 머리가 완전히 재생했습니다.”
정훈은 마왕의 오른쪽 머리를 가리켰다.
“저것들이 끊기지 않는 이상 마왕은 계속 회복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절망스러운 장면이었다. 모든 걸 걸고 총공세를 하여 큰 타격을 주었지만, 완전히 숨통을 끊지 않은 이상 놈은 계속해서 회복할 것이었다.
그때였다.
“저기 보십시오! 드, 드래곤이······.”
경계를 서던 대원이 소리쳤다.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콰드드드!
마왕의 팔이 촉수처럼 늘어나 이사벨라의 날개에 뒤엉켰다.
붙잡힌 것이었다.
‘벌써 끝났다.’
마왕과 대응할 수 있었던 유일한 무기인 ‘공중 기동’을 잃은 순간, 이사벨라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구속된 레드 드래곤을 향해 붉은 광선이 일제히 쏘아졌다.
콰— 과— 과— 과— 과— 과!
6발의 광선이 이사벨라의 몸에 꽂히며, 그 거대한 몸이 하늘 멀리 치솟았다.
후우우우—
이내 그 거대한 몸이 힘없이 늘어지며, 저 멀리, 아마존 어딘가에 처박히고 말았다.
쿠— 우— 웅—
“마, 말도 안 돼.”
“드래곤마저 당하다니······.”
곳곳에서 탄식이 들렸다. 성우 역시 머리가 복잡해졌다.
‘놈의 권역이 유지되는 한 반격은 불가능하다.’
이곳을 놈의 권역으로 만드는 ‘마왕 점령지’의 유지 시간은 단 20분이다. 하지만 모든 게 끝장날 수도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어떻게 할까? 이렇게 답이 나오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 * *
이사벨라는 무력하게 추락했다.
쿠구구구구—
그 거대한 몸뚱이가 열대우림 위로 스치듯 떨어졌다. 식생을 죄다 짓이기며 긴 상흔을 남겼다.
후— 우— 후— 우—
그녀는 죽지 않았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무려 6발의 광선을 내리 맞았으니 당연했다.
“이, 이사벨라······.”
그때, 그녀를 향해 누군가 다가왔다.
“어, 어떻게 나한테 이, 이럴 수가 있지?”
온몸이 불에 그을린 사람, 그레이스였다. 그녀는 드래곤 브레스에 스쳤을 뿐인데도 회복 불가능한 화상을 입고 간신히 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파르르 떨며 증오에 찬 눈동자로 이사벨라의 몸 곳곳을 훑었다.
“내,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는 너를······ 너에게, 너 따위 몬스터에게 충성한 것밖에 없는데?”
그녀는 먼 곳에서 전투를 지켜보고 있다가 이사벨라가 추락하는 걸 보고는 복수심에 불타, 곧장 포탈을 타고 온 것이었다.
“내가 네년······숨통을 끊어주겠어.”
그레이스는 복수를 위해, 아껴두었던 아이템을 꺼냈다.
그건 녹색 돌이었다.
[아이템 정보]
- 이름 : 기원의 돌
- 등급 : 신화
- 분류 : 소비
- 효과 : ‘정령 친화력’이 일정 등급에 도달한 상태일 경우 이 아이템을 매개로 특정 원소의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다.
그건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내 모든 걸 빼, 빼앗았으니 나도 내 모든 걸 써서 널 죽이겠어.”
최상위 정령, 정령왕 정도라면 다쳐서 기절한 드래곤의 숨통을 끊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녀는 ‘기원의 돌’을 왼손으로 쥐고 이사벨라의 머리를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악!”
무언가 그녀의 발목을 휘어잡고 들어 올려, 그녀를 거꾸로 매달아 버렸다.
그레이스는 반사적으로 손을 휘저어 바람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내 어디선가 날아든 차가운 밧줄이 그녀의 손을 옭아맸다.
“윽, 너는?”
거꾸로 맺힌 세계, 꺾인 나무 사이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억울해?”
리웨이였다.
물의 정령들이 바닥에서 올라오며 그레이스의 온몸을 옭아맸다.
“네가 그렇게 당한 게 억울해?”
“뭐? 지금 뭐라······.”
리웨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억울할 만도 해. 그런 안쓰러운 꼴을 보니 인정할 수 있겠어. 그런데······.”
리웨이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물의 정령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레이스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커, 커허······.”
손아귀에 천천히 힘을 주었다.
“너 한 명 억울하게 돼서 다행히도 수십만 명이 억울하지 않게 될 거야.”
더욱 강하게 힘을 주었다.
“미안하지만, 네가 억울한 게 비교적 옳아.”
그레이스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고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녹색의 돌이 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다. 그것은 리웨이의 발아래로 굴러왔다.
“이건······.”
리웨이가 기원의 돌을 집었다.
“나도 뭐 좀할수 있겠는데?”
* * *
이사벨라마저 쓰러지자 마왕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그리고 빈사 상태나 다름없는 플레이어들을 쫓기 시작했다.
잔당 처리가 시작된 것이다.
“어서 후퇴해!”
“아, 아직 생존자들이······.”
“늦었어!”
마왕의 사정거리 안에 있던 플레이어들은 서둘러 그곳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쿠— 우— 우— 우— 우—
땅에 박혀 있던 마왕의 몸이 천천히 상승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수백만 개의 촉수 다발로 만들어진 하반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들은 세포 분열하듯 계속 자라나고 있었는데 어느 정도 모이며 무게를 견딜 수 있게 되자 이동이 가능해진 듯했다.
성우는 아직 해답을 찾지 못했다.
‘20분 안에 모든 걸 끝낼 생각이다.’
직접 움직여 플레이어들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놈도 알고 있었다. 20분 뒤, 권역 확장이 풀리게 되면 다시 한번 큰 타격을 입을 수도 있었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
하지만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소환이 제한되는 한 성우가 할 수 있는 건 극히 드물었다.
그때, 놈의 손 하나가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쩌一 엉!
붉은 구름에서 붉은 번개 한 가닥이 작렬했다. 단 한 발이었지만, 생존자 구조를 하고 있던 수십 명의 플레이어가 일거에 쓰러졌다.
전부 즉사였다.
쩌一엉! 쩌一엉!
이내 곳곳에, 정교하게 조준된 벼락이 내리꽂혔다. 마치 개미 사냥 같았다.
쩌一 엉!
이처럼 희생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었다. 하물며 사정거리 밖에 대기 중인, 수십만에 달하는 플레이어들 병력 위로 광역 스킬이라도 떨어진다면······.
‘그대로 전멸이다.’
그 사태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마왕의 시선을 끌어 어떻게든 시간을 끌 수 있는 자는 오로지 성우 자신뿐이었다.
성우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좀비 히포그리포 한 마리를 근처로 데리고 왔다.
“성우 씨? 어떻게 하시려고요?”
정훈이 걱정스레 물었다. 지금 밖으로 나가 마왕의 눈에 띄었다가는, 아무리 성우라고 해도 생존을 장담할 수 없을 것이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놈이 사정거리를 확보하면 모두가 죽습니다.”
과거였으면 분명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저들의 희생을 이용했을 거다.’
성우도 자기 자신의 생존이 최우선일 때가 있었다.
‘그때는 그게 유일무이한 목표였으니까······.‘
하지만 수많은 일을 겪어왔고 이제는 생존을 넘어선 다른 목표가 생겼다.
‘해피 엔딩을 보고 시스템을 무너뜨린다.’
단순히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이 상황은 폭풍이다. 그렇다면 폭풍이 지나간 이후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을 다시 건설하는 일······.‘
그걸 결코 혼자 할 수 없다는 걸, 성우는 알았다. 그렇기에 마왕을 향해 걸어나갔다.
“응?”
그런데 별안간 떠오른 메시지 한 줄이 좀비 히포그리포에 올라타려는 성우를 멈춰 서게 했다.
- 해당 지역에 ‘망자 인도’가 시작되며 ‘명계의 문’이 열립니다.
“명계의 문?”
성우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살피기 시작했다.
‘명계의 문이라니?’
그건 성우의 신격인 염라의 권능으로 열 수 있는 게 아니던가?
“······진짜다.”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던 붉은 구름이 흩어지며 하늘 한편에 검은 구멍이 뚫렸다.
성우는 느낄 수 있었다. 저건······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명계의 문이 확실했다.
그런데 염라의 권능으로 열 수 있는 명계의 문과 비교하면 다소 작은 크기였다.
이어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우一
곳곳에 있던 플레이어들의 시체에서 영혼이 피어오르더니, 삼삼오오 모여 어디론가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혼들이 모이는 곳에 누군가 서 있었다.
지수였다.
그녀는 머리 위로 원형의 녹색 아우라를 드리운 채 하늘 높은 곳에 서 있었다.
그녀는 지금, 발키리가 아니었다. 성우는 그녀에게서 익숙한 무언가를 느꼈다.
‘죽음의 권능?’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또 다른 무언가였다.
* * *
경수가 가져다준 경험치 카드는 총 5장이었다. 지수는 그중 4개를 사용하여 25레벨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신격을 얻었다.
- 무조신 ‘바리데기’의 힘을 얻습니다.
* 신격을 발휘할때마다 ‘데미 갓’ 상태가 됩니다.
* 모든 능력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10)
* 〈망자 인도자(장인)〉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무속 신앙, 모든 무당의 신으로 불리는 존재, 일명 ‘바리공주’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바리데기였다.
바리데기는 저승을 관장하는 신이자 망자를 인도하는 존재로 알려져 있었다. 발키리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스킬이 단 한 가지뿐이었다.
[스킬 정보]
- 이름 : 망자 인도자
- 등급 : 데미갓
- 분류 : 액티브
- 소모 : -
스킬 사용 시 일시적으로 ’명계의 문’을 열며 주변 사망자의 ‘망령’을 이끌게 됩니다.
* 해당 스킬의 ‘명계의 문’은 주변의 제약과 관계없이 ‘우선 작동 판정’되며 직접 입장할 수 없습니다.
바리데기는 망령을 ‘명계의 문’으로 인도할 때마다 일시적으로 소정의 능력치 상승을 얻게 되며 그 누적 수에 따라 아래의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1) 영혼 타격 (10명 인도) : 상대의 모든 방어를 무시하는 파동을 날려 ‘고정 데미지’를 입힙니다.
2) 잡귀 인멸 (100명 인도) : 일정 반경 내 적의 권속을 소멸시킵니다. (지성이 있는 존재는 제외)
3) 망자 회생 (1,000명 인도) : 단 한 명의 플레이어를 ‘부활’시킬 수 있습니다. (사망 24시간 이내)
지수가 ‘망자 인도자’ 스킬을 사용하자 하늘에 명계의 문이 열리고 땅에서 망자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 총 475명의 망자를 ‘명계의 문’까지 안전하게 인도하세요.
바리데기는 이런 미니 퀘스트를 통하여 스킬 사용 조건을 충족해야만 하는 듯했다.
그런데, 지수의 의지와 별개로 명계의 문 근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지수의 통제를 받고 있지 않은 귀신들이 명계를 향해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성우 씨?”
성우는 하늘에 열린 명계의 문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이곳은 마왕의 권역이기에 공간을 여닫는 스킬을 사용할 수 없었다.
‘이건 설마?’
단, 예외의 경우가 있었다.
‘마왕도 내 권역을 무너뜨린 적 있었다.’
천사의 전당에서 놈과 맞섰을 당시, 놈이 ‘마왕의 침공’이라는 스킬로 공간에 구멍을 내자 명계가 붕괴한 적이 있었다.
‘그것과 같은 원리인가?’
마왕의 왼쪽 머리가 고개를 들어 올려 명계의 문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의아하면서도 불쾌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아직 놈의 권역을 붕괴시키진 못했다.’
성우는 그 구멍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무언가 느껴졌다.
지수의 권능으로 열린 명계의 문이지만, 저 공간은 분명 성우의 통제 범위 안에 있는 그 명계와 같은 곳이었다.
‘문의 크기와 용도만 다를 뿐, 저 공간은 분명 염라의 권능이 미치는 곳이다.’
성우는 그 구멍을 바라보며 염라의 권능 ‘명계의 문 개방’을 사용했다.
우우우우一
그러자 사방에 흩어져 있던, 성우의 통제를 받는 ‘귀신’들이 바로 그곳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성우의 권능이 마왕의 권역 안이 아니라, 균열 사이에서 작용하여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들이 하나로 합쳐지며 그 구멍에 동화되자······.
- 주의! 해당 지역에 ‘명계의 문’이 열립니다.
“······됐다.”
마왕의 권역에, 강제로, 거대한 구멍이 열렸다.
고오오오오一
단단한 벽을 허물어뜨리는 건 어렵다. 하지만 단 하나의 균열, 더 나아가 구멍이 발생했다면, 그 지점을 비집고 뜯어내는 건 상대적으로 쉽다.
「네크로맨서, 무슨 짓을 한 거지?」
마왕의 목소리가, 다소 분노한 목소리가 울렸다.
「도대체 어······떠······ 말······돼······.」
그런데 제 권역 안을 쩌렁쩌렁 울리던 그 목소리가, 갈라지고 깨지며 기괴하게 흩어져 버렸다.
‘놈의 권역이 붕괴한다.’
명계의 문이 서서히 확장되며 붉은 구름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 두 공간이 부딪칠 때마다 형형색색의 스파크가 튀며 기이하고도 초현실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 두 개의 권역이 충돌합니다.
* 한쪽을 닫지 않으면 양쪽 모두 붕괴합니다.
두 권역이 한 공간에 겹치어지며 간섭이 일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 주의! 두 개의 권역(마왕성·명계)이 붕괴합니다.
마왕의 권역이 무너졌다.
후우우우一
하늘을 뒤덮고 있던 붉은 구름이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다시 시작이군?”
성우는 새로운 시너지로 강화된 스킬, 그중에서도 ‘종말의 군단’ 소환 목록을 확인했다.
- 소환할 대상(군단)을 선택하세요
(동시 선택 가능)
1) 죄수 부대(소환 가능)
2) 기간테스(현재 소환 중)
3) 봉인된 자(소환 가능)
“하지만······ 이제는 뭔가 많이 달라졌어.”
성우는 1, 2, 3번을 동시에 소환했다.